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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륵한 종주자들
막 밝아오는 이른 시각에 내가 일박하려다가 생각을 바꾼 빼재
마루 정자에서 아침식사를 준비중인 중년 남녀가 나를 반겼다.
인천 석바위시장에서 한약재 도소매를 한다는 서성수 부부다.
그들은 바쁜 일상에서 간신히 짜내는 시간이라 짠돌이 종주가
불가피한 듯 간밤에 내려와 이 정자에서 자고 북상하려 한단다.
이즈음에 교행하게 되는 종주자들은 나를 무척 부러워 한다.
겨우 시작에 불과한 그들에게는 정반대로 종착점을 목전에 두고
있는 내가 부러울 수 밖에.
하긴 나도 그 땐 그랬으니까.



상 / 뼈재가 빼재로 발음된 것은 이해된다. 그러나 빼재의 빼가
빼어날 秀로 둔갑되어 秀嶺이 된 것은 황당하다.
중 / 재마루에서 쉬어 가도록 정자를 세웠지만 통행하는 차량이
뜸해진 이후로는 종주자들이 노숙용으로 활용하고 있다.
휴게소 주인은 취사후 마구 버리고 가는 종주자들을 원망.
하 / 갈미봉(대봉)
서성수 부부의 순탄한 장도를 축원하고 능선으로 올랐다.
아직 완만한 오르내림이어선지 속도감이 났다.
비를 흠뻑 맞으며 고투하던 그 때에 비하면 신선놀음이었다.
흥얼거리며 걷는 걸음이 가벼워 쉬이 갈미봉에 올랐다.
월음령(달음재)을 지나 오름길에서 또 한 종주자를 만났다.
다양한 건설장비의 제작과 시공을 업으로 하는 회사의 생산부
직장인 전북 김제의 김삼우.
그도 월 2회 밖에 없는 휴일을 몽땅 대간에 바치기로 했단다.
무릇 일득 일실(一得一失)이며 일리 일해(一利一害)다.
(One man's meat, another man's poison)
그들은 대간 종주를 위해 무엇인가는 희생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 모두 갸륵한 종주자들이다.
풍요로운 덕유산
내가 아침겸 점심 식사장소로 점찍은 1.302m 못봉(池峰)에서는
한 작은 팀이 벌써 식사중이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그들의 호의로 합석하게 되었다.
푸짐한 반찬에 소주도 받아 마셨다.
빼재에서 마감한다는 그들은 남은 거라며 햇반과 라면, 찬 등
먹거리를 몽땅 내게 넘겨줘 돌연 거부가 된 느낌이었다.
덕이 많은 덕유산 풍요의 서막이다.
어울려 촬영도 했다.
사진 전담인 젊은 조현탁은 이 사진과 함께 덕유산의 후덕한
모습들을 보내왔다.(우리의 이야기들 214번 글중 1, 2번 사진,
더불어사진자료실 597~601번 사진 참조)


못(池)봉의 늙은 山나그네와 식사중인 조현탁 일행
얼마 가지 않아 북상중인 또 한 종주팀을 만났다.
청주의 한 산악회원들인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여러 이야기를
하려 했으며 듣고 싶어 했다.
촬영도 원했다.
유병철은 약속대로 사진과 함께 진지한 사연을 내게 보냈다.
(우리의 이야기들 214번 글중 3번 사진, 더불어사진자료실 602,
603번 사진 참조)
귀봉부터는 동쪽인 거창군 북상면 송계사에서 올라왔다는 젊은
이들과 잠시 동행했다.
맏이로 보이는 청년이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리는 동료에게 나를
빗대며 따끔한 충고를 했다.
"어르신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산을 기피한다는 그에게 나를 판 대가인가.
꽤 많은 량의 사탕을 넘겨주며 "종주중 계속 잡수세요"다.
백암봉 직전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휴식중인 두 쌍을 만났다.
50대에 막 접어든 대전의 치과 원장 부부와 내과 원장 부부다.
그들은 시원한 미싯가루물을 거푸 딸아주고 과일도 내놓으며
권하는 등 내게 각별했다.
또한 품위있는 위트로 편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특히 치과 윤창구 원장의 부인이 손수 만들었다며 건네준 쿠키는
무룡산을 넘을 때 요긴한 활력소가 되었다.
또 윤창구로부터는 함께 찍은 사진들이 곧 왔다.
(우리의 이야기들 214번 글 4, 5번 사진 참조)
윤창구의 실토대로 위 아래(부모와 자식)를 다 거느리는 일로
여념이 없는 샌드위치 세대라지만 그럴 수록 건강을 위해 더욱
자연과 친숙하기를 당부했다.
의사인 그들이 어련히 챙기랴만 남의 건강 지키미인데 반해
자신에 대해선 소홀한 직업이 의약사(지혜의 샘 21번 글 참조)
이기 때문이다.
덕유산 유감
예상한 대로 손꼽히는 국립공원 답게 순역(順逆)양방향 모두
많은 요산인들로 붐볐다.
특히 대덕유의 중심인 백암봉 일대는 성시를 이뤘다.
화사한 덕유평전 철쭉쑈의 끝판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남녀
장청소들과 중봉, 향적봉을 다녀오는 등산인들로 혼잡했다.
일행인 듯한 몇 장년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덕유산지기를 자임하는 이들은 덕유산이 우리나라 제일을 넘어
세계 제일이란다.
자기 고장 산에 대한 애정일 수 있다.
상정 김도규도 소백산이 최고라 한다.
그런데 덕유산엔 산 프로(Pro. 전문가)들이 왜 이리 많은가.
20년을 하루같이 올랐으니까 프로라고?

