譬喩品 第三
2. 게송으로 다시 표현하다 (3)
어제 이어서 하겠습니다.
비유품에 사리불이 방편품에서 들은 부처님 법문에 감동을 해서
사리불이 그 감동에 그치지 않고 여기서 깨달았다고 이렇게 들 많이 표현합니다.
사리불이 깨달은 마음으로 자신이 그 동안의 소감을 피력하는 그런 내용이지요.
산문으로 대강 이야기 하고 게송으로 다시 거듭 말씀하시는 그런 부분입니다.
처음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속으로 매우 놀라고 의심하기를
‘아마 마귀가 부처님의 모습을 지어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가.’ 하였습니다.
이 말이 아주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사실 ‘마강법약’(魔强法弱) 이라고 해서 말세적인 현상을 말할 때
삿된 사상, 마구니라고 불교에서 늘 그렇게 말하지요.
마구니의 힘은 강하고 정법의 힘은 약하다. 그랬어요.
그리고 ‘인다해태(人多懈怠)’ 또는 ‘인다사치(人多奢侈)’
사람들은 많이 사치하거나 또는 정법을 공부하는데 해태하다.
그것이 말세적인 현상중의 가장 두드러진 표현들을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실은 지금 불교가 여러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서 일반화된 것은 사실입니다마는,
정말 어떤 것이 진정한 불법인지 우리가 정법구현, 정법구현 그런 표현을 쓰는데,
진정한 정법이 무엇인지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당히 의문을 가지고
좀 생각해봐야 할 그런 부분입니다.
여기도 아마 마귀가 부처님의 모습을 지어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가?
이런 표현이 있는데, 사실은 사리불이 부처님의 정말 올곧은 가르침을 듣고
이런 생각을 했다면, 그 동안 사리불은 마구니였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마구니라고 할 만치 올바르지 못한 사상에 젖어 있었다고 봐야 되겠지요.
자신이 올바르지 못한 사상을 올바른 사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진정 부처님의 올바른 사상을 들으니 마구니가 아닌가 이렇게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목에서 우리 불자들이 참 흔하고 흔한 불법,
널리고 널려있는 그 많은 불법에 우리가 정말 진정한 정법이 무엇인가?
과연 우리는 정법을 얼마만치 이해하고 있는가?
또 얼마만치 실천하고 있는가? 이런 점들을 한번쯤 되돌아보고
정법이 아닌 것은 한시 바삐 털어버리고, 또 바로잡고
더 이상 연연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도반 중에서도 당신이 상당히 오랫동안 공부해왔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이 정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중에는 알았어요.
그런데 정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 동안 공부해온 것이 아까워서
차마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직접 들었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 드리는 소위 사람의 성령이라고 하는 것은
옳고 그른 것은 차제하고, 자기가 그 동안 몸 담아오고 마음 기울여 오고
정성 쏟아온 그런 일들이라면, 그 공을 들인 것이 아깝다는 것이지요.
‘전공이 가석이라 [前功可惜].’
그리고 ‘단마기금이라 [擔麻棄金]’ 그런 표현을 쓰는데,
그러니까 ‘지고 온 그런 공이 아까워서 금을 보고도 금을 짊어질 줄 모르고
삼을 그대로 지고 가더라.’ 라고 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지요.
우리 도반 한 분도 얼마 전에도 만났습니다마는 참 변함이 없더군요.
수 십 년 전에 같이 공부 하면서
그 때 벌써 조금 사사로운 길을 가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해서
기탄없이 지적을 해주고 그렇게 했는데,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에 사상을 잘 들여야 하고, 길을 잘 들여야 하고
설사 중간에 자기가 잘못된 줄 알면 얼른 버려버리고 돌아설 줄 아는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사리불도 부처님의 정법을 듣고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니까,
정법을 듣고 혹시 마귀가 부처님의 모습을 지어서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표현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불교를 왜 공부합니까?
가장 바른 가르침이고, 이것은 깨달은 분의 올바른 사상이고,
인간으로서 인간의 실상과 모든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본 사람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래서 바른 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따르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여기서 구체적으로 한 구절을 지적 한다면,
사리불이 마구니가 아닌가 라는 그런 의심을 했다고 하는 것도,
내가 여러 번 언급하지만 산란한 마음으로 탑 전에 들어가서 예배 한번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다 이미 성불해 마쳤다.
나무불 하고 염불 한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다 이미 성불해 마쳤다.
불전에서 손을 한번 번쩍 드는 그것만으로 다 이미 성불해 마쳤다. 하는
이런 정말 우리는 본래로 부처다 라는 그 사상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사상을 지금도 믿고 따르지 않는 그런 불자들이 많고 한데,
그 당시야 오죽 했겠습니까?
옛날 부처님 당시 때는 정말 더 말할 수 없이 부처님이라고 하는 분은
오직 석가모니 한 분만이 가능한 것이고,
그 외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아주 철두철미하게 그런 사상에 젖어 있을 때,
그것은 정말 마구니의 말이다 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거예요.
충분히 그런 것이 이해는 됩니다.
지금은 대승불교, 선불교가 발달했지요.
그래서 이 불교 사상의 밑바닥까지 다 파헤쳐서, 완전히 백일하에 드러내놓고
모든 사람이 눈 있는 사람은 보고, 귀 있는 사람은 들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사람이 본래로 완전무결한 부처님이라고 하는,
이런 이야기에 이렇게 무슨 의심하거나 마구니의 말씀인가 이렇게 여길 까닭은
사실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말을 지금도 물론 태국이나 그 외 미얀마라든지
소승불교를 하는 나라에서는, 전혀 못 믿는 일인데
그 당시야 오죽 했겠습니까?
다행히 이쪽으로는 대승불교가 들어오고 또 선불교가 들어오고 이렇게 해서
그야말로 부처님의 사상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그 높은 끝까지를 우리가 다 궁구해서 다 알 수 있고
최첨단의 사상에 우리는 다 어떤 이해를 하고 있는 그런 입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첨단 불교를 하는 마당에서는
이런 것이 큰 문제가 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법화경이 설해질 그 무렵에는
이것은 마귀가 부처님의 모습을 지어서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것이 아닌가?
그 사리불이 보통 사람 같으면 몰라도 사리불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
그것을 우리는 아주 무게 있게 생각해야 할 줄로 그렇게 마음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