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 미국의 뉴키즈 온 더 블록(NKOTB)에 맞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국의 보이밴드 테이크 댓(Take That)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난 후 영연방은 백스트리트 보이스(BSB)이라는 미국출신소년들의 대규모 공습에 유니언 잭을 내려야만 했다. 위기에 봉착한 영연방의 독불장군 영국은 상처입은 자존심 회복을 위해 주변형제들에게 음악이라는 평화와 화해의 원조를 구했다. 이에 중세로부터 이어져왔던 충돌과 마찰의 선봉장 아일랜드는 거국적 차원에서 수도 더블린(Dublin)출신의 5명의 소년들을 본토에 상륙시키며 영연방의 자존심 회복은 물론 최소한 대서양 일대는 이 5명의 소년들의 발밑에 두게 만드는 기대이상의 시나리오를 제공했다. 결국 빼앗긴 들에도 봄은 찾아왔던 것이다...
이상이 간략한 보이존의 출현배경이다.. 이것이 본문의 주제인 리메이크와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할 수 도 있겠다. 그러나 지금 살펴볼 곡이 그들의 출신지를 거론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기에 장황한 서론을 기술 한 것이다.
지금도 정치적 불안과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 아일랜드에게 있어 대중음악은 혼돈의 과거와 현실이 투영된 태생적인 반골(反骨)음악일 수 밖에 없었다. 즉 현존 최고의 정치적 록 밴드 유투(U2)를 비롯, 90년대 초 삭발의 잔다르크 시네이드 오코너(Sinead O' Conner), Dream의 주인공 크랜베리스(The Cranberries)에 이르기 까지 무수히도 많은 아일랜드 출신 아티스트들이 의식있는 실천가들로서 사회성 짙은 음악을 들려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이밴드였던 보이존은 민족적 기질을 드러내지 못했고 아니 드러낼 수 가 없었다. 소녀들의 감성을 울리는 그들의 음악에 반역의 씨는 가당치도 않았던 것이다. 연계적으로 리메이크에 있어서도 그들은 지극히 대중적인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Ben, 비지스(Beegees)의 Word 같은 곡을 리바이벌 하는 현실순응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입양(?)으로 정체성을 잊어버린듯한 그들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의식중에 아일랜드의 DNA를 머금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이의 산물이 바로 98년의 3집 Where we belong 의 리메이크작 Baby can I hold you 로서 흑인포크싱어 트레이시 채프먼(Tracy Chapman)의 88년 기념비적인 명반 Tracy Chapman에 수록된 원곡을 재해석했다. 트레이시 채프먼이 누구인가! 마이클잭슨으로 대변되는 레이건 보수시대에 맞서 통기타 하나로 미국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고든 저항의 여신상 아니던가!... 바로 이점이 키워드였다. 즉 국적과 피부색은 다를지라도 저항이라는 공통된 대의가 보이존의 조국 아일랜드와 트레이시 채프먼을 동일선상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따라서 보이존은 트레이시의 곡을 선택함으로서 타지에서 본의 아니게 이적행위(?)를 해왔지만 결코 고국의 정신을 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미약하나마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성인취향의 고급스러운 팝을 구사하는 보이존에게 있어 외유내강(外柔內剛)한 포크음악은 음악적 색깔의 유지와 그들이 의도했던 의식표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적격이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다. 비록 선곡이 그 메시지에 있어 조금 부족했다는 점을 지울 수 없지만 말이다..
음악적인 부분에서 있어선 원곡이 통기타 선율에 트레이시 채프먼의 흐느끼는 듯한 애잔한 보컬이 조화를 이룬 모습을 연출했다면, 보이존의 그것은 감정조절의 극치를 보여주는 로넌 키팅(Ronan Keating)의 목소리에 오케스트레이션을 강조한 고급스러우면서 유려한 어레인지가 돋보였다.
아무튼 Baby Can I Hold You는 리메이크 전문 밴드인 보이존의 다수의 리메이크 중 음악적 부분을 차치하고서라도 가장 의미있는 그것임에 틀림없다. 즉 그들은 이 작업을 통해 지금 현재 비록 영국이 주는 성공의 단물을 섭취하고 있지만 자신들에게도 고국 아일랜드의 자랑스러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자긍심을 내보이고자 노력했다. 또한 곡을 디딤돌 삼아 일회용 보이밴드가 아니라 고급스러운 팝 그룹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그들의 목표에 한결 다가서고자 했다. 그러나 미성의 소유자 스티븐 게이틀리(Stephen Gately)의 “커밍 아웃(Coming Out)” 소동으로 인해 목표의 반환점을 돌지 못하고 주저 앉아버렸다는 점이 씁쓸한 여운을 남기지만 말이다........
