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히아이스가 고등판무관으로 하이네센에 눌러앉은 지도 어언 2년. 동맹의 체제는 아직 레벨로 아래에서 유지되고 있었다. 제국 수도가 페잔으로 옮겨진 지금, 이젤론 회랑과 페잔 회랑을 손에 쥔 제국군의 압력은 한층 더 거세졌지만 동맹 국민들은 그 누구도 제국군의 재침공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키르히아이스의 판무관 재임은 그야말로 동맹 국민들에게 있어서는 평화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지난 2년 간, 우주 전체에 있어서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라곤 지구교도들의 존재뿐이었다. 동맹군 조직의 재편도 아무 말썽 없이 이루어졌다. 단 한 번, 레사빅 성계에서 마스카니 소장의 지휘하에 이루어지던 폐전함 폭파작업 중에, 괴집단의 습격으로 폐기할 함선들이 강탈당한 사례가 있었다. 물론 하이네센의 조야는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그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전 제국군 대장 메르카츠였다. 메르카츠는 키르히아이스 함대가 바라트 성계를 공격하던 당시 500척 규모의 토벌함대를 이끌고 출동했다가 귀환하지 않은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고, 그 휘하의 병력들도 단 한 척도 하이네센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만일 이들이 키르히아이스 휘하병력과 교전해서 섬멸당한 것이라면 제국군 측의 전투기록이 존재해야만 한다. 하지만 제국군에는 메르카츠 함대와 교전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즉, 이들은 말 그대로 “사라진”것이다.
판무관부 내에서는 전쟁이 확실히 제국측으로 기울어진 것을 안 메르카츠가 구명을 위해 도피했다는 관측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메르카츠는 립슈타트 전투에서 귀족연합군의 총수였고 내란이 종결된 이후에도 투항하지 않고 동맹으로 도주, 동맹군의 편에 섰다가 골덴바움의 복위를 주장하는 ‘은하제국 정통정부’의 국방장관을 역임하기까지 했다. 만약 체포되면 반역자로서 재판에 회부될 것은 분명했고, 처형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가 파렌하이트처럼 립슈타트에서의 패전 직후 투항하기만 했어도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키르히아이스는 추적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었다. 하지만 동맹 정부군과 제국군을 합쳐 6,000척에 달하는 함대를 풀어서 주변 성계를 모조리 수색했음에도 그 도둑떼의 꼬리는 잡히지 않았었다. 그것 이외에는 종종 지구교도들의 소요가 있을 뿐, 전반적인 치안은 평온한 편이었다.
지구교도들이 벌이는 테러행각은 상당히 골치가 아팠다. 그들의 테러는, 즉위 열이틀 만에 시가행진중인 라인하르트를 향해 핸드캐논을 쏘는 것으로 시작되었었다. 다행히 빗나간 포탄은 그가 탄 특별차량 대신 뒤따르던 경호차를 박살냈다. 곧바로 투입된 헌병 특경대가 테러리스트를 체포하려 했지만, 저격에 실패한 암살자는 그대로 독약 앰플을 물고 자살하고 말았다.
이런 식의 테러는 신영토 노이에란트에서도 종종 일어났다. 키르히아이스를 노린 총탄이 날아드는가 하면 호텔 샹그릴라로 폭탄이 든 소포가 배달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황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고, 그만큼 암살범도 적었다. 2년의 재임기간 중 그를 덮친 암살범은 불과 3명이었다. 물론 전원이 현장에서 체포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외에 암살음모를 꾸미던 지구교도들이 미리 신고, 체포된 경우는 꽤 여러 번 있었다. 그 중에서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열혈 팬클럽의 회장이던 딸이 지구교 지부장인 아버지와 행동대원인 오빠의 키르히아이스 암살계획을 엿듣고는 그 즉시 판무관 사무소에 밀고한 바가 있었다. 키르히아이스는 그 소녀에게 감사의 표시로 직접 사인한 감사장을 주고 제국 본토로 이주시켜주었다고 하는데, 그 소녀의 이름은 공식 기록에 남지 않았다. 보복 또는 사회적 비난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의 이름이 동양식이고, "K"로 시작하는 성을 가졌다는 이야기만이 알음알음으로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전해지는 소문에 따르면 키르히아이스는 그들 암살범 부자를 처형하지 않았으며, 단지 하이네센에서 멀리 떨어진 행성 에코니아로 추방하는 것으로 처벌을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2년의 시간을 보내던 키르히아이스에게 느닷없이 제도 페잔으로부터(페잔은 라인하르트 즉위 1주년이 되던 날에 정식으로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전문이 날아왔다.
