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24일 저녁, 군함 한 척을 앞세운 우키시마(浮島)호가 교토부(京都府) 마이즈루만(舞鶴灣)에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후 쾅쾅쾅! 하는 커다란 폭발소리와 함께 이 배는 아비규환의 지옥을 연출하면서 가라앉았다. 이틀 전에 혼슈(本州)의 최북단 아오모리(靑森)현을 출발한 이배의 최종 목적지는 갓 해방된 부산이었다.
일본 정부측 자료는 3천735명의 승선자 중 524명이 사망했다고 돼있으나 한국인 생존자들은 7천500여명이 승선해 5천여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해왔다.
일본 정부측 주장을 따른다 해도 대사건임에 분명한 이 사건에 대해 이상하게도 일본 언론들은 발생 당시부터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은폐되었던 이 사건은 발생 45년이 지난 1990년에야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건 4개월 후 미 진주군 사령관에게 우키시마호는 "일본군에 의한 계획적이고 잔인한 폭거"로 침몰했다는 한 고발문서가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발견되면서부터였다.
그간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호가 미군측의 기뢰에 닿아 침몰했다는 폭뢰설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폭뢰설은 많은 의혹을 받으며 자폭설이 제기되어왔다. 당시 일본 해안에는 미군이 낙하산으로 투하한 기뢰도 있었지만 일본 해군이 부설한 5만347기의 기뢰가 있었으므로 미군기뢰에 의한 폭뢰설은 그야말로 초점을 미국쪽으로 돌리려는 잔재주에 다름 아니다. 더군다나 이런 위험한 지역을 항해하는 우키시마호에 제공된 해도가 기뢰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밀해도가 아니라 일반해도였다는 점도 자폭설이 더 신뢰를 받는 원인이다.
이 배에 타고 있던 한국인들은 태평양전쟁 말기 한반도의 고향에서 강제로 끌려와 철도 부설이나 비행장 활주로 건설 등의 군사적 목적의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징용자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충북 영동 출신의 김동천씨처럼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다가 끌려간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은 또한 강제적으로 1945년 8월19일까지 출항하라는 명령을 받고 우키시마호에 태워졌다. 또 하나 연료는 부산항까지 갈 수 있는 편도분만 주어졌다. 그래서 일본 해군 사병들이 이는 죽으러 가는 것이라며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완강히 저항했던 것이다.
폭뢰로 인한 침몰이라면 선체의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구멍이 뚫려있어야하는데 1954년 10월에 인양된 우키시마호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구멍이뚫려있었다. 사건 직후 일본군부가 폭파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것은 당시 오미나토 해군경비사령관이었던 우가키(宇垣完彌) 해군중장 등 일본군부 수뇌부에게 혐의를 두는 것이다. 이 사건의 생존자와 희생자 유족 등 80명은 3차례에 걸쳐 교토 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 희생자들의 영령을 위로하고 일본에도 정의가 살아있음을 확인받기를 원했는데 최근 10년만에 내려진 판결은 승선사실이 확인된 15명에게만 300만엔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역시 일본에게 과거사에 대한 정의를 구하는 것은 주변국의 우려를 무릅쓰고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한 고이즈미 총리에게 일본보다 70배에 해당하는 배상금을 지불한 서독의 아데나워 총리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인가? 마이즈루만에 수장된 원혼들의 울부짖음이 두렵지도 않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