(6) 에릭 베네(Eric Benet) - Dust in the wind -
70년대 미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캔사스(Kansas)의 최고의 히트곡이자 그들의 정체성과는 동떨어진 곡인 포크 발라드 Dust in the wind는 그 동안 독일의 거물 스콜피온스(Scorpions), 팝페라의 거성(巨星) 사라 브라이트만(Sarah Brightman), 한일월드컵앨범에 참가한 DJ 프레디(DJ Freddy)에 이르기까지 많은 아티스트들이 저마다의 맛을 내곤 했다. 그러나 본문에선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 의 의미를 20 여년 뒤 흑인의 필로 걸러낸 Urban R&B 소울 아티스트 에릭 베네(Eric Benet)의 것을 맛보기로 한다..
사실 에릭 베네는 흑인음악 애호가를 제외하곤 국내에선 인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다. 99년 대중과 평단의 찬사를 거머쥔 이 리메이크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건너 한국은 그 사정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출연한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의 셀프 스토리 “글리터(Glitter)” 의 흥행참패는 그의 한국입성을 또 한번 가로막는 저해요인이었다. 그러나 치맛바람(?)의 위력은 대단했다. 2001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흑인배우 할 베리(Halle Berry)와의 결혼은 비로소 그가 입국금지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여성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순수한 음악적 역량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유독 한국에서만 그랬던 것뿐이지 본토에선 맥스웰(Maxwell), 디 안젤로(D' Angelo)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소울 R&B계의 실력파 아티스트로 대접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접을 가능케 한 전환점이 바로 99년 그의 2집 A Day In The Life 의 Dust in the wind 였다. 이 앨범에선 페이스 에반스(Faith Evans)가 피처링한 토토(ToTo)의 Georgy porgy도 담겨있으나 완성도나 파급효과는 Dust in the wind 에 조금 못 미쳤다.
본론으로 돌아와 마치 도가사상(道家思想)의 테마송으로 불릴만한 인생무상의 Dust in the wind!! 이 곡이 에릭 베네와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캔사스의 77년 앨범 Point Of Know Return에 수록된 이 곡의 테마적 소스는 베이비붐세대를 포함한 6∼7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들의 공허함과 무기력함을 다루고 있다. 즉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부르짖던 히피들의 이상과 민권과 인권을 요구한 흑인들의 투쟁이 70년대 말 보수적 현실과 지나간 세월앞에 ‘바람속에 날려버린 먼지’ 와 같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 특히 흑인 선조들의 이같은 애환은 같은 핏줄로서 에릭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즉 시대가 바뀌면서 흑인들도 현대인의 도시적 삶을 공유하고, 음악도 도시적인 리듬앤블루스라는 Urban R&B가 등장하는 등 외형적으로는 흑인의 삶의 질이 향상된 것 같지만 그 이면에 아직도 할렘(Harlem)이나 슬럼(Slum)같은 차별적 잔재요소가 남아있는 현실은 20여년전의 그것과 다름없음을 에릭은 공감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Dust in the wind 가 작금의 현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 방법론으로 그는 자신의 음악인 세련된 편곡의 Urban R&B를 선택했다. 원곡이 공허함의 메시지와 어울리게 통기타에 세상에 대한 관조적인 필을 듬뿍 담은 보컬을 얹은 일종의 포크음악이었다면, 에릭은 펑키하면서 그루브한 리듬을 강조하며 흑인특유의 끈적끈적한 목소리를 그 위에 입힌 도시적 감각의 터치를 보여줬다. 그러나 세련됨 속에 적당히 어두운 감성을 머금고 있는 그의 보컬은 Urban R&B로 대변되는 신장된 흑인들의 삶 이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군중속의 소외’ 를 표현하는 듯한 진한 향기를 풍겼다. 그것은 안타까운 진실의 소리였다............
진실의 소리는 대중음악인으로서 그의 커리어의 일대전환을 가져왔다.