곧바로 하이네센의 고등판무관 사무소는 벌집을 쑤시듯 소란스러워졌다. 황제가 신영토를 방문하는 것은 2년만이었기 때문이다. 곧 키르히아이스 지휘 하에 있는 간달바 성계의 슈타인메츠 함대가 총동원되어 페잔에서 하이네센까지의 항로를 경비하기 시작했고, 아직까지 3만 척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동맹군 함대도 제국군과 함께 황제 라인하르트를 영접하기 위한 주변지역 정리에 착수했다. 동맹이 아직까지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동맹은 이미 제국의 종속국이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방문하는데 영접을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레벨로를 비롯한 동맹 정부의 수뇌부는 판무관 사무소와는 별도로 성대한 환영행사 준비에 들어갔다. 여기에 20여 개에 달하는 소규모 자치령들의 환영준비까지 궤도에 오르자 신영토 전역은 잔치 분위기에 휩쓸리게 되었다.
지구교도나 극렬공화분자의 테러 가능성은 충분했지만 결국 아무 일 없이 라인하르트 일행은 3개월간의 항주 끝에 무사히 하이네센에 도착했다. 여로 중간에 있는 각 성계마다 들러서 환영행사에 참가하느라 그만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늘어지기만 하는 스케쥴에 몸달아 한 사람은 경호대장 키슬링 소장뿐이었고, 다른 수행원들은 오랜만의 장거리 여행에 즐거워할 뿐이었다.
이번 여행의 특징이라면, 오벨슈타인, 미터마이어, 로이엔탈, 케슬러, 와렌, 루츠, 아이제나흐, 메크링거 등의 제국군 수뇌부가 거의 총동원되어 라인하르트를 수행하는 동시에 그들의 가족들도 함께 따라왔다는 점이다. 이들 가족들은 황제 라인하르트보다는 황비 힐데가르트와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 수행원에서 제외된 장군들의 명단은 비텐펠트, 파렌하이트, 렌넨캄프, 뮐러였는데 이들이 제외된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은 모두 독신이라 동반할 가족이 없었던 것이다. 여행에 참가한 장군들은 모두 결혼하여 가족이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기혼인 장군들로만 수행원을 편성한 것은 황비 힐데가르트의 입김이 쏘인 탓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결국 황제 일행이 하이네센에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 모인 장군들 중 독신자는 키르히아이스 뿐이었다.
어쨌든 이들 장군들의 가족들은 브륜힐트를 타고 우주를 가로지르면서 즐거운 유람여행을 했다. 원칙대로라면 여자와 아이들을 전투함에 태우지는 않지만, 이번 경우에는 황제의 시찰여행에 동반하는 것이니 만큼 특별히 사정이 감안되었다. 더군다나 각 장군들이 모두 자기 기함을 타고 이동하는 만큼, 그 가족들을 제각기 데리고 타는 것보다는 브륜힐트 한 곳에 다 모아두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서 역시나 가장 활달했던 것은 미터마이어의 아내 에반제린이었다. 그녀와 케슬러의 부인 마리카는 황비의 거처 안에서 늘 웃음꽃이 터져나오게 하는 주역이었다. 아이제나흐의 아내 엠마는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서 루츠의 아내 마르가레테와 함께 일행의 8명이나 되는 애들을 모두 모아 돌보았고, 안네로제는 메크링거의 아내가 된 베스트팔레 남작부인 및 로이엔탈의 정식 아내가 된 엘프리데(라인하르트는 즉위를 기념하여 엘프리데에게 특사령을 내려 그녀의 대역죄를 사면해 주었다)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유독 오벨슈타인의 아내 엘사만이 남들과 굳이 어울리려 하지 않고 혼자 방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즐겼다. 그녀도 남편 오벨슈타인의 성격을 닮았는지 말이 없었고, 시종 쌀쌀한 태도로 일관하며 여행을 하고 있었다.
