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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글은 로버트 윌슨과 리처드 포먼 같은 연극인들의 실험연극들에 “이미지 연극”이라는 명칭을 붙인 미국 연극공연이론가 보니 마란카(Bonnie Marranca)의 연극비평집 《연극생태학(Ecologies of Theater)》(1996)에 수록된 동명의 에세이로서 《공연과 리뷰》(제60호, 2008년 봄)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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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 세계, 퍼포먼스 문화〉
문화는 몸에 있다: 피란델로부터 퍼포먼스 예술까지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의 충격파를 감안하지 않고 20세기 연극을 고찰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몸(body)을 텍스트(text)로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이 지닌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이런 관점을 개괄해보고자 그렇듯 텍스트로 간주되는 몸, 가면, 몸동작(=몸짓), 태도 같은 것들을 고찰할 것이다.
피란델로의 연극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발견하는 것은 ‘배역과 일치하는 배우’라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배우이다. 피란델로의 인물들은 다른 인물들의 연기들에 대한 의견들을 개진하거나 심지어 해설들마저 한다. 그런 과정에서 인물들의 개인세계들은 공공세계와 상호작용한다. 브레히트는 배역과 배우의 분리를 당연시하는 이론을 창안했다. 그러나 그는 ‘개인자아와 공공자아의 긴장’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브레히트의 인물은 완전히 사회의 몸(social body)이다. 문학텍스트와 배역개발을 모두 거부한 아르토는 특히 연극을 몸의 체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객도 그가 “이미지들에 대한 육체의 지식”이라고 불렀던 것을 체험해야만 했다.
피란델로, 브레히트, 아르토의 연극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공통요소는 몸동작의 위상이다. 몸동작은 현상세계의 현실성을 의심했던 상징주의시대부터 현대 예술가들을 매료하기 시작한 보편적 표현법이다. 또한 몸동작은 예술이 추상적 경향을 띠기 시작한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피란델로는 상징주의에 얼마간 심취하던 시절에 몸동작과 정체성의 위상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현을 작업의 주제로 삼아서 상징주의논리를 분쇄해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이론의 토대를 몸동작에 두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게스투스(Gestus; 제스처) 개념이었다. 그의 게스투스는 특정한 시기와 장소의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인습을 드러내어 보이는 방식이었다. 그는 몸을 사회의 텍스트로 간주했다. 아르토 역시 몸동작이라는 화두를 언급했다. 몸동작은 배우의 몸으로써 표현되는 기호(記號)였지만 ‘연기의 메타자연학(metaphysics-in-action)’ 즉 ‘대사보다 앞서는 정신’의 언어였다.
몸을 벗어나서 가면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브레히트는 가면을 믿지 않았던 극작가로 보일 수 있다. 그는 가면으로써도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피란델로는, 말하자면, 얼굴에 쓰인 대사 같은 가면의 문학적 개념에 완전 심취했다. 아르토는 언어만큼 양식화된 효과를 발휘하는 동양배우의 가면을 연구했다.
이 모든 과정은 배역에서 배우를 분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결국 배우의 몸자체가 일종의 텍스트라는 인식을 낳았다. 그러나 그런 분리과정에서 현실의 연기전통을 거역하는 퍼포먼스 특유의 화법(話法)이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은 더욱 중요하다. (이론적 견지에서 현실주의는 배우와 배역의 일치된 “태도”를 부정하지만, 내가 연기와 상반되는 것으로 언급하는 퍼포먼스는 배우와 배역의 불일치를 인정하는 식으로 “태도”를 긍정한다.)
그래서 퍼포먼스 화법은 연기자체에 대한 해설까지 아우르는 것이다. 피란델로는 자신의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자아들을 객관화시켜 다룰 수 있었고 또 그것들을 해설의 대상들이 되기도 하는 추상적 자아들로 쪼개고 분리하여 퍼포먼스 화법에 영향을 끼쳤다. 이것이 바로 피란델로에게 ‘거울’이라는 개념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브레히트와 아르토는 서로 아주 다르고 서로의 견해차이도 컸지만 모두 동양연극에서 구사되는 화법의 진수를 발견했다. 동양연극은 동일한 무대의 한편에서 진행되는 배우들의 연기와 다른 한편에서 연주되는 음악가들의 음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전개과정은 연극의 개념을 퍼포먼스 예술의 영역으로 이행시키기 시작했다. 퍼포먼스는 원초적 화법이어서 훨씬 자전적(自傳的)이고 추상적이며 비현실적인 것이다.
