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 의해 날조된 우리역사
우리 강토는 3만~5만리
일제는 우리를 단일민족이라고 왜곡해서 가르쳤으나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중화주의(中華主義)와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익숙해져서 우리들 자신을 잊어버렸다. 단군을 신화화(神話化)하고 붉은 악마의 상징인 고조선의 전신(戰神) 치우천왕(蚩尤天王)은 도깨비로 둔갑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치우천왕은 도깨비가 아닌 실제 존재했던 우리의 조상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치우천왕을 자기들 조상으로까지 모셨다. 또 가야국(伽倻國)은 만주에서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건국했다. 건국지가 김해(金海)가 아니다. 가야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5만의 군사로 침략했을 때 남하했다. 아울러 발해(渤海)가 망한 것은 백두산 화산 폭발로 인해 6년간 재난으로 먹을 것이 없어진데 따른 영향이었다. 당시 발해 유민이 남하하자 거란족(遼)이 그 땅을 차지했던 것이었다. 발해 군사 한사람이 거란군의 군사 셋을 상대 할 만큼 강한 발해군대였지만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흉년을 가져왔고 발해는 끝내 멸망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중국은 자신들이 불리한 것은 역사에 절대로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소정방(蘇定方)은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앞장선 당의 장수였으나 백제가 멸망한 후 당 세력을 몰아내는 김유신 장군에게 패했다. 소정방은 당시 패전후 신라가 다리를 놓으며 그 밑에 같이 처박아 넣었기 때문에 중국역사에 나오지 않는다. 안시성의 영웅 양만춘(楊萬春) 장군도 중국역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왜인가. 자기들이 수치스러운 것은 모두 숨기기 위해서다. 양심 있는 중국학자 중엔 이런 내용을 똑바로 지적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있다. 위안텅페이(袁騰飛=징화학교(京華學校)의 역사담당 교사는 “중국의 진짜 역사는 5%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위안텅페이는 이 같은 언급을 한 이유로 지금도 감옥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우리는 천년 왕조가 있지만 중국의 경우 300년 왕조는 송(宋) 이외에는 없다. 따라서 중국이 감히 우리 역사를 날조한다는 것은 난센스(nonsense)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해동삼국(海東三國)이라 했고 당태종(唐太宗)은 죽으면서 유언으로 “고구려를 치지 말라”고 까지 했다.
고구려 시조 주몽(추모)은 고구려를 천제지자(天帝之者)라고 했다. ‘영락’(永樂)이라는 독자 연호를 썼다. 28대 705년간 (BC37~AD668) 존속한 대 고구려다. 중국은 이 기간 동안 35개의 나라가 바뀌었다. 그런데도 고구려가 감히 지방정권이라니. 참으로 무엄하기 짝이 없다는 표현을 써야겠다. 이런 것을 두고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하는 것이다. 송(宋)나라는 고려를 천자(天子)의 나라라고 했다. 유라시아를 제패했던 우리는 기마민족으로서 실재하고 존재한 고조선을 통해 동아시아 최초이자 최강의 국가를 건설했던 것이다. 고대에 우리는 중국과 항상 전투관계에 있었지만 고조선은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해 주는 사례로 훙산문화(紅山文化)를 들 수 있다. 1980년대 중반에 중국이 우리 몰래 비밀로 발해만 인근에서 발굴한 대규모 유적과 유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유적과 유물들은 바로 고조선의 것이다.
이 훙산문화(紅山文化)가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1500~2000년이 빠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자 중국은 중원(中原) 중심론에 타격을 받을 것을 우려한 나머지 한술 더 떠서 훙산문화(紅山文化)를 포함해서 지금 자신의 국경 내에 존재하는 문물은 모두 자국의 역사라는 논리로 동북공정을 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역사를 훔치는 행위는 야만적인 해적행위다. 1905년 청·일간의 간도조약 후 중국과 일본은 우리역사의 말살을 기도 하고 있다. 중국은 특히 동북공정으로 우리 고구려와 발해 역사까지 송두리째 빼앗아 가려고 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역사가 중국, 일본에 의해 엄청나게 도둑맞았고 지금도 도둑맞고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 중에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왜곡·날조한 그대로 우리 고대사의 전반부를 절반 이하로 잘라버렸다. 단군조상과 우리민족이 요동의 강역에 살았음을 부정하고 남이 만들어준 역사를, 그것도 일본의 황통사(皇統史) 식민사관 그대로 고집하는 자가 아직도 주도하고 있다는데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는 우리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단군조상과 우리민족이 발상지인 요동의 강역에 살았음을 부정하는 것은 용납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중국도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망발을 하고 있다. 우리역사를 송두리 채 뭉개는 만행인데도 우리 정부와 학계는 눈치만 보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나아가 지난날 사대주의자들이 중국에 요공(要功)하느라고 없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갖다 넣어 역사를 왜곡하더니 이제는 일본이 왜곡한 역사를 호도하는 학노(學奴)들이 우리 역사를 좌지우지 하고 있다. 더 이상 묵과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부는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앞장서서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
고구려 발해를 지방정권이라 하는 중국의 가소로운 동북공정은 세계를 기만하는 작태이기도 하다.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참담한 흉계다.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중국의 역사왜곡과 날조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과 같은 주장을 절대 받아들일 수 가 없으며 용납도 되지 않는다. 독자 연호인 영락(永樂)을 쓰고 수양제(隋煬帝)의 113만 대군을 물리친 나라가 지방정권인가. 아니면 당나라 당태종(唐太宗)이 이끄는 30만의 정예군대를 물리친 고구려가 어디 지방정권이란 말인가. 빈대도 낮 짝이 있지, 수치를 모르는 중국이 힘으로 역사를 밀고 가려는 만용은 더 이상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볼 수가 없다. 이 같은 만용의 우는 범하지 않는 것이 중국을 위해서도 이로운 것이다. 705년이나 존속한 고구려를 어디 감히 날조를 하려는가. 이 기간 동안 중국은 35개의 나라가 명멸 했는데,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다. 어디다 조작하려 한다는 말인가. 참으로 개구무언의 지경이다. 외국학자들도 중국의 왜곡을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자들은 왜 이렇게 조용한가.
우리역사를 도둑맞고 있는데, 침묵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강력한 항의와 이에 걸 맞는 연구 노력을 더 경주해야 한다. 하지만 양적으로나 국가 정책적으로나 동북공정에 대응할 기관의 예산이나 연구원의 인선 등 그 대비가 중국에 못 미치고 있다. 필자는 우리 고대사 역사를 연구한지 10년 정도 밖에 안 돼 아직은 초급 수준이라고 본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보면 중국의 동북공정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중국의 나라수명을 순서 가리지 않고 살펴보면 왜 유치한지 이유를 안다. 진(秦) 15년, 수(隨) 37년, 당(唐) 289년. 송(宋) 319년, 한(漢) 230년, 요(遼) 218년, 명(明) 280년, 청(淸) 295년, 금(金) 119년, 원(元) 97년, 초(楚) 43년, 위(魏) 46년, 오(吳) 53년 등이다. 이런 나라가 1만년이나 되는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를 지방정권이라고 하니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는 법이다. 중국과 일본이 아무리 우리 역사를 왜곡·날조해도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다.
