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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서울사나이
서연호[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등장인물의 성격과 가면
일본『교훈초』의 기악(伎樂)과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전승되는 하회별신굿(이하 하회굿)이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우연으로 지나칠 수 있을까.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의 기악에 관한 편린과 하회굿 사이에 어떤 상관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소론은 이러한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교훈초』를 비롯하여 기악에 관한 자료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일본에서 ‘기악연구는 추측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1)인데, 자료편린만으로 한반도의 기악을 논하는 것이 무리임은 자명한 론리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문화사의 실체를 밝혀야 하는 학문적 책임은 더욱 막중하다는 점에서 감히 시론을 펼쳐 보기로 한다.
일찍이 이혜구는 서울 근교에 전승되는 양주별산대놀음과『교훈초』의 기악이 유사하다는 견해를 밝혔다.2) 필자는 황해도(해서)지역의 탈춤과 『교훈초』 기악의 유사성을 비교한 바 있다.3)
일본기악면(이하 伎樂面)과 하회가면(이하 河回面)은 코가 높은 Aryan적인 인물형이고, 눈썹부위와 눈두덩이 사이의 골이 깊고, 크게 웃는 초승달형(初生月, 弦月)이다. 다만 일본오녀(吳女)와 하회각씨만은 조용한 하고 수심에 찬 인상을 풍긴다. 가면들은 사실적이기보다는 험상궂은 조형이 대부분이고, 후두부까지 천으로 가리도록 돼 있으며, 턱 주위에 수염을 붙였던 자국이 남아 있다. 대체로 활달하고 강한 인상을 풍기는 점 등에서 유사하다.
하회면의 눈은 세 가지 형태를 보인다. 각씨는 눈썹부위와 눈두덩이가 거의 평면으로 일치하고 가늘게 일자형으로 눈을 떳다. 부네․중․량반․이매는 크게 웃는 모습이다. 다만 부네만은 턱이 움직이지 않는 데다가 입이 아주 작아서 미소짓는 모습이다. 할미․백정․초랭이․선비의 눈은 눈썹부위와 눈두덩이 사이의 골이 깊고, 눈두덩이가 볼록하게 솟은데다 가운데 구멍을 뚫은 듯한 동공형이다. 이같은 다양성을 통칭 심목고비(深目高鼻)라고 하는 것은 너무 막연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하회면의 대부분은 턱이 움직이는 절악면(切顎面)이다. 턱을 자유자재로 움직여야 할 정도로 대사를 많이 하는 인물들이다. 다만 초랭이․각씨․부네는 턱을 움직일 수 없는 형태이다. 귀의 부분은 없다. 상대적으로 기악면은 절악면이 아니다. 대사를 하지 않고, 춤과 판토마임을 주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귀는 대체로 둥글고 길게 늘어져 있다.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
가면의 형태나 제작기술, 그리고 원형성의 측면에서 기악면은 하회면보다 고전성이 짙다. 기악면은 대륙적인 원형성을 대체로 유지했지만, 하회면은 고려시대에 지역적인 변이와 창작이 늘어난 까닭으로 여겨진다. 하회인들의 안면모습과 하회면이 몹시 유사하다고 느끼는 것은 비단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대사는 전승과정에서 동시대성을 바탕으로 점차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각가 최만린은 필자와의 면담에서, ‘하회면의 조형미는 신앙성과 더불어 립체성과 사실성을 지닌 것이어서 매우 뛰어나다. 가면마다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고, 산대계면(山臺系面)과도 다르며, Aryan계와 몽고계와 유사성이 보인다’고 했다.4)
등장인물의 성격은 어떠한가. 일본에서 치도(治道)는 코가 성인남자의 생식기 같이 길게 늘어지고, 귀는 사람의 귀보다 훨씬 큰 타원형이며, 눈과 눈썹이 위로 솟은 귀면(鬼面)이다. 하회의 초랭이는 치도역에 해당한다. 사실적인 대사극으로 변용되면서 길놀이만 남고, 치도는 량반의 하인인 초랭이로 전환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기악에서 사자(獅子)는 정교한 용모를 지녔고, 털은 오색으로 치장했다. 이것은 하회에서 두 마리의 사자와 유사하다.5)
기악에서 곤륜(崑崙)이 오녀(吳女)를 희롱하다가 역사(力士)에게 쫓기는 장면은 가장 흥미롭다. 곤륜은 로골적인 남근무(男根舞)를 추고, 력사는 그의 남근을 밧줄로 묶어 돌리다가 상하게 만든다. 사찰공양(寺刹供養)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풍자성이 짙은 교훈극인 셈이다. 하회에서 곤륜과 유사한 짓을 하는 인물은 중이다. 중은 각씨(혹은 부네)를 유혹한다. 두 사람은 초랭이에게 외도가 발각되자 도주한다. 바라문(婆羅門)은 ‘기저귀 빠는 사람’으로 격하되어 등장하는데, 격하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하회의 중과 동격이다.