96년 데뷔 후 가능성있는 아티스트에 머물러있던 그에게 소포모어 앨범의 Dust in the wind는 그가 바람속에 묻혀버리지 않도록 아니 바람을 타고 날아갈 수 있도록 고출력 엔진을 제공했다. 앨범의 대박은 물론이거니와 흑인음악의 그래미로 불리는 소울트레인어워즈에서 최우수 R&B/소울 앨범까지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6∼70년대를 보낸 베이비붐세대들에게 이루지 못한 이상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향수를 제공했으며 장르를 초월한 팝의 명곡을 신세대들에게 전파하는 전도사 역까지 자처했다.
한국팬들에게 있어 비지스(Begees)의 빅 히트곡 How deep is your love의 리메이크하면 흑인보컬그룹 포트레이트(Portrait)의 버전이 떠오르듯이 캔사스(Kansas)의 Dust in the wind도 스콜피온스가 아닌 에릭 베네의 버전이 언뜻 뇌리에 스쳐가기를 소망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 싶다..
더 이상 할 베리(Halle Berry)의 반쪽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닌..........
(7) 조던 나이트(Jordan Knight) - I could never take the place of your man -
적어도 한국에 있어서 90년대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들에게는 추억에 잠기게 하는 젊음의 증인이며, 기성세대들에게는 꽃다운 1명의 목숨을 앗아간 폭도들이란 양극으로서 기억되는 전대미문의 보이밴드 뉴키즈 온더 블록(NKOTB)!! 지금은 세월을 뒤로 하고 역사속에 안치된 그 그룹의 리드 보컬리스트였던 조던 나이트에게 있어 리메이크는 그의 독립슬로건인 ‘블루아이드소울(Blue eyed Soul)’ 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블루아이드소울(Blue eyed Soul)이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푸른 눈을 가진 백인들이 흑인의 음악인 소울을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점은 60년대 후반 ‘블루스 리바이벌’ 이 백인들이 주도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출발부터가 블루스는 아니었다는데 있다. 즉 록을 하는 그들이 뿌리찾기의 일환으로서 한시적으로 행한 말 그대로 ‘리바이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기한 블루아이드소울은 앞선 그것과 백인들이 한다는 측면에선 유사했지만 애초부터 흑인이 되고자 했던 점에선 궤도를 달리했다. 그 대표적 증인들로서 60년대, 우리에겐 사랑과 영혼의 테마곡과 영국의 신예 가레스 게이츠(Gareth Gates)의 리메이크로 널리 알려진 Unchained Melody의 주인공 라이처스 브라더스(Richeous Brothers), 6∼80년대를 관통한 대표적 듀오 홀 앤 오츠(Hall & oates)와 80년대를 풍미한 허스키보이스의 대명사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과 설명이 필요없는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 베이비페이스(Babyface)의 직계후손임을 자청한 90년대의 존 비(Jon. B)를 거쳐 새천년의 매력남 저스틴 팀버레이크(Justin Timberlake)등이 그 명맥을 이어왔다..
따라서 어린시절부터 템테이션스(The Temptations), 스타일리스틱스(The Stylistics)같은 소울그룹들이나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같은 R&B 아티스트의 음악을 즐겨들어왔던 푸른 눈을 가진 그에게 블루아이드 소울은 당연한 심연의 발로였다. 필연적인 결과로 그는 블루아이듯 소울을 표방한 99년 솔로데뷔작 Jordan Knight에서 80년대 펑키소울의 상징적 아티스트인 프린스(Prince)의 곡을 빌어왔다. 프린스가 누구인가! 80년대 초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Thriller)에 유일하게 맞설 수 있었던 아니 더 높은 평가를 받았던 퍼플레인(Purplre Rain)의 슈퍼스타 아니던가!!
그런 그의 음악을 80년대에 보고 듣고 자란 조던에게 있어 리메이크는 장르를 떠나 어찌보면 어릴적 추억의 재생이기도 했다. 그 추억의 재생으로 그는 프린스의 87년 앨범 Sign 갣" the times의 Top 10 싱글 I could never take the place of your man 의 버튼을 눌렀다. 당시 그는 첫 싱글 선정과정에서 Top 10에 올랐던 Give it to you와 이 곡을 놓고 저울질하며 상당한 고민을 했었다고 알려진다. 결국 독립의 순수한 창조물을 보여준다는 취지에서 Give it to you로 가닥이 났지만 뉴키즈와 결별하고 새출발하는 그에게 리메이크 곡을 첫 시험무대로 고려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곡의 완성도가 높았는지를 반추해볼 수 있다. (2번째 싱글로 나와 아쉬움을 달랬다.)