우리의 환국(桓國)은 1565년 간 지속됐다. 단군조선은 2096년간 47대에 걸쳐 통치했다. 부여(夫餘)는 496년(BC2~AD494년)까지 실제 존재했던 국가다. 고구려(高句麗) 705년, 신라(新羅) 929년, 백제(百濟) 681년, 고려(高麗) 475년, 조선(朝鮮) 528년, 발해(渤海) 228년, 대가야(大伽倻) 490년 등의 긴 역사가 있다. 일본 오가야마(岡山)에도 가야(伽倻)가 있다. 이처럼 우리 역사의 위대함은 중국과 비교가 안 되는 만큼 우리가 오랜 역사와 국가를 지속하며 통치를 해온 사실은 숨길 수 없다. 중국이 우리 역사를 손댄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영토는 너무 광활해 그 땅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고 컸으며 위대했다. 그러기에 고구려는 국시(國是)를 다물(多勿)이라고 했다.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말 한다. 환국시대(桓國時代), 단군시대에서 우리 조선(祖先)들이 일구었고, 아세아 유아아라시아의 광활 한 땅을 다시 찾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 땅을 찾기 전에 먼저 조선시대까지 우리 영역인 간도부터 찾아 나가야 한다.
지난 2009년 11월 17일 KBS뉴스는 카마르탄트 벽화가 고구려 벽화라고 보도했다. 우리 선조의 고대국가들은 유라시아 중앙아세아에 실제로 지배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 먹 거리도 그 역사를 가늠하게 한다. 미국 학자는 우리나라 된장을 보고 1만년의 민족사(民族史)를 가진 민족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같이 세계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인류의 문명은 중원(中原)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들이 분명함에도 중국,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 학자라는 자들 까지 중국과 일본의 논리에 부화뇌동하고 있으니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 바로 시정돼야 하고 정부도 이런 노예근성의 학노들을 추려내야 한다. 이를 통해 잃어버린 우리역사의 올바른 역사정립을 위해 새로운 영단을 내리고 도둑맞은 우리역사를 바로 잡고 가야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이 저지른 역사왜곡을 그대로 두는 것은 우리 조상에 대한 모독이요 학살이다.
우리강토는 3천리가 아니라 3만~5만리였다
우리역사는 삼성기(三聖記)에 실려 있는 사실 그대로다. 상고시대(上古時代) 우리나라의 강역(疆域)은 바이칼(Baikal) 호수를 중심으로 시베리아 대륙과 만주, 중국, 한반도, 일본 열도에 이르는 엄청난 경계를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3천리 강산이 아니라 동서가 3만리요 남북이 5만리가 되는 상상 할 수 없는 광활한 강역의 국가였다는 것이다. 이는 아세아와 유럽을 아우르는 것으로 이 광역한 땅에 사는 인구는 1억8000만인 때도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렇듯 강성한 나라의 후예인 고구려,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인류의 문명은 중원(中原)에서, 정확히 말해서 요하(遼河)에서 시작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1500~2000년 앞선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옛날 이곳은 중국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조선, 고구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의 역사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러시아의 학자 푸틴도 “고조선은 고대에 어느 나라에도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나라였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지배를 받던 중국, 일본이 열등감에서 우리역사를 거꾸로 꾸미고 있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이렇게 중국과 일본이 노골적으로 천인공노 할 역사를 왜곡 조작하는 데도 우리나라 강단파 학자들은 왜곡된 역사만을 고집하고 중국,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나라가 바로가기 위해서는 우리역사의 정체성을 되찾고 가야 한다. 도둑맞은 우리 역사를 그대로 간다면 조상에게 대죄를 짓는 일이다. 자랑스러운 조상의 자손으로서 역사를 제자리로 찾아 넣어야 한다. 로마의 철학자이나 정치가로 알려진 키케로(Cicero)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모르는 것은 영원히 어린이로 남는 것이다”고 했다. 귀가 있는 사학자라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를 찾고 더욱 빛내도록 해야 한다.
일본 천황은 백제 후손
일본과 중국이 우리역사를 폄하하며 공세적으로 나오고 있음에도 우리는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형세다. 왜 이렇게 무사안일에 빠져있는 우리들이 됐는지 참으로 실망스럽다. 동북공정과 관련한 최근의 한 사건이 우선 그렇다. 잘못을 지적해야 할 ‘동북아역사재단’이 오히려 경기도교육청이 제작한 ‘동북아 평화를 꿈꾸며’ 자료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연구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위정자나 학자도 하물며 언론까지 나서서 역사왜곡을 하는 외국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데 대해 실망을 금치 못하겠다. 지난 9월 18일 중앙일간지 J신문 사설은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서술했다. 이는 국내 고대사학계의 일치된 의견이 아니다. 아울러 간도를 우리 땅으로 기술한데 대해서는 “중국과의 외교문제로 비화될 소지가 있다. 한·중·일 3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점을 고려해야 한다. 동북공정의 왜곡을 문제 삼는 우리가 오히려 이 자료집으로 역공을 당할 우려가 있다”는 등의 황당하고 무지한 주장을 해 그저 유구무언이다. 이미 전편의 원고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단군은 47대에 걸쳐 실존했던 왕국이며, 단군은 실재했던 우리의 조상이다. 간도 또한 엄연한 우리 땅이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위대한 선조의 역사에 대한 모독을 이대로 두는 것은 우리의 수치요 조상에 대한 말 할 수 없는 불충이면서 불효를 저지르는 큰 대죄다. 오늘날 날이 갈수록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발해가 지방정권으로 위축돼 가고 있다. 나아가 만리장성이 평양까지라고 하는 주장과 한사군의 영역을 제멋대로 넓게 표시하는 것 등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역사왜곡이고 날조다. 이를 보면서도 침묵만 하는 우리 학계나 언론계를 보고 있으면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이는 일제가 의도한 우리역사의 무지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의 찬란한 역사가 훼손되고 일본의 터무니없는 역사왜곡으로 한국역사가 기자조선부터 기술되고 단군역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조용하다. 이것은 우리 영혼이 살아 있지 않고 죽어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지 우리의 정신세계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자손만대의 창대한 번영을 위해서라도 역사는 바로 찾아 올바르게 세워져야 한다. 최태영 선생은 이러한 우리나라의 무정책, 무관심을 한탄했다. 최 선생은 고대사 특히 단군에 관한 연구를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매진하면서 “역사를 잃으면 다 잃는다”는 비장한 각오로 고군분투하며 연구했었다.
