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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당에 다니면서도 지금까지 한 번도 부끄러운 내면을 반성하거나 고해성사를 해본 사실이 없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기대를 저버리고 점점 배부른 돼지가 되어갔다.
타성에 젖은 그릇된 생각과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서슴없이 이행하였으면서도 한 점 반성 없이 성전에 얼굴을 내밀곤 하였다.
나의 가슴에는 언제나 이상과 현실이 괴리된 상태로 웅크린 두 마리의 괴물이 서로를 헐뜯고 싸우면서 나의 이성을 조절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상반된 모순을 극복하고 올바른 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유박해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혼란하였던 나의 내면을 정화시켜보고 싶었다.
역사시간에 문득 황사영이라고 하는 걸출한 인재를 대면하게 되었는데 그는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음을 당하였고 그의 가정은 파탄되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야하는 고통과 슬픔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황사영이 조선 가톨릭교 역사에 해성처럼 등장한 것은 남인계 정약용 가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가 살아있었을 때는 탕평정책을 실시하여 보수와 진보 양당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울 수 있었으나 정조가 일찍 죽으면서 정치적 균형과 조화는 깨지고 말았다.
조선시대 붕당정치는 선조 때 이조 전랑이라고 하는 관직에서 유래되었다.
이조가 조선시대 관리들의 인사권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기초작업을 담당하는 부서가 전랑직이었다.
이조 전랑직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는 정5품에 해당하였으나 관리를 임명하거나 파면시키려고 할 때 기초작업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이러한 이조 전랑직의 업무는 신중하고 청렴하여야 하였기 때문에 최고의 장인 이조판서라도 전랑의 업무를 관여할 수 없었다.
또한 이조 전랑직을 거치는 사람은 고속 승진을 하여 재상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어떻게보면 이조 전랑직은 재상이 되기위서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코스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많은 관리들은 이러한 이조 전랑직을 거치고 싶어하였을 것이다.
선조 때 이조 전랑 오건은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상관이었던 이조 참의 심의겸이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김효원의 조상이 윤원형의 문객 노릇을 하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심의겸이 김효원의 이조 전랑직 추천을 반대한 것은 그를 중심으로 언관권이 강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후 김효원은 덕망을 얻어 전랑직에 오를 수 있었다.
김효원이 전랑직을 마치고 다른 부서로 옮기려 할 때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추천되었다.
김효원은 심의겸의 전철을 생각하여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의 전랑직 추천을 거부하고 말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시대 정치권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서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었다.
남인은 다시 경상도 지방의 남인과 경기도 지방의 남인으로 갈라서게 되었었는데 경기도 지방의 남인이 정약용 가문이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는 노론 벽파의 리더였다.
그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오러버니가 김귀주였는데 그는 누이가 영조의 계비로 들어가면서부터 궁중에 출입하기 시작하더니 교만해지기 시작하였다.
김귀주는 김상로ㆍ신만ㆍ홍계희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죽이고 부수찬ㆍ강원도관찰사ㆍ좌승지를 역임하면서 왕세손인 정조마저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벽파와 시파 간의 싸움을 불지피기도 하였다.
그는 벽파의 두령으로 여러 가지 권모술수를 써서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영의정 홍봉한 등 시파 일당을 몰아내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영조가 세자의 죽음을 후회하고 사도라고 지칭하는데다가 벽파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정후겸이 시파로 전향하자 홍국영에게 아부하여 이전의 흉계를 감추려 하였으나 정조가 즉위하여 그를 흑산도로 귀양보내고 후에 감형되어 나주로 이거했다가 거기서 사망하고 말았다.
정조가 죽고 11살인 순조가 즉위하였다.
순조는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정순왕후 김씨가 순조가 어리다는 이유로 섭정을 하였다.
이때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 출신들은 서양의 새로운 학문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에서 가톨릭이 자생하게 된 계기였디.
그 가톨릭을 연구하고 체계화하는 데는 많은 사람들의 역활이 컸으나 그 선구적인 역할은 정약용 가문이 아닌가 싶다.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정순왈후 김씨는 자신의 오라버니인 김귀주의 죽음을 남인 탓으로 돌렸다.