곡을 한번 비교하는 시간을 갖자..
미네아폴리스 왕자의 87년의 오리지널 산(産)은 일렉트릭 기타를 곡 전면에 깐 펑키(Funky)한 리듬의 로큰롤을 들려주고 있는데 특히 숨쉴틈없이 내달리는 프린스의 선굵은 보컬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펑크(Funk)나 로큰롤의 이분법적 문법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상당히 유니크한 구성이 이채롭다. 사실 이 유니크함이 펑키한 소울에 팝, 록을 뒤섞는 잡종교배자 프린스에게 있어 어제 오늘일이겠냐만 정말 이곡은 그만이 할 수 있는 프린스표 음악의 엑기스를 고스란히 농축하고 있다.
그에 반해 조던의 리메이크는 자기입맛에 맞는 맞춤식 설계도면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영리하게도 조던은 블루아이드소울로 체질개선한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소울의 요소만 남겨두고 나머지 덩어리들은 쏙 덜어내는 센스를 발휘했다. 이는 어레인지적 측면에서 명확한 식별이 가능한데 프린스가 일렉트릭기타를 내세운 업템포의 흥겨운 로큰롤이 주(主)가 된 모습을 연출했다면, 조던은 이를 키보드, 신시사이저로 대체하면서 그의 외모만큼이나 세련된 미디움템포 발라드로 각색해놓았다. 특히 곡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녹아내리는듯한 그의 보컬은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는데 음의 세기의 조절이 그야말로 압권이다.. 또한 한남자의 가슴아픈 순애보를 묘사하고 있는 곡의 가사가 원곡의 흥겨움보다 발라드의 감성에 비교적 잘 어울린다는 점은 곡의 퀄리티를 한단계 더 높여주고 있다.
이러한 수작의 리메이크의 프리즘은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발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먼저 조던 자신에게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던 뉴키즈의 환영을 떨쳐냈고, 동시에 자신의 음악적 노선의 의심의 여지없는 증거물로서 대중앞에 제출했다. 이 점은 특히 묘하게도 동시에 솔로데뷔작을 출시한 옛 팀의 막내 조이 맥킨타이어(Joey Mcintyre)에게 형 만한 아우가 없음을 인식시켜주기에 충분했다. 또한 지지부진하던 블루아이드소울신에 원자폭탄급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고, 80년대가 문워크(Moonwalk)만이 아닌 왕자(Prince)의 에로틱한 스텝도 공존했다는 사실을 젊은이들에게 인식시키는 효과까지 불러 일으켰다.
조던 나이트(Jordan Knight)라는 신인(?)을 처음 접한 신세대들과 구(舊) 뉴키즈 팬들은 이런 그의 시도를 반기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가움으로 가득찬 대중들의 희색만연한 얼굴이 4년동안이나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조던은 깨달아야만 한다. 그의 목소리가 그립다..........
(8) 휘성 - Incomplete -
90년대 초반 서태지라는 걸출한 아티스트가 출몰하면서 발라드 일색의 보수적 한국대중음악시장은 랩이라는 흑인의 주절거림을 메인스트림에 수용하는 아량(?)을 보였다. 이어 90년대 중반 한국인에 있어서 감상은 가능하지만 실천은 요원해보였던 R&B음악이 재미교포출신의 3인조 그룹 솔리드(Solid)에 의해 최초로 실현가능의 영역임이 증명되며 단숨에 한반도를 뒤흔들었다. 사실 흑인의 전유물인 아카펠라, 살떨리는 비브라토의 애드립은 우리에게 있어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여겨졌다. 즉 국내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보이즈 투 멘(Boyz II Men), 올 포 원(All 4 One) 등의 흑인 R&B 그룹의 음악을 한국사람이 소화할수 있으리라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토의 필을 흠뻑 전수받은 솔리드의 등장은 고정관념의 타파와 동시에 한국대중음악신에 R&B라는 생소한 장르를 신규목록에 추가기입시키는 현상까지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솔리드를 신호탄으로 욱일승천의 기세를 발산했던 R&B를 위시한 한국의 흑인음악은 외형적으로는 비대해졌지만 궁극적으로 내실있는 인프라 구축에는 실패했다. 즉 제대로 된 R&B음악의 요소는 실종되버렸고, 병든 한국음악의 주 바이러스인 틴 에이저 그룹의 댄스음악에 상업성을 위한 약간의 양념으로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얼마 전 까지 병상에 누워있던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벌떡 일어났을지도 모를일이다..