기악의 력사는 하회의 백정으로 전이되었다. 백정은 살생 모티프를 지니고 있다. 이 모티프가 지배층에 대한 경고와 위협, 풍자 및 야유로 발전된 것으로 해석된다. 백정은 소를 잡아 우랑(牛根)을 들고 등장하는데, 이것은 기악에서 력사가 곤륜의 남근을 잡아당기는 행위와 상통한다. 백정은 량반과 선비에 맞서서 행동한다. 기악의 오공․취호왕(醉胡王)은 하회의 양반과 선비에 해당한다. 무능한 두 사람은 부네를 놓고 다투다가 백정에게 심한 망신을 당한다.
귀족들에게 ‘세금을 내라’고 호통치는 이매는 금강(金剛)과, 각씨의 시모인 할미는 태고부(太孤父)와, 현재 사자면(獅子面)이라고 남아 있는 것은 실은 새의 모양으로서 가루라(迦樓羅)와 각각 유사하다. 태고부가 남자의 모습이면서도 ‘노녀자’(老女姿)로 기록된 것은 본래 여신역(女神役) 혹은 무녀역(巫女役)이었던 것이 후대에 로인으로 전환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각씨는 태고아에 해당한다. 태고아면(太孤兒面)에 전아한 여성의 모습이 짙게 베어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무덕악(武德樂)은 한국에서 죽은이를 천도하는 무악에 해당한다. 그 음악을 월조(越調)라고 기록한 곳도 있다.6)『삼국사기』에 의하면, 월조는 삼국시대의 음악이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교훈초 하회가면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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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물(打物) 악사
치도 초랭이
오공 량반
오녀(4인) 각씨, 부네
금강 이매
파라문 (중)
곤륜 중
역사 백정
취호 선비
태고부 할미
태고아 각씨
사자 사자(주지역)
가루라 사자
무덕악 무악(巫樂, 別神굿)
기악의 발달과 전파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남북조시대(420-589)인 5세기 중엽에 고구려와 백제 기악은 중국에 전파되었다. 당시 중국에도 다양한 기악이 존재했지만, 이상 두 나라와의 차이 때문에 '한반도의 신(新)기악'으로 인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宋世有高麗百濟伎樂, 魏平燕跋, 亦得之而未具, 周師滅齊, 二國獻其樂, 隋文帝平陳, 得淸樂及文康禮畢曲, 列九部伎, 百濟伎不預焉)7)
『수서』(隋書) 의하면, 문제(文帝, 581-600)는 개국하자 악제(樂制)를 칠부기(七部伎)로 개편하였는데, 고구려기(高句麗伎)가 들어 있었다. (始開皇初定令, 置七部樂... 高麗伎)8) 『신라화엄사경조성기』(新羅華嚴寫經造成記, 755)에 의하면, 푸른 옷을 입은 어린이와 네 명의 기악인이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天寶十三載甲午八月一日....又靑衣童四伎人等...佛菩薩像作時中, 靑衣童子伎樂人等, 除余淳淨法者)9)
이상 삼국시대의 기악들이 『교훈초』의 기악과 동일한 가면무용기악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주지하는 대로, 일본기악은 백제기악이고, 미마지(味摩之)에 의해 7세기 초(612)에 전파된 것이다. (百濟人味摩之歸化曰, 學于吳, 得伎樂舞, 則安置櫻井, 而集少年, 令習伎樂舞,於是眞野首弟子, 新漢齊文二人, 習之傳其舞)10)
7세기 이전에 가면무용기악이 고구려에서 연희되었다면 언제부터였을까. 필자는 4세기 말부터 이런 고구려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5세기 중엽부터는 성행한 것으로 생각한다. 미마지의 일본전파보다는 150여년의 시차가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에 불교가 수용․공인된 것은 372년이었다. 모든 종교의 수용이 그렇듯이, 공인 이전에 상당한 밀교시대가 있었을 것이다. 앞서 소개한 중국기록에 나타난 고구려기와 백제기를 가면무용기악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4, 5세기에 축조된 낙랑과 고구려 고분벽화들에 보이는 가면무와 불교적인 세계관은 이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시사한다. 또한 실크로드 주변의 고분과 고구려 고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악비천도(伎樂飛天圖)는 사자의 영혼등천을 기원하는 신앙적 염원을 드러낸다.11)
기악은 실크로드 주변의 여러 지역에서 공연되었고, 서남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로 전파되었다. 기악내용이나 양식은 지역마다 시기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전파과정에서 변이와 창작을 이룬 까닭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단 소하분지(小河墓地, 古代樓蘭)에서 발견된 인면목가면(人面木假面), 인물목상(人物木像), 장수의(長袖衣), 노란(樓蘭) 서방 영반묘지(營盤墓地)에서 발견된 금박백인면가면(金箔白人面假面), 천산산맥 북방 파마묘지(波馬墓地)에서 발견된 금판인면가면(金板人面假面) 등은 수세기가 흐른 지금에도 한국에서 사용하는 가면극의 가면과 동질적 원형성이 보인다.12)
