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환경은 모든 문화의 출발점이다. 모든 문화는 자연환경조건을 기반으로 발전하였다. 자연환경의 다름에 따라 문화의 발전방향도 달라진다. 바닷가에서 살던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얻고 있기 때문에 바다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산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가 서로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곰과 호랑이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곰과 호랑이에 신이 깃 들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상어나 고래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상어나 고래에 신이 깃 들어 있다고 생각할 것인가. 또한 바다에서 배를 타고 다니던 사람들은 일찍 바다를 이용하여 다른 문화와 접촉하는 것이 발달할 것이고 육지의 사람들은 말이나 기타의 운송수단을 이용하여 다른 문화와 접촉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배경은 사람의 사고와 행동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지금과 같이 복잡한 경제문제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생활이 복잡하지 않았던 과거로 돌아가 보면 자연환경과 경제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연환경이 좋아 먹을 것이 풍부한 지역에서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급자족이 이루어 졌기 때문에 다른 종족과 교역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땅이 척박한 곳에서는 교역을 통하여 물자를 조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 다른 부족의 것을 쟁취하거나 또는 일찍부터 상업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비교만으로도 우리의 문화가 결국은 자연환경에서 비롯됨을 쉽게 알 수 있다.
음식문화도 기본적으로는 자연환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 최근에 들어 교류가 증대되면서 음식문화의 뒤섞임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지만 19세기 이전까지만 하여도 음식문화는 언어와 더불어 가장 보수성이 강한 부분이었다. 특히 자연환경은 삶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쳐 삶의 기본모습을 결정한다. 초지(草地)가 많아 유목이 기본 생활로 자리잡은 곳에서는 음식물 채취의 대상과 종류도 극히 제한된다. 정착하지 않고 계속 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다보니 음식의 종류가 단순하고 쉽게 조리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발전되어간다. 이러한 음식문화는 정착하고 사는 사람들의 음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정착하여 사는 사람들의 음식은 다양하고 조리하는 방법도 복잡하게 변하게 되지만 이동하는 사람들의 음식은 간편하고 종류도 그리 많지 않게 된다. 종교도 이러한 자연조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이 살아온 자연환경 체계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거나 두려움의 대상들이 신으로 부각이 되고 이것을 바탕으로 원시 종교가 발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바탕에서 출발한 종교는 문화양태가 다변화됨에 따라 그 변화를 시작하여 현재의 종교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예에서 보듯이 모든 문화현상의 근간은 자연환경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떠한 자연환경에서 살아왔는가에 따라 문화의 양상이 결정되는 것이다.
집 역시 문화를 이루는 한 갈래라고 보았을 때 자연환경을 떠나서 집을 생각할 수 없다. 집은 자연환경에서 사람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각 지역의 전통가옥에서는 자연에 적응하고 있는 집의 모습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한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옛 집은 지역마다 그 특징이 있다. 지역마다 특징이 있다는 것은 철저하게 지역의 자연조건에 맞추어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자연조건이라는 것은 단순히 춥다거나 덥다거나하는 기후부터 시작하여 자연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와 자연으로 인한 재해에 어떻게 방어하는가의 문제까지를 포함한다. 한옥의 구석구석을 보면 이러한 자연에 어떻게 적응하고 발전하여 왔는지를 알 수 있다. 한옥에서 집에 적응하였던 대표적인 예들은 기단, 기초, 온돌과 대청, 지붕과 처마, 굴뚝, 부엌 등 집의 구성요소 들에도 있지만 건축재료, 집의 형태, 평면 구조 등 집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골고루 나타나게된다. 이러한 것들 중 어떠한 것은 오히려 사회, 문화적 요소가 더 강조되어 나타나는 것도 많다. 그러나 사회·.문화적 요소가 강조된 부분도 그 출발점은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것에서 발생되었기 때문에 먼저 자연환경의 요소로서 검토하여 볼 필요가 있다.
