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연기처럼
-김영임 문우를 그리워하며
서길원
그대를 만나러 부천에 가는 길이 오늘로 두 번째입니다. 7호선 부천시청 역에서 바라보는 거리는 녹음이 짙어 가는 계절임을 한눈에 보여 줍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 두리번거리는데 뜻밖에도 그대가 일하던 곳이 눈에 들어오네요. 키 큰 가로수 늘어선 길을 건너, 그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이 그대를 만나러 가는 내 마음과 대비되어 걸음이 멈칫합니다.
지난 2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문학회의 정기총회를 마친 후 나는 그대를 만나러 가기 위해 부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몸을 실었다는 말이 맞을 만큼 그날 나는 조금 지쳐 있었습니다. 잘하지도 못하는 솜씨에 문학회의 살림살이를 맡아 2년을 보낸 마지막 날이었으니까요. 그동안 두 달에 한 번 있는 모임 때면 늘 그대부터 눈으로 찾았지요. 계리에 어두운 사람을 흉허물 없이 지켜봐 주니 옆에만 있어도 든든했습니다.
해마다 그맘때쯤이면 모임에도 나오지 못할 만큼 바쁜 그대를 생각해 문우들끼리 나누어 먹으려고 마련한 떡 봉투를 들고 가는 길,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가뿐했습니다. 첫번 부천행 길에 만난 그대의 일터는 어찌나 밝고 활기가 넘치는지, 우리들 삶의 고단함을 가려 주고도 남는 것 같았습니다. 왠지 안심이 되었습니다. 소풍 길에서 돌아오듯, 약간은 감미로운 나른함에 젖어 어두워 가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신촌행 버스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습니다. 그대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여기까지 와 준 고마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정이 쌓여 갔습니다. 그대는 내게 ‘언니’라고 불러 주었지요. 하지만 나는 그대가 늘 형(兄) 같았습니다. 정월 보름을 즈음해 문우들이 산영재 선생님 댁을 방문한 어느 날, 그대가 자그마한 김치 단지를 살며시 식탁 위에 내려놓았습니다. 선생님께 드리려고 가져온 그 김치를 우리는 ‘무엄하게도’ 한 포기 꺼내어 한 가닥씩 나누어 먹었습니다. 아, 잊을 수 없는 맛이었습니다. 김치 담그는 비법을 묻다가 곧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에서는 얼른 눈길을 거두어야 하니까요. 나는 틈이 날 때마다 그대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았습니다. 발송 작업을 하다가도, 우체국에서도, 일을 마친 후 찾아갔던 시장 골목에서도, 우리들 모임의 회계 장부를 정리하다가도….
첫날과는 너무나도 다른 심정으로 그대의 일터를 바라보다가 눈길을 거둡니다. 이제 그대를 만나러 부천에 올 일이 다시는 없겠지요. 그대가 있는 병원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걸어가는 길 오른편으로 아파트촌이 줄을 이어 늘어섰습니다. 한순간 깜짝 놀랍니다. 포도마을! 너무나도 익숙한 그대의 집 주소가 아니던가요. 지금은 조마루로(路)라는 거리 명을 쓰지만 인상적인 마을 이름이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기 어디쯤에 그대의 집이 있겠네요. 조금 더 걷다 보니 왼편에 널따란 공원이 나타납니다. 오래전에 조성된 곳인지 조경이 잘 되어 있습니다. 구불구불하게 설계해 놓은 산책길도 푹신해 보이네요. 그 길을 따라 운동을 하는 사람이 여럿 눈에 뜨입니다.
그런데 저 속에 그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허리 수술을 한 후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을 하던 그대가 양팔을 앞뒤로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그 길을 걷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느닷없이 나타난 환영(幻影)에 울컥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오릅니다. 집과 일터, 그대가 다니던 동네 길 한가운데에 지금 내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멀지 않은 거리 안에서 그대가 가족과 동료를 위해 종종거리며 다니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아픈 마음으로.