무려 1세기 동안 지속된 퍼포먼스와 연기의 긴장은 결국 자아(self)를 텍스트로 활용되도록 만들었다. 자신의 단독 퍼포먼스를 토대로 제작된 동명의 영화 《캄보디아로 헤엄쳐가기(Swimming to Cambodia)》에 출연한 스팰딩 그레이(Spalding Gray)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이지만 자신과 완전히 다를뿐더러 자신의 인생사를 해설하는 역할마저 겸행한다. 그는 연극을 했다기보다는 차라리 인생을 살았던 셈이다. 동일한 유형의 개인영화 《안드레와 함께한 나의 저녁만찬(My Dinner with Andre)》의 월러스 숀(Wallace Shawn)과 안드레 그레고리(Andre Gregory)처럼 스팰딩 그레이도 아방가르드 연기기법이 대중매체인 영화에 도입되던 1960년대 실험영화의 소산이다.
태도찬양, 개인자아와 공공자아의 상호작용, 가면의 아이러니, 허구와 현실의 긴장, 화법과 장면에 대한 스팰딩 그레이의 성찰은 퍼포먼스로써 표현되었다. 이 모든 주제는 20세기 연극성(演劇性; theartricality)의 근본적 운동방향과 배우의 여정을 개괄적으로 보여준다. 또 다른 이색적 방면에서 이런 “자연인”의 연극화(演劇化; theatricalzation) 경향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초월주의정신의 정점뿐 아니라 심지어 급락마저 대변하기도 한다. 소로우의 정신은 정치문제를 자연이나 사회단체와 결부시키는 철학적 옹호만으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서 부단히 성찰되어야 했다.
퍼포먼스 문화의 개념
나는 연극의 패러다임을 둘러싼 개인적·사회적 활동의 모든 측면을 구조화시키는 미국식 생활경향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퍼포먼스 문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심리치료부터 정치, 자족적(自足的) 책들, 운동선수들의 훈련, TV 프로그램 편성, 광고, 비디오게임, 사업, 보안기술에까지 강조되는 작업은 ‘모든 활동을 배우-관객-사건이라는 삼각구조에 대입하여 구조화시키는 작업’이다. 개인들은 구조화되도록 자극되고 ‘내가 “퍼포먼스 행위”라고 지칭하는 개인적 체험’을 주시하도록 권장된다. 이런 퍼포먼스 행위는 특정한 이미지에 자아를 투영하는 활동과 결부된 자각적 역할극의 형식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여태껏 사회적 멸시와 조롱을 받은 배우가 이 시대에 개성의 모델로 거듭났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 보인다.(그래서 피란델로는 퍼포먼스의 본성이 집단행동과 유관하다고 이해한 최초의 현대 극작가였다.)
연극활동은 인간의 원초적 활동일뿐더러 심지어 필요하거나 요구되기도 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과 별개로, 인간행동의 모델로서 역할극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인생체험을 더 의식적으로 비판하는 활동이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퍼포먼스 행위”를 할 수 있을까? 퍼포먼스는 예술일까 활동일까? 그것이 사람들의 감정을 미화할까 아니면 사람들을 더 감정적으로 만들까?
연극의 패러다임들은 물론 유익하거나 유해한 목적대로 해석될 여지도 겸비했다. 우리는 그런 패러다임들이 인간체험에 가하는 영향과 충격을 속속들이 고찰해야하고, (공공의 시선에 드러나는) 공공생활과 개인생활(‘나’의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모든 것)의 상호작용을 더욱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역할들을 장려하고 그 역할들의 결과들에 보상하는 정치적-사회적 방식을 깊이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퍼포먼스 행위가 단순한 사회적 행위가 아니라 존재론적 행위로서 존중될 수 있을 것이고 또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형식을 기대하는 감정, 상황에 맞춰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인간의 이미지들을 변형하고 통제하려는 의지, 대사를 지어내려는 의지, 사회관계들을 구조화하려는 의지, 정서를 조작하려는 ㅡ 스스로를 예술작품으로 만들려는 ㅡ 의지는 모두 인간욕망의 발로들이므로, 그것들의 복잡다단함도 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만약 퍼포먼스가 역할극이고 존재론적 행위라면, 그것은 어떤 존재와 유관한 것일까? 이것보다 더 중대한 문제는 개인의 “퍼포먼스 행위”가 ‘민주주의사회에서 태어난 자아의 새로운 해방과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오직 공공역할만 인정하고 표정과 이미지마저 세계질서로써 규제하는 전체주의적인 미래를 위한 리허설’이냐 하는 것이다.