고구려기는 무교와 불교를 기층으로 하고 중국기악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즉 오랜 기간 토테미즘과 샤마니즘을 바탕으로 하여 가면을 만들고 가면극을 놀았는데, 신흥종교인 불교와 더불어 공양보시(供養布敎)를 위한 새로운 기악극을 창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필자는 황해도(해서)지역의 가면극과 『교훈초』 기악의 유사성을 전제로 하여, 미마지가 기악을 배웠다는 구레(くれ, 吳)가 고구려의 대방군(帶方郡) 지역(현재의 봉산)일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13) 『일본서기』에서 나타난 오국(吳國)은 중국의 오국(吳國, 229-280), 중국의 남방지역, 혹은 중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4) 한편, 오국한반도내재설(吳國韓半島內在說)은 백제설15), 고구려설16), 가야설17) 등이 제기되었다. 고구려의 대방군지역에는 당토성(唐土城)이 남아 있고, 314년에 미천왕(美川王)이 대방을 멸망시킨 이후에 휴암군(鵂岩郡) 휴류성(鵂鶹城)이라고 했다. 휴류의 고대음은 구루(くる)이고, 구루(くる)에서 구레(くれ)로 변화될 수 있다. 오늘날 봉산(鳳山)이라는 지명도 ‘휴류(수리부엉이)의 서식지’에서 연유된 것으로 해석된다.18) 또한 봉산군에는 고려리(高麗里)라는 고지명도 남아 있다. 구루(くる), 구레(くれ), 고라이(こらい) 혹은 고쿠리(こくり)로 변화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19)
나리사와 마사루(成澤勝)는『일본서기』『속일본기』의 기록을 대조하고, 『신찬성씨록』『신찬성씨록고증』『일본서기조선관계기사고증』『낙양가람기』등을 참고하여 구레(くれ)가 중국남방지역이 아니라, 한반도의 대방군이었던 근거를 제시했다. 대방군에 오씨족(吳氏族)이 많이 살아서 구레(くれ)라고 지칭했는데, 그들이 대거 남방으로 이주하여 백제의 구레(くれ, 現在의 求禮地域)가 된 것으로 해석했다.20)
기악이 고구려에서 변이․창작되었다고는 해도, 불교의식인 행도(行道)로 시작되고, 사자(師子)가 선두에 서며, 금강․가루라․파라문․곤륜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서 중국을 포함한 서역희(西域戱)의 영향은 여전히 짙게 드러난다. 대방군은 한사군시대의 마지막 지역으로서, 장기간에 걸쳐, 이른바 실크로드의 한반도내 거점이었다. 삼국에서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부터 대방에 서역불교문화가 영향을 끼쳤음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백제의 미마지는, 중국이 아닌, 고구려의 대방에 가서 기악(くれがく, 吳樂)를 배운 후 먼저 백제에 전파시켰고, 다시 일본에 건너가 성덕태자(聖德太子)의 불교보급정책에 힘입어 기악을 전파시킨 것이다. 한편, 백제기악은 미마지 이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전파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21)
신라의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하기 위해 목우사자(木偶師子)를 만든 것은 512년이었다.22) 가야의 악사 우륵(于勒)은 551년에 신라에 복속했다. 이보다 앞서 그는 가야 가실왕(駕實王)의 명령에 따라 12곡을 지었는데, 그중 제8곡은 사자기(師子伎)였다.23) 이처럼 미마지의 일본전파보다 1백년이나 앞서 사자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삼국에서 사자기의 성행을 시사한다. 사자기의 성행은 기악의 발전을 의미한다. 미마지가 중국에서 사자기를 포함한 기악을 배워서 자국 백제에 전파시킨 후, 7세기 초에 일본에 건너갔다는 종래의 통설은 문화적 총체성을 결여한 단순론리여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중국에 전파된 고구려와 백제의 기악은 12세기까지도 그곳에서 전승되었다.24) 한반도에서는 고려시대까지 기악이 전승되었다. 불교국가인 고려에는 전국에 크고 작은 사찰과 승려의 수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사찰을 중심으로 한 불재(佛齋)와 세시연희․포교연희는 년중무휴로 지속되었다. 동양의 다른 불교국가와 마찬가지로 고려에서도 부처님을 가무희로써 즐겁게 하는 것을 기악공양(伎樂供養), 사찰에서 하는 각종연희를 통칭 기악이라 했다. 이처럼 빈번하고 다양한 기악을 위해서 여러 범패승이 필수적이었던 것은 물론이고, 분야마다 전문적인 재승이 제도화되었다. (王, 惑辛旽言, 冀生子, 又大設文殊會..... 作法梵唄, 震天隨喜, 執事者, 無慮八千人)25)
고려시대 기악(妓樂)은 『최충헌전』(崔忠獻傳)에 보이는 대로, 과거급제를 축하하는 귀족층의 행사에서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중요한 행사․사찰의 중요한 행사에서 연행되었다. 예종(睿宗) 11년(1116) 3월에는 천수사(天壽寺) 락성식에서 왕이 참석한 가운데 채붕기악(綵棚伎樂)을 공연했다.26) 충렬왕(忠烈王) 22년(1296) 정월에는 왕의 환궁을 축하하기 위해 궁중에서 채붕기악을 공연했다.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 4월에는 초팔일을 축하하기 위해 궁중에 화산(火山)을 만들고, 잡희(雜戱)와 기악을 공연했다. 이러한 기록은 수차례 보인다.27)
하회별신굿과 기악
현재 전승되는 하회굿을 고려기악의 계승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앞서 지적한 대로, 일본기악면과 하회면, 『교훈초』의 내용과 하회굿의 유사성 이외에도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영향관계를 방증할 수 있다.