오늘은 최 선생이 노구를 이끌고 단군연구에 관한 연구 자료수집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외국 특히 일본에 가서 답사하고 연구해 온 것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 귀중한 고대사 자료가 되는, 국내외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 신황기·神皇紀)에 관해 소개하고자 한다.
최태영 선생이 역사를 연구하게 된 동기
우리 고대사 복원을 위해 평생을 바친 최태영 선생은 강단파인 학노(學奴)들의 김부식 ‘삼국사기’를 금과옥조로 내세운데 대해 우리나라 역사를 망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하고 있다. 선생은 ‘삼국사기’는 김부식이가 당시 반대파의 북진 논리를 막기 위해 한국사 전반부 2000년을 싹둑 잘라낸 역사서이기 때문에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선생이 고대사를 연구하게 된 동기였다. 김부식은 자료를 당에서 가져와 중국의 시각에서 삼국사기를 편집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참고로 했던 이전의 수많은 역사서들을 모두 대궐 안 깊숙이 수장해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게 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역사를 팔아먹은 자나 진배없기에 그를 나쁘다고 하는 것이다. 김부식이 저지른 죄과는 천추에 후환을 씻을 수 없는 죄과가 되고 있다. 이 같이 잘못된 고대사를 바로 잡을 학자는 신채호, 정인보, 손진태, 안재홍, 최동, 장도빈 같은 학자들이었다. 이들이 살아 있었다면 국사가 이 지경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6.25 전쟁으로 이들 석학들은 납치되거나 타계했기에 우리의 고대사는 일본의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최태영 선생은 한탄했다.
그래서 선생은 자신이라도 이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한문과 일본 고문(古文)에 소양이 있음을 믿고 사재를 털어 가며 한국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게 됐다. 선생은 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국내 학자들의 저서도 섭렵했다. 먼저 정인보(鄭寅普)선생의 저서부터 다시 탐독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당시 우리나라 3대 수재(정인보 이광수 최남선)로 이름난 정인보 선생은 역사서에서 “단군은 중국 요(堯)와 같은 시절에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은 새롭게 주장 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단군은 신도 아니고 곰의 아들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닌 우리 조상 할아버지와 똑 같은 사람이다”고 했다. 이는 최태영 선생이 어렸을 때 배운 것과 같은 것이었다. 선생은 한국사의 출발은 정인보가 옳다고 하면서 더욱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게 된 사연을 말했다. 선생은 서울 법대와 대학원에서 법학과목과 함께 국사과목도 자원해서 가르쳤다. 이것은 한국학(韓國學)과 본격적으로 관련을 맺은 결과가 됐다. 그는 대학에서 법철학을 연구하면서 우리조상들의 사상을 공부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한국학 특히 국사에 주목을 하게 됐다.
선생은 고령임에도 1985년 ‘한국학연구원’ 모임을 만들어 역사 강의와 토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2년 남짓 지속된 이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도 소개하고 있다. 김우현 목사, 윤태림 전 숙대 총장, 송지영 KBS 이사장, 유승국 전 정신문화 연구원장, 김재원 전 국립 박물관장, 손보기 교수, 윤내현 교수, 김주현 교수, 박진근 전 광신상고 교장, 김성호 백제 연구가, 김선기 전 문교부 차관, 문승연 이대강사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 모임에 열정적으로 참여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선생은 1988년 ‘한국 상고사’를 발표한다. 여기에는 해방 후 강단파의 거두인 이병도 박사도 그동안 주장해왔던 학설을 바꾼 내용이 있다. 이병도는 최태영 선생의 의견과 같이해 기존의 잘못된 단군을 “단군은 실재 인물이다”는 논지를 발표했다. 그래서 최태영, 이병도 공저의 ‘한국 상고사’가 나오게 됐다. ‘한국 상고사’에는 단군이 실재했던 임금임을 밝히고 있음이 물론이다. 이러한 연구가 되기까지는 최태영 선생의 충정어린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 神皇紀)의 확인
최태영 선생은 ‘한국 상고사’를 발간한 그해 눈을 외국에 돌렸다. 그는 일본에 간 우리의 유민이 1200년간 일본 후지 산 아래 지하 서고에서 보관돼 온 비서(秘書)중의 비서인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 신황기·神皇紀)를 1988년 4월 도쿄대학(東京大學)에 연구실을 갖고 오랜 연구생활을 하고 있던 이병창 박사로부터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이 박사는 당시 최 선생에게 “일본 연구자들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데 한번 와서 실제로 만나보고 실지답사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최 선생에게 한 것이었다. 이는 한국사학계에 행운이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1988년 최태영 선생과 19세나 나이 차이가 있지만 절친한 김주현(金周賢) 박사와 이병창 박사의 주선으로 일본 야마나시 현(山梨縣) 후지시(富士市) 후지산(富士山) 아래 산기슭 대밭 지하금고 안에 미야시다(宮下) 가문의 보물인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를 볼 수 있었다. 이 보물은 일본 궁궐에서도 알 수 없던 책으로 당주(當主)가 1890년경 1200년간 침묵을 깨고 미와 요시히로(三輪義熙)에게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나온 보물 중의 보물인 책이다.
미와 요시히로(三輪義熙)는 ‘미야시타 문서’의 최초 연구자가 된다. 그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나와 공증인(公證人)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문서를 접하고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느낌을 갖고 공증인 직업도 내팽개쳤다. 이후 30년간 ‘미야시타 문서’를 연구해 1921년 ‘신황기’(神皇紀)로 출판하기에 이른다. 이 문서는 가야계(伽倻系) 한국인으로 7세기 일본의 실제 통치자였던 소가(蘇我)가 썼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던 때라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중국인 서복(徐福)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미야시타 문서’(신황기·神皇紀)는 내용이 신작(神的)인 것은 없고 매우 합리적이며 대륙(한국)의 일과 일본의 일을 구분해서 서술하고 있다. 바로 백제인(百濟人)이 일본에 와서 일본인들을 깨우쳐 문화를 전하고 이어서 천황(天皇)이 됐다는 내용을 쓴 책이다. 몇 대부터 몇 대까지가 백제 인이 즉위한 일본왕인지 시대가 분명하게 쓰여져 있다. 이에 비해 ‘상기’(上記)는 막연한 기록이어서 “단군의 73대 손이 진무(神武) 일왕이 됐다”고 쓰여 있다.