가. 집의 구성요소와 자연환경
온돌
온돌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친근한 단어이다. 이미 여러 책에서도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설명은 하지 않고 아직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관심하게 넘어가는 점 몇 가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한다. 첫 번째는 언제부터 온돌이라는 난방시스템이 한옥에 완전하게 자리잡았는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난방의 효율에 대한 문제이고 세 번째는 온돌시스템과 부엌의 구조와의 문제이다. 네 번째는 온돌이 우리 생활 문화와 정서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한다.
우선 온돌이 우리 나라만의 고유한 난방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이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온돌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점에서는 우리보다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나라에서는 바닥 난방만을 하는데 비하여 로마시대의 온돌은 벽체 난방까지 하고 있다. 이것은 집을 짓는 재료가 우리와 달랐기 때문이다. 로마시대는 벽돌이나 돌로 집을 지어 벽체를 2중으로 만들 수 있어 그 사이로 열기를 보내 벽체까지도 난방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난방시스템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중세까지 명맥을 이어오다가 그후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보면 문화가 퇴보한 것이다. 이렇듯 문화란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고유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다시 주제로 돌아오자 그러면 언제부터 우리 나라에서 온돌이 우리의 대표적 난방시스템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신영훈 선생의 견해로는 고구려의 쪽구들에서 시작된 온돌이 고려시대까지는 한강이북까지 전파되었고 고려말에서 조선 초까지는 문경새재까지 남하하고 임진란 전후로 남부해안지방으로 전파되었다고 하며 제주도에는 17세기경에서야 전파된다고 하였다. 또한 온돌은 고구려에서 발달된 문화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향이 강하였던 영동지방에서는 더 일찍 남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였다. 이처럼 온돌이 우리 나라 전체에 완전히 정착하게되는 것은 제주도를 제외하고도 16세기말에 이르러서이다. 온돌의 전파에 대한 간접적 증거는 불교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시설도 건축물이기 때문에 당대의 생활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온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이 좌식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시설 또한 이러한 생활의 모습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인 1430년(세종 12년) 전라남도 강진에 세워진 국보 13호인 무위사 극락전을 보면 바닥마감이 전(塼)으로 되어있다. 현재의 마루바닥은 후대에 다시 설치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마감은 아직 좌식생활이 이곳까지 전파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아직 좌식생활이 이곳에서는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루를 깔지 않고 전(塼)으로 마감한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5세기초만 하여도 전라남도 지방까지는 온돌이 일반화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새로운 변화가 온전하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오랜 동안의 적응기간이 필요로 한다. 우리의 새로운 주거방식으로 완전하게 자리잡은 아파트도 바닥난방으로 정착한 것은 1980년 대 중반으로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초기의 아파트는 방만이 바닥난방이었고 기타의 방은 라디에이터라는 온수난방이었다. 이러한 혼합난방방식이 전체를 온돌로 변화되기까지는 2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처럼 하나의 새로운 체계가 정착하기에는 많은 난관이 있어 우리의 것으로 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고 우리의 고유의 전통으로 생각하고 있는 온돌도 우리 나라에 정착하는데는 1000년 이상의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
