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시헌력 도입 과정 과정과 갈등
규린아, 너는 조선왕조 최대의 치욕은 무엇이라 생각하니? 삼전도의 굴욕이겠지. 병자호란은 그렇게 굴욕적인 항복으로 끝났어. 조선은 이제 청나라의 번속국이 된 것이지. 번속국은 황제국으로부터 역법을 받아쓰는 것이 동아시아의 전통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야. 그런데, 조선은 칠정산 내외편에 따라 독자적인 역서를 제작하고 있었지만, 명나라에서 역법을 받아쓰는 형식을 취했거든. 조선은 이번에는 청의 역법을 받아써야 했지만, 숭명배청론자들(명나라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망설임으로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어.
인연이라는 드라마를 함께 시청한 적이 있지? 병자호란이 끝난 후 수많은 조선인이 포로로 끌려가던 장면을 기억하니? 일반 백성들만 아니라 왕자 두 분 역시 인질로 잡혀갔잖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나중에 효종)이 그들이었지. 1644년 9월 소현세자는 심양에 머물다 북경으로 옮겨갔는데, 그곳에서 아담 샬을 만나게 돼. 아마 아담 샬이 조선의 세자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전도를 목적으로 접근했을 거야. 아니면 소현세자 자신이 호기심에서 선진 문물을 접해 보고 싶어 했을 수도 있지.
어찌 되었든 소현세자는 두 달 넘게 아담 샬과 교류하면서 그로부터 천문, 수학, 종교에 관한 서적과 마리아상 등을 선물로 받았어. 아담 샬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소현세자가 대통력을 개정할 필요성을 언급했다고 해. 소현세자는 1645년 1월 귀국했는데, 샬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역법 개혁을 의도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소현세자는 그해 3월 유명을 달리하고 말아.
그러나 조선인으로서 서구의 문물과 천문역법에 관해 처음 접한 사람은 소현세자가 아니었다고 해. 1631년 정두원(1581~?)이 사신으로 북경에 가던 길에 산동 반도의 등주라는 곳에서 로드리게스(João Rodrigues, 陸若漢, 1561~1634)라는 선교사를 만났지. 서로 친교를 맺어 한문으로 된 천문서를 선물로 받고 역관 이영후를 통해 로드리게스와 토론했다고 해. 역관 이영후는 서양식 천문 계산법을 배우기 위해 그곳에 체류했단다.
조선 조정에서 역서 개정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한흥일(1587~1651)이라고 하는 분이야. 한흥일은 봉림대군을 수행해서 북경에 체류하면서 시헌력서와 서양신법역서를 읽어봤다고 해. 그리고 그는 몇 권의 서적을 구해 1645년 6월 귀국했는데, 귀국하자마자 적극적으로 역법 개정을 주장했어. 한흥일은 집안 제사까지 시헌력에 따라 모셨다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고 해. 한흥일에 자극받아 제상 김육(1580~1658)은 인조에게 역법 개혁의 필요성을 진언하게 돼. 김육은 한흥일이 가져온 책만으로는 시헌력의 원리를 아직 알 수가 없으니 사신이 북경에 갈 때 관상감원을 함께 보내 흠천감에 물어보게 하자고 주청했어. 한흥일이나 김육 등은 대통력이 이미 천상의 도수와 어그러졌다는 사실을 알고 시헌력이 서양인의 역법임에도 역법 개정을 주장한 거야.
당시 조선의 관상감원들은 궁금한 것이 많았을 거야. 칠정산 내외편에서는 하루를 100각으로 나누었는데, 왜 시헌력에서는 96각으로 나누는지, 평기법을 정기법으로 대체한 까닭은 무엇인지, 한 달에 절기가 세 번 들어도 상관없는지 등이 가장 궁금했을 거야. 1646년 6월 사은사가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북경에 파견되었지만, 아담 샬을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단다. 번속국인 조선은 적어도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청나라의 역법인 시헌력을 시행해야 할 텐데, 정확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무조건 사용할 수도 없었어. 그러는 동안에 1648년 역서에서는 절기가 대통력서와 달라지고 대통력서에서 윤3월이 시헌력서에서는 윤4월이 되는 혼란이 발생하게 돼. 그래서 1648년 9월 다시 일관 송인룡을 북경에 파견했어. 송인룡은 아담 샬을 만났으나 청 조정의 단속이 심해져서 계산 방법에 관한 책과 별자리 지도를 받아오는 데 그쳤단다.
이렇게 5년 동안의 수고 끝에 1651년 드디어 시헌력법을 어느 정도 배우는 데 성공했어. 당시 관상감원들은 수입 서적을 통해 시헌력을 연구했는데, 김상범(?~?)이 가장 뛰어났다고 해. 김육의 주청으로 1651년 김상범은 북경에 파견되었어. 김상범은 청나라 관헌의 방해를 뚫고 흠천감원들을 뇌물로 매수하여 겨우겨우 역법을 익혔다고 하지. 이 과정에서 데리고 간 하인이 흠천감 도서관 바닥에 침을 뱉다가 관원에게 들키는 일이 벌어졌어. 그 하인이 관원들에게 치도곤을 당한 것은 그렇다치지만, 김상범 역시 관리 책임으로 곤장을 맞았다고 해. 좀 슬프지 않니? 과학자가 연구하는 데 이런 치욕을 당해야하다니!
