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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석교를 보고 싶다, 그 위를 천천히 걷고 싶다 | ||||||||||||
1400여년전 신라 진흥왕때 수리 기록, 가장 오래된 명품 돌다리 1932년 일제때 매몰, 석교동 명칭 유래, 청주시 일부 복원 시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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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이란 휴식을 위한 느릿느릿 걷기다. 몇 해 전 충청리뷰에서 인문학강좌를 연 일이 있었다. 그 강좌 중 “고려와 조선의 차이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던져주던 젊은 철학자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그 철학자에 따르면 고려시대까지 바퀴가 지배했다면 조선은 인위적으로 바퀴를 배제시킨 시대였다. 수레에서 바퀴를 빼 버리고 걷는 시대로 돌아갔다는 말이다. 바퀴는 손수레로부터 소 말이 끄는 우마차까지 많은 물품의 동시이동을 가능케 했고 이로 인해 쌓인 富가 지방의 호족들을 만들었으며 지방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고려의 무신정권이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설파하였다.
바퀴의 폐해를 절감한 이성계와 정도전등의 조선 개국세력들은 고속도로를 닦거나 4대강사업처럼 국토개발에 힘썼던 근현대 한국의 지도자의 길 대신 조선은 바퀴를 뺀 도학과 유학을 통한 인문통치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게 된다. 따라서 도성인 한양을 제외한 지방간의 도로가 생길 수 없기에 팔도엔 조붓한 봇짐길이나 지겟길, 가맛길만 남게 되어 그야말로 느릿느릿한 무한사유의 조선, 고고한 인문학의 조선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무심천 범람 수로 변경 땅에 묻힌 듯 돌다리 이야기를 하려다 왕조의 통치이념까지 넘어갔으니 비약이 심하다. 각설하고 청주약국네거리 (청주읍성의 남문인 청남문이 있던)를 지나 남쪽 육거리쪽으로 잠시 걷다보면 전 동명약국이 있었던 작은 네거리가 나온다. 네거리 서쪽을 예전엔 약전골목이라 불렸는데 지금은 가구점이 더 많아져 가구점 골목으로 불린다. 예서부터 육거리시장 쪽으로 80미터는 더 느리게 발끝을 들고 사뿐사뿐 걸어야하는 곳이다. 여기 아스팔트밑 40센티 아래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신라 진흥왕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1,461년이상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서울 한양대학교 앞에 있는 살곶이 다리 보다 10미터쯤 더 긴) 잘 생긴 돌다리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돌다리인 진천의 명품 농다리는 징검다리 형식의 돌다리인지라 공학적 비교가 불가하다. 이 돌다리, 남석교는 남겨진 사진으로 보아서도 공학적인 안정성과 미적 완성도가 높은 명품다리임에 틀림없다. 1932년 일제에 의해 매몰되었다는 강제 매몰설이 있기는 하나 역사적 사실들을 뜯어 보면 무심천의 범람이 해마다 이어져 수로가 자연스럽게 지금의 청남교(꽃다리)쪽으로 이동하였고 거기에 제방을 쌓아 제방 안쪽 모래섬에 저잣거리가 생기며 묻히게 된 것이 맞을 것 같다. 모진 놈(일본)은 곁에 있기만 해도 돌을 맞게 되는 법이다. 자업자득이다. 일제시대 읍성안은 인구밀집지역이라서 자연히 읍성밖인 제방 안쪽으로 시장이 생겨났고 그 규모가 대구장에 이어 조선에서 두번째로 큰 시장이었다고 한다. 묻힌 지 80년이 지나도록 모래와 세월과 육거리를 드나드는 시장의 인파에 묻혀있는 동안 청주사람들은 남석교를 잘 모르고 잊고 지냈다. 석교동이라는 동 이름과 석교초등학교의 이름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실물을 본 이는 더욱 드물다. 다행이 요즘 청주시에서 남석교를 드러내어 보이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어려움이 있다해도 지혜를 모으면 청주의 큰 보물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스팔트만 걷어내면 돌다리의 상판이 대청마루처럼 드러날 텐데 여기에 미끄럼방지 강화유리를 깔면 유적이 더 가까워질 것이며 다리의 네모서리에 우뚝 서 있었던 고려견상(청주대학교 박물관과 충북대에 있는)을 찾아 세운다면 금상첨화겠다. 상인들이 조금쯤 양보하면 짧은 시간내에 공사가 끝날 수 있고 드러난 청주의 새 명물 남석교옆의 가게들은 장사도 대박일 것이다. 봄날 육거리시장을 천천히 걸어가며 발아래 드러난 남석교를 그려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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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생전에 육거리 남석교를 걸어보세...한시장과 윤대표가 뭔가 뵈줄것 같은 느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