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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實하여 조금도 虛妄하지 않음을 믿는 마음(信心)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 17 ) 2005.8.14 호국대원사일요법회
1. 功德讚歎과 眞言 (般若心經 總結論)
故知 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際一切苦 眞實不虛
2. 深般若波羅密多의 殊勝한 功德
故知 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그렇기 때문에 잘 알아야 한다.
반야바라밀다(공의 실천으로 깨달은 반야 지혜의 완성)는
가장 위대하고 신비스러운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이 절대적으로 위대한 주문이다.
<해설>
반야바라밀 주문에 대해서,『반야심경』은 네 가지 수승한 공덕을 찬탄하고 있습니다.
첫째, 대신주(大神呪)라는 것으로, 가장 위대하고 신비로운 주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대명주(大明呪)로서, 크게 밝은 주문이며,
세째, 무상주(無上呪)로서, 이 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최고의 경지의 주문이고,
네 번째, 무등등주(無等等呪)라 하여, 그 무엇과도 비교될 만한 것이 없는 최상의 주문이라는 의미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지혜의 완성’을 의미하는 ‘반야바라밀’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시작되는 주문(呪文)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呪)"는 범어로 만트라(mantra) 혹은 다라니(dharani), 한문으로 진실한 말씀이라는 뜻으로 진언(眞言)이라 하는데
주(呪)"는 원래 번역하지 않고, 산스크리트어 원음을 그대로 소리 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여기에서도 이 원칙에 따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진언에 담겨 있는 의미가 너무도 오묘하고 깊어, 번역에 의해서 진언이 담고 있는 본래의 의미, 깨침의 세계를 왜곡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고,
또 진언이 가지는 소리의 진동 그 자체가 깊은 기운을 담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能際一切苦 眞實不虛
이 주문은 일체의 괴로움(苦)을 능히 재거할 수 있는 주문이니, 완전하고 진실하여 조금도 거짓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해설>
텅 비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며(無所得), 집착하고 분별할 바가 없는 반야 공의 이 도리에 이르면, 일체의 모든 고통과 불안,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됩니다. 그 어떤 문제라도 지혜의 완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일이 가능 한 것입니다.
3. 믿음(信心)에 대하여
반야심경은 지혜의 완성(반야바라밀)을 "진실불허"의 대목에서 믿음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불자는 반야바리밀이 “진실되어 헛되지 않음”을 믿음(信心)의 말씀(境地)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이 가르침은 사회의 윤리 도덕이나 철학일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란 모름지기 믿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종교의 맨 처음 단계인 믿음이 준비되어 있지 아니하면 많은 교리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는 신자(佛子)는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 대상이 잘못 선정되면 우매한 미신이나 맹목적인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믿음의 대상을 크게 네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信根本 이리하여 인간의 본성, 즉 일체중생 실유불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입니다.
불교에서 믿음을 신심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결국 마음을 믿는 일입니다.
화엄경은
“믿음은 道의 근원이요, 功德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온갖 善法을 길이 기르며 의심을 끊고 애착에서 벗어나 열반의 무상도에 드러낸다.”하였습니다.
믿음이란 기본적인 마음이 없다면 보살이든 부처든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나무의 뿌리와 같습니다. 뿌리는 모든 나무를 길러냅니다. 온갖 사물들은 뿌리를 통해 자라는 것입니다.
<例話>
어느 날 부처님께서 갠지스강변에서 설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자(佛子)가 부처님께서 강 건너 저쪽에서 설법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강변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강을 건너는 배도 없고 물은 세차게 흘러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농담으로 말하기를
“ 이강은 보기에는 물결이 세찬 것처럼 보이지만 발목까지밖에 차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신자(佛子)는 그 말을 곧이듣고 그대로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기리고 그는 거침없이 물결을 차며 강을 건넜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설법을 듣지 않고 강을 건너는 신통(神通)한 신자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더 이상 설법을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강을 다 건너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부처님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신통한 힘이 있어서 세찬 강을 거침없이 건널 수 있었는가?”