자신의 오라버니 김귀주의 원한을 갚는다는 이유로 남인들을 검거하가 시작하였는데 이들 남인들은 거의가 가톨릭 신봉자들었다.
정치권에서 밀려난 남인들은 현실을 비판적 안목으로 바라보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사상을 갈망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가톨릭이었는데 지봉 이수광에 의해서 최초로 조선에 소개되었으나 학문으로만 연구되다가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 등에 의하여 차츰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까지만 하여도 교황이 임명한 주교가 북경교구에 상주하고 있었으나 조선에서는 가톨릭이 종교라기보다는 학문으로만 연구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아직은 기반이 미약하였다.
그러다가 가톨릭이 종교적 색체를 띠면서 사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조선에서의 초기 가톨릭은 신분적 위계를 암묵적으로 무시하고 신도들을 사랑으로 포용하였기 때문에 신도는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었다.
신도가 늘어갈수록 조선시대 양반들은 기존의 전통체제가 무너지지는 않을까하는 위기의식을 갖게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양반들은 제사를 반대하는 전례문제를 들어가며 가톨릭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같은 양반들의 상소는 정순왕후 김씨의 생각과 맞아떨어져 가톨릭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 탄압은 남인은 물론 정약용 가문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장형인 정약현의 딸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탄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황사영은 너무도 많은 신자들이 무모하게 죽어가고 박해를 당하는 현장이 비참하고 참담하였기 때문에 부모에게 소식을 전하는 심정으로 조선에서의 가톨릭 박해 현황을 상급 교구인 북경교구에 알릴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당시의 참담함을 비단폭에 두서없이 써내려 간 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였다.
황사영의 부인은 정난주마리가였다.
정난주마리아는 그 여파로 제주도 대정 관노비로 귀양 보내졌고 그의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 버려졌다.
황사영이 가톨릭에 심취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자신의 부인인 정난주마리아가 진실한 가톨릭신자였다는 것 외에도 가톨릭 가문인 정약용집안의 환경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신유박해로 제천 배론에 피해있으면서도 당시 조선 가톨릭교회가 북경교구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황사영은 조선에서의 가톨릭 박해를 북경교구에 신속히 알릴 필요성이 있었다.
정순왕후 김씨가 단행한 신유박해로 조선의 가톨릭교계는 기반이 뿌리 채 뽑힐 정도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황사영은 대책과 대안을 제안할 필요성을 느꼈다.
중국 북경교구에 조선의 가톨릭박해 현황을 신속히 알려 위기에 닥친 조선의 종교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우리 역사는 정책수행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왔다.
이러한 시행착오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적 선진국이 되었다.
황사영의 백서에서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측면도 일부 발견할 수 있으나 이것은 교회를 더욱 공고히 다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황사영은 교회창설 초기 지도자적 신도중의 한 사람이며 순교자였다.
본관은 창원이며 남인계 명문 출신이었다.
부친 황석범과 모친 이 씨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정5품 전랑 직을 역임한 바 있으며 모친은 이동운의 딸이다.
그는 1790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과에 급제하여 정조의 특별한 사랑을 한 몸에 받은바 있었다.
정조가 그의 손을 잡아주기까지 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하여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닐 정도로 소박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황사영은 과거에 급제한 직후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난주 마리아)과 결혼하였다.
정약현의 아버지 정재원은 부인이 셋이었다.
세부인 사이에 모두 5남 5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약 현은 24세로 요절한 의령 남씨의 소생이었으며, 둘째 부인 해남 윤 씨와는 약전, 약종, 약용과 이승훈에게 시집간 누이가 있었다.
다산 정약용에게 가톨릭을 가르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이벽은 다산의 맏형인 정약현의 처남이었다.
이벽은 다산 정약용과는 사돈 간이었고 백서사건으로 유명을 달리한 황사영은 조카사위가 된 셈이다.