물론 본토의 진한 그것의 여과없는 수용은 국내의 정서적 갭을 고려할 때 애초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전술한 바와 같이 댄스음악 일변도의 천편일률적인 시장구조에서 기인했다.
음주가무의 미학(?)을 몸소 실천하는 나라답게 한국은 해가 바뀔수록 댄스의 독을 겉잡을 수 없이 퍼트려나갔다. 그것도 아주 아이러니 하게 댄스음악의 다양한 종(種)을 분화시켜가며 말이다. 즉 소위 잘 팔리는 음반을 만들기 위해 흑인음악의 매력적인 요소만을 추출하여 댄스비트에 혼합시키는 국적 불명의 괴상한 곡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것을 그네들은 힙합(Hiphop), 알앤비(R&B)라고 너무도 당당하게 정의했다. 한국의 블랙뮤직의 총체적 위기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희망의 씨는 암흑속에서도 자라나고 있었다. 즉 왜곡된 한국흑인음악의 현실에 대한 반발로 진실을 추구하고자 했던 소수의 젊은이들이 밀레니엄을 기점으로 대거 등장하면서 희망의 싹을 틔웠던 것이다. 박정현, 박효신, 박화요비 등의 등장은 솔리드가 천명한 대의(大義)가 헛되지 않음을 실로 잘 보여줬다. 그리고 이에 한국축구의 역사적인 4강신화로 기억될 2002년 그 희망을 찬란한 현실로 바꾼 총아(寵兒)가 출현했으니 바로 휘성이었다. 그는 노래의 호흡, 마음속 한 구석에서 끄집어 올리는 소울의 필과 풍부한 성량등 실로 흑인의 오리지널리티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장안을 휩쓴 공전의 히트곡 ‘안되나요’ 는 그 오리지널리티의 결정체였다. 그런 그가 정규앨범에서 본토의 R&B곡을 리메이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즉 2002년 데뷔앨범 Like A Movie에서 그는 흑인 R&B 그룹 드루힐(Dru Hill) 출신의 Urban R&B 스타 시스코(Sisqo)의 99년 넘버원 싱글 Incomplete를 리메이크했는데 이곡은 그에게 경이와 도전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가수 지망생이었던 시절 버스에서 시스코의 99년 앨범 Unleash the dragon을 듣던 그는 Incomplete의 선율이 귀에 감기는 순간 눈물을 흘림과 동시에 상당한 쇼크를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한 바 있다. 초창기 미성의 소유자 였던 그는 시스코의 밑기둥 굵은 목소리와 능수능란한 창법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목에 피가 날 정도로 성대를 단련시켰고 그 결과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목소리의 광맥을 찾음과 동시에 높게만 보였던 Incomplete라는 히말라야를 정복했다.
궁극적으로 휘성은 자신의 우상 시스코의 그것을 음색, 호흡, 성대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의도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재현함으로써 동양인도 흑인의 아이덴티티를 자의적 수정없이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만만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휘성은 불완전한(Incomplete) 하지만 실속있는 고기능 센서를 발판삼아 자신의 음악적 색깔이 정통 R&B, 소울에 있음을 명백히 했고, 시류에 편승한 여타의 R&B 가수들과의 공식적인 구별의 잣대로서 곡을 적극 활용했다. 또한 가요대세의 시장구조와 맞물려 팝을 듣지 않는 신세대들에게 시스코(Sisqo)라는 훌륭한 아티스트를 알리는 기폭제 역할까지 해냈다.
그런 그에게 한가지 희망사항이 있다면 시스코(Sisqo)도 오티스 레딩(Otis Redding)처럼
“곡을 빼앗겼다.” 고 푸념을 늘어놓았다는 낭보(?)를 전해듣는 것인데......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
2주마다 한번씩 글올리기로 다짐했었는데 그게 잘 안되네여... 오랜만에 글 올립니다.. 이번에도 장문이지만 눈아프시더라도 읽어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