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60년 맞은 가수 하춘화, 한국트로트가요 후진양성 매진하겠다
6세 가수 입문
2500여 넘는 곡 남겨
대한민국 가요계 산증인
영원한 디바 대한민국 국민가수
최다 공연기록 기네스북 갱신
한국트로트가요센터 후학양성
국보급가수 하춘화 별중에 별로 빛나다
그의 노래에 희망의 삶이 되다
노래에 살고 노래에 죽는 멋진 삶,
100년의 무대에서 쓰러진 영광 누리고 싶다
“가수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대부분 영암한국트로트가요센터가 차지할 겁니다.”
물새 한 마리(1971), 영암아리랑(1972)을 부른 국민가수 하춘화 가수가 데뷔 60년을 맞아 월간중앙 특별 인터뷰에서 밝힌 말이다. 그는 1961년 12월 6세 때 가요계에 입문하여 가요계 생활 올해로 환갑을 맞았다.
그의 나이 6세에 가요 데뷔 이후 16세 때 불렀던‘물새 한 마리’로 대히트를 치며 스타덤에 올랐던 하춘화 가수,「외로이 흐느끼며 혼자 서있는/싸늘한 호숫가에 물새 한 마리/짝을 지어 놀던 님은 어디로 떠났기에 외로이 서서/머나먼 저 하늘만 바라보고 울고 있나/아 아아~ 떠난 님은 떠난 님은 못 오는데』가사가 그의 데뷔 60주년을 맞아 우리의 귓전에서 다시 맴돈다.
인생의 황금기(黃金期)는 60세부터 75세까지다. 75세부터 90세까지는 마음껏 달릴 나이다. 75세까지 성장하고 90세까지 달려라 102세 철학자 김형석(1920년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지론이다. 하춘화 가수도 김형석 교수의 말을 인용해 가수생활 60년 70세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김 교수의 말에 공감이 간다고 강조하며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심정을 밝혔다.
김 교수의 말대로라면 1955년생인 하춘화 가수도 지금 인생 황금기의 초입에 들어선 게 분명하다. 하춘화 가수는 김형석 교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 또 그 말씀을 가슴 속에 새기며 산다고 70을 바라보고 있는 시점에서 여생에도 다시 한 번 화려한 꽃과 탐스러운 열매를 맺고 싶다고 꿈꾸며 희망했다.
영원한 디바, 하춘화 가수가 올해로 데뷔 60주년을 맞았다. 강산이 여섯 번 바뀔 법한 시간이 흘렀지만 하춘화는 별로 변한 게 없다. 가수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은 물론이고 노래에 대한 열정도 변함이 없다. 열정이 식으면 모든 게 끝난다는 게 하춘화의 오랜 소신이다. 그래서 그는 지지 않는 열정으로 노래하다. 영원한 국민 언니로 국민들 가슴에 남아있다. 하춘화 가수는 60년 음악 원동력은 '열정' 이라며 팬들이 원할 때까지 노래하겠다고 했다.
하춘화 가수는 자신의 데뷔 기념 앨범을 늘 2~3년 전에 발표해왔다. 60주년 기념 앨범도 앞서 2019년에 발표했다.
하춘화 가수는 데뷔 60주년 감회에 대해 사실 실감이 잘 안 난다고 했다. 데뷔하던 때만 해도 대중예술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너무 컸고 더구나 어린 아이가 노래를 부른다는 그 자체만으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됐던 시절이었다면서 옛 일을 회상했다. 하춘화 가수는“그런 시절이었지만 아버지는 자식은 부모의 의지나 욕심대로 키우는 게 아니라 타고난 소질대로 키워야한다는 확고한 소신을 가진 분이였다”고“부모의 사랑으로 오늘날의 하춘화가 있었고 빛났다”면서“사회적으로 따가운 시선을 받을 때 유일하게 저를 밀어주셨던 분이 아버지였다”고 봤다.