황사영은 1791년 처고모부인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입수하여 가톨릭에 관한 지식을 넓혀갔으며 정약종, 홍낙민 등과도 천주교 신앙에 관하여 진지한 토론을 하였다.
이후 알렉시오란 세례명을 받고 영세 입교하였다.
그의 영세 직후인 1791년 10월(음)에 신해박해가 발생하였다.
그의 친척과 친구들은 천주교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를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으로 확신하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포기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조상에 대한 제사의 포기는 관직에의 진출을 단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문모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후 주 신부의 측근으로 활동하다가 주 신부가 조직한 명도회의 주요 회원이 되었다.
앞날이 촉망되었던 양반인 그가 대부분 중인, 상민들과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그는 1796년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 권일신, 최창현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주문모 신부와 협의하여 북경의 주교에게 해로를 통한 서양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청년 황사영이 이와 같이 당시 교회의 극비상황에 깊이 간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교회 내에서 그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798년 이후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고양을 떠나 서울에 이주하여 애오개, 북촌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신도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지냈고,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며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1801년 신유박해 직전까지도 가장 활동적인 교회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약종 등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떨어졌다.
그는 1801년 2월 초순 체포를 피하여 서울 도성 안을 전전하다가 상복을 입은 채 피신 중에 김한빈을 만나 배론으로 피신하였다.
제천으로 피신한 황사영은 옹기장이 출신 김귀동의 집에서 은거하며, 자신이 겪은 박해상황을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김한빈을 1801년 3월(음) 서울로 보내 박해의 진행과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그는 제천에서 교회의 재건방안을 생각하거나, 시작(詩作)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그 때 그가 작성한 기록들은 ‘백서’를 작성하는데 기본적 자료가 되었다.
8월 26일(음) 황심을 만난 황사영은 박해의 경과와 교회의 재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비단 폭에 적어 북경 주교에게 발송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이 백서가 황심의 체포로 사전에 발각되어 황사영 자신도 1801년 11월 5일(음)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그의 처형 이후 황사영이 소유하였던 가산은 몰수되고 그의 사노비 5명은 국가 소유 관노비로 환수되었다.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귀양 가고 처인 정명련은 제주도 대정읍 관노비로 신분이 강등되었다.
그의 아들 황경한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나 추자도에 유배되었다가 하(下)추자도 예초리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나는 이번 제주도 여행을 통하여 칼로 나무를 내리 치듯이 모자의 정을 끊어야만 하였던 당시 추자도의 애절한 이별의 현장들을 돌아보고 정난주(명련) 마리아의 가슴 아픈 순교자적 정신과 고통을 일부분이라도 이해하고 그의 뜨거운 사상과 가톨릭에 대한 열정을 나의 가슴속으로 전이시켜보고 싶었다.
또한 정난주 마리아가 서소문 사형장에서 남편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거열형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도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친정 가족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남편의 죽음 때문에라도 평생을 남을 위하여 봉사를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였던 대정읍내 유적지와 정난주 마리아순교성지를 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온갖 고통을 신앙으로 승화시켜 극복하려 하였던 정난주 마리의 강인하고 초연한 사상을 대정읍에서 찾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보고 싶은 어린 아들이 지척에 있었으나 끝내 상봉하지 못한 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증오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과의 인연을 끊어버린 채 조용히 잠들고 있는 대정읍 정난주 마리아순교성지를 찾아보고 싶은 욕망이 간절하였다.
정난주 마리아순교자성지를 돌아본 후 정난주 마리아가 어린 아들을 추자도에 버릴 수밖에 없었던 애환을 머리에 떠올려보면서 추자도의 저녁너울이 그리워졌다.
이번 여행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여행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도곡 성당 성 동기부부 형제자매님의 도움이 물신 양면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제주도 여행 일정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숙박이나 교통 등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음에도 항상 웃으며 여유 있게 대처해준 형제자매님의 처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날씨가 쾌청한 가운데 제주특별자치도의 관광지를 돌아보고 이어서 계획한 추자도까지 관광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으나 제주특별자치도와 추자도의 날씨가 예측불가하고 수시로 변덕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제주특별자치도와 추자도 여행 전에 warming-up겸 몸을 단련하기 위한다는 핑계를 들어 북한산 둘레 길을 다녀왔다.