첫째로, 하회는 고려중기까지 허씨동족촌(許氏同族村)이었고, 하회면을 허도령(許道令)이 제작했다는 전설은 일치한다. 국보 제121호로 지정된 하회면은 제작연대를 11, 12세기까지 소급할 수 있다.28) 하회에는 '허씨(許氏) 터전에, 안씨(安氏) 문전에, 류씨(柳氏) 배판'이라는 말이 전한다.29) 고려중기까지 허씨, 고려말기까지 안씨, 그리고 조선시대 초기부터 류씨가 살았다. 현재도 류씨동족촌으로 유명하다. 허씨동족촌은 지금 하회의 동편(현재는 논밭이다)에 있었고, 지금 마을 자리는 그 당시 낙동강변의 넓은 들이었다. 낙동강의 흐름에 따라 강바닥이 넓어짐으로 마을 사람들은 차차 서편으로 이동해 간 것이다. 고려시대 귀족인 허정승의 무덤은 근래까지도 마을 사람들이 벌초를 해왔다고 한다.30)
처음 탈을 만든 허도령은 신탁을 받고 마을의 주산인 화산(花山) 속에 들어가 움막을 지었다. 외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주변에 금색을 치고 밤낮 정성스럽게 탈을 만들었다. 허도령을 몹시 사모하는 이웃 처녀가 몰래 잠입하여 엿보는 도중에 도령은 부정을 타서 피를 토하고 죽어 버렸다. 열두 번째로 만들던 이매탈은 미처 턱을 깍지 못한 미완성으로 남고 말았다. 그후 사람들은 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성황당(上堂) 아래에 제단을 마련하고 매년 제사를 올렸다. 이것이 허도령전설의 내용이다. 현재도 제단의 흔적은 화산에 남아 있다. 마을에서는 별신제를 할 때만 탈이 공개되었고, 別神祭期間 중에는 부부관계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금기를 지켜야 했다.31)
둘째로, 하회면을 보존해온 장소는 마을 한 가운데 있던 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절의 명칭을 기억하지 못한다. 고려시대 안동에는 3백여개의 사찰이 있었다.32) 귀족들이 승려가 될 정도로 불교가 번창했다.33) 하회의 화산 기슭에도 장안사지(長安寺趾)의 석불과 석탑이 남아 있다.34) 조선시대에 하회의 절은 동사(洞舍)로 전락되었고, 1930년대에 동사는 소실되고 다락에 보관했던 목궤와 그 속에 넣어둔 탈만 남았다. 현존하는 탈이 바로 그것이다. 소실된 동사는 그 자리에 복원되지 않은 채 밭으로 변했고, 그 후에 동사는 마을 중앙에 서 있는 삼신당(三神堂, 産神堂)의 바로 뒷편에 신축되었다. 1986년 1월 24일, 필자는 하회 출신이자 문화연구가인 류한상(柳漢尙)의 안내로 현지를 두 번째로 답사(제1차 답사는 1977년 7월)하며 이런 사실들을 확인했다.35)
류한상은 필자에게 50여년 전에 불타 없어진 동사자리를 안내해주고, 탈이 그대로 보존된 래력을 설명해주었다. 그가 어린시절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겨울에 동사에 불을 때던 사람이 갑자기 간질병(癎疾病)을 일으켜 의식을 잃은 사이에 불이 건물에 옮겨 붙게 되었다고 한다. 건물은 모조리 타버렸으나 마지막에 보니 다락에 놓아 두었던 가면궤만 남아서 탈들을 무사히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사찰이 동사로 전환된 것은 조선시대에 척불숭유정책으로 이 마을을 유학의 명승지로 육성하면서 폐사시킨 것으로 여겨진다.36) 사찰에 보관했던 가면이 그대로 동사에 보관되고, 그 전정(前庭)에서 그대로 연행되면서 현재에 이른 것이다.