두 번째로 요사이 사람들은 옛날 집은 춥고 불편하여 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한옥에서 살면서 추운 겨울 코가 찡하게 시려오는 윗풍에 시달려 본 경험이 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불편한 것은 놔두고라도 너무 추워 집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듯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우리 나라의 집만 유독 추워서 집의 구실을 못하였다는 이야기인지 또는 현대의 집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춥다는 것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선 다른 나라의 집과 비교하여 한옥이 특별히 추웠는가 하는 점이다. 정확하게 과학적 수치까지를 들먹이며 비교 검토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여 보자. 기본적으로 집이 따뜻하기 위해서는 우선 단열성능이 확보되어야 하고 다음으로 난방연료를 풍족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서구의 여러 나라도 이러한 점을 만족시킬 수 있었던 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다. 더욱이 단열이라는 개념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더욱 금세기 중반을 넘어서 이야기이다. 이러한 사실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금처럼 따뜻한 집에서 살게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열성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술의 발전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단열성능을 좌우하는 것은 단열재와 기밀성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서는 목재와 흙을 주재로 심벽구조로 만들어진 한옥은 단열성능은 우수하나 상대적으로 기밀성이 많이 떨어진다. 기밀성이라는 것은 창문의 틈새라든지 문의 틈새, 벽의 틈새가 얼마나 많은 가에서 결정된다. 심벽구조라는 한옥의 특징은 기밀성에서 매우 취약한 구조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최근 기술의 발전으로 거의 해결되고 있다. 최근에 지어지는 한옥은 현대적 기술을 응용하여 단열성능과 기밀성을 대부분 해결하였기 때문에 결코 춥지 않다. 결국 집의 따뜻함은 난방연료를 얼마나 많이 사용하였는가와 단열성능 향상 여부의 문제이다. 결국 특정한 양식을 지닌 한옥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밀성이 사람들에게 무조건 좋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공기가 움직이지 않고 환기가 되지 않는 공간이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인가는 따져볼 문제이다. 움직임과 흐름이 없는 공기는 고여있는 물처럼 깨끗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환기를 시켜주라는 권유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약간은 춥지만 늘 맑은 공기가 실내에 흐른다면 흐르는 물처럼 우리에게 쾌적하고 맑은 환경을 제공하여 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많은 화석 연료의 남용으로 공기까지 맑지 않게 되었다. 결국 현대에 사는 사람들은 따뜻함을 얻은 대신 쾌적함을 잃어 버렸다.
세 번째로 살펴볼 문제는 온돌과 부엌의 관계이다. 가끔 여성분들이 한옥은 여성들을 힘들게 만들려고 만든 집인 냥 이야기하는 것을 가끔 듣는다. 여성의 움직임이라는 것만으로 보면 여자에게 문제가 있는 집이라는 것이 맞는 말로 생각된다. 그러나 집을 단순히 여성의 움직임만으로 보는 것은 너무 집을 단편적으로 보는 것이다. 부엌의 문제는 총체적으로 집에서 어떠한 것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온돌을 들이기 위해서는 온돌 구조에 적합한 집으로 만들어야 한다. 온돌을 들이려면 불을 때는 아궁이와 방바닥 면이 최소한 3-4자(약 90-120cm)정도 차이가 나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궁이가 있는 부엌과 방은 당연히 높이 차가 날 수밖에 없다. 또한 부엌이 방과 붙게 된 것은 난방과 취사를 같이 해결하려는 의지에서 생겨난 구조이다. 조선조 보다 윗 시대로 가면 부엌은 본채와 관계없이 반 빗간 형식으로 별도의 구조로 독립되어있었다. 그 당시의 생활은 앞서 말한 것처럼 온돌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지 않아 난방과 취사가 별도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한 온돌의 원조인 쪽구들은 걸터앉도록 되어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주로 생활하는 건물의 바닥은 외부와 높이의 차이가 많을 필요가 없다. 이러한 형식이 집에서 난방과 취사를 같이 해결하여 연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구조로 발전하면서 부엌이 건물 내로 같이 붙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온돌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부엌과 생활하는 공간과 높이의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나무를 난방과 취사의 연료로 사용하는 생활 구조에서는 오히려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 연료의 효율적 이용이라는 문제에서 취사와 난방의 겸용이라는 선택은 매우 합리적인 결정인 것이다. 결국 부엌의 구조는 겨울을 보내야하는 우리의 자연환경에서 추위를 이겨냄과 불편함 사이의 선택에서 불편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부엌에 대한 불만 중 또 하나는 통풍이 너무 잘되어 겨울을 지나는데 불편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옛 살림을 하여본 여인의 증언을 듣고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러한 생활을 오랜 동안 경험한 분의 말씀으로는 '겨울보다는 음식이 쉬 상하는 여름이 음식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통풍이 잘되는 부엌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연료를 절약하기 위하여 난방과 취사가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부엌의 구조에서 부엌 내의 연기가 잘 배출되기 위하여 환기는 필수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부엌의 구조가 환기가 잘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옛 한옥의 부엌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집을 가보면 창문을 유리 또는 비닐로 대부분 막아 놓고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변화가 있는 집의 부엌에서는 취사 연료로 가스나 기름 등을 사용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취사를 위한 연료와 도구가 바뀌면서 이제 아궁이의 활용도가 낮아져 예전과 같은 환기가 필요없게 된 결과이다. 