아침 날씨가 쌀쌀하여 괜히 북한산 둘레 길을 다녀오자고 한 것이 아닌가 하고 후회를 하였으나 북한산 1구간에서 3구간까지 산행을 마친 후 기뻐하는 일행의 모습을 보니 나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와 추자도 여행을 위한 날짜가 다가왔다.
일요일 이른 아침이었으나 약간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맑아 기분이 상쾌하였다.
이 정도의 날씨라면 전라도 장흥군 노력도 항에서 오렌지 2호가 출항하는 데는 별지장이 없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물론 김포에서 항공기로도 제주특별자치 도에 갈 수 있었으나 장흥군 노력 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바다를 항해해 보는 것도 운치가 있어보였다.
오늘 오전 09:00 정각에 양재2동 구 삼호물산 버스승강장 앞에서 일행들과 미팅하기로 미리 약속을 해두었다.
09:00시 정각이 되자 성 동기형제님께서 직접 벤츠승용차를 몰고 구 삼호물산 버스승강장에 도착하였다.
우리를 태운 승용차는 47번 양재도로를 달리다가 양재 I·C를 돌아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하였다.
내일 09:30분 출항 예정인 제주행 오렌지 2호를 미리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오늘은 남도를 유람하면서 풍광을 즐기다가 하룻밤을 장흥군 장흥읍 우드랜드펜션에서 숙박하기로 하였다.
시간적인 여유가 충분하여 도중에 영광군 백수 해안도로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백제 최초의 불교 도래지를 관람하였다.
이어서 영광 백수면 일 번지 식당을 소개하였는데 모두가 대만족이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장흥군 장흥읍 우드랜드펜션으로 이동하였다.
장흥군 장흥읍 우드랜드펜션에서 1박을 보내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도로가 막히고 지체되어 늦은 시간에서야 겨우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날 일찍 노력 항에 도착하여 대합실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나 바람이 평소보다 심하게 불어 마음을 불안하게 하였다.
또한 바다 멀리서 풍랑주의보가 이미 발효되었으니 주의 요망이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기도 하였다.
풍랑주의보가 내린 상황에서 제주도행 오렌지 2호에 승선한다고 하는 것은 왠지 기분이 불안하고 의기가 소침하였다.
쾌속선인 오렌지 2호가 노력도 항에서 출발하였으나 계속 서행을 하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항해사에게 물어보았더니 이곳에서 쾌속 질주를 하게 되면 노력도 주변 김 밭에 막대한 피해를 주기 때문에 서행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남쪽으로 약간 더 이동해야 쾌속 질주가 가능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파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풍랑주의보가 발표되었다는 것 때문인지 주변 김 밭을 오가는 작은 어선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먼 바다를 바라보며 조선시대 강진에서 청자와 옹기를 구웠던 가마를 생각해 보았다.
강진은 경기도 강화도와 전라북도 부안 등과 함께 고려시대 3대 도요지 중의 한 곳이었다.
바다를 품고 있었던 강진은 도요지로서는 최적지였다.
다량의 옹기를 운반할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은 단연 범선이었다.
삼국시대 백제의 도공이나 유학자가 범선을 타고 일본 현해탄을 넘었듯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옹기장이 또한 범선위에 질그릇을 실고 전국 어디든 판로를 찾아 나섰다.
평소 범선을 이용하여 국내 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까지도 옹기를 운송하였기 때문에 옹기장이들은 한반도는 물론 중국 일본의 항해까지도 항로를 꿰뚫고 있었다.
옹기장이들의 항해술을 활용한다면 어떠한 곳이든 못갈 곳이 없었다.
상하이 금가 항에서 김대건신부가 라파엘 호를 타고 고국을 찾아 나섰던 외로운 항해도 옹기장이의 몫이었을 것이다.