하춘화 가수는“2년 전(하종오 옹, 만 100세) 돌아가셨는데 앞으로 제 가수 활동은‘아버지에 대한 추억 속에서 이뤄질 것’같다”고 밝혔다.“왜냐하면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어디를 갈 때도 아버지와 함께했다”면서“저 하춘화는 아버지 때문에 가수가 됐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모든 덕택은 아버지한테 돌렸다.
하춘화 가수는 전남 영암 학산에서 태어났지만 사업을 하던 부친을 따라 다섯 살 때까지 주로 부산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여섯 살 때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했는데 부친이 동아예술학원으로 하춘화를 데려가서 우리 아이가 노래에 소질이 있다며 작곡가들에게 소개했다. 재능을 인정받은 하춘화는 이후 당시 최고 작곡가였던 형석기(1911~1994) 선생에게 6개월간 교육을 받았고‘천재 소녀 가수 하춘화 가요앨범’이라는 타이틀로 음반이 탄생했다. 이때가 1961년이다.
하춘화 가수는 지난 60년 세월에 대해 정말 치열하게 교과서처럼 열심히 살아왔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많다고 했다.
하춘화 가수는“황금기가 지나면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라면서“제가 저를 돌아봐도 지금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을 것 같고 누구에게도 말해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지금 황금기를 맞은 것 같다”고 여겼다. 하춘화 가수는“아쉬움이 적게 남을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살 것”이라고 했다.
하춘화 가수는 데뷔 60주년을 맞아 가수로서 가장 보람된 기쁜 일과 아쉬운 슬픈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서“가장 기쁘고 뿌듯한 건 제 노래가 국민에게 힘과 용기를 드렸고 슬픔을 달래드렸다는 점”이라고 했다. 또“국민이 저를 인정해 줄 때 가수로 큰 보람을 느낀다”고 봤다. 하춘화 가수는“제 노래가 국가적 현안 해결의 작은 실마리가 됐을 때도 무척 뿌듯했다”고 봤다.“아버지는 가수인 저에게 가정교사까지 붙여주시면서 노래를 부르더라도 공부는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면서“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저는 늘 공부에 압박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또 슬픈 일로“1872년 시민회관 화재,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를 겪었을 때는 정말 지치고 힘들었다”고 했다.
하춘화 가수는 기억으로“남한을 대표한 예술인 자격으로 평양방문 및 공연과 한.일협정문제로 신라호텔 초청 공연 등으로 주요 신문에‘가요외교’라는 제목 기사가 크게 실렸는데 '대한민국의 딸' 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기부의 여왕으로 유명한 하춘화 가수는 부모님의 교육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하춘화 가수는“제가 어렸을 때 대중예술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을 때 히트곡 물새한마리(당시 16세)가 나왔는데 아버지는 사회로부터 받은 사랑을 어려운 사람을 위해 나눌 줄 아는 가수가 돼야한다고 늘 강조했다”면서“그래야 대중가수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고 동료.선배.후배들에게도 동기부여가 된다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하셨고 그 말씀이 계기가 돼서 지금까지도 어려운 이웃과 나누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하춘화 가수는 2016년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에 가입했다. 하춘화가 지금까지 공연 수익을 통해 기부한 금액은 200억 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한창 활동할 때 서울의 100평짜리 단독주택 1채 가격이 300만~400만 원쯤이었는데 공연 후 500~1000만원을 기부하기도 해는 등의 기부에 인색하지 않게 통 큰 기부로 사회를 따뜻하게 한 기부천사가수로서의 또한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그다.
‘열정이 식을 때가 모든 게 끝날 때라고 생각한다’는 하춘화 가수는“어려움에 부딪히면 한 템포 늦추고 크게 심호흡을 한다”고 했다.“결국 참고 견디는 게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 같다”고 봤다.