결국 부엌의 구조 역시 우리가 생활방식에 있어 자연환경의 조건에 따라 어떠한 선택을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온돌이 우리의 생활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보자. 온돌의 선택은 우리의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입식생활에서 좌식 생활로의 변화는 우리의 생활 모든 면에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생활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서양이나 중국의 집을 보면 입식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집에서 생활은 가구가 많이 필요하게된다. 바닥에 앉을 수 없다보니 의자가 필요하게되고 그에 따라 물건을 올려놓거나 손님과 대화할 때 찻잔을 놓기 위한 탁자가 요구되는 것이다. 또한 바닥에서 잘 수가 없으므로 침대라는 가구가 필요하게된다. 결국 의자, 탁자, 침대 등은 입식생활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구도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치장스러운 도구일 뿐이므로 이러한 가구들이 없다. 결국 가구는 정착한 민족이 입식생활을 하려고 만든 도구일 뿐이다. 이러한 가구가 만들어짐에 따라서 가구의 배치에 따라 실의 기능이 분화된다. 손님을 맞이하는 곳에서는 탁자와 의자가 필요하게되고 잠을 자는 곳에서는 침대가 필요하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침대가 있는 곳은 잠을 자는 공간으로 인식하게되며 더욱이 부부의 침실인 경우 그 곳은 내실의 개념이 되어 함부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실의 기능 분화는 일부분 집의 규모확대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에 비하여 우리의 한옥을 보면 바닥이 따뜻하기 때문에 침대를 놓는 것이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따뜻한 온기를 그대로 느끼기 위하여 잠잘 때만 요와 이불을 깔게 되고 낮의 일상의 생활에서도 따뜻한 온기를 활용하기 위하여 잡다한 가구를 들이지 않는 것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즉 열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쓸데없는 가구를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 한옥에서는 방의 기능에 따른 구분이 없어지고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온돌 때문에 일어나는 생활의 변화는 가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온돌을 들인 이후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예전과 같이 신을 신은 채로 들어가는 것과는 완연히 다른 생활 방식을 요구하게되었다. 우선 신을 벗는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가 하루에도 수십 번도 더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신는 신발도 그 형태가 변하게 된다. 고려시대까지만 하여도 일상의 신은 발목까지 오는 장화와 같은 형태였다. 이러한 형태의 신은 말을 타는 민족인 경우 거의 같다. 그러나 이러한 목이 긴 신발은 신고 벗는데는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따라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을 타지 않는 후로부터 신발은 벗기 편한 형태는 변화한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좌식생활을 하면서 신발을 신고 벗는 불편을 없애기 위하여 신발의 형태가 변하여 지금과 같은 신발로 변화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습관은 일상의 예절에도 영향을 미친다. 서양에서는 아직도 실내에서 신을 벗는 것은 결례라고 한다. 이것은 신을 자주 벗을 수 없기 때문에 신을 벗게되면 발냄새가 심하게 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신을 벗는 것이 일상화되어 신을 신고 있다는 것을 오히려 불편하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무실에서도 별도의 실내화를 비치하고 근무하는 동안 신을 벗고 실내화를 신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온돌을 들인 것 때문에 일어나는 변화의 극히 일부분이다. 온돌 때문에 일어나는 변화 중 중요한 것은 정서의 변화이다. 온돌 문화는 우리의 정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온돌 때문에 발생되는 가구 등과 같은 외형적 변화보다는 정서적인 변화가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 장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므로 정서의 변화에 대하여는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겠다.