길이 24자 폭 9자 깊이 7자밖에 되지 않았던 소형 돛단배를 타고 무모하게 고국을 찾아 나섰으나 옹기장이들은 어려운 항해를 거뜬히 극복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종교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하루라도 빨리 고국사람들에게 충족시켜주어야 하겠다는 김대건신부와 옹기장이들의 통일된 일념 때문이었다.
쾌속선 오렌지 2호는 질풍노도와 같이 제주도 성산포항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었으나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바람 때문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집채만 한 파도가 오렌지 2호의 옆구리를 강타할 때는 심한 충격으로 배가 파르르 떨리기도 하였고 파도를 정면으로 받아쳤을 때는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가 떨어지는 것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연상하게 하였다.
황사영의 백서사건 이후 가톨릭계는 쑥대밭이 되었다.
정난주 마리아는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으나 어린 아들 경한이 때문에 죽을 수조차도 없었다.
이미 정난주 마리아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제주도 관노비로 강등되었기 때문에 범선을 타고 제주도로 이동하면서도 모든 고통과 수모를 감수하여야 하였다.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였던 바다와 파도를 보고 속이 뒤집힐 것 같기도 하고 가슴이 울렁거려서 토할 것도 같았을 것이다.
그 때의 상황이 지금과도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쾌속선 오렌지 2호가 제주도 성산포항 부두에 닿자 곧바로 대정읍 정난주 마리아순교성지로 이동하였다.
순교성지를 돌아보고 1135번 도로를 따라 다시 제주시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태양은 어느덧 뉘엿뉘엿 서산으로 모습을 감추려하고 있었다.
배가 점점 고파지기 시작하여 제주시 수산물시장에 들어가 방어회로 배를 채우고 다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회천동 3-16에 있는 한화리조트로 이동하였다.
한화리조트는 제주시청에서 대략 46km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성 동기형제님과 와인 한잔을 곁들고 잠을 청하였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때문에 내일 추자도 관광이 걱정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니 날씨가 점점 개고는 있었으나 아직도 세찬 바람이 여전하였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제주항연안여객터미널로 이동하였다.
어제부터 밤새도록 불기 시작한 비바람은 밤새 요란을 피우더니 아침부터 점점 잠잠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잠잠해지고 있다는 의미가 너무 추상적이어서 감각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연안여개선 터미널 내 매표소로 다가갔으나 추자도행 쾌속선 예매는 하지 않았다.
풍랑주의보가 아직 해제되지 않았으니 좀 더 기다리고 있어보라는 매표인의 말에 대합실소 안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밖은 아직도 어제의 세찬비바람처럼 강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다시 매표소로 다가가 추자도행 예매가 가능한지 물어보았으나 항만청에서 운항 명령이 떨어져야 가능하다고 하였다.
다시 대합실 밖으로 나가 승용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20분 후 다시 대합실로 들어가 추자도 여행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풍랑주의보가 해제되어 가능하다고 하였다.
표를 사들고 부두로 나가보았다.
날씨가 화창해지고 있어 항해하는데 어려움이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여유를 찾아보려 노력하였다.
우리 일행이 승선해야할 선박은 핑크돌핀 호였다.
핑크돌핀 호는 목포에서 벽파 도를 거쳐 추자도와 제주도를 왕래하는 쾌속선이었다.
09:30분이 넘어서야 겨우 핑크돌핀 호에 승선할 수 있었는데 오후 4시에 다시 추자도에서 제주도로 돌아온다는 쾌속선을 탈 수 있을 런지가 걱정되었다.
핑크돌핀 호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제주항 연안부두를 빠져나갈 때까지만 하여도 잠잠하였던 파도가 갑자기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핑크돌핀 호는 제주 연안부두를 멀리하고 무한질주를 하고 있었다.
예상컨데 제주항을 빠져나간 핑크돌핀 호는 제주도와 추자도 사이를 질주하고 있지않을까 생각이 들었는데
바다 위에서 낙엽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노력 항에서 성산포항으로 항해하였을 때는 그래도 점잖은 편이었다.
