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타향에서 부르는 희망찬가
본문 : 에스겔 40장 38-49절
찬송 : 40장
약3000천만명이 이동하는 민족대명절 추석은 부모님, 일가친척 및 고향친구를 만나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는 때입니다. 그런데 타향살이를 계속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경찰아저씨, 추석 알바생, 버스기사님. 이보다 더 힘든 사람들은 이혼가정, 탈북자, 월남자들입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이와 똑같은 신세 에스겔. 덩그렇게 걸친 보름달을 보며 ‘같은 하늘 이고 사는데 아 내 신세여! 하늘도 무심하구나!’ 갑자기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깊은 슬픔과 절망의 광풍이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전쟁에서 패한 사람들, 약탈당하고, 죽고,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수고가 헛되고, 하나님의 응답은 이루어지지 않고, 살기위해 서로 투쟁하는 타향살이입니다. 그러기를 벌써 25년. 보고 싶어도, 가고 싶어도, 하나님 만나고 싶어도 갈 수가 없습니다. 머나먼 이국땅에 포로라니--. 하나님 계신 성전은 다 불타고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설령 돌아가려고 해도 염치가 없죠? 하나님 싫다고 떠나 우상을 더 좋아했으니, 행음했으니 낯 뜨거워서 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사람들을 징계하고 치셨습니다. 머나먼 이국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인자하신 하나님은 애끓는 마음으로 이들을 보고 계십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처절하고 아픈 현실에 사는 자기 백성을 위로하고 힘주시고 소망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다시 일어나 인생길을 힘차게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나아와서 편히 쉬길 원하십니다.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공을 하늘 높이 쏘아 올리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인자하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공의와 긍휼이 넘치는 곳, 여호와의 은혜와 다스림이 임하는 곳.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까이 나아올 수 있는 성전의 환상을 보라’ 하십니다.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 대역죄로 하나님께 올 자격이 없는 사람이 돌아올 길을 보이십니다. 돌아올 길을 마련하십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오는 일을 확정하고 이루어질 것 말씀합니다. 1절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여” 4절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서 전할지어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실력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스스로 마음을 돌이키는 자도 없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슬픔이고 절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은 인간의 무능력을 이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자는 반드시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도록 명하시면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죄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막는 장애물, 죄를 친히 제거하시기 때문입니다. 38절 “번제물을 씻는 방이며” 39절 “상 위에서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희생제물을 잡게 한 것이며”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희생제물이 필요합니다. 제물이 인간의 죄를 상쇄시킴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물은 인간의 죄를 대신한 희생적, 대속적 사명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기쁘게 받으심으로써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희생제물은 속죄의 은총과 관계의 회복의 필수입니다. 그런데 짐승의 제물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스스로 책임 회피에 빠지게 되고 위선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제사로서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요구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단번에 십자가에 드렸습니다. 모든 죄인을 대표로 해서 죽으셨습니다.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이 대속적 희생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 때 인간은 속죄와 구원을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대속적 희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십니다. 거듭나게 하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7절 “안문의 안뜰에는 네모 반듯하며 제단은 성전 앞에 있더라” '네모 반듯한' 구조는 그 거룩하고 완전한 모습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솔로몬의 아름다운 성전도 결국 부패하고 타락한 죄의 온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실패한 그 성전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세우실 것입니다. 안문의 안뜰은 제단이 위치한 곳입니다. 흠 없는 제물을 구별하여 드렸던 거룩한 장소입니다. 모든 제사는 이 제단을 통해서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께 올려집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거룩한 제단 위에서 불완전하고 더러운 제물로 형식에 지나지 않는 예배를 드렸습니다(말 1:7, 8). 이것은 제단을 세우신 하나님을 경멸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아예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장소를 폐쇄시켜 버리셨습니다(사 1:13 말 1:10). 그 성전에서 멀리 쫓아내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소를 다시 세우시고 에스겔을 그곳으로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놀라운 초대입니다. ‘내게 가까이 오라’는 은총입니다.