나는 특정한 활동들이 퍼포먼스와 유관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 몇 가지를 이 시대의 문화로부터 추출해보았다.
1. 내가 거주하는 뉴욕 맨해튼 근처에 있는 어느 디스코클럽은 매주 화요일을 주식중매인의 밤으로 정했고, 화요일 밤마다 젊은 주식중매인들과 월스트리트 사람들이 택시를 타고 그 클럽으로 몰려온다고 한다. 말하자면, 매주 화요일은 그들이 안전과 비밀을 유지하느라 주식거래를 하지 않는 날이라는 말이다. 그들이 즐기는 일탈은 그들이 거행하는 의례의 일부인데, 그 의례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개얼굴 가면(견안가면; 犬顔假面)을 쓴다. 그런 ‘개얼굴 가면’ ㅡ ‘텍스트-몸’ ㅡ 은 그들의 ‘낮’생활을 겨냥한 ‘밤’의 사회적 비판일까? 이런 장면은 오늘날 다다(dada)와 신표현주의(新表現主義; neoexpressionism)가 교체될 때 나타는 파괴직전의 국면을 풍자적으로 그린 게오르게 그로츠(George Grosz)의 사회풍자화에도 그로테스크하게 표현된다. 바야흐로 현대의 즉흥적 감성과 퍼포먼스 행위가 더욱 긴밀히 연결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2. 오늘 발간된 잡지들에는 개인광고가 가득하다. 매력, 식이요법, 감흥, 치료, 정보, 생명 같은 단어들은 개인광고란의 문구들에 반복적으로 동원되는 듯이 보인다. 물론 그것들은 광고가 실리는 지면을 따라 변용되기도 한다. 《뉴욕 리뷰 오브 북스(New York Review of Books)》에는 ‘예술, 연극, 콘서트 관람, 앤서니 트롤럽(Anthony Trollope)의 소설을 좋아하는 유대계 남성들’을 찾는 여자들의 광고가 실렸다. 그런 여자들의 직업은 대학교수, 작가, 정신과의사 등이다. 《네이션(The Nation)》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잠시 해고된 공산주의자 배관공” 친구에게 소개해줄 여자를 찾는다는 광고도 실렸다. 《빌리지 보이스(Village Voice)》에는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건강한 신체”를 가진 “비(非)여피족”을 찾는 대형광고도 실렸다.【여피족(yuppie族)은 도시 주변을 생활기반으로 삼아 전문직에 종사하고 신(新)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합성어이다. 즉 ‘젊은 도시 전문직업인들(young urban professionals)’의 머리글자들인 ‘yup’와 ‘히피(hippie)’의 뒷글자들이 합성된 단어이다.】
《뉴욕(New York)》에는, 어쩌면 롱아일랜드의 시골별장에서 딸기나 먹으며 안락하게 지낼, “자수성가한 백만장자”와 “모델”과 “마케팅전문가”를 찾는다는 노골적인 광고도 실렸다. 이 모든 사례를 보면서 우리는 오히려 엄격히 규정된 역할들과 바람직한 인생시나리오들의 개략적 줄거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유형의 인물도 각각 창작자 한 명이 모색한 것이다. 어느 쪽이 실재인물이고 가상인물일까?
3. 지극히 개인적인 주제를 다루는 드라마 《베이비 엠(Baby M)》이 공연되었다. 이 멜로드라마에는 일련의 반전(反轉)하는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그리 재미있는 것들은 아니다. 문제는 부모역할을 누가 가장 잘 소화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재현문제가 등장한다.