당시 일본 신문은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뒤집는 진짜 역사서가 나왔다고 대서특필(大書特筆) 했다. 당시 한국을 침략하고 조선총독부 부총독이었던 사이토(齊藤) 내무대신이 이 책을 보고 감동해 후지문고(富士文庫) 고문이 됐다. 하지만 일본 국수주의(國粹主義) 파들이 크게 반발했다. 이로 인해 연구는 더 지속되지 못하고 1200년을 내려온 문서를 복원한 ‘신황기’(神皇紀)는 군부에 의해 거짓위서(僞書)로 몰렸다. 그러나 전후 1980년에 와서 이 책은 다시 아고 기요히코(吾鄕 淸彦), 가시마 노보루(鹿島 昇), 나카쿠라(中倉) 등의 노력으로 재간됐다. 미와 구니미쓰(三輪 邦光)는 1980년 ‘신황기’의 ‘복간에 임하여’라는 글에서 이 문서를 30년간 연구한 파란만장한 삶을 가졌던 부친 미와 요시히로(三輪 義熙)와 신황기(神皇紀)의 내력을 소상히 기술하고 있다.
그 내용이 매우 진지하다. 그래서 ‘신황기 복간사’(復刊辭, 일본의 歷史と現代 1980년 여름호)의 내용을 요약 그대로 소개한다. “아버지는 연구심과 정신을 이 한 가지 일에 집중했다. 처음 이 문서를 읽었을 때 경천동지의 느낌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여러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상가야(上伽倻) 왕조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에 비하면‘고사기’나 ‘일본서기’는 허구일 뿐, 사서(史書)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제까지 사람 눈에 띄지 아니했던 이 비서는 아버지와 미야시타 집과의 외양간에서 아버지는 그 문서의 해독을 시작 한 것이다. 이리하여 아버지의 평생사업은 정해졌다. 이 문서를 정리해 세계에 자랑할 일본의 역사를 남기고 세상을 묻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결심은 순수한 애국적 지성(至誠)에 의한 것이다. 그 후 30년에 걸쳐 연구한 결과 1921년 신황기(神皇紀)라는 이름의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아버지는 유지와 연구가들을 모아서 1922년 재단법인 후지문고를 창립해 이사장이 됐고 당시의 내무장관 사이토가 수석고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발간은 ‘고사기’나 ‘일본서기’를 일본사의 바이블로 맹신하고 국민을 속이고 사학을 가장하고 있던 학노(學奴)들을 극도로 자극한 것이 됐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생하는 교직과 신직(神職)의 학노들은 실직하게 될까봐 맹렬한 반론을 일으켜 “신황기는 일본 국사를 파괴하는 위서(僞書)”라고 몰아서 말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당시의 군부(軍部)는 허구의 신국사상을 만들어 무모한 침략전쟁으로 일본국민을 몰고 가고 있었다. 군인들은 신황기에 나와 있듯 일본왕가가 한국에서 이주(移住)했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인정하려 들 능력도 없었다. 이 때문에 군부는 학노들을 지지한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 당시 군의 명령은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 것이어서 아버지는 침략전쟁에 눌려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황기에 위서(僞書)라고 낙인을 찍는 것은 진리에 대한 테러이지만 학노와 군은 그런 일을 실행했다”
“재단법인 후지문고도 탄압되어 활동정지명령을 받고 동지들은 수십 년에 걸친 연구결과를 서고에 잠재워두고 묵묵히 헤어졌다. 그리고 대지진이 서류를 불태웠다. 진실의 등불은 이렇게 꺼져버렸다. 아버지는 당신이 연구한 사거가 장사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신황기에 반대하는 난폭자들은 수천 년의 조국을 지켜온 조국의 파멸을 향하여 전쟁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한사람으로는 이 대세를 막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아버지의 신황기를 다시 출간해 아버지가 발견한 진실을 세상에 호소하려 하고 있다. 과거 일본민족의 파멸을 위사(僞史)에 의하여 생겼음으로 일본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짓역사를 버리고 진실을 교훈으로 하여 미래를 구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 상가야 왕조사인 신황기의 복간에 임하여 어려운 시기에도 신황기를 몸에 간직해온 친족과 현내(縣內)의 유지와 미야시다 가(宮下 家)의 당주(當主) 이하 여러분과 아버지 별세 후 30년에 걸쳐 그 연구를 계속한 분들의 협력에 감사를 표한다” <1980년 3월 28일>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들도 “거짓역사를 버리고 진실을 교훈으로 하여 미래를 구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하고 있다. 일본 학자나 사료 보관자와 연구가들마저 바른 역사로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역사를 버리고 진실을 교훈으로 해 미래를 구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우리 학자들이라는 학노(學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희망조차 없다. 언제까지 일본의 총독부가 왜곡하고 조작한 허황된 허구의 유령을 따르려 하는가. 우리역사의 너무나 비참한 현주소를 보며 최태영 선생이 안타까워했던 그 모습과 그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는 듯 기억이 새롭다.
한국은 일본왕조의 실크로드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는 학노(學奴)
작가인 로버트 하인라인은 “역사를 무시하는 세대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고 했다. 고대사연구에 평생을 바친 최태영 선생은 전후 일본의 새로운 학파인 상가야(上伽倻) 연구자들을 알게 되고 나서 한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귀중한 고대사 자료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신황기·神皇紀)를 접했다. 일본 야마나시 현(山梨縣) 후지시(富士市) 후지산(富士山) 아래 산기슭 대밭 지하 금고 안에 미야시다(宮下) 가문의 보물인 ‘미야시타 문서’를 직접 확인하고 귀국한 최태영 선생은 이 답사 보고를 학계에 하고자 했다. 그러나 연구를 하지 않아 왔던 국내 국사학계는 오히려 당황하면서 ‘한국인이 일본을 세웠다는 역사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의 왜곡한 한국역사가 전부인양 거기에 안주해온 자들이기에 사실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였다.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 중 거세진 일본군국주의의 발호로 핍박 받기 전에도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같은 일본 왕실 권력사와는 다른 고대사 자료가 연구되면서 많은 자료가 제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런 연구조차 않은 것은 물론 자신들이 아는 것 외에는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심의 틈새가 없는 참으로 한심한 학자들이었다.
