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25일 오전 11시. 서울 모 호텔에서 온갖 괴소문에 따른 기자회견을 자청했던 트로트
황제 나훈아는 이 말로 그간의 루머를 일축하고는 이날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
나훈아를 괴롭혀 온 괴소문들은 ‘개그맨 폭행설’ ‘개그맨 전 부인과의 관계설’ ‘
야쿠자 관련설’ 등. 미디어 상업주의와 결탁한 국민적 집단관음증은 연예계에서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어낸 ‘가황(歌皇)도 어쩔 수 없었다.
잠적 4년째. 그림자가 너무 길다. “그림자 봤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 나훈아를 만났다는
사람은 없다. 그가 없는 사이, 말들은 꼬리에 꼬리를 치다가 슬그머니 잦아 들었다. 이제는 “
그립다”며 황제의 귀환은 바라는 ‘팬심’이 대세다.
이 포스트 또한 그의 컴백을 그리는 글이다. 가수 나훈아가 왜 ‘황제’로 불리는지,
그가 살아온 노래 인생 중 생긴 에피소드를 통해 다시 짚어 본다.
나훈아 소유라는 양평 작업실 원경.
2010년 한 여성지가 취재했던 기사로 최근 연예기자들이 많이 우려먹고 있다.
나훈아 남진 팬들… 술병 깨들고 무대 위로!
나훈아는 1966년 ‘천리길’로 데뷔해 ‘청춘을 돌려다오’, ‘사랑은 눈물의 씨앗’, ‘고향역’, ‘잡초’,
‘갈무리’, ‘무시로’ 등을 히트시키며 모습을 감추기 전까지 최고의 가수로 인기를 얻어왔다.
1970년대에는 남진과 함께 한국 가요계 양대 산맥으로 군림했다. 특히 전라도 목포 출신인
남진과 경상도 부산 출신인 나훈아를 두고 지역간 팬의 경쟁은 치열했다.
1972년에는 나훈아가 리사이틀 도중 쇼 무대에 유리병을 깨서 들고 난입한 괴한에 의해 얼굴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사건 이후 남진의 팬들이 저질렀다는 루머가 전국에 퍼져 남진
팬과 나훈아 팬들끼리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가수
들이었던 것. 나훈아 얼굴의 굵은 흉터가 그때 남은 상처다.
나훈아, 천하의 이건희 회장 청도 ‘얄짤 없이’ 거절
나훈아의 품성을 잘 알려주는 과거 일화가 있다. 자주 초청 행사를 뛰는 여느 가수들과
달리 나훈아는 그의 노래를 앙망하는 고위급 인사들의 파티에 단 한 번도 참석을 수락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다른 가수들은 대개 그런 파티에서 2~3곡을 부르고 3,000만원 가량을
받는 게 관행처럼 돼있는 반면 나훈아의 거절 사례는 유명하다.
“나는 대중 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사람 앞에서만 공연을 한다.
내 공연을 보고 싶으면 당장 표를 끊어라.”
실제로 삼성의 이건희 회장에게 이런 말을 하고 한 마디로 딱 잘라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도 등장한다. 김용철은 이
일화를 알고 난 후 나훈아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손꼽게 되었다고 한다.
부부이던 시절 김지미가 한 공연장에서 나훈아의 넥타이를 바로잡아주고 있다.
“정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 준 연하남甲 나훈아
그는 사랑도 남달랐다. 톱가수로 뭇여성팬들의 열화같은 애정공세를 받던 나훈아가
어느날 갑자기 결혼을 발표했다. 상대는 7살 연상인 당대 스크린의 히로인 김지미. 더우기
김지미는 3번째 결혼이었던 것.
팬들은 경악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7살 연상 이혼녀가 총각과 결혼한다는것은 용납할 수
없는 풍조였다(9년 연하라는 주장도 있다).
