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0살 중반쯤부터 마라톤을 즐겼다. 물론 처음에는 1킬로미터는 고사하고 5백 미터를 멈추지 않고 달리는 것도 힘들 정도의 저질 체력이었다. 배가 불룩 나와서 그 정도 거리만 달려도 식은땀이 비 오듯 했던 것이다. 그러니 달리는 일은 남의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는 도중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직은 한창 젊은 나이에다 아이들도 어린 데 벌써 건강을 잃고 삶을 의미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달리기를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수백 미터를 가는데도 헉헉거렸다.
어떻든 그렇게 시작한 달리기가 시간이 지나자 거리가 조금씩 늘어났고 시간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한 삼 년 남짓 지나서 마라톤 대회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혼자 학교 운동장을 달리거나 동네 도로를 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자 수많은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달려야 하기 때문에 작은 승부욕도 생기도 해서 기록 단축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때부터 하프 마라톤 대회를 한 달에 2회 정도로 꾸준히 참여했으며 일 년에 한 차례 정도로 풀코스에도 도전을 했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건너 하루씩 15킬로미터 전후로 달렸다. 그때는 주로 인천문학경기장 보조경기장에서 달렸다. 그런 내 달리기를 응원하기 위해 젊은 선생님 한 분이 내게 책을 한권 선물했다. 그 책이 바로 이제 막 읽기를 마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다.
그런데 책을 선물 받고 처음에 몇 장을 넘겨 읽다가는 다른 바쁜 원고를 쓸 일이 있어서 독서를 뒤로 미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 계속 원고와 강의가 밀려드는 바람에 아예 이 책의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다 요 며칠 전 책장을 정리하다가 이 책이 책장 구석에 꽂혀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다시 꺼내 야금거리며 읽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지금도 이틀에 한번 꼴로 10킬로미터 정도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 동안 달리기를 즐긴 것은 그저 달리기가 좋아서 즐긴 것이라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는 그의 소설쓰기를 뒷받침하기 위한 나름의 치열한 자기 검열 같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달리기로 체력을 다지고 그 힘으로 소설을 쓴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한창 때 달리기로 힘을 비축하고 그 힘으로 술을 마신다고 친구들에게 허풍을 떨곤 했었다. 나는 결국 속물이었던 셈이다. 어떻든 하루키의 달리기는 나름대로 치열했다. 미국의 동부에서 하와이에서 일본에서 그는 틈나는 대로 달렸다.
그는 스스로가 실토하기를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웠다고 했다. 그 말이 내게 큰 의미를 가지고 다가왔다. 내 경우도 달리면서 머릿속으로 강의나 세미나의 원고를 쓸 때가 많았다. 그러다보면 뜻하지 않게 멋진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었다.
책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달리기 코스는 하와이 카우아이 섬이다. 4년 전에 가족과 함께 그곳을 방문했었다. 정말 그림 같은 곳이었다. 어쩌면 하루키가 달렸던 곳을 우리는 자동차로 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곳을 가기 전에 책을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이런 세계적인 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마찬가지고 달리기 역시 어느 날 갑자기 하고 싶어졌다고 한다.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라는 에디슨의 말이 무색해 보인다.
이 책은 에세이라기보다는 하루키의 회고록이라고 할 것이다. 글 속에 자기를 온전히 드러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과 소설 쓰기 씨줄로 마라톤이라는 날줄에 얹어 멋스럽게 직조해냈다.
하루키는 달리기에 빠져들어도 소설 쓰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라는 스스로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런데도 마라톤 풀코스, 100킬로미터의 울트라 마라톤 그리고 트라이애슬론까지 달리기를 즐기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일본의 올림픽 은메달 리스트와 달리기를 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둘이 달린 곳이 미국의 콜라라도 주의 보울더의 고산지대라고 했다. 나는 한 달 전까지 그곳에 있었다.
아마도 그가 3천미터를 이야기한 것을 보면 보울더 인근의 로키산 정상 부근을 말하는 것 같다. 그곳의 높이가 3400여 미터이므로 정상아래 도로 높이 정도일 것이다. 보울더 시내에서 내가 즐겨 달리던 보울더 계곡을 따라 달리는 길은 해발 1600여 미터 정도다.
책의 말미에 ‘만약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키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의 달리기에 대한 치열함이 물씬 풍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