더욱 기가찬 일은 김영삼 정부가 역사를 바로 세운다고 큰 소리를 칠 당시 국무총리 두 사람은 열 명도 안 되는 단군 연구학자들과 사사건건 맞섰던 일이 있다. 최태영 선생은 이 사건을 회고하며 기가 막힌 심정을 ‘인간 단군을 찾아서’에서 언급하고 있다. 또 1997년에는 고시(考試)에서 국사과목조차 빠져버렸다. 이 같이 우리나라 역사 복원은 멀어져가고 앞장서서 뭘 할 것처럼 큰 소리 치던 학자들은 벙어리가 돼 정부에서 주는 요직에 만족 할 뿐이라고 선생은 질책을 했다. 역사를 너무 모르는 사람들이 사학계를 잡고 다수결이란 명목으로 정책을 휘둘러 왔다. 나아가 우리 역사를 아는 사람은 아주 소수다. 우리 역사를 바로 찾고 세워야만 나라가 변할 수 있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수 있는데도 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무기력한 학자무리에 최 선생은 한탄했다. 일본에서는 자국역사가 아닌데도 우리 역사를 깊이 연구하며 발표하고 책자까지 발간하는데, 우리네 학자라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잠만 자고 있는 형세다. 이는 국가장래를 위해서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왕조는 한국인이 세웠고 일본역사의 상반은 한국역사라는 책들
일본의 학자는 일본의 뿌리가 한국인데서 우리역사를 깊이 연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유민들이 가지고 간 자료가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것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신황기·神皇紀) 외에도 ‘고사기’와 ‘일본서기’와는 다른 ‘수진전’(秀眞傳), ‘상기’(上記), ‘다케우치(竹內)문서’(富士高天原朝史), ‘北陸飛彈朝史’와 ‘구카미(九鬼)문서’(出雲高天原朝史) 등이 그것이다. 이 문서들은 널리 공개가 되지 않던 비서들이며 흠결된 부분이 있어서 여럿을 종합해 읽어야 대체를 알 수 있다. 이 비서(秘書=비밀스런 서책)들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역사의 상반은 한국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일본의 학자로는 미와 구니 미쓰(三輪邦光),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 가시마 노보루(鹿島昇), 요시다 하치로(吉田八郞), 마쓰모토 젠노쓰게(松本善之助) 등이 있다. 이들 학자들은 이들 문서를 두루 연구했다. 그 내용은 ‘일본왕조의 발생이 일본열도에서 자생한 것이 아니고 대륙인 한국에서 건너갔다’에 관한 것이었다. 즉, 단군이래의 한국이 일본왕조의 발상지이고 실크로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를 상가야 왕조사(上伽倻王朝史)라고 지칭한다. 아울러 한국의 고대사와 일본 역사의 접점을 찾는 중요자료로 환단고기(桓檀古記)가 덧붙여지고 있다.
최태영 선생은 젊은 시절 중국대륙에 가서 고적을 듣고 보아 고대 한국의 주된 활약무대가 지금의 중국대륙이라는 것은 확인했지만 일본왕조의 발상지가 한국이요 한국이 그들의 실크로드라는 것은 일본에 가서 한국사 연구자료를 찾아다니면서 얻은 지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연찮게 이들의 연구를 접해 권력사에 불과한 ‘고사기’(古事記) 및 ‘일본서기’(日本書紀)와는 다른 여러 가지 역사서가 일본 땅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진전’(秀眞傳)처럼 고대문자(가림토)로 기록된 역사서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수진전’이란 ‘진짜 우수한 전기’라는 뜻의 책이다. 그런데 이 역사서의 발상이 단군조선이고 또한 한·일 두 나라의 역사가 연접돼 있기 때문에 적어도 ‘환단고기’(桓檀古記),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신황기·神皇紀), ‘상기’(上記), ‘다케우치 분쇼’(竹內文書), ‘수진전’(秀眞傳) 같은 다섯 가지의 비서와 30종의 고대 일본문자를 우리도 알 필요가 있다. 이 비서(秘書)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미야시타 문서’는 일본 학자들조차 이 문고를 직접 본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최태영 선생은 이병창 박사의 주선이 없었다면 이런 문서가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국내 사학자들은 최 선생이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몰아 세웠다. 이에 최 선생은 1921년 ‘미야시타 문서’의 저자인 미와 요시히로(三輪義熙) 선생은 타계했으므로 1980년 ‘신황기’(神皇紀) 복간을 한 그의 아들 미와구니 미쓰(三輪邦光) 선생을 초청해 ‘미야시타 문서’ 탐사보고회를 갖고자 했다. 그러나 국내 식민사관 학노(學奴)들의 방해를 받아 무산됐다. 그래서 1999년 2월 들어서야 한국 학술원 통신지를 통해 간략하게 첫 공식 보고를 했다고 그동안의 안타까웠던 일을 최 선생은 회고했다. 도둑맞은 우리 역사의 정립을 위해 애쓰는 고령의 노학자를 돕지는 못할망정 자기들의 신분을 지키기 위해 소중한 역사자료도 팽개치는 이들이 한국국민이며 과연 한국의 사학자인가 묻고 싶다. 분명한 것은 일본의 왕조는 한국인이 세웠고 일본의 상반 역사는 한국 역사라는 것이다.
제1대 일왕은 단군 73대손
한국인이 일본을 세웠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로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일본궁궐에서는 엥기시키(延喜式) 제사를 할 때 신라 가야 계통의 원신(園神) 1좌와 백제 조상신인 한신(韓神) 2좌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일본 궁궐에 신라, 가야, 백제에서 간 선조들이 조상들이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를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자들이 많다. 일본의 에가미(江上波夫)는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을 말하면서도 일본 천황가(天皇家)를 백제가 아닌 ‘위지’(魏志) 한전에 나오는 진왕(辰王)과 관련시켜 백제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시키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에가미(江上)는 4세기 초에 스진천황(崇神天皇)이 이끌고 온 기마민족의 후예에 의해 구주가 정복된 다음 4세기 말 오진천황(應神天皇)이 인솔 하에 기내(畿內)지역으로 진출해 야마토(大和) 조정을 건설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Gari K. Ledyard 교수는 346년에 선비족에 의해 멸망된 부여의 전사들 일부가 만주로부터 한강유역을 거쳐 김해를 지나서 일본의 구주로, 그리고 마침내는 야마토(大和) 지방으로 이주해 왔다고 제기해 수정된 기마민족설을 내세웠다. 우리나라 학자인 홍원탁(洪元卓)씨는 그 부여의 전사(戰士)를 아예 백제인으로 대치함으로서 바다를 건너와서 일본을 정복하고 야마토(大和) 조정을 건설한 것은 일단의 백제인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에서 나온 한국사 책 가운데 ‘원효전집’(元曉全集)이나 율곡(李珥) 선생이 쓴 ‘향약’(鄕約)을 일본인이 연구해서 내 놓고 있다. 그 사람은 한국에서 쫓겨 간 뒤에도 연구를 계속해서 내놓은 것이다. 최태영 선생은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가 낸 35권의 한국사는 왜곡된 것이기에 다 갖다 버렸다고 했다. 일고의 가치가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역시 왜곡 조작된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두 책의 내용이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다. 얼마나 역사왜곡을 했는지 증명되는 예다.