톱스타들의 결혼도 예삿일이 아닌데 연예계 사상처음 연상연하 커플에 미혼과 3혼의
결혼이니 인터넷이 없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이 떠들썩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김지미 출연영화 거부운동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김지미와 나훈아는 1976년 결혼했다. 김지미, 나훈아의 결혼식을 첫 보도한 기자는 방송인
이상벽이다. 선데이서울 연예부 기자였던 이상벽은 “나훈아 김지미 결혼을 발표 일주일
전 알았내 단독보도했다”고 해피투게더에서 말한 적이 있다.
김지미 나훈아 커플은 세간의 눈총을 피해 이들은 서울을 떠나 대전에서 살림을 차렸다.
나훈아는 4년간 가수활동을 중단하고 밀월을 즐겼다.
김지미 나훈아 커플이 헤어진 연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부부는 결혼 6년만인
1982년 헤어졌다. 이혼 당시 나훈아는 유명한 한 마디를 남겼다. 자신의 전재산을 몽땅
김지미에게 위자료로 넘겨주며 했던 말이다.
“남자는 돈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여자는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이다.”
심수봉 여학생 때 한 눈에 발탁
나훈아는 심수봉을 가수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2010년 여름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심수봉이 직접 밝힌 이야기다.
심수봉이 여학생 시절 아르바이트하던 곳에 나훈아가
손님으로 들어왔다고. 심수봉은 트로트 황제 앞에서 그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래가 끝난 후 나훈아가 말 없이 나가더니 레코드사 사장을 데리고 왔다는 것.
심수봉을 처음 본 대스타가 노래만 듣고 내주었던 음반이 그녀의 데뷔 앨범이다.
“밥 맛 없으면 쇼 못 합니다!”
김지미와 이혼 후, 당대 톱스타였던 나훈아도 컴백은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7년이나
무대를 떠나 있었기 때문. 김지미와 만나기 전, 만 3년 군 복무기간과 결혼기간 동안
마이크를 놓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전국을 리사이틀로 매진하며 예전 인기를 힘겹게 만회하던 시기, 코미디 황제 고 이주일
씨는 여전히 그를 최고의 스타로 인정했다고 한다. 이주일은 1980년대 중반 남대문
근처에서 유명한 극장식 회관을 운영했다. 그 무대에 나훈아를 특급 가수로 초빙한 것.
서울 무대에서는 다시 우뚝 섰지만 지방은 달랐다. 다시 말하자면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다.
일일이 전국 구석구석 돌아가며 ‘건재한 나훈아’ 보여주기에 촌분을 아끼지 않았다.
그 시절 일화다. 경상도 어느 소도시에서 공연을 했는데 표는 전석 매진이었다. 나훈아
보러 인근 산골에서 소달구지를 타고 온 여성팬도 많았다고 한다. 드라마 ‘빛과 그림자’처럼
전회 매진 대박으로 쇼가 시작하고 끝날 무렵이면 경찰이 출동해 인파를 통제할
정도로 난리였다고.
그런데 이 공연이 나훈아의 어깃장으로 무산될 뻔 했다는 것이다.
“술값이 4만 원이나 하나?”첫 회 공연이 끝나고 티켓을 본 나훈아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극장 사장에게 따졌던 것. 쌀 한 가마니 값이 8만 원이던 시절이었다. 공연을 보러 온
팬중에는 농민도 많았다. 나훈아는 쌀을 무엇보다 귀히 여길 이들에게서 4만 원을
노래값으로 받는다는 건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후 나훈아는 소도시
공연만큼은 사양했다고 한다.
나훈아는 그런 남자다. 디너쇼를 하면 입장료 가격이 부담이 안 될지, 팬들이 먹을
음식 맛은 어떤 지 하는 소소한 점까지 따지는, 어찌보면 좁쌀같은 남자다.
그래서 업소 사장에게 “음식 맛 없으면 공연 안 한다”고 엄포 놓았던 가수.
그의 좁쌀 맞고 깨알같은 인정이 그립다. 폭포수 같은 노래도!
첫댓글 나훈아가 궁금합니다.
나훈아...허허...
지금 어디서 무얼하는지...밥은 굶지 않는지....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