48-49절 “성전 문 현관문의 좌우 벽을 측량하니 이쪽도 저쪽도 다섯 척, 세 척이며---문간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문 벽 곁에는 기둥이 이쪽 저쪽에 있더라” 하나님께서 친히 은혜의 보좌를 베푸시고 말씀하시는 지성소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최종 통로인 이 문의 현관은 좌우가 대칭을 이루는 안정된 구조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성소를 향해 들어갈 때 주위에 마음이 분산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널려있는 각양각색의 주의들로 유혹을 받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손을 놓으시면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지 못합니다. 예배의 순서들이나 삶의 요소들이 모두 흐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소로 들어가는 안문의 현관에 층계가 있습니다. 이 층계는 성결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직분상 실수를 조금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조심스럽게 경건하게 행동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실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약점을 성소 입구의 층계 구조로 보완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가 무분별해지기 쉬운 순간에 하나님은 성도의 경성을 위해 여러 가지 기회를 만드십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자의 삶이 점진적으로 깨끗해지고 성화되어 갈 수 있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도우십니다. 성소 입구의 현관에는 두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습니다(왕상7:21). 그러나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두 기둥은 뽑혀져 바벨론을 위한 물건이 되어 버렸습니다(렘52:17). 이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성전에 새로운 기둥을 친히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소의 거룩함을 견고히 지키게 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세우리라” “나에게 능력이 있노라”
이 성전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환히 열린 것입니다. 이 문을 통해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얼마나 힘들었니? 내가 너의 힘겨운 고통을 안다. 내가 너의 슬픈 눈물을 보았다. 너의 부르짖는 통곡을 들었다. 이제 다 끝났다. 내 집에서 편히 쉬어라” 할렐루야!
거룩한 제단과 성소를 향한 입구의 환상은 포로 되어 타향살이하는 이스라엘에게 커다란 소망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회복되었도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죽어 있는 우리에게도 이 은혜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보이시고 열어 놓으신 환상을 본 것입니다. 다시 하늘에 뜬 둥근달을 쳐다봅니다. 너무도 포근하고 온화합니다. 그의 슬픔과 절망은 안개처럼 싹 사라져 버립니다. “오 할렐루야” 기쁜 노래가 떠져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은혜의 얼굴을 뵈옵고 다시 일어납니다. 타향살이의 치욕과 고통은 온데간데없어집니다. “성전과 제단을 지키는 거룩한 자로 살아가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리라!” 주먹을 불끈 쥡니다. 사로잡힌 지 25년 만에 처음으로 모든 시름을 잊고 깊은 잠을 잡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실히 볼 수 있게 만듭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봅니다. 땅의 것, 현실의 참담함만 봅니다. 그래서 아프고 시리고 낙심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실하게 봅니다. 산소망이 그를 일으킵니다. 다시 살 힘이 절로 생깁니다. 에스겔을 보십시오. 포로로 잡힌 지 25년의 참담한 현실, 고향에 가보 싶어도,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도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만 보였습니다. 그 때는 깊은 실의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환상을 보이실 때 에스겔은 믿음의 눈이 띄었습니다. 믿음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자기는 무능하지만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실 것을 보았습니다. 징계와 심판을 받았던 모든 죄를 사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포로로 고통하는 삶을 다시 회복하실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떠났던 자를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 하실 것을 보았습니다. 에스겔처럼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새 성전의 환상을 보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죄인도 가까이 믿음으로 나아갑시오. 연약한 자도 나아가십시오. 고통가운데 눈물만 짖지 마시고 일어나 기쁨으로 맞으시는 하나님께서 나아가십시오.
그래야만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머나먼 타향에서도 소망찬 노래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전에 거하시며 하늘 보좌에 계신 주 주가 베푸신 모든 사랑 우리 찬양을 주님께 오 아름다운 주의 영광 승리의 함성 들리네 죽임 당하신 어린양께 우리 큰 소리 외치며 찬양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