일본 역사서의 진무는 가공의 인물이다
일본을 한국인이 세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본 궁내성(宮內省) 문고인 상기(上記)와 다케우치 문서(竹內 文書)는 똑 같이 그 내용이 표리(表裏)와도 같다고 하고 있다. 다케우치 문서(竹內 文書)는 다케우치 고마로(竹內 巨磨)가 개인 소장문서로 전해져 왔다. 상기(上記)는 고사기(古事記) 몇 대를 압축한 것을 여러 대(代)를 펼쳐서 설명한 것으로 고사기(古事記) 계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 “단군의 손이 일본에 건너와서 그 73대손이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일본 고대사 연구가인 요시다 하치로(吉田八郞)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상기(上記)에 의해 계산하면 이론의 진무천황(神武天皇)은 니니기노미코토(瓊瓊靈神) 이래 상가야 왕조의 73대 손이다. 진무의 조부가 제70대, 진무의(神武) 아버지가 71대이다. 72대는 진무의 형인데 갇힌 몸으로 즉위해 전사했고, 73대 진무가 왜를 개국해 일본 제1대 일왕이 된 것이다” 현재 일본 역사서에서 말하는 진무(神武)BC660~585)는 있지도 않은 가공의 천황이며 허구의 날조된 거짓의 진무다. 이는 진무가 단군의 후손으로 일본에 온 사람의 73대손이란 설명이다.
1920년대 최태영 선생이 대학생인 때 최 선생을 아끼던 은사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佐崎박사같은 사람은 최 선생과의 대화에서 “네가 하는 옛글과 한문이 옳은 것이다”고 했다. 직접적인 지적은 아니라 해도 의미심장한 암시를 던지는 말이었고 최 선생은 그 때 확신을 얻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최 선생이 상기(上記)를 본 사람의 쓴 책을 갖고 본 결론은 우리 한(韓)민족이 일본에 가서 일본을 세우고 경영한 사실이다. 다케우치 문서(竹內 文書)를 연구한 가시마 노보루(鹿島昇) 같은 사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실크로드는 역사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일본 국내의 역사는 아니다. 다케우치 문서(竹內 文書)는 단군국가를 기술하고 있다. 그것이 일본열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 단지 거기서 왔다거나 그 곳을 통과해서 왔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민족 이동의 결과 이곳은 망명지이자 분국으로 이동한 것이 된다” 이것은 단군조선에서 일본으로 간 사람들의 단군조선의 역사와 그 이전의 실크로드 역사를 일본의 일로 기술했다고 보는 것이다.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는 한국 역사이다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의 경우는 대륙시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때문에 이들은 일본 열도의 역사가 아니라 일본 민족의 역사라고 생각하면 좋다고 보고 있다. 다케우치 고마로(竹內 巨磨)도 소장하고 있는 이 다케우치 문서(竹內 文書)가 위서(僞書)라고 해서 탄압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수진전(秀眞傳)은 우수한 진짜 전기 역사라는 뜻이다. 상가야 왕조사의 뿌리는 수진전(秀眞傳)에 근거한다. 이 수진전(秀眞傳)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원전(原典)이라고 한다. 마쓰모토 젠노쓰게(松本善之助)가 도쿄 골동상에서 수진전(秀眞傳), 원(原)수진전(秀眞傳)의 일부를 발견했다. 소장자의 친척 한 사람이 일부를 빼내어 골동상에 내놓아 알려지게 된 것이다. 후손들이 잘 간수해 오다가 “조상들의 물려준 책 더럽히면 안 되니 불을 놓자”고 해서 태워 버린 직후였다. 1980년 각 방면의 연구자 7인 이상이 모여 수진전(秀眞傳)의 여러 문제를 토론한 일본의 ‘역사와 현대’ 여름호 좌담회 내용으로 수진전(秀眞傳)이 설명되고 있다.
수진전(秀眞傳)은 천(天), 지(地), 인(人)의 3권으로 돼 있다. 처음의 두 권은 오모노누시쿠시미가타마(大物主櫛甕玉命)가 역사적 문서 부분은 오타타네코(大田田根子)가 각각 편집했다. 예부터 역사서를 만드는 것은 대체로 정권이나 왕조가 변한 때다. 신의 체계와 왕의 체계를 하나로 짜낸 왕권의 권리증서 같은 사서(史書)로서 오늘날 사학의 상징하는 사서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일본에서도 계도系圖(위조)가 주제가 된다. 오타타네코(大田田根子)는 왕조가 바뀌며 난이 일어나자 신구 양정권이 만족하도록 사서를 만들어서 한 계통의 왕조가 존재한 것처럼 만들었다. 내란을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해 타협하여 역사를 위조 한 것이다. 수진전(秀眞傳)의 형성 연대는 오모노누시쿠시미가타마(大物主櫛甕玉命)가 야요이 시대쯤 만든 것을 그 후 미와(三輪秀聰)가 적당히 선집해 인(人)의 권으로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수진전(秀眞傳)의 주요 주제 또한 “일본 역사가 아닌 한반도의 실크로드의 역사이고 그 역사를 일본사로 차용했다”는 것이 가시마 노보루(鹿島昇)의 설명이다. 이에 대해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는 “모든 것이 이입된 것은 아니며 순수한 일본 것도 있었다”면서 이는 중요 한 것이기 때문에 원문을 정밀히 점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수정된 부분이 있다고 인정 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진전(秀眞傳)은 ‘일본서기’의 제기(帝紀)구사(舊辭)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를 연구해온 마쓰모토 젠노쓰게(松本善之助)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사기, 일본서기, 제기(帝紀)구사(舊辭) 훨씬 전에 수진전(秀眞傳)은 한문으로 번역돼 있었다.
그 시기는 한자가 일본에 들어온 오진천황 때 쯤일 것이다. 그 때 활동하던 귀화인(바다 건너온 한국인)들은 일본 내의 여러 가지 옛것들을 바르게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 당시 귀족자체가 귀화인들과 같은 사고를 하는 자들이었음으로 일본의 고대전통을 충실하게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수진전의 한문번역된 오진천황대 제1기에는 벌써 그 내용이 10분의 1쯤으로 압축 삭제됐다고 본다. 그 삭감된 것을 본으로 삼아 이번에는 성덕태자(聖德太子)가 손댄 것이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가 됐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다.”
또 가시마 노보루(鹿島昇)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다를 건너간 한인들은 귀화가 아니라 도리어 일본의 본체(本體)였다. 그러면 선 주민(先住民)은 어떻게 됐을까. 그 시점에서 선 주민은 거의 다 피살됐다고 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이 역사를 엮고 가다듬는 수사(修史)에 영향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수진전(秀眞傳)이 쓰여진 문자는 지금의 가나가 아닌 고대문자이다. 일본의 고대문자 도요구니(豊國)의 고자(古字)보다 새롭고 인간의 지식이 상당히 발달 된 구조의 문자이다. 당시 한인(韓人)들은 부여, 고구려에 와서 한자를 사용하기 전, 단군시대에 한글의 원형인 가림토를 사용했다고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되어 있다. 최후에 생긴 가림토가 모양만 변형 된 것이 수진전(秀眞傳)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은 최태영 선생이 연구한 결과를 추린 것이다.)
