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를 정리하면서, 먼저 나온 유서(類書)들을 다시 한 번 읽기로 하였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범우사, 1995)를 두 번째로 읽으면서, 거듭 놀라는 것은 그의 탐독(貪讀, 耽讀)이다. 글 속에 책읽기에 대한 그의 욕망이 점점이 묻어나 있다. 이런 점은 김현, 《행복한 책읽기》와도 사뭇 다른 분위기다.
불교학자인 나로서 대답해야만 할 사항은 경전의 우회성과 반복성 문제이다. 그의 문제제기 : "경전연구모임 편, 《유마경》(불교시대사, 1991) [ ----- ]을 읽다. 경전을 읽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점을 우회해가는 경전의 그 지루한 형식을 읽기에는 너무 힘들다."(p.53)
초기불교의 경전들, 예컨대 《법구경》이나 《잡아함경》과 같은 경우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으나, 《유마경》과 같은 대승경전은 사실 지루할 수 있다. 반복이 심하기 때문이다. 종밀의 경우, 경전의 언어와 선의 언어를 대비하여 "모든 부처의 설법은 활과 같으며 선사들의 언어는 가야금 줄과 같다"고 하였다. 선사들은 현재 그의 앞에 서있는 한 사람만을 문제삼았다. 그래서 직설적이고, 직선적이다. 다행히 알아들으면 도통하는 것이고, 못 알아들어도 그만이다. 무자비하다. 못 알아들어서 속병이 생기는 것을 화두(話頭)라 한다. 화두는 심리적 쳇증과 같은 것. 그러나, 부처의 설법은 지금 그 앞에 서 있지 않은 수많은 중생들,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후학(後學)들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 그래서 반복이 심하다. 그것이 경(經)이다.
한편, 뒷 사람들 중에 경전의 이같은 반복을 지루해 하는 사람들이 경전의 핵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지운 채, 그 남겨진 핵심만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기도 한다. 그것이 논(論)이다. 간명(簡明)하고 직절(直截)하다는 점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는 있지만,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잃는 것은 문학이요, 얻는 것은 철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비에서 우러난 반복 속에 설화와 비유가 등장하고, 산문과 운문이 교차하며, 때로는 《유마경》과 같이 극적인 구성을 취하는 문학성을 그들 논서(論書) 속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하나, 사실 불교 경전이 "요점을 우회하는 것"은 아니다. 요점은 일반적으로 제일 앞에 나온다. 아니, 제목 속에 담겨 있다. 제목의 의미만 알면 된다.[이런 점에서 일본의 어떤 《법화경》 계통의 종파는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경의 제목을 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전부 제목에 대한 해설이라 할 수 있다. 못 알아들으니까, 계속 이렇게 반복하는 것이라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옛날의 주석가들이 경전을 해설할 때에 본문을 해석하기 앞서서 경의 제목 해석을 먼저 행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장정일의 독서일기》의 제일 마지막 책은 이진우의 《적들의 사회》(서적포, 1994)이다. pp.270-271로 이어지는 마지막 인용, "시와 소설을 함께 쓰고 있으며 평론가이기도 한 작가의 평론가론"의 일절 중에, 근래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해석의 보수성을 깨닫게 하는 구절이 있다.
평론가들이란 주로 강자의 편에 서 있기를 좋아한다. [ ----- ] 텍스트가 없으면 아무쪽
에도 소용없는, 직업 자체의 근본적 요인이 그들에게 새로운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품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보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교시를 내리기만 기다렸다가 그 교시를 분석하고 원용하는 획일적인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
어서 문단내에서는 어느 집단보다 보수성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불교학은 '논'에 의해서 성립한다. 그러나, '논'은 언제나 '경'에 대한 해석으로서만 성립한다. 경은 논에 앞선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지만, 그렇게 되면 불교의 계속적 창조[일본의 불교학자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는 "불교는 붓다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는 사실상 어렵게 된다. 그 대책은 경의 무거움을 다소라도 가볍게 해야 하는 것일 텐데, 그렇다고 해서 무한히 가볍게 할 수는 없다.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보다 근본적으로 논을 경에 앞세운 인물이 불교사 속에는, 현재 내가 아는 한, 단 1명 나온다.
중국에서 삼계교(三階敎)라는 새로운 불교를 성립시킨 신행(信行)이다. 그의 모든 저술은 경에 대한 논으로서 성립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하고 싶은 말[논]을 보강해주는 증거로서 경전을 인증(引證)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삼계교는 끝내 억압당하여 사라지게 하는데, 그 금압(禁壓)의 이유 중에는 이같은 글쓰기 방식의 역전(逆轉) 역시 중요한, 내밀한 이유였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