대 청
대청은 온돌과 더불어 한옥을 특징 지우는 중요한 대상이다. 대청에 대한 설명도 구들만큼 많이 소개되어 있어 부연 설명을 하지 않고 새로운 관점에서 보아야 할 점을 두 가지만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대청의 발달의 이유이다. 우리의 대부분은 대청이 남쪽지방의 고상주거에서 발달되어온 여름을 위한 공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의견이 크게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대청의 목적을 이해하기에는 아직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이러한 점에 대하여 혹시 이것이 제례공간과 맞물려 발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견을 제시한 분이 있었다. 이 견해를 듣는 순간 그럴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 조 초기에는 성리학적 국가관을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사당 짓는 것을 권장한다. 그리고 사당을 지을 만하지 못한 집은 대청에 위패를 모시는 것도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예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산의 성준경씨 댁, 곡성의 군지촌 정사, 영덕의 만괴당 등은 별도의 사당이 없고 대청 한편에 위패를 모셔두었다. 이렇듯이 대청은 단순히 여름을 나기 위한 공간만이 아닌 제례의 중심으로 활용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대청은 자연환경에 적응하려는 시도와 사회 정치적 요소가 어울려 발달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할 예는 일반 백성의 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성의 집에서 대청이 그리 발전되지 못하였다는 것도 위의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백성들의 집에서 대청을 만들지 못한 것은 집의 규모를 크게 할 수 없었다는 경제적 문제가 가장 큰 이유이라고 생각하지만 만들 수밖에 없을 만큼 절실한 요구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대청의 과학적 기능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보자 여름에 대청에 누워본 사람들은 대청의 시원함에 대하여 늘 감탄한다. 대청에서는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살랑살랑 바람이 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바람과 깊게 드리운 그늘이 효과로 여름에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작용의 원인은 무엇일까. 옛날부터 더운 여름날에는 사람들이 다리 아래로 모여든다. 이것은 물과 그늘이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다리 아래서는 바람이 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람이 대청에도 있다. 고등학교 과학과목에서 베르뉴이의 정리라는 것을 배운다. 베르뉴이의 정리 중 하나는 유체가 넓은 면적에서 흐르다가 좁은 면적으로 흐를 때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베르뉴이의 정리가 대청에서도 적용된다. 대청의 앞은 넓고 뒷 쪽의 개구부는 작을 뿐만 아니라 집 전체의 입면을 보면 대청의 면적은 지붕면과 방의 벽면까지 포함하면 상대적으로 작게 되어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아주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에도 대청에서는 꽤 시원한 바람이 불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의 원리가 대청에 숨겨져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과학이란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도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단과 기초
기단과 기초의 설정은 우리 나라의 기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나무가 주재료인 한옥에서 기단과 기초는 반드시 설치되어야 한다. 기초의 문제는 나무라는 재료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기초 위에 기둥을 세우는 것과 맨 땅에 기둥을 세우는 것은 목재의 수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살아있는 나무에서 물이란 생명과 같은 것이지만 죽어 목재로 사용되는 나무에서는 물은 목재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치명적인 요소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습기와 적당히 공기가 접하게 되면 나무는 쉽게 썩는다. 그러나 물 속에 완전히 잠겨있는 상태라면 공기와의 접촉이 차단되면서 오히려 나무는 썩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물위에 세워진 도시인 베네치아에서는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건물의 기초를 나무 말뚝 위에 얹어 놓았다. 나무말뚝의 공법은 콘트리트 말뚝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 많이 이용되었다. 고대의 건물의 유구를 보면 구멍을 뚫어 기둥을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목구조에 대한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기초를 따로 만들지 않고 흙바닥에 구멍을 뚫어 기둥을 세운 것이다. 옛사람이라고 나무가 흙에 접하면 쉽게 썩는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식으로 집을 지은 것은 아직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집을 짓는 기술이 발전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집 자체의 무게가 그리 많지 않아 맨땅 위에 집을 짓더라도 집이 가라앉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생활이 발전되어감에 따라 건물의 규모가 커지게 되고 보다 항구적인 건물을 만들 필요가 발생하자 나무가 썩는 문제는 이제 중대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안된 것이 기단과 기초이다.