우리 역사 3661년 암살
고대부터 한족(韓族)은 일본을 지배했다
일본은 식민지사관에 입각해 민족적 긍지를 가질 수 없게 함과 동시에 독립과 자주의식이 없도록 역사를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새로 엮으며 식민지 정당화 이론을 전개했다. 예컨대,“한국은 외국을 침범 한 적이 없다”고 유약한 나라로 부각시키며 역사를 왜곡했다. 필자도 초등학교 때 그렇게 배웠다. 그러나 이것은 다 거짓이다. 우리는 중국과 유라시아를 지배했고 일본까지 지배한 민족이다. 우리가 왜를 친 기록도 없는 것 같이 일본은 왜곡했으나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도 우리가 왜를 친 기록들은 나온다. 예컨대, 3대 단군 가륵(嘉勒) 때인 BC 2173년 “반란을 일으킨 예읍의 추장 소시모리를 참하였는데 그 후손 선승노(陝野奴)라는 자가 해상으로 도망해 세 섬에 의거하면서 왕이라 칭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35대 단군 사벌(沙伐) 조에는 BC 723년 “장수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규수(九州)의 구마소(熊襲)를 평정했다”는 기록도 있다. 36대 단군 매륵(買勒) 조에는 BC 667년 “섬승노(陝野奴), 배폐명(裵幣命)이 병선을 몰고 가서 왜란의 반란을 진압하고 왜의 세 섬 왕을 칭했다”고 돼 있다. 일본 상고사 상기(上記)의 기록에는 “조선인이 선단 70척에 군대 1000명을 싣고 왜(구주)로 쳐들어 가 장수언으로 하여금 내란을 일으키게 하고 임금으로 내세웠다가 수십 년후 평정됐다”는 기록까지 나온다.
우리가 직접 싸운 것이 아니고 규슈(九州)에서 장수언 이라는 유력한 세력가를 일으켜 왜왕으로 삼고 수십 년간 다른 대치세력과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이때의 왜(倭)는 규슈(九州)에서 활동하는 집단이었으며, 지금의 일본 본토로 진출한 것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이후다. 후일 일본에서 진무(神武)라는 왜의 지도자가 장수언의 대치세력이었다. 진무 일왕(日王)의 아버지 대에 일어난 이 전쟁에 진무 집안 3대가 나서서 싸우다 두형이 죽고 진무대에 가서 가까스로 수습됐다. 진무에게는 후일 스진(崇神) 왜왕 대에 있었던 업적까지 덧붙여져 신격화되는데, 일본사의 믿을 수 없는 부분이 이런 것이다. 일본의 진무천노(神武天皇) 이야기는 필자가 초등학교 때 일본 역사책에서 보았다. 진무천노가 배를 타고 일본에 상륙해 원주민을 토벌하고 초대 천황이 일본 열도에 상륙하며 배에서 내리는 그림이 있는 일본어 책을 처음 접한 것이다. 지금도 어렸을 때 그 장면의 기억이 난다.
배폐명(裵幣命) 혹은 섬승노(陝野奴)라고 불린 존재의 왜 정벌은 매우 복잡한 역사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가서 왜를 정벌하고 임금을 내세웠던 것은 사실이다. 선단 규모가 70척, 500척인 것으로 미루어 국가적 정벌군으로 보인다. 우리가 규슈(九州)로 왜를 치러간 기록은 부여 때도 나온다. 일본 상고사 연구가들은 이 사실을 주목 한다. 진무(神武)의 가계는 상기(上記)에 의하면 일본에 온 단군 손의 73대가 됨으로 종래는 왜 땅의 통치권을 두고 우리나라 종족끼리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이를 두고 ‘대리전’이라고 한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 배폐명(裵幣命)의 사실을 접하면서 진척되지 못하던 연구가 일본 고대사서(古代史書), 상기(上記)와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신황기·神皇紀)등을 통해 분명해 졌다. 단군조선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일본은 완전히 한족(韓族)이 가서 건설 한 것이다. 왜를 정벌하고 임금을 내세웠던 것도 사실이다.
천인공노할 중국의 역사왜곡 도를 넘고 있다
최태영 선생은 단군(檀君)이 우리주변에 예사롭게 그 존재의 단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흩어져 있는 단군릉(檀君陵)과 단군사당(檀君祠堂) 같은 것에서 엿볼 수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동네 어린놈들이 단군릉(檀君陵)이라며 무덤꼭대기에 올라가 장난하는데 단군릉이라 하니 그런 짓말라”는 기록이 보인다. 적어도 여러 개의 단군릉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1990년대의 북한 단군릉 발굴은 어딘지 부자연스러운데, 정보교환이 없으니 알 수 없으나 만주, 환도 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 근처에 가면 이름 없는 장군릉(將軍陵)이 많다. 이렇게 많은 능(陵) 가운데 단군릉(檀君陵)이 그 중에 있을 것이다. 발굴해 보면 많은 사실이 밝혀질 것이지만 중국 측이 절대 발굴을 금하고 있다. 설령 발굴을 한다고 해도 한국학자의 참여를 극구 막고 도둑같이 자기들만 발굴하면서 왜곡하고 있으니 후치무안의 도를 넘고 있다.
중국 산동 등지에는 단군사당이 많다. 환도근처에 아직도 자신이 고구려인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이 단군사당(檀君祠堂)에 제사를 지낸다. 최태영 선생이 1920~1930년대에 현지에서 직접 확인했던 사실이다. 평양 숭녕전(崇寧殿)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도 단군을 조상으로 섬겨 국가적 의례(儀禮)로서 제사지낸 곳이었다. 일제가 바로 이 숭령전과 삼성사를 헐어버렸다. 참성단 행사는 일제 이래 단군을 부정하면서 국가적 행사가 아닌 일개 단체행사로 축소됐다.
우리 조상은 조상을 위하고 하늘을 위하는 민족이며 보은사상(報恩思想)이 강했다. 그것이 전통이다. 그런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거기에 옷을 입혀 한구석에 변조되기 시작했다. “옛날에 환국(桓國)이 있었다”는 기록의 환국(桓國)이 불교적 존재인 환인(桓因), 이를테면 제석이라는 것으로 둔갑해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는 기록과 병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생겨나기 이전 사실인 환국(桓國)을 제대로 기록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기(古記)의 가치와 역사가의 입장을 지켰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있지도 않은 허구다
한국사의 큰 의문의 하나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 기자 또한 은(나殷)라 족인지 모르겠으나 조선의 지방 관리 정도였을 뿐 그가 조선에서 임금을 한 자취가 없다. 1천년 후 기준(箕準)을 뜬금없이 기자(箕子)의 후손이라고 내세운 것도 중국에 대해 사대주의(事大主義)가 발생해 갖다 붙인 것으로 보인다. 기자조선은 허구(虛構)다. 단군의 사적(史蹟)은 사기(史記)를 통해서만 전하는 것은 아니다. 글로 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 ‘세년가’(歲年歌)로도 단군의 존재는 오늘날 까지 전해져 왔다. 세년가 속에 기자조선은 없다. 그런데 일본은 삼성당(三省堂)이 간행한 ‘각국별’ 세계사의 정리(世界史の整理) 책자에 조선사는 “BC3세기경 조선에 이주한 중국인이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며 자기들의 한국침략을 정당화 하는데, 단군조선을 아예 빼버리고 기자조선을 갖다 놓고 있다.