국민가수 하춘화 가수는 발표한 노래에 대해 어느 해에는 1년에 11장 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동안 발표한 곡은 총 2500곡 이상 된다고 했다. 앨범은 140번째까지 세다가 이후로는 세지 못했다고 했다. 낸 곡과 앨범이 너무 많아서 파악이 잘 안 될 정도로 냈고 불렀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하춘화 가수는“다른 가수들은 명절이 되면 콘서트나 리사이틀을 열었는데 저는 가족과 함께했다”면서“1년 365일 중에서 180일을 공연하기도 했다”고 했다. 또“하루에 다섯 번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고 했다. 이런 공연 열정이 곧 기네스북에 오르게 된 이유임을 은근히 자랑했다.
하춘화 가수는 1981년에 공연 횟수 8500회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하춘화 가수는“여러분이 사랑해주신 곡은 모두 제 생명 같은 노래”라고 했다.“그래도 꼭 집어서 얘기한다면‘물새 한 마리’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대중에게 하춘화라는 이름의 석자를 각인시켜준 노래이니까 의미가 있고 콘서트에 레퍼토리로 반드시 들어가는 노래이기도 한다”고 물새 한 마리가 자신을 가장 국민들한테 사랑을 받았고 알렸던 노래임을 강조했다.
하춘하 가수는“죽기 전날까지 노래를 부르고 무대 내려오다 죽으면 더 좋겠다”고 했다.“국민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그는 국민들을 위해 변함없이 노래를 불러드리고 싶다는 심정을 밝혔다.
하춘화 가수는 황금기 나이를 맞아 제2의 인생 설계에 대해“2년 전 고향에 유일한 전남 영암에‘한국트로트가요센터’를 열고 교육에 힘을 쓰며 지내고자 한다”며 인생의 황금기(黃金期)는 60세부터 75세까지다. 75세부터 90세까지는 마음껏 달릴 나이다. 75세까지 성장하고 90세까지 달려라 102세가 된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말을 항상 되새기면서 제2의 인생시기를 이곳에서 열정을 불태우면서 보내고 싶다”고 했다.
하춘화 가수는“한국트로트가요센터를 반석 위에 올려서 후배들을 키우고 싶기도 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런 일들을 하려한다”고 밝혔다.
영암 태생인 하춘화 가수는 가수로서의 앞으로 계획은 대부분‘한국트로트가요센터가 차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한국에 트로트가요센터는 그곳 하나밖에 없는데 앞으로 그곳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하려한다”고 했다.“현재는 소극장.전시관.가요역사관.하춘화전시관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 교육이 가능한‘아카데미’착공에 곧 들어갈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도 밝혔다.
하춘화 가수는 그동안 걸어온 길보다 앞으로의 걸어갈 길은‘한국트로트가요센터’임을 강조하며“한국트로트가요센터는 단순한 가요센터가 아니라‘예술학교’로서 후세에 물려줄, 영원히 남을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한국대중가요와 후배들을 위해 어떻게 트로트가요센터를 키우고 또 어떻게 후배들을 키울 것인지가 큰 숙제”라고 본다면서 트로트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하춘화 가수는“지금까지는 10년 단위로 데뷔 기념공연을 열었는데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공연이 어렵게 됐다”며“그 대신 TV출연 등 비대면 무대에 자주 올라 팬들과 만나려한다”고 환하게 웃었다.
하춘화 가수는 요즘 우리 국민들이 코로나19란 상황에서 어렵고 힘들어한데 이 위기를 극복하고 위로를 위해 그의 히트곡이자 가장 아끼는 노래‘물새 한 마리’를 불러주고 싶다고 했다. 또 희망을 가지라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되도록 카덴차 신민요풍의‘영암아리랑’을 불러주며 모든 시름 잊는, 함께 덩실덩실 어께 춤을 추고 싶다고 했다.
한편 영암출신 가수에는 '알고계세요.물새 한 마리.영암아리랑' 하춘화 가스를 비롯해 영암읍 교동리 태생‘그대여 변치마오.미워도 다시 한 번.님과 함께’남진 가수, 학산 테생인‘여고시절.내곁에 있어주’이수미 가수, 시종 봉소리 태생인‘땡별.삼각관계.막걸리 한잔’강진 가수, 심호읍 태생인‘옹기여인.영암아가씨.내 사랑 꼭 잡고’김정은 가수 등이 있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