셋째로, 하회굿은 석가탄신일인 사월 초팔일의 평상제(平常祭)와 별신제(別神祭)에서 연행되었다. 평상제는 매년 정월 15일이나 4월 초팔일에 거행했다. 별신제는 보통 10년 주기로 평상제보다 규모를 크게 하고 탈놀음을 겸했다. 특별히 대축제를 열어 신을 초대했기에 ‘별신굿’이라 했다. 60년마다 회갑대제가 있었다. 다른 지역같이 유교식 당제나 무당의 제의로 별신제을 올린 것이 아니었다. 무당은 마지막 송신제(허천굿, 거리굿이라 한다)을 할 때만 참여했다. 15일간 가면극 자체를 별신제로 연행했다. 이런 자료가 남은 지역은 현재 하회뿐이다. 4월 초팔일에 평상제나 별신제를 올린 것은 삼국시대 불교공인 이후의 전통임이 분명하다. 별신제는 1928년에 마지막으로 거행되었다.
서낭굿과 기악
넷째로, 하회굿은 무속제의와 사찰의 기악공양의식이 융합된 것이다. 하회의 주산인 화산 중턱에 서낭당이 있다. 이 서낭당에서 신탁을 받고 제사를 올린다. 서낭당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도중에 국사당이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신간(神竿)을 운반하고 하산하다가 이곳에서 제사를 올렸다. 마을 가운데 서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 밑에 삼신당이 있다. 삼신의 신위가 분명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산신당(産神堂)의 오기일 수도 있다. 이상과 같은 3당의 위계는 상중하당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신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고, 또한 낮은 당에 모시는 신일수록 신통력이 뒤지는 것으로 인식된다.37)
신위(神位)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신화들이 전한다. 서낭당(上堂)에 모시는 신은 무진생(戊辰生) 각씨신으로서, 의성오토산(義城五土山)이 본관인 심씨(金氏)이다. 본가는 월애(月涯, 豊川面 仁今洞)이고 외가는 갈전(葛田)이었다.38) 15세에 하회의 남편과 결혼했으나 청상이 되었고, 죽어서 각씨신이 되었다. 통상 '무진생서낭님'이라고 불렀다. 1928년은 무진년이었는데, 매우 어려운 경제현실에도 불구하고 별신제를 개최했다. 서낭신의 회갑이었기 때문이다. 회갑대제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각씨신은 마을 가운데 있는 삼신당의 자부신격(子婦神格)이다. 마을 창설당시는 할미신(三神堂의 神位)이 주신(上堂神)이었으나 각씨신이 나오자 자부에게 양위하고 삼신당(下堂)에 물러 앉았다. 신간에 매다는 신령(神鈴)은 하회에서 멀지 않은 안동권씨종족촌(安東權氏同族村)에서 얻어 온 것이다. 1928년 이후 일제의 조선민속취체와 경제의 어려움으로 별신제는 중단되었다.39)
신간에 매다는 신령을 안동에서 가져왔다는 것은 인근 서낭신제와의 상관성 및 전파성을 시사한다. 조사기록에 의하면, 하회서낭신제는 낙동강 중류인 안동읍내의 서낭신제와 풍산면 수동(壽洞)의 서낭신제, 상류인 도산면(陶山面) 왕모산(王母山)의 서낭신제와 가송동(佳松洞)의 서낭신제, 영양군(英陽郡) 일월면(日月面) 주곡동(注谷洞) 일대의 서낭신제와 매우 유사한 원형성을 지닌 것이 확인된다.