이 예상치 못한 대집단을 맞이한 키르히아이스는 일순간 당황했으나, 곧 침착성을 되찾고 그들을 판무관 사무소가 있는 호텔 샹그릴라로 안내했다. 물론 이들은 여기 묵지 않았다. 행궁으로 쓰는 겨울 장미원이 정돈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여기에 잠시 들렀을 뿐이었다.
우주항에서의 성대한 환영 후 행궁인 겨울 장미원에 여장을 푼 라인하르트는 키르히아이스와 함께 하이네센폴리스 전역을 훑어본 다음 샹그릴라 호텔에서 벌어진 1차 환영행사, 레벨로의 자택에서 벌어진 2차 환영행사에 연이어 참석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리고 도착 사흘째 밤에는 행궁의 정원에서 성대한 즉위 2주년 기념파티가 열렸다. 그는 즉위식은 오딘에서, 결혼식과 즉위 1주년 기념식은 페잔에서 했으니 2년 만에 그의 통치하에 있는 3개의 주요도시에서 모두 한 번씩 행사를 치르는 셈이다.
“오랫만에 뵙는군요, 얀 원수.”
“그렇습니다. 폐하.”
옛 원수이자 전우라고 할 수 있는 얀 웬리를 비롯한 동맹측 인사들도 모두 초청되었음은 물론이다. 물론 라인하르트는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으므로 얀 한 사람과만 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덕분에 야회복 차림의 프레데리카를 동반한 신사복 차림의 얀은 파티장 구석에서 옛 부하들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만 다른 제국군 장군들이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그의 앞에 나타나 한 번 따로 만나 뵙고 싶었다면서 말을 걸어오지만 않았다면 좀 더 단란했을 것이지만.
라인하르트는 시끌벅적한 정원을 뒤로하고, 잠시 휴식하러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서도 그를 수행한 사람은 키르히아이스였다. 평소대로라면 슈트라이트와 뤼케가 그를 수행했겠지만, 옛 감정에 젖어보고 싶어진 라인하르트가 그들에게 임시휴가(?)를 주고 키르히아이스와 함께 파티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어때, 키르히아이스? 즐겁지 않니?”
“물론입니다, 폐하.”
키르히아이스는 창 밖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집무실 창문을 통해 힐데가르트와 안네로제가 지나가는 모습이 언뜻 비쳤다. 두 사람 모두 밝게 미소짓고 있었다.
“폐하는 무슨. 그냥 전처럼 부르라구. 하하.”
“이젠 황제십니다.”
키르히아이스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더라도 둘 사이에는 통하는 것이 있었다. 잠시 마주 미소를 짓던 라인하르트는 화제를 돌렸다.
“2년 동안 신영토를 통치하느라 너무 수고했어. 뭐 원하는 게 없니?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허락하마. 페잔으로 돌아오고 싶으면 그것도 좋고, 직책을 바꾸고 싶거든 그것도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어.”
“글쎄요.”
키르히아이스는 잠시 생각하는 듯 머리를 굴리더니 미소를 지었다.
“전 특별히 원하는 게 없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지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지 말고 말해 봐. 뭐든지 들어줄 테니.”
“정말이십니까?”
“정말이고 말고. 내 브륜힐트를 걸고 맹세하지.”
다음 순간 키르히아이스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라인하르트는 키르히아이스의 표정이 굳어지자 잠시 불길한 기분이 들었지만 잠시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마침내 키르히아이스가 입을 열었다.
“안네로제 누님이 구워주신 사과 파이가…매일 먹고 싶군요.”
다음 순간 라인하르트는 폭소를 터뜨렸다.
“겨우 그거였어? 결국 페잔으로 오고 싶다는 이야기였구나? 걱정하지 마. 예전처럼 황궁에서 같이 살면 누님이 구워주신 사과파이를 먹을 수 있잖아? 그럼 네 후임으로….”
“폐하!”
키르히아이스는 라인하르트의 한껏 들뜬 말을 중간에 잘라버렸다. 그리고는 놀란 라인하르트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다음 말을 내뱉었다.
“제 말뜻이 뭔지 모르시겠습니까?”
“…?”
라인하르트는 그저 얼떨떨해서 키르히아이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키르히아이스가 스스로 입을 열었다.
“안네로제 누님과의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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