4. 《스타들의 지도(The Map of the Stars)》. 비벌리힐스의 일요일오후를 배경으로 삼은 이 영화에서 행상인들은 200여 명에 달하는 영화스타들의 주소들이 표시된 지도를 판매한다. 구경꾼들은 종일 길거리를 오르내리며 비디오카메라나 사진기로 스타들의 집들을 촬영한다. 영화스타들은 대중의 시선을 피해 각자의 전자동(全自動) 대문 뒤에 숨어서 각자가 뒤집어쓴 가면에 걸맞게 행동해야 하는 유명인들의 역할에 얽매여있다. 스타들 중 누군가 사망하는 경우에나 우리는 이미 죽은 스타를 기념하는 장소로 변해버린 집의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그곳에는 사라진 스타의 몸을 대신하여 후원자들을 기념하는 스타의 생전사진들과 의상들이 전시된다. 확신컨대 바로 그곳이 우리가 아는 은총의 나라의 전모이다.
5. 아련한 극장. 미국국방부에서 간행된 《군사용어사전(Dictionary for Military Terms)》에는 극장(theatre)이 “아메리카 합중국의 바깥에 위치한 지리적 영역”으로 정의되어있다. 그리스어 테아트론(theatron)에서 유래한 이 낱말은 원래 “구경하는 장소”를 의미했다. ‘미국의 극장이나 러시아의 극장이 아닌 유럽의 극장만 존재한다’는 속설은 ‘미국인들과 소련인들은 관객들이고 유럽인들은 배우들이다’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상상의 리허설은 오직 구경꺼리의 관점에서만 역사적인 것으로 존중받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교란한다. 사회진화가 발달시킨 매체들과 소통수단들은 연극정신을 다름 아닌 ‘20세기 정치/예술의 형식’으로 가공해버렸다. 그것은 현대세계에서 우리의 존재방식들인 이데올로기와 개성을 동시에 포섭했다. 사회과학은 퍼포먼스하는 자아의 윤곽을 창조하는 못하는 한계에 봉착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사회과학으로부터 퍼포먼스 이론을 되찾아 예술과 철학의 영역으로 반환해야 할 시대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퍼포먼스 윤리학’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연극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1975년에 내가 《이미지 연극(The Theatre of Images)》을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품었던 의도는 새로운 연극언어를 자체개발하던 연극계에 접근할 수 있는 나만의 새로운 비평어휘를 개발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는 방법의 한 가지는 영화전공대학원생이던 나의 생활을 비평해보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주중에는 뉴욕시립대학에서 전통적인 연극수업을 받았고 주말에는 로버트 윌슨(Robert Wison), 리처드 포먼(Richard Foreman), 마부 마인스(Mabou Mines)의 초기 작품들을 관람했다. 그런 새로운 작품들은 내가 공부하던 연극을 의심하게 만든 급진적 대안연극들이었다.
내가 현대의 실험연극들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느라 사용하는 명칭인 “이미지 연극”은 연출가, 배우, 극작가의 역할과 공간 및 관객에 대한 재고를 요구한다. 그것은 심리묘사, 현실주의 전통, 관객의 동일시 같은 것들을 벗어나서 연극의 공간감각을 재조직하고, 배우를 교체하며, 때로는 유동적인 단어들을 사용하는 대본을 창작하고, 기술(技術)을 작품의 특징적 표현방식으로 만드는 연극이었다. 그런 연극에서 이미지는 대사에 무게감을 부여하면서 대화를 전반적으로 지배했다.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려는 시도보다는 현재순간(present moment)이 더 강조되었다. 이런 연극의 창작자들이 품은 중요한 의도들 중 하나는 시간과 공간과 대사를 더욱 직접적이고 더욱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새로운 관객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런 연극과 더불어 새로운 시각적 표현양식이 미국 연극계에 도입되었다. 말하자면, 이미지 연극은 대본을 배제하기보다는 무대의 더 많은 부분을 언어로써 강조하는 텍스트성(textuality)을 탄생시켰다. 물론 이 연극의 모든 요소가 텍스트를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작품들은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것들은 연극을 다루고 창작행위를 다루는 작품들이었고 시간예술과 매우 흡사한 작품들이었으며 매우 공간적인 동시에 과정지향적인 작품들이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의 관점에서 보이는 이런 예술가들의 탄생은 우리가 아는 ‘연극실험’의 개념을 변형시켰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그런 변화들은 아무데도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전통연극의 역사에 속하는 피란델로, 브레히트, 아르토의 작품들에 뿌리를 내리는 동시에 상징주의와 함께 시작되어 미래파(未來派), 다다(Dada), 초현실주의로 확대되면서 미국의 머스 커닝엄(Merce Cunningham)과 저드슨(Judson) 무용단뿐 아니라 그 이전에 활동한 미국 아방가르드의 어머니로 불리는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최소개념예술에도 영향을 끼친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퍼포먼스 역사를 형성했다.