그랬더니 신자는 자기 자신도 놀라면서
“나는 아무런 神通도 없습니다. 다만 강이 깊지 않다는 말을 믿고 강을 건넜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믿음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설법하시며,
생사의 물결도 그와 같이 건너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순수한 믿음의 일념 때문에 이루어진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우리가 어른들께 자주 듣는
“마음을 올바르게 가져라(남을 미워하고 원망하지 말라....,
입조심 하라( 입방정이 화를 불러들인다)”등의 꾸중은
그러한 마음이 쌓여 원(願)이 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수행법 ( *.참선; 지관참선법, 묵조선, 간화선 *. 간경; 독경, 사경 *. 기도; 염불, 주력, 절)중에 절수행법(108배, 천배 3천배, 만 배 등등)이 있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왜 절하는 것을 권할까?
첫째, 절을 통하여 아상(我相)을 꺾고 복밭(福田)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나다, 내가 제일이다’하는 아만심으로 남을 무시하는 데서 사회적 모든 갈등은 시작됩니다. 아상을 없애는 공부 그것이 곧 절입니다. 절을 통하여 下心을 길러 나와 남이 편안한 관계를 가지면 福田이 이룩될 것입니다.
둘째, 업장소멸, 즉 절을 많이 하여 속에 쌓인 업을 비워내고자 함입니다.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몸은 돌아다니는 변소요, 구정물통이다.’하였습니다. 구정물 통을 깨끗이 씻으려면 한 두 바가지 물로 씻어서는 씻기지 않습니다. 수세미로 문지르고 여러 번 씻어내고 또 오랫동안 우려서 항아리에 밴 냄새를 뽑아내야 합니다. 절하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작업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거듭 몇 백, 몇 천 몇 만 번을 거듭 하면 업장이 소멸 될 뿐만 아니라 마음이 청정해 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그릇이 깨끗해지면 몸도 깨끗해지면서 부처님의 가피(夢中加被, 顯證加被, 冥熏加被)가 나타나게 됩니다.
♧ 절하다 죽을 각오로 절을 하다 ♧
돌이 갓 지나 뇌성마비를 앓은 소녀가 있었습다.
일곱 살 되던 해 죽음을 선고받고,
마지막으로 이번 생에서 ‘참회’의 절이나 실컷 해보고 죽자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철스님을 찾았습니다.
“살려거든 하루에 천배씩 하라”는 스님의 말씀에 따라,
소녀는 23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1000배를 했습니다.
어느 순간 나무인형의 사지처럼 제각각 놀던
소녀의 팔다리는 제자리를 잡았고,
소녀는 번듯한 한국화가로 성장했습니다.
부처님의 가피(加被)를 적은 불교설화에 나옴직한 얘기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主人公 한국화가 한경혜(30·‘작가의 집’ 대표)씨는
생명을 건 ‘절(拜)수행’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2회, 입선 5회의 당당한 한국화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 자신의 작업실이자 집인 ‘작가의 집’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이 지역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가르치는가 하면,
지난 2월엔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작가의 집 아이들 전시회’를 열었고,
최근 자신의 장애극복기를 적은 ‘오체투지’란 책을 냈습니다.
몸이 두세 개라도 하기 힘든 일들을 척척 소화하며
세상과 거리낌 없이 만나고 있습니다.
오체투지 (五體投地)
여기에 책의 내용을 일부 소개 합니다
갓(1975.) 태어난 아이는 체중 1.6킬로그램.
인큐베이터 속에서 보호 양육되었어야할 아이의 가정 형편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엄마의 관심과 사랑만으로 자라야 했던 아이는 백일을 지나도 목을 가누지 못했고 육개월이 지나도 앉지 못했다. 돌이 지나도 생후 몇 개월짜리의 행동발달에 머물고 있었다. 겁을 먹고 허겁지겁 찾은 병원에서는 뇌성마비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의 병은 생활을 더욱 쪼들리게 만들었고 변변한 직업한번 갖지 못하였던 아빠는 엄마와 헤어졌다.
엄마는 두 아이를 양손에 잡고 냉혹한 현실에 내 던져 졌다.
14개월 후에 낳은 아이의 동생은 건강하였지만, 언니인 아이는 걸을 때마다 팔다리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실로 연결된 헝겊처럼 덜렁거리고, 말을 하려면 온 얼굴 근육을 다 움직이며 한참을 걸려야 겨우 한 두 마디소리를 입 밖으로 내는 아이였다.