특히 우리 나라처럼 여름에 비가 많이 오고 겨울에도 눈이 많이 오는 기후에서는 기단을 만드는 것이 나무로 지어진 집을 보호하는데 매우 적절한 방법이다. 기단을 만들어 지면과 높이를 달리하면 최소한 기단으로 둘러싸인 부분만큼은 지면에서 올라오는 물기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것이다. 기단을 높게 만들면 만들수록 물기와 습기로부터 해방되지만 너무 높을 경우 이용하는데 불편이 따르기 때문에 적절한 높이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비가 많은 곳에서는 기단이 다른 지방보다 높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낮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기초는 건물의 무게와 습기 문제 때문에 고안된 구조이다. 모든 건물의 무게는 기둥으로 전달되고 기둥으로 전달된 무게는 땅으로 전달되어 궁극적으로 땅이 모든 무게를 받치고 있게 된다. 건물을 지을 때 딱딱한 땅을 찾는 이유는 땅이 무를 경우 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라앉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의 집의 경우 집 자체의 무게가 그리 무겁지 않아 땅위에 기둥을 세워도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기초 형식만을 놓고 보면 땅에 구멍을 파고 기둥을 세운 시절의 건물은 자체 무게가 그리 무겁지 않고 건물의 구조도 그리 복잡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부재를 쉽게 교체하거나 손쉽게 새로 지을 수 없는 구조라면 이러한 기초 방식을 차용할 수 없을 것이다. 건물 자체의 무게가 그리 무겁지 않고 구조가 복잡하지 않았던 건물이 점차 장식과 지붕의 재료 등이 변하면서 예전의 방식으로 기둥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땅위에 바로 올려놓는 기둥으로는 집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게 되자 기초라는 것을 고안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자연환경과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기술발전과 집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고 습기의 문제만을 이야기하기로 하자. 기초는 집을 세우려는 기술적인 문제에서 발전하여갔지만 부수적으로는 땅과 기둥을 분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목재로 만든 기둥이 땅과 분리된다는 것은 기둥을 습기로부터 격리시켜 주어 기둥이 썩는 것을 방지하여 준다. 기초의 설치로 인한 기둥과 지면의 분리 덕분에 기둥의 수명이 거의 반영구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기둥과 처마
모든 집에는 지붕이 있다. 그러나 처마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평지붕의 집은 처마가 없는 경우가 많다. 지붕이 평지붕인 곳은 모두가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처마는 이처럼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고안된 장치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처마가 있더라도 처마가 돌출되는 길이는 지역마다 다르다 그 목적이 단순히 비를 흘러내려 버리는 것을 목적으로 할 때는 처마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도 되지만 비가 들이치는 것을 방지할 경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돌출된 길이는 길어 질 수밖에 없다. 들이치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설치되었을 경우도 그 지역의 바람이 어느 정도 강한가에 따라 달라진다. 처마는 햇빛으로부터 그늘을 만들 때도 매우 유리하다. 비가 내리지 않지만 더위가 심한 지역에서는 별도의 차양을 설치하여 그늘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지붕의 경사는 그 지역의 강수량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눈과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은 당연히 지붕의 경사가 급할 수밖에 없다. 눈의 경우는 흘러내려 눈의 하중으로부터 집을 보호하려는 목적이고 비의 경우는 빨리 흘러내리게 하여 비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우리 나라는 비가 많이 오고 여름과 겨울이 같이 있는 기후이다. 이러한 기후에서 지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비로부터 집을 보호하고 햇빛을 잘 조절하여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는 역할을 지붕이 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비가 많이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의 재료는 목재와 흙이 주로 이용된다. 이 둘은 모두 물과는 상극이다. 그러므로 비로부터 벽체를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처마가 많이 튀어나온 것도 비로부터 벽체를 보호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또한 기단을 빗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처마는 기단보다 조금 더 나오게 설치된다. 기단 위에 빗물이 떨어지게 되면 벽체에 바로 손상이 가기 때문에 기단을 보호하는 것은 건물의 수명과 직결된다.