안동읍내의 서낭당에는 남신․여신․아동신이 있었고, 신의 하강이나 이동에는 서낭간(城隍竿)을 사용했다. 마을에서 뽑힌 상당주․중당주․하당주가 굿을 주도했고, 광대들은 풍물을 울리며 서낭간을 앞세우고 마을을 순회하면서 신력을 베풀고 향응을 받았다. 남신을 모시는 경우는 서낭간에 베나 종이로 옷을 해 입히고, 여신을 모실 때는 서낭간에 아름다운 색깔 옷을 입혔다. 신상(神像)을 만든 것이다. 굿에는 무당이 초청되어 광대들과는 별도로 무악을 베풀기도 했다. 그밖에 절차나 금기는 하회와 흡사했다.40)
수동의 서낭신제는 공민왕의 부처를 국신(國神)으로 하고 나무로 신상을 깎아 봉안했다. 전설에 의하면, 오래 전에 큰 홍수가 났을 때 벌판 가운데서 위패가 발견되어 그 자리에 모신 것이 국신당을 세우게 된 계기라고 한다. 3년에 한 번씩 별신제를 했는데, 그 후로 마을에 재앙이 없어져 더욱 성대하게 굿을 하게 되었다. ‘별신굿을 보지 않으면 죽어서 저승에 갈 수 없다’는 말이 류행할 정도로 인근에서 유명해졌다. 제관(祭官)과 관원(官員)은 물론 농악대, 무부(舞夫)와 무동(舞童), 주민들이 가장하고 행렬에 참가했다. 특히 호장(戶長, 2인)은 개가죽으로 만든 탈을 착용했다. 그밖에 절차나 금기는 하회와 흡사했다.41)
왕모산 서낭신제는 공민왕의 모후(母后)를 제사하는 의식이다. 모후와 공민왕의 목상(木像)을 만들어 당에 나란히 모셨다. 신을 받기 위해 서낭간을 만드는데, 장간(長竿) 끝에 오색실과 빨간 주머니, 파랑 주머니, 백지 등을 매단다. 제물 준비가 끝나면, 당주, 제관, 마을 사람들은 풍물을 치며 신상 앞에서 제사하고, 다시 주변을 돌면서 함께 유희한다. 주송동 서낭신제는 공민왕의 공주를 제사하는 의식이다. 현재 신상은 전하지 않는다. 서낭간에 매다는 방울, 흰치마, 다홍치마가 벽에 걸려 있다. 서낭간을 앞세운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30여리의 눈길을 멀다하지 않고, 공민왕의 신위가 봉안된 봉화군(奉化郡) 명호면(鳴湖面) 북곡리(北谷里)의 청량산성(淸凉山城) 서낭당에 세배를 간다. 가며오며 풍물을 치면서 신과 인간이 함께 즐긴다.42)
주곡동 서낭신제에도 남녀신이 있었고, 남녀신간으로 가장하여 서로 결합시키는 의식을 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주곡동에는 녀성신으로 가장한 서낭간이 보존돼 있었고, 인근의 가곡동(佳谷洞)과 도계동(道溪洞)에서는 남성신을 모셨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별신제를 할 때는 주곡동의 여신과 가곡동의 남신의 합방(合房)과 화해를 위해 두 마을 사람들이 각각 신간을 들고, 행렬을 지어 마을길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서로 만났다. 바람이 불어 두 신체(神體)의 바지와 치마가 서로 엉기면 합방으로 간주했다. 두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굿놀이를 통해서 부부와 같은 애정을 지속시켰다. 또한 인근의 마을에서는 가면극을 연행하기도 했다.43)
이상과 같은 서낭신제에서 신성현시의식(神聖顯示儀式)과 신인동화(神人同化)․신인동유(神人同遊)의 유희는 고려시대 기악과 절충융합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신간에 매달아 놓은 신령이 울리면 신이 지상에 내린 것으로 간주했다. 이것은『위지』(魏志)「마한전」에 나오는 蘇소도의식(塗儀式)과 동일하다.44) 하회에서는 상당의 각씨신이 각씨역으로 인격화 하여 가면을 쓰고 광대들의 ‘무동(舞童)을 탄 채’(즉 어깨 위에 서서) 마을로 하산한다. 제관들이 신간을 들고 각씨를 인도해서 하산 할 때, 사람들은 신간에 천이나 옷을 걸어준다. 그렇게 하면 신이 복을 내린다는 믿음 때문이다. 오리쿠치의 개념에 의하면 각씨역은 분명 마레비토(來訪神)이다.45)
무속제의인 서낭신제와 불교의식인 기악이 하회의 별신제에서 융합된 것은 축제정신과 유희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당연한 결과이다. 15일간이나 가면극만으로 신성의식을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풍자와 해학에 넘치는 축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융합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광대, 재승과 기악
다섯째로, 하회에서는 연희자를 광대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고려시대 가면극을 하는 예능인을 지칭했다.『고려사』「전영보전」에는 광대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전영보는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들어와 여러 가지 아첨과 모략으로 벼슬이 삼사사(三司使)에까지 이르렀다. 충숙왕(忠肅王, 1313-1330)이 원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왕위를 빼앗으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왕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옛날에 소광대가 대광대를 따라 물을 건너는데, 배가 없으므로 여러 대광대들에게 말했다. 나는 키가 작아서 물의 깊이를 알기 어렵다. 너희들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곧이 듣고 대광대들은 먼저 물속에 들어갔다가 모두 빠져 죽었다. 지금 그런 소광대가 우리나라에 있다. 전영보(全永甫)와 박허중(朴虛中)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재난의 화망 속에 나를 두고도 태연히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으니 소광대와 무엇이 다른가. 우리나라의 말에 가면을 쓰고 희롱하는 자를 광대라고 한다.”46)
기록상으로는 이렇게 충숙왕 때부터 광대라는 용어가 보인다. 그러나 ‘석유광대(昔有廣大)’라는 지적과 더불어 ‘국어위지광대(國語爲之廣大)’라는 표현이 있는 사실로 미루어 광대라는 말은 고려초 혹은 그 이전의 삼국시대부터 사용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국어는 한자어가 아닌 몽고어계의 어휘 혹은 고유어로 해석할 수 있다.47)
여섯째로, 하회굿에는 백정역이 등장한다. 백정은 고려시대에 생긴 직업이다. 수척(水尺, 楊水尺, 禾尺)은 북방 유목민으로서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그들은 수초를 따라서 이동하며 사육마를 잡거나 사냥을 하여 그 고기를 팔았다. 백정은 여기서 유래한 명칭이었다. 또한 그들은 버들고리(柳器)를 역어서 팔았고, 여성들은 노래와 춤, 때로는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창기가 본래 수척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런 이유였다. 백정광대라는 말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재인(才人) 역시 수척과 유사한 처지와 생활방식을 이어왔다. 그러나『고려사』에서, 수척과 재인을 구분하여 수차례 기술한 것은 그들의 집단적인 성격과 직분이 달랐음을 말해준다. 조선시대 초기에, 수척과 재인은 ‘본비아류(本非我類)’라 하거나 ‘호종(胡種)’ 혹은 ‘이류(異類)’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48) 그렇다면 그들은 북방인 출신으로서 천민이었고, 정착생활이 불가능해서 사냥이나 거지노롯을 하면서 방랑생활을 한 부류로 볼 수 있다.