지금까지 나는 “이미지 연극”의 개념과 배경을 개괄해보았지만, 이것은 내가 본격적으로 다루고 싶은 주제들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로버트 윌슨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감, 우스터 그룹(Wooster Group)과 온톨로지컬-히스테릭 극단(Ontological-Hysteric Theatre)의 실험작품들에 대한 비판, “형식주의적”이거나 “반동적”이거나 “정치무관심주의”적인 이미지 연극 자체에 대한 비판을 주시하는 책을 쓰려고 했다는 말이다. 유행하는 실험연극에 대한 많은 논의들 내지 부족한 논의들은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둘러싸고 진행된다.
1. 실현가능성 ㅡ 작업과정은 얼마나 복잡한가?
2. 이미지로써 정치적 내용을 표현할 가능성 또는 그런 가능성의 결핍
3. 감정 그리고/혹은 지성에 대한 호소력
4. 실험 자체의 중요성
이것들은 반감을 지닌 관객들과 비평가들이 제기했거나 1970년대의 실험들이 경고한 문제점들이다. 지금의 나는 이 모든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 싶지 않다. 나는 다만 ‘반동적 예술’이나 ‘파시스트 예술’ 같은 표현을 자유롭게 구사하면 위험하다고 믿는다는 말만 해두고 싶다. 물론 ‘이미지 연극을 연극의식(演劇意識)의 새로운 진일보로 간주하여 각광한 사람들이 역사를 변천시켰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바야흐로 아방가르드 개념이 문제시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듯하다. 그리하여 이제 예술가들은 더 광범위한 관객에게 노출되려는 노력을 반대하는 입지를 스스로 저버렸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예술을 위시한 여러 활동들은 오히려 과도하게 정치화되기도 한다. 10년 전에 비하면 다방면에서 덜 복잡하고 덜 지식적인 작품을 바라는 욕구가 생겨난 것은 분명하게 보인다. 예술을 유럽의 모더니즘과 결별시켜서 “대중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규정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감행된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본 결과 나는 퍼포먼스의 새로운 경향들과 결부된 실험에 대한 비판이 문제의 소지를 지녔다고 알았다. 오늘날 연극에 관능과 아름다움이 표현될 여지가 있을까? 예술가들과 관객들이 진실로 원하는 작품이 과연 설익고 직설적인 정치연극일까? 그런 변절로써 취향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또 얼마나 경제적인 변화일까? 그리하여 비평과 예술의 이데올로기적 변화가 내포한 더욱 깊은 의미들은 무엇일까?
풍경화 같은 연극
거트루드 스타인은 연극을 ‘풍경화’로 지칭한 최초의 작가이다. 이것은 겉보기로는 소박한 시적(詩的) 진술로 보이지만 심층에서는 세월이 갈수록 심오한 의미를 자아낼 것이다.
‘연극적 몸’의 역사와 관련된 피란델로, 브레히트, 아르토를 모르는 사람이 20세기 연극을 이해할 수 없다면, 로버트 윌슨과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를 모르는 사람은 연극의 미래를 점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들은 각각이나 모두 이 시대의 연극과 예술에 관한 생각들이 선회하는 현안들을 선명히 조명한다. 그것들은 ‘쾌락이나 아름다움이나 이미지의 처소,’ ‘예술가나 지식인의 사회적 신분,’ ‘고전 다시 쓰기’ 같은 현안들이다.