지붕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맞배지붕, 사모지붕 등이 대표적이 지붕의 형태이다. 이러한 지붕 중 맞배지붕은 처마가 앞뒤로만 나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측면은 비로부터 취약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맞배지붕의 경우 측면으로 도리를 많이 빼내어 깊은 처마를 만들어 주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도리를 많이 빼낼 경우 목재의 크기가 커져 공사비가 많이 들게 된다. 공사비의 증가는 도리가 커지는 것 때문 만은 아니다. 도리를 많이 빼면 지붕의 면적이 커져서 서까래 및 기와가 많이 들게 된다. 옛날 집을 지을 때 구하기 가장 힘든 것이 기와이다. 기와를 굽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가마를 만들고 땔감과 흙을 확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건물을 짓는데 제일 확보하기 힘든 것이 기와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조의 경우 주변에 기와가마가 설치되면 주변에서 집을 지을 계획이 있는 사람들이 미리 기와를 주문하여 확보하여 두었다고 한다. 이처럼 기와를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기와를 설치하는 면적이 줄어들면 그만큼 공사비가 많이 줄어들게 되고 공사가 쉽게 된다. 결국 경제적인 문제가 봉착하게 되자 사람들은 공사비를 줄이면서 빗물에서 벽을 보호하기 위하여 방풍널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처럼 방풍널은 자연환경의 문제를 경제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굴 뚝
굴뚝이 필요한 것은 집안에서 불을 때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불을 때지 않으면 굴뚝이 필요 없다. 유럽의 건물도 취사와 난방을 위하여 건물 내에서 불의 땠기 때문에 집에 굴뚝이 있다. 굴뚝의 개수를 보면 살고 있는 가구 수를 알 수 있을 정도로 굴뚝이 많다. 지금도 오스트리아에는 굴뚝 청소하는 직업이 있을 정도로 굴뚝이 많았나 보다. 하여간 굴뚝은 불을 때는 곳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다. 굴뚝이 연기를 빨아들이기는 기능은 불길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게 된다. 이러한 원리를 잘 이용한 것이 구들이다. 그러므로 굴뚝의 설치가 구들을 발전시켜 나간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굴뚝에도 과학적 원리가 있다. 뜨거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원리와 앞서 대청의 공기 흐름에서 설명된 베르뉴이의 정리를 실생활에 응용한 것이 굴뚝이다. 이런 원리 때문에 굴뚝이 높으면 연기가 잘 빠져나가 불이 잘 들여진다. 그렇다고 무작정 높게만 한다고 불이 잘 들이는 것은 아니다. 연기가 올라가다 식으면 역류하기 때문에 오히려 연기의 흐름을 방지한다. 이러한 것 문제 때문에 지방 또는 지역마다 굴뚝의 모습이 다르다. 높낮이나 보온의 여부는 지역의 기후 특성에 따라 선택되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너무 추운 곳은 굴뚝이 식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별도의 보온을 하였다. 예를 들어 바닷바람이나 산골의 골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곳에서는 짚으로 싸서 굴뚝을 보온하였다. 이렇게 바람이 세찬 곳이 아니라도 굴뚝이 건물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면 굴뚝에 보온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보온재료를 써서 시공을 하게되면 굴뚝의 필요한 크기보다 훨씬 커지게 된다. 경복궁 자경전 뒷뜰의 굴뚝은 장식이 너무 아름다워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장식을 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굴뚝의 보온 때문이다. 굴뚝이 건물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보온이 필요하여 보온을 한 후, 궁궐의 격식에 맞추어 아름답게 장식을 한 것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굴뚝과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여러 용도로 이용하였다.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아 불이 잘 들이지 않아도 그런 대로 지낼만한 곳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굴뚝과 연기를 이용하였다. 여전에 시골의 생활을 경험한 분들은 마당에 피어 놓은 모깃불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연기는 해충을 쫓아내기 때문에 연기를 그냥 공중으로 날려버리지 않고 벌레퇴치에 이용하는 것이다. 외암리 마을의 영암군수댁 사랑채와 곡성의 군지촌 정사의 안채에는 굴뚝이 없다. 기단에 있는 조그마한 구멍이 바로 굴뚝이다. 이곳에서 나온 연기는 곧장 위로 올라가지 않고 바닥에 깔리면서 해충을 없애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은 이곳의 날씨가 불이 잘 들이지 않아도 그런 대로 견딜 만하였고 불을 때는 나무의 또는 짚푸라기의 연기가 냄새로 향긋하고 사람들에게 해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사이처럼 나무라고 하여도 생나무가 아니고 각종 페인트 또는 방충제로 도포되어 있는 것은 냄새도 고약하고 사람들에게 해가 되어 생각할 수 없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