1423년(世宗 5年) 10월에 병조에서는 수척과 재인을 백정이라 통칭하기를 상소했고, 왕은 그것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옛 명칭이 백정과 혼용된 사례는 허다하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면, 수척(수척광대)은 비전문적인 연희집단이었고, 재인(재인광대)은 수척에서 발전한 전문적인 연희집단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49)
하회에 백정이 등장하는 것은, 광대들이 곧 백정이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그런 문화를 바탕으로 백정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극중에 백정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당시 광대들의 처지와 생활을 희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백정들이 차차 정착생활을 하게 되고, 사당(寺黨)과 거사(居士)들이 유랑광대로 대두됨으로써, 조선시대에 성립된 가면극에는 사당과 거사장면이 수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 백정출신의 광대는 반인광대(泮人廣大)로 호칭되기도 했다.50)
“석가가 불교를 창시하면서 청정으로 근본을 삼고, 온갖 더러운 것을 멀리하며, 탐욕스러운 생각을 없애 버리고자 했다. 지금 나라의 역사(役事)를 기피하는 무리들이 불교를 빙자하여 재물을 불리고 사생활에 치중하고 있다. 그래서 농업과 축산으로 직업을 삼고, 상업을 예사로 한다. 밖에 나가서는 계율(戒律)을 위반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청정의 도리를 실천하지 않으며, 몸에 걸치는 장삼은 술독의 덮개로 전락되고, 불경을 강독하는 장소는 채소밭으로 변하고 말았다. 장사치들과 결탁하여 물건을 매매하고, 잡인들과 어울려서 술주정을 하며, 기생집에서 시끄럽게 어울리며 우란분(盂蘭盆)을 모독하고 있다. 속인의 모자와 옷을 입고, 절을 짓는다는 명분으로 북과 깃발을 만들고 노래하고 연주하며, 촌락과 시정으로 다니면서 사람들과 난투(亂鬪)하여 피투성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51)
이상은 재승 사칭자들을 비방한 고려시대의 기록이다. 불교국가이어서 승려에게 면역(免役)해 주는 기회를 이용해 재승을 사칭하고 피역(避役), 치부(致富), 방탕하는 부류의 인간들을 비판한 것이다. 고려시대에 ‘비기고가취(備旗鼓歌吹)하는 승려’는 재승이었다. 그들은 국가적인 연등회와 사찰에서 연행한 기악에서 연희를 담당한 이른바 광대승려였다. 이상의 기사는 정상적인 재승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유사재승(類似才僧)을 통해 척불의도를 강조한 조선시대의 역사기술(고려사의 기술방법)임이 분명하다. 이런 유형의 기사는 조선전기까지 계속되었다. 다만 이런 무리를 사장(社長) 혹은 사당(寺黨)이라고 한 것이 고려와 다를 뿐이다.