그러나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보면, 윌슨과 뮐러는 20세기 모더니즘의 정점을 대변한다. 특히 뮐러는 현대와 고전주의시대를 연결한 극작가로서 유명한데, 그는 자신의 메데이아 연극을 “아르고 선단(Arogo 船團)의 풍경화”로 지칭했고, 이 연극에서 이아손은 동베를린의 길거리를 걷는다.【그리스 신화에서 이아손(Iason; Jason)에게 매료된 메데이아(Medea; 메데아; 메디아)는 황금양털(黃金羊毛)을 찾는 이아손에게 큰 도움을 제공하는 여마술사이고, “아르고”는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찾느라 타고 항해하는 배의 명칭이다.】
윌슨의 연극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상징주의, 미래파의 기질, 아르토를 거쳐 신화연극과 정령연극에 이르는 실험극의 모든 요소를 집결시킨다. 뮐러의 연극은 뷔히너로부터 다다, 브레히트, 정치적 테러리즘에 이르는 노선과 상반된 노선을 걸었다. 그들은 뮐러의 《햄릿기계(HAMLETMACHINE)》의 세계에서 합류했는데, 거기서 학습하는 고전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관객에게 햄릿 역할을 해보이기를 거부하며 정련된 신소리를 늘어놓는다. 이어서 코카콜라와 텔레비전과 일상적 욕설들에 점령당한 도시의 풍경 속 냉장고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엘렉트라(Electra)는 울리케 마인호프(Ulrike Meinhof, 1934~1976)의 여동생으로 나온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가멤논(Agamemnon)의 딸 엘렉트라는 동생 오레스테스(Orestes)에게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와 그녀의 간부(姦夫)’를 죽이라고 사주한다. 울리케 마인호프는 독일 좌파 여군으로서 적군파(赤軍派; Rote Armee Fraktion)의 공동창립자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모더니즘 작품들인 동시에 고전주의작품들이다. 뮐러와 윌슨은 동일한 장소에, 즉 고전, 기술, 정치, 관광업의 이미지 조각들로 합성된 풍경화에 도달했다. 새뮤얼 베케트(Samuel Beckett)도 이미 그곳에 도착해있었고, 그의 인물들은 거대한 나무 주위에 둘러앉아있었다. 조만간 모든 이야기가 정원의 풍경화로 복귀할 것이다. 여기서 세속적 활동들은 낙원 같은 정원의 신화, 연극의 제1막, 처음부터 다음에 할일을 생각해야 하는 미래의 개념을 직면할 배우들과 통합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아도 때로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망각한다.
비평의 벼랑끝에서 글쓰기
나는 얼마 전부터 읽기를 포함하는 글쓰기를 여행과 같은 활동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글쓰기와 여행은 많은 좌절과 쾌감을 공유한다. 나에게 문제는 글쓰기야말로 내가 진실로 사랑하고 내주(內住)하기 바라는 근사한 풍경화 같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글쓰기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연극계에서 착각되는 것들 중 하나가 관객들에게 다른 세상에서 내주할 수 있다고 느끼는 감정을 심어주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착각을 믿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아웃사이더이자 여행자로서 내가 지닌 차이점을 고맙게 여긴다. 그래서 어떤 무대에서 어떤 세계를 창조하려는 관념은 나에게는 문제로 보인다. 나는 그리스의 비극, 셰익스피어, 베케트 같은 위대한 텍스트들은 무대를 요구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쓰인 작품들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것이 바로 연극의 패러독스(逆理)이다.
재현과 관련된 일정한 개념들은 나로 하여금 비평가의 태도를 취하도록 만든다. 그러면 내가 어떤 것을 재현하려는 태도를 단념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로 이행할 수 있으리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비평’으로 알아온 것을 뛰어넘는, 특히 새로운 연극을 기다릴 여지도 없이 연극 자체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연극비평을 뛰어넘는 탐구방법이다.
다음은 내가 생각해본 몇 가지 탐구방법이다.
- 비평을 ‘비평의 비평’으로 만들기
- 글쓰기의 허구적 기법과 여타 기법들을 합체하기
- 시적(詩的)이고 철학적인 에세이나 아포리즘의(잠언의; 箴言의)의 왕국으로 이동하기
- 발언과 글쓰기 사이에 에세이를 위치시키기
- 정서적 표현을 동반하기
- 텍스트를 압도할 만큼 강력히 발언하고 표현하기
- 비평을 글쓰기로 전환하기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