제주항에서 추자도로 이동해가는 핑크돌핀 호는 매직 아일랜드의 자이로드롭이나 롤러코스터를 연상하게 하였다.
이제 핑크돌핀 호 선실에서 나 스스로가 몸을 겨누기도 힘들었고 나를 사정없이 팽개치고 있어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갑자기 쾌속선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하늘로 치솟았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고공낙하의 아찔한 느낌을 정난주 마리아도 겪었으리라 생각이 들어 그 당시의 바다 상황이 어떠하였으리라는 것을 이제야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평양으로부터 이동한 강한 파도는 계속 우리가 탄 핑크돌핀 호를 강타하고 있었다.
사방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검은 파도가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로마 네로 황제가 초기 교회 신자들을 원형극장에 가두어놓고 며칠 동안 굶긴 맹수를 풀어 넣었을 때 두려움에 몸서리치면서 울부짖었던 신자들의 목소리가 지금 바다에서 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두려움에 지친 나는 선실 의자에 앉아 잠을 청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정신이 점점 맑아지기만 하였다.
얼마나 이동하였을까 서쪽으로부터 몇 개의 무인도가 나타났다.
그리고 11시 방향에서 해무 속에 감춰진 섬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신비하리만큼 아름답게 보였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여행하고자 하는 목적지이고 베일에 감춰진 추자도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우리하고 같은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곳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이곳에서도 육지처럼 일상이 변화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번 추자도 여행은 강진에서 추자도를 거쳐 제주도로 귀양 갔을 때 정난주 마리아가 겪었던 고통을 실제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아주 뜻깊은 여행이었다.
10:50분에서야 고생 끝에 추자도항에 도착하였는데 갈매기들이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일부 갈매기들은 우리 일행을 경호라도 하려는 듯 쾌속선 양 옆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리워서였을 것이다.
어린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이 추자도에 버려졌을 때도 갈매기들이 경한을 에워싸며 추위를 달래게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외롭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추자도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다시 예초리 마을로 이동하였다.
예초리 마을 주민들에게 황경한의 행적과 무덤을 물었더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마을 뒤편으로 올라가면 황경한의 묘가 있다고 하여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였다.
바다의 시원한 바람이 등까지 스며들었다.
오솔길은 포장이 잘 되어 있었으나 산비탈에 있는 밭에는 일손이 부족했던지 농기구가 아무데나 버려져 있었고 밭 가장자리에는 채소와 잡초가 뒤범벅되어 자라고 있었다.
30분 정도 가파른 절벽을 따라 산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하였더니 황경한의 묘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황경한 묘 주변은 현재 관광지로 개발 중에 있었으며 절벽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풍광은 육지 어느 곳 못지않게 빼어나고 수려하였다.
이곳은 제주도 올레18-1길이 지나는 곳으로 잠시 쉬었다가 가게끔 정자가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어서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다.
제주도 올레18-1길이 지나고 있는 도로 옆 정자에 앉아 잠간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한 무리의 갈매기 떼가 황경한의 무덤 주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언제 누군가가 장미꽃 한 송이를 무덤 앞에 놓아두었는지 햇볕에 그을려 새하얀 색이 되어 있었다.
양반 가문의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로 태어나 국가의 미래를 개척해야하는 고귀한 신분이 하루아침에 능지처참당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참변을 당하였는데도 그의 가족을 잊지 않고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으로 볼 때 황사영과 그의 가족이 겪었던 고통과 참변이 결국 헛되거나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황사영의 아들 경한이가 죄가 있었다면 부모가 가톨릭교에 입교한 것이었을 뿐 자식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도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지 당시 조선 사회의 급박한 상황을 보는 듯 하였다.
황경환 묘를 돌아보고 돈대산 정상으로 이동하였다.
이 코스는 추자도 항으로 가는 제주도 올레18-1길이었다.
돈대 산에서 내려다보는 추자도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고요하기만 하여 과거의 역사는 이미 잊힌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