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르드에 성지순례를 간 적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개인적으로 두 번 그곳에 갈 기회를 가졌다. 한 번은 혼자서 갔었고, 한 번은 교구 신부들과 신학생들과 함께 갔었다. 그리고 언제든지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그 이유는 치유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치유를 직접 언제든지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52년 오늘, 성모님께서는 베르나데뜨 수비루라는 어린 소녀에게 나타나신다. 프랑스 대혁명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진 가련한 교회에, 모두 18회에 걸쳐 나타나신 성모님께서는 문맹인 소녀에게 당신의 이름을 “원죄없이 잉태된 여인”이라고 알려주신다. 이 말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소녀는 본당 신부님께 여인의 이름을 이렇게 소개하고, 막 전 세계 교회에 교황님의 무류권을 통해 반포된 “원죄없는 잉태 교리”의 주인공이 발현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지역 교회가 들끓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실제로 우리가 루르드를 이야기할 때에, 바로 이 원죄없는 잉태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지만, 오늘 축일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루르드를 기념한다. 치유이다.
성녀 베르나데뜨로부터 시작된 루르드의 역사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치유의 역사로 대변되어 왔다. 수많은 병자들이 성한 몸으로 돌아갔다. 성지에는 그들이 놓고 간 휠체어와 목발이 그득하다. 치유의 증거이다. 동시에 영혼이 치유를 받는 곳이다. 나도 그랬지만 그곳에 가면 우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볼 수 있다. 동시에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하느님 안에서 쉬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지상의 낙원이 그곳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서 다시 나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 이렇게 영혼과 육신을 치유하는 그곳에서 지낸 시간은 나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귀한 것이리라. 이탈리아의 경우, 우니탈시 (UNITALSI)라는 그룹이 있어서 수시로 병자들을 이탈리아에서 기차로 루르드로 실어 나르고, 그들을 위해 친절히 봉사와 간호를 한다. 젊은 신앙인들이 방학을 이용하여 이런 봉사를 한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주일에 루르드에서 국제미사라고 하여 다양한 언어로 하는 미사가 지하 대성당에서 있는데, 나를 따라 다니면서 성체분배를 돕던 소녀는 아일랜드 출신이고 한 달간 봉사한다고 말해주었다. 그 소녀는 치유를 돕지만 자신도 치유를 받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모님에 거의 사로잡힌 분이었다. 교황 문장만 보더라도 십자가와 마리아의 M자 하나밖에 없다. 문장의 색도 교황님께 의무적인 흰색과 금색 외에 성모님의 색인 하늘색 밖에 없다. 그분은 세계의 성모 성지는 기회가 될 때마다 가셨다. 아주 작은 곳까지도. 그런 복자께서는 1992년에 루르드 성모님 발현 기념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제정하신다. 그분의 성모 신심의 결과이다. 실제로 돌아가시기 한 두 해 전에, 파킨슨씨병으로 고생하시면서 말씀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던 분께서 루르드에 가셔서 기도하시는 장면은 유명하다. 몸을 못 가누시면서도 성모상 앞에서 절규하시며, 마치 화를 내시는 듯 당신의 질병을 고통스럽게 눈물과 온몸으로 고백하시며, 당신의 아픔을 고백하시던 복자의 동영상이 있다. 그렇게 고통을 호소함으로 영혼과 육신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완전히 당신을 맡기심으로, 비록 현세에서 육신의 병을 치유 받지 못했지만 복자의 영혼이 치유받은 모범을 보이신다. 그렇기에 루르드는 영혼의 치유의 장소이다. 영혼의 치유는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고 호소하는 것으로 벌써 충분히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수없이 많이 질병을 고치신다. 성경에 수시로 보이는 그런 치유들은 영혼의 치유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기능을 한다. 육신의 치유는 세상에 하느님께서 살아계시고, 그분을 믿음으로써만 오로지 영혼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계시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오늘 세계 병자들의 날은 단순하게 육신의 치유가 아니라 영혼이 낫게 되는 신비를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소녀 베르나데뜨가 체험했듯이, 복자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체험했듯이.
재작년에 이탈리아 할머니가 루르드에 휠체어를 두고 왔다. 육십을 막 넘긴 그 분의 인터뷰를 뉴스에서 보았다. 기자가 기적이 일어난 순간에 무슨 기도를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분의 대답은 명료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치유는 하느님 사랑에서 일어난다. 치유는 하느님 사랑을 닮은 사람들의 사랑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을 치유한다. 내 영혼만이 아니라 나의 주위의 사람들의 영혼도 치유한다.
오늘 세계 병자들의 날을 지내면서 나 자신도 그곳에서 작게나마 체험했고 우리 교회가 계속 가르쳐온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영혼과 육신의 주인이시다”라는 것이다. 그분이 치유하시는 유일한 분이고, 그분이 영혼과 육신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병의 치유는 영원한 생명이 하느님께 있다는 증거를 신앙이 약한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는 기능을 하는 것이지, 그것이 치유 받은 사람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기복적인 증거의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루르드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은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가 영원한 삶을 얻게 된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더 나아가 예로 든 이탈리아 할머니처럼, 병자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공유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깊은 희망이 현실화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살아있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며, 병자성사를 비롯한 봉성체를 통해 교회가 사제들에게 실천하도록 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 이런 지향으로 병자들을 위해 마음을 모으자. 특히 외롭게 혼자 앓고 있을 수밖에 없는 많은 병자들을 기억하며.
“병자 방문을 주저하지 마라. 그런 행위로 말미암아 사랑을 받으리라” (집회 7,35).
ㅈ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