일곱 살 되던 해 갑자기 온몸에 열이 펄펄 나고 경기를 하며 팔다리가 뒤틀려 찾은 병원에서는 “마음에 준비를 하셔야 겠습니다”하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밤새도록 죽음의 빛깔이 짙어가는 아이를 지켜보던 엄마는 날이 새자 아이를 업고 무작정 해인사 백련암으로 가면서 등에 업힌 아이에게 타일렀다.
“우리의 이생에서의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경혜야 엄마랑 같이 죽자.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우리가 어태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대한 참회도 해보고, 또 다음 세상에는 더 좋은 세상에 더 좋은 인연으로 만나기를 기원하기 위해서라도 부처님께 절이라도 실컷해보자. 힘들더라도 이 세상의 마지막이니 할 수 있겠지? 못해도 노력을 해보자....응”
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그때 죽을 각오로 절을 하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절이 제대로 됐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3일 만에 3천배를 마치고 담벼락에 의지하여 몸을 질질 끌며 성철스님이 계신 곳으로 갔다.
“스님 저 죽는대요. 언제 죽어요?”
스님의 무뚝뚝한 한마디
“오늘 저녁에 죽어라”
아이가 엄마를 쳐다보며
“엄마, 큰스님이 나보고 오늘 죽으래!”
법당에서 절하던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 그럼 어디 가서 죽어야하는지 다시 가서 불어봐”
“스님, 저 어디 가서 죽을까요?”
“너거 집에 가서 죽어야지!”
“우리 집은 돈도 없고 어차피 죽으면 여기서 49재를 지낼 텐데 나 여기서 죽을 랍니다”
스님이 절하고 있는 엄마에게로 와서
“너거 아 와그러노?”
“스님이 시작했으니 스님이 책임 지이소”
엄마는 그 말만하고 절을 계속하였다.
스님은 또다시 아이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로
“야이, 가시나야. 그럼 니 오래 살아라............
.........그라고 하루에 천배씩 꼭 절하거래이”
그렇게 뜬금없이 시작한 것이 바로 아이가 서른살이 넘는 오늘날까지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천배이상의 절을 하게 된 이유였다.
절에 올라 갈 때만 해도 물도 못 삼키던 상황이었는데 삼천배를 하고나니 물도 삼키고 토하지 않았다. 성철스님이 아이에게 바나나를 주었는데 그것을 다 먹을 수 있었다. 다들 기적이라 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엄마에게 업혀서 심지어는 동생에게 업히기도 하며 절에 절하려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인자 절에 안와도 된다. 이걸 걸어놓고 집에서 하그래이”하며 성철스님이 동그라미가 그려진 화선지 한 장(일원상)을 주셨다.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인지 아이는 어린 아이였지만 생존본능 같은 의지로 매일 천배씩의 절을 현재까지 23년간 계속하고 있다.
절은 아이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
비틀어지고 흔들거리던 몸은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가 중심을 잡기 시작했다.
육체뿐만이 아니었다. 동생에게 업히거나 보호아래 다닌 초등학교 중학교 성적이
학년이 높아갈수록 성적이 올랐다. 동생의 신세를 덜 지려고 진학하지 않은 고등학교는 대입검정고시에 2달 만에 응시 하여 전 과목 합격하였다.
그래서 지금 한경혜씨는
“절하면 집중력이 높아져 머리가 좋아 진다”고 말한다.
또 한경혜 씨는 책(오체투지)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절을 통해서 내가 깨달은 것 중에 가장 큰 힘이고 지팡이가 되어 준 것이 있다면 바로 인연과에 관한 것이다. 인과에 대해 알게 됨으로써 나는 운명을 받아들였고 또한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에너지를 갖게 된 것이다 ’
4. 이루어진다는 확신
절은 온몸을 낮출 뿐 아니라 마음도 낮추는(하심·下心)행동입니다.
그래서 절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동작이라고도 이릅니다.
기도하는 불자는 모름지기
첫째, 간절한 바람(希望)
둘째, 굳건한 의지(決心)
셋째, 이루어진다는 믿음(확신)을 가져야 그 기도가 성취된다 하였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한경혜 씨는 삼보에 대한 의심 없는 확고한 믿음이 부처님의 가피를 받게 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도 확신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단 포교사 민병준(치오백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