그런 곤혹스러운 상황에서도 1년 남짓한 연구 끝에 김상범은 기어이 1653년 역서를 시헌력법으로 제작했단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이나 중성(해가 뜰 때와 질 때 하늘의 정남쪽에 보이는 별)의 출몰 등을 관측해서 역서의 정확성을 확인했어. 그런데 김상범은 칠정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을 미처 배우지 못했다고 해. 큰달과 작은달, 절기, 윤달의 배치는 시헌력법을 쓰고 칠정의 위치 계산은 칠정산 외편에 따를 수밖에 없었어. 1655년 김상범은 칠정 행도(달, 해,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운행하는 길)의 계산법을 완전히 배우기 위해 다시 북경으로 떠났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도중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단다.
현종 대(1660~1674)에는 시헌력 자체에 대한 신뢰가 계속되지 못했어. 청나라에서 시헌력이 일시적으로 폐지되고 대통력으로 회귀했다가 시헌력이 재시행되는 혼돈이 일어났지. 아담 샬이 대통력 역법사 양광선의 모함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풀려난 사건이 일어났던 거야. 이 사건을 역국대옥(曆局大獄)이라고 부른단다. 역법을 연구하는 기관에서 일어난 큰 고발 사건이라는 말이지. 1664년 아담 샬의 흠천감에서 죽은 태자의 제삿날을 잘못 계산한 일이 있었어. 대통력 역산가 양광선이 이를 빌미로 아담 샬을 고발한 사건이야. 유교 이념을 숭상하는 봉건왕조에서 죽은 태자의 제삿날을 잘못 잡은 것은 역모사건에 버금가는 큰 사건이지. 아담 샬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다행스럽게 황후의 은전으로 풀려나게 되었단다. 하지만 1665년 역서는 시헌력이 아니라 대통력으로 인쇄해야 했어. 그러나 대통력이 천상 행도를 올바로 계산하지 못했다는 것이 밝혀져서 아담 샬은 흠천감정에 복귀하고 역서는 다시 시헌력법으로 제작되었지.
이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그러지 않아도 청의 역법을 사용하는 데 불만을 품고 있었던 숭명배청론자들이 나서서 시헌력 폐지를 공식적으로 제기했어. 청나라는 오랑캐가 세운 나라이니, 그 역법을 받아쓰는 것은 사대(事大 : 작고 약한 나라가 크고 강한 나라를 섬김)에 어긋난다는 것이야. 이들은 명나라 역법인 대통력만이 유교의 이념을 구현하고 있다고 믿었단다. 그렇지만 너도 기억하고 있지? 시헌력이 청나라의 역법인 것은 분명하지만, 제정된 것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때였다는 것을 말이야. 그래서 시헌력이 결코 오랑캐의 역법이 아니라 ‘대명 황제가 내려주신 황은이 망극한 역법’이라는 논리로 숭명배청론자들의 저항을 누를 수 있었단다.
정작 끊임없이 반대론을 펼친 사람은 관상감원 중 한 사람이었어. 당시 조선의 관상감에는 역법을 담당하는 세 분야의 역관이 있었는데, 각각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 분야가 그것이야. 명과학이라는 말이 좀 낯설지? 명과학이란 인간이 태어난 년, 월, 일, 시의 간지(60주기로 반복되는 년, 월, 일, 시에 붙여진 이름)로 인간사를 예측하는 학문을 말한단다. 그게 무슨 학문이냐고 너는 반문하겠지? 네 말이 맞다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결정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수단이었단다.
조선 초부터 명과학 체계는 수시력과 대통력을 바탕으로 길흉을 점치고 있었는데, 시헌력이 기존의 명과학 체계에 상당한 혼란을 일으킨 거야. 시헌력은 절기의 간지 배열 규칙을 무너뜨리거든. 예를 들어 대통력에서 한식은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로 누구나 알고 있었다고 해. 그러니 동지의 간지를 알면 자동으로 한식의 간지를 알게 되고 간지의 배열로 행과 불행을 쉽게 점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런데 시헌력에서는 역서를 보지 않으면 어떤 절기도 추정할 수가 없게 된 거야. 이것은 명과학 종사자들의 전문성과 위신을 뒤흔드는 일이었겠지. 그 때문에 명과학자들이 나서서 시헌력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거야. 대표적인 인물이 관상감에서 명과학을 담당했던 송형구라는 분이야. 이 분은 세 차례에 걸쳐 반대 상소를 올렸단다. 이러한 반대론은 시헌력 체계에 기초해서 명과학을 새롭게 정비한 협길통의(協吉通義)라는 책이 조선에서 유포된 후 비로소 잠잠해졌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