그대가 느린 걸음으로 걷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노라고 말하곤 했지만, 우리들 누구도 그대의 부지런한 천성이 그 바람 같은 걸음걸이를 만들어 내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빠른 걸음으로 그대는 아마도 남이 하는 열 배의 일을 해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터무니없이 빠른 걸음으로 우리의 곁을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사고로 다쳐….” 누군들 그대가 일어나기를 의심했을까요. 이 길이 병실에 누워 있는 그대를 만나러 가는 길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 저쪽 세상에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 일손이 누구보다 재바른 사람이 필요한 대역사(大役事)가 있나 봅니다. 그것도 촌각을 다툴 만큼 급한 일이. 그러지 않고서야 어쩌면 그렇게 기척도 없이 그대를 불러 갈 수 있단 말인가요. 유족의 황망함이 묻어나는 그대의 영정을 흐릿해진 눈길로 마주합니다. 그대는 사진 속의 모습보다 훨씬 더 고왔지요. 형언할 수 없는 슬픔 가운데서도 의젓한 그대 두 아들의 손을 잡아 봅니다. 상객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서서 아내의 영정을 무연(憮然)히 바라보던 남편의 뒷모습이 가슴에 각인되는 것 같습니다.
그대를 나보다 훨씬 더 오래 알고 지내온 문우가 곁에서 눈물을 거두지 못하네요. 허망한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나누어 보려는 심산이었는지, 우리는 그대 곁을 바로 떠나지 못합니다. 문우는 수필반 살림을 꾸려 나가며 그대와 속이야기 나누던 때를, 나는 그대와의 마지막 날이 된 문학회의 지난 소풍 길을 이야기하며 그대가 살던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 헤맵니다. 문학회가 봄 소풍을 간 날이 마침 스승의 날이어서 우리는 편백나무 숲에 자리를 펴고 케이크에 불을 켠 후 둘러서서 선생님께 ‘스승의 은혜’를 불러 드렸지요. 나는 소풍 길을 같이 못한 문우에게 그대가 목이 메어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하더라는 말을 전합니다. 그러노라 우리는 저녁이 늦어서야 부천을 떠납니다.
바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우리 곁을 맴돌다 어느 날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져 가는 그대. 이제 우리는 역(逆)으로 그대와의 지난 시간을 하나하나 추억하며, 그대를 보낼 채비를 합니다. 그대가 생각날 때면 일 년 365일 향초가 불을 밝히는, 사이버 공간에 마련된 우리들의 카페를 찾을 것입니다. 그대는 조용한 미소로 맞아 주겠지요.
<에세이21> 출신 작가 기념문집 <존재의 향기>에 수록.
__________________________
▶ 서길원_ 「시대문학」(1999)과 「에세이21」로 등단(2004. 가을). *수필집(공저)『목요일 아 침』등.
첫댓글 이 글을 보며 또 한번 눈물을 흘리네요. 구구절절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대 잘 계시나요?
산영회 모임과 발송할 때 언제나 먼저와 챙기고 손 빠르게 마무리짖던 그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는 문우가 되었습니다. 며칠 후 가을호 발송일인데 이젠 만날 수 없게 되었군요. 언제인가 산영회모임에서 회비를 받아합산을 하려고 계산기를 두들겼드니 내가 하겠다고 하며 그대로 우 아래로 훌터 보더니만 합계산이 나오는것 이었습니다. 이렇게 훌터만보고 암산으로 모두 끝내던 문우 였습니다. 이젠 더 볼 수가 없겠네요.먼 곳에서도 부디 평안하시길...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4.08.17 10:12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군요. 거길 갈 때면 중앙공원 산책을 자주 했지요. 그 건너 편에 '포도마을'이 보이던데 책이 나올 때 마다 얼굴 보이지 않던 숨은 봉사가 있었기에 '에세이21'의 10년 역사를 쓸 수 있었군요. 늦었지만 삼가 고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생시에 맺은 동료애를 이렇게 절절히 조사를 바쳤으니 망자는 그래도 복 받으신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서길원 작가님의 글이 감동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