한편, 이 기사는 사찰의 정통 재승으로부터 시정의 재인광대와 백정광대로 기악이 전승․확대․변이되는 과정을 류추할 수 있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청정을 근본으로 삼고 계률을 지키며 포교를 실천해야 할 재승들이 오히려 거리의 광대로 전락되고 있었음을 여실히 말해준다. 하회에서 연희자가 광대이고, 연희내용 중에 백정광대역이 등장해서 녀성들에게 정력에 좋다는 우랑(소의 불알)을 팔고 있는 모습은 바로 고려시대 기악이 일면 민간연희로 전환되어 가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안동문화와 기악
일곱째로, 하회굿 대사에는 귀족들이 사대부와 문하시중이라는 신분과 관직을 놓고 갈등하는 장면이 있다. 이런 신분과 관직은 고려시대의 명칭이었다. 사대부는 왕 밑에서 정치의 실무를 장악하며 영토를 세습해 온 치자계급을 지칭했고, 문하시중은 문하성(門下省)의 최고관리였다. 이 명칭을 비유하여 가면극에 등장하는 선비는 자신이 사대부(士, 四大夫)보다 높은 팔대부(八大夫)의 손자이고, 문하시중(門下侍中)보다 높은 문상시대(門上侍大)의 아들이라고 자랑함으로써 무지를 폭로한다.52)
끝으로, 고려시대의 문화환경이 안동 하회지역에 가면극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안동은 고려시대 문화가 번창한 지역이었다. 고대 창녕국(昌寧國)이었던 안동을 신라가 빼앗아 고타야군(古陀耶郡)이 되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고창군(古昌郡)이었다.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 867-935)과 병산(屛山)에서 싸워 승리함으로써 안동부로 승격시켰다. 1197년(明宗 27年)에는 안동부에서 대적을 토벌하여 승리하자 안동도호부로 승격시켰다. 1204년(神宗 7年)에 야별초난(夜別抄亂)을 막아내자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1308년(忠烈王 34年)에 복주목(福州牧)으로 되었다가 1361년(恭愍王 10年) 왕이 홍건적난(紅巾賊亂)을 피하여 이곳에 피난한 후에 다시 대도호부가 되었고, 주변의 17개 군현을 관할케 했다. 앞서 서낭신제에서 공민왕과 상관되는 신사(神事)가 많았던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안동지역은 이처럼 중요한 문화거점지역이었으므로 유무형의 고려문화와 문화재가 다수 보존, 전승된 지역이다. 기악이 발달할 수 있는 정치․경제․문화적 여건을 두루 갖춘 곳이었다.53)
결론
고대 삼국의 기악은 고려로 전승되었다는 것이 이 론문의 대전제이다. 고려중기부터 안동 하회에 전승되는 별신가면극과 『고려사』에 수차 나타나는 기악기사 사이에 어떤 상관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의 연구는 이런 의문에서 출발했다. 일본『교훈초』의 기악과 하회의 연희내용이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하회지역의 력사와 민속, 현지의 사정을 조사해 봄으로써, 별신가면극이 고려기악의 계승일 것이라는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이상에서 론의한 방증자료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일본 『교훈초』의 사자, 곤륜, 오녀, 력사, 오공, 취호왕, 태고부, 태고아 등은 하회의 주지(獅子의 異稱), 노승, 각씨(젊은 여인) 혹은 부네(젊은 여인), 백정, 량반, 선비(學者), 로파, 각씨 등으로 각각 변이된 양상을 보인다.
2. 하회는 고려중기까지 허씨동족촌이었고, 하회가면을 허도령이 제작했다는 전설은 일치한다. 국보 제121호로 지정된 하회면은 제작연대를 11, 12세기까지 소급할 수 있다.
3. 기악공양이라고 하듯이, 기악은 사찰에서 연행되었다. 하회지역에는 고려시대에 사찰이 많았고, 별신가면극의 가면이 보관된 장소와 공연장도 하회마을의 동사였는데, 그 건물은 본래는 사찰이었다.
4. 하회굿은 석가탄신일인 사월 초팔일의 평상제와 별신제에서 연행되었다. 별신제는 보통 10년 주기로 평상제보다 규모를 크게 하고 가면극을 겸했다. 60年마다 회갑대제가 있었다. 이처럼 4월 초팔일에 별신제를 올린 것은 삼국시대 불교공인 이후의 전통임이 分明하다.
5. 무속제의인 서낭신제와 불교의식인 기악이 하회의 별신제에서 융합된 것은 축제정신과 유희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당연한 결과이다. 15일간이나 가면극만으로 신성의식(神聖儀式)을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풍자와 해학에 넘치는 축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융합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6. 하회에서는 옛부터 연희자를 광대라고 불렀다. 이 광대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가면극을 하는 예능인을 지칭했다. 배역명에 고려시대의 관직명이 그대로 사용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7. 하회굿에는 백정역이 등장한다. 백정은 고려시대에 생긴 직업이다. 수척(양수척, 화척)에서 백정으로, 백정광대, 반인광대로 이어졌다.
8. 고려시대의 문화환경이 안동 하회지역에 가면극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안동은 고려시대 문화가 번창한 지역이었다. 문화거점지역이었으므로 유무형의 고려문화와 문화재가 다수 보존, 전승된 지역이다. 기악이 발달할 수 있는 정치․경제․문화적 여건을 두루 갖춘 곳이었다.
(2005, 6)저서, 동서 공연예술의 비교연구, 연극과인간, 2008,게재
JH 지식 곳간채 - 한국풍속문화연구원
깨어있는 푸른역사 삼태극 http://cafe.daum.net/mookto
- 삼태극 전문 학술위원 서울사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