백암봉 정상 뒤로 능선이 덕유평전, 중봉, 향적봉으로 이어진다.
산은 프로를 용납치 않거니와 나 또한 산에 관한한 프로라는 단어
자체를 거부한다.
나는 이 자칭 프로들을 떠나 북적대는 동엽령길을 앞서 나갔다.
내리닫는 중에 방송통신대학교 전북지역대(전주)의 김종규와
동행하게 되었다.
이 붙임성 있는 50대와의 동행을 편하고 부드럽게 한 것은 내가
알고 그도 친분이 두텁다는 본대학 학보사의 이대의.
이대의라는 공통분모가 대화를 자연스럽게 발전시켰으니까.
그에게서도 둘이 찍은 사진이 왔다.(우리의 이야기들 214번 글중
6번 사진, 더불어사진자료실 604, 605번 사진 참조)
대규모인 그의 일행은 단합 산행중인 그 학교 직원 학생들이란다.
학교의 특성상 교직원과 학생이 얼핏 구별되지 않는 그들과는
동엽령에서 헤어졌다.
변방에 해당하는 빼재 ~ 횡경재에서는 주로 북상하는 백두대간
종주자들과의 해후였으나 역시 외곽지대인 동엽령 이후의 오후는
다시 나홀로의 여정이 되었다.
번화가를 방불케 한 덕유산 심장부와 너무 대조되는 고요 자체의
무룡산에서 삿갈골재 대피소에 이르기 전에 하루를 정리했다.
대전의 치과의사 윤창구의 부인이 준 쿠키를 먹으며.
덕이 많은 산에 들면 사람도 덕스러워 지나.
그렇다.
본디 산은 인(仁)이다.
덕(德)은 인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산은 덕이다.
요산인들이 덕스러운 이유다.

무룡산 정상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
삿갈골재의 밤은 두 번째다.
대피소를 독점한 듯 편하기 그지 없던 그 때와 달리 만원사례.
이런 경우 대피소는 인내심과 적응력 양성소가 된다.
따라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다.
북상 때는 진입과 탈출의 서툰 조절 때문이었긴 해도 3일이 걸린
부항령 ~ 삿갓골재를 이틀에 완료함으로서 하루를 단축했다.
귀로 또한 앞당기게 된데 고무되었는가.
달아난 잠 되찾느니 떠나자.


삿갓골재대피소와 삿갓봉에서 맞은 일출장면
대피소 이후 남덕유 아래 까지의 대간은 눈여겨 보아야 했다.
북상 때 유감스럽게도 본의 아닌 밤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밝은 아침에는 천하 태평의 삿갓봉 ~ 월성치 ~ 남덕유 입구가
그 밤엔 그리도 지루했다.
무엇보다도 미안했다.(백두대간 7회 참조)
의도하지 않았는데 삿갓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감상할 수 있었고
전망바위는 이름 그대로 전망이 좋았다.
비켜 있는 1.507m 남덕유산에도 올랐다.
거창군 북상면과 함양군 서상면에 걸친 암봉이다.
이른 아침이라 다소 희미하나마 원근의 모든 산이 한 눈에 잡혀
떠나기가 싫었다.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한데 등지고 싶겠는가.



상 / 백두대간에서 비켜 있는 남덕유산 암봉
중 / 남덕유산에서 바라본 서봉(장수덕유산)
하 / 서봉(장수군에서 오르기 때문에 장수덕유산이라 하는 듯)
서봉(1.510m 장수덕유산)의 안전시설들이 유난히 눈부셨다.
편이도와 안전도를 높인 금속 사다리들이 밧줄과 대체된 것.
한 겨울에도 무난할 것 같다.
편하게 오른 서봉은 보다 더 한가롭고 태평한 느낌이었다.
더욱 선명해진 서봉의 조망에 도취돼 더더욱 내려가기 싫었으나
서울의 뒷풀이 약속시간을 지키려면 일어서야 했다.
할미봉까지의 지리한 남행 내리막에서다.
"늙은 이 쯤이야" 하며 무시하는 듯, 움찔도 하지 않는 독사 한
마리가 길을 막았다.
살생을 피하는 승려들 조차도 독사같은 맹독생물에 대해서는
대승적 조치를 취한다지만 나는 언제나 피해버린다.
천적 부재로 더욱 기승을 부려 걱정이라니 어찌 해야 할지.
할미봉 위험구간은 왜 방치하고 있을까.
향양군과 장수군이 서로 떠밀고 있는 걸까.
걸쳐 있는 밧줄은 수명이 다한 듯 한데 또 인명을 제물로 바친
후에나 손을 쓰려 하는 건가.
서봉처럼 유비무환하면 아니되겠는가.

할미봉 / 서봉에 오르려면 할미봉에서 뚝 떨어지는 암릉을 통과
해야 하는데 삭은 밧줄이 그대로 있다.
함양과 장수의 군계라 서로 미루고 있는 건가.
육십령재에 내려섰으나 차량 통행이 뜸해 난감한 판에 함양쪽
채석장의 돌 운반 대형 덤프트럭이 섰다.
장계로 가는 중인 이 트럭이 나를 위해 일부러 선 것이다.
비슷한 몇 차례의 경험에 의하면 무거운 배낭을 맨 채로는 올라
탈 수도 없게 높다.
그래도 산지기, 구름산과의 서울 약속시간을 지킬 수 있게 해준
이 공룡 트럭의 운전자가 고마울 뿐이었다.
3일 전의 시작처럼 끝도 좋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