우리의 고대사를 완전히 뭉개고 있다. “큰 거짓말은 통한다”는 그들의 방식대로 우리 역사를 날조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차고 못 말리는 일본임을 웅변하고 있는 부분이다. 엄연히 단군조선은 47대 2096년 간 실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환국(桓國)도 53대 1565년간 엄연히 실재했던 것을 일본은 숨기고 있다. 날조의 천재인 일본의 속셈이 들여다보인다. 아울러 “인류의 문명은 요하 중원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하는 학자들의 말을 외면하고 있다. 역사는 가감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바로 전해야 올바른 역사가 되는 것이다. 날조, 왜곡은 역사가 아니다. 좀비족이나 이런 작태를 연출하는 것이지 정상인은 이런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
이같이 단군을 일제가 말살한 이후 역사학계에서는 단군역사를 회복 하지 못한 채 일본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민간단체들이 단군을 제 위치로 되돌리기 위해 단군을 되찾는 운동을 벌리고 있으나 여기에는 학구적 관점이 결여된 것이어서 문제점이 없지 않다고 최태영 선생은 염려했다. 무조건 단군을 높인다고 애국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최태영 선생은 단군을 억지로 높이는 것을 경계하며 “역사가라면 적어도 우리 민족이 수천 년간 단군을 국조(國祖)로 모셔 왔음을 인정해야 하고 일제 강점 이후 일본에 의해 단군이 부정되는 사태가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설명해야 한다”고 한탄하면서 “지금처럼 뚜렷한 해명없이 단군을 말하는 것은 일본의 주장을 쫓아 단군을 암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서 수 없이 벌어졌던 역사적 인물을 암살한 것과 다르지 않은 작태인 것이다.
최 선생은 “단군 연구는 문헌학과 고고학 학문의 연구를 통해서 진전될 것이다”면서 “단군은 우리의 위대한 조상이며 나는 진실로 그 조상을 존경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종교적 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미련하게 단군상만 많이 만들어 세우는 것과 몰지각한 기독교일부 사람들이 단군 상을 쫓아다니며 목을 베고 부수는 야만스런 작태 등을 한탄해 했다. 최 선생은 또 “이런 상황에서 단군이 끝내 학술적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일본은 한국역사를 분열시킨 획책이 맞아 들어갔음을 지극히 기뻐하며 속으로 크게 웃을 것이다”며 “조상은 조상이지 왜 아니라고 하는가”고 울분을 토했다.
신채호(申采浩)선생 독사신론(讀史新論)도 단군 실재 인정
최 선생은 민간단체가 상을 주고자 할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적어도 학교 교과서에 단군이 정식으로 조선을 개국한 임금인 조상으로 기록되고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또한 우리민족이 일찍이 북경 근처 요동과 한반도에 최초로 선주했던 민족이라는 나의 학설을 절반 정도의 사람들만이라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그땐 죽었던 조상을 기어이 찾아서 받들었다는 공로로 상을 주는 데가 있다면 자축하는 의미에서라도 받겠다. 하지만 지금 단군 조상은 교과서에도 못 오르고 후손들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일본인들에게 더 밀려서 쫓겨난 상황이다. 단군 조상은 못난 후손들을 바라보며 지금 울고 있을 것이다” 선생은 이렇게 한탄하면서 연구를 열정적으로 계속했다. 최태영 선생보다 앞서 나온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저서 독사신론(讀史新論)도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로 이어진 역사를 정인보(鄭寅普) 선생과 같이 바로 인정하고 있다. 신채호 선생이 일제에 의해 희생된 것이나 정인보 선생 외 안재홍(安在鴻) 선생들이 납북으로 인해 역사 복원이 안 된 것은 우리 고대사복원을 위해 너무나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독사신론(讀史新論)은 최근 역사서 중에서 효시(嚆矢)로 간주되고 있는 서책이다. 좀 더 신채호(申采浩) 선생과 정인보(鄭寅普)선생 안재홍(安在鴻) 선생들이 살아 있었다면 최태영 선생이 노구를 이끌고 중국과 일본을 왕래할 일이 덜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훌륭한 선각자들의 노고에도 아랑곳없이 우리 학노(學奴)들은 연구는 차치해 두고 현실 직책에만 만족하고 있는 어리석은 상황이다. 이런 사태는 바꿔져야 한다. 우리 역사 단군을 복원치 않고 우리나라의 올바른 존립은 있을 수 없다. 고대사 복원은 우리의 지상과제라는 것이다. 이럴 때 타계한 선생들의 손길이 아쉬운 것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우리의 세 선각자이며 대학자인 선생들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머리 숙여 기도한다. 너무나 애석하고 아쉬운 마음을 금 할 수 없다. 러시아의 학자로 ‘고조선’을 쓴 U.M 푸틴은 한국 학노(學奴)들의 이런 상황을 개탄하며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 조선을 제외하면 아시아 역사는 이해 할 수가 없다”고 하고 있음에도 “한국은 어째서 그처럼 중요한 고대사를 부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충고를 제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한국 학자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양상을 보면서 “일본과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내는데 당신들 한국인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그러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다”고 U.M 푸틴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참으로 통탄할 일이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중국과 일본은 우리 역사를 끊임없이 날조하고 왜곡하고 있다. 역사가 도둑맞고 있는데도 우리나라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 소수를 제외한 학노(學奴)들은 이를 바로 잡을 생각은 뒷전으로 한 채 아직도 ‘조선사편수회’의 왜곡 날조된 역사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방관만 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하루속히 민족사관에 입각한 올바른 역사정립을 우리들이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지상과제다. “역사를 무시하는 세대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로버트 하인라인의 말을 온 국민은 거듭 귀담아 들어야 한다. 또한 키엘케고르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역사에서 살 길을 배운다”는 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단군은 실재한 우리의 위대한 선조다. 잃어버린 역사와 조상인 우리의 단군을 되찾아야 한다. 이것이 후손인 우리가 할 일이다.(스카이데일리 : skyedaily@skyedaily.com)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6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