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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유자적 등산여행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무념무상
멕시코 유카탄 반도 테오티와칸의 태양의 피라미드(사진 위)와 멕시코시티 역사지구 중앙광장의 매트로 폴리타나 대성당. |
고대 중남미 마야(Maya), 아스텍(Azteca), 잉카(Inca) 문명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어설픈 소망으로 시작한 여행은 한인촌 소나로사(Zona Rosa)의 한 커피숍에서 산산이 깨어졌다.
■ 중남미 문명을 보러 나선 여행길
치첸이트사 입구 상점에서 판매하는 마야 신화 중 한 장면을 꾸민 양탄자. |
마야족 언어로 ‘신의 탄생지’라는 뜻을 가진 테오티와칸(Teotihuacan)에서 태양 및 달의 피라미드와 그 중심 도로 ‘죽은 자의 거리(The Avenue of the Dead)’를, 또한 마야족의 일원인 ‘이트사족’의 ‘샘물 입구’라는 뜻을 가진 치첸이트사(Chichen-Itza)에서 종족 신화에 나오는 뱀의 이름을 빌린 쿠쿨칸(Kukulkan) 신전 등을 둘러볼 때, 중남미 고대 문명은 ‘여러 신에게 산 사람의 생명을 바치는 것(인신공양)’ ‘거대하고 균형 잡힌 건축물’과 ‘화려한 조각 장식’(피라미드) 등으로 구체화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역사지구를 중심으로 위대한 사원(Great Temple)이란 뜻을 가진 템플로 마요르(Templo Mayor)와 중앙광장 중심에 우뚝 선 매트로 폴리타나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을, 1325년(혹은 1345년)에 건설되었다는 아스텍 왕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을, 제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신 네 명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신 우이칠로포츠틀리(Huitzilopochtli) 등을 둘러보고는 중남미 문명의 역사와 문화 흔적을 보겠다는 소망은 더 구체화되어가는 것 같았다.
■ 한민족의 아픈 ‘애니깽’ 역사를 만나고
메리다 한국이민사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인 이민자 그림. |
지친 숨을 잠시 가다듬기 위해 커피숍으로 가서 유적지 안내 팸플릿을 밀쳐놓고 창밖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꼬레아노?’라는 말이 들렸다.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그 말이 30년 전으로 되돌아가서 ‘애니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그 단어는 황현(1855∼1910년)의 ‘매천야록’(국사편찬위원회, 1955년), 주요섭의 소설 ‘구름을 잡으려고’(1935년), 김호선 감독의 영화 ‘애니깽’(1997년 12월 13일 개봉), 김상열(1941년 8월 8일∼1998년 10월 26일)의 희곡 ‘애니깽’(1988년),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2003년), 문명숙의 청소년 소설 ‘에네껜 아이들’(2009년) 등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정도 자연스럽게 마야 문명이 번창했던 유카탄(Yucatan)반도로, 식민지 조선인이 이주해 와서 고된 노동을 해야 했던 애니깽(Henequen, 용설란의 일종)재배 농장의 흔적으로 다가선다. 마야 문명의 유적과 일본제국의 야만, 식민지 조선의 흔적이 공존하는 유카탄반도로 떠난다.
1905년 4월 4일 화물선을 타고 제물포(지금의 인천)를 떠나서 5월 15일 살리나스 크루즈(Salinas Cruz)에 도착한 조선인들은 기차와 배로 약 1100㎞ 떨어진 프로그레소(Progreso) 항구에 내린 다음 유카탄반도의 깊은 내륙 지역에 자리한 애니깽 농장으로 보내진다.
■ 칸쿤까지 여정은 이어지고
마야 언어로 ‘원숭이의 장소’라는 뜻의 테막스(Temax), ‘그의 네 마리 원숭이들’이라는 뜻의 막스카누(Maxcanu), ‘오직 대답만’이라는 뜻의 우눅마(Hunucma)로 보내진 조선인들은 반도의 원주민 마야족, 북부 소노라(Sonora)주에서 강제로 끌려 온 야키족(Yaqui)과 함께 백인 농장주에게 그 도시의 지명에 어울리는 노예의 삶을 강요당한다.
농장과 맺은 노동계약이 끝나자 식민지 조선인들은 스페인 정복자 몬테호(Francisco de Montejo)와 그의 아들 레온(Leon)이 ‘다섯 개의 언덕’이라는 마야 제국의 이치칸제호(Ichcaanziho)에 세운 식민 도시 메리다(Merida)에 정착하거나 브라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쿠바, 파라과이, 페루 등으로 길고 긴 방랑의 삶을 시작한다. 조국의 상실과 무국적 이주민의 삶을 살면서 조선인들은 메리다에서, 남미에서 다시 긴 험하고 힘든 생존을 이어간다.
유카탄 반도에서 동포의 그 발자취를 따라서, 흔적 없는 흔적을 찾아서 약 1500㎞ 거리를 기차와 버스, 때로는 화물 자동차 등에 편승하여 다니면서 마지막에 도달한 곳은 칸쿤(Cancun)이다.
■ 이역만리서 만난 한민족의 흔적
반도의 북서부 메리다에서 북동부 칸쿤으로 가는 기차에 연결된 차량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은 ‘식민지 조선인이 꿈꾼 것은 무엇인가?’ ‘나라를 되찾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나라를 얻는 것인가? ’였다. ‘나’와 ‘나라’라는 말이 서로 뒤엉켜 수많은 질문을 만들어낸다. 그 질문에 스스로 지쳐서 도착한 곳이 칸툰(Cancun)이다. ‘무지개가 끝나는 곳에 있는 배’라는 뜻의 마야어인 칸쿠네(Cancune). 하지만 식민지 조선인에게는 ‘배’는 애니깽 농장으로 가는 ‘노예선’이었다.
나에게 그 배는 애니깽 농장으로 가는 노예선만 의미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한국인인 내게 그 ‘배’는 6·25 전쟁 후 포로 교환 협정에서 남한과 북한이 아니라 제3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쿠바 등 남미 국가들로 보내달라는 선택을 했던 한민족의 흔적을 되짚어 보고 싶은 희망으로 다시 이어졌다.
내 고향에서라도 이제 오래된 과거를 지워서는 절대 안 된다는 바람을 가지고, 환력 기념으로 정한 남미 여행을 현재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었다.
민병욱 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 bmw@p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