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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제13권 / 신도비(神道碑)
■ 이지란 (李之蘭)
1331년(충혜왕 1) - 1402년(태종 2)
조선전기 보조좌명개국 1등, 정사공신 2등 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으로, 본관은 청해(靑海). 초성은 퉁(佟), 초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 자는 식형(式馨). 남송 악비(岳飛)주1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이며, 이화영(李和英)의 아버지이다.
이성계와는 결의형제를 맺었고, 출신지는 북청(北靑: 靑海)이다. 첫째 부인은 함안군부인(咸安郡夫人) 혜안택주(惠安宅主) 윤씨(尹氏)이며, 둘째 부인은 태조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조카딸인 상산군부인(象山郡夫人) 곡산강씨(谷山康氏)이다.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가 되었으며, 1371년(공민왕 20)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해 북청에서 거주하며,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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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명]
수충분의익찬경운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 문하시중 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겸 판형조사 판의흥삼군부도절제사 청해백 양렬 이공의 신도비명 서문을 아우르다.(輸忠奮義翊贊景運開國功臣輔國崇祿大夫門下侍中贊成事同判都評議司事兼判刑曹事判義興三軍府都節制使靑海伯襄烈李公神道碑銘 幷序)
홍무(洪武) 25년(1392)에 강헌왕(康獻王 태조)이 즉위하여 수충분의 익찬경운개국 공신(輸忠奮義翊贊景運開國功臣) 양렬(襄烈) 이공(李公)을 청해백(靑海伯)으로 책봉하고, 보국숭록대부 문하시중 찬성사 판형조사(輔國崇祿大夫門下侍中贊成事判刑曹事)를 더하였으나 공이 굳이 사양하고 북청(北靑)으로 돌아가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았다.
건문(建文) 2년(1400)에 공정왕(恭定王 태종(太宗)이 우시중(右侍中)에 특배(特拜)하고 승지를 보내어 그를 불렀으나 가지 않았는데, 공정왕이 오히려 공신록(功臣祿)을 하사하여 종신토록 지급하게 하였다. 건문 4년(1402) 여름 4월 계해일에 북청에서 돌아가시니, 왕이 조제(吊祭)를 내리고 이틀 동안 조회를 폐하였다. 영락(永樂) 8년(1410)에 강헌왕의 묘정에 배향하도록 명하였다.
공의 휘는 지난(之蘭)이요, 자는 식형(式馨)으로 본관이 북청이다. 초명은 두란(豆蘭)이었다. 성은 동(佟)씨로서 국조(國朝)에 들어와 이씨(李氏) 성을 하사받았다. 증조 부해(浮海)가 원나라에 들어가 공을 세워 5천 호에 봉해졌다.
공의 아버지 아원(雅遠)에 이르러 여진에 벼슬하여 관직이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에 이르렀는데, 공이 귀해지고 나자 보조공신 영의정부사(補祚功臣領議政府事)에 추증되었다. 처음에 정서대장군이 여진에 있을 때 큰 별이 우물 바닥에 빛을 드리웠다. 천기를 관찰하는 자가 이르기를, “이것은 계명성(啓明星)이니, 그 아래에 반드시 뛰어난 인물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공이 태어났다. 장성하여서는 사람됨이 용감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원(元)나라 지정(至正) 중에 강헌왕이 옛 광성(匡城)을 정벌하러 갔을 때, 의비(懿妃) 최씨 꿈에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개강(价江)에서 활 쏘는 사람이 패왕(覇王)을 보좌해 줄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마침 공이 개강 가에서 사슴을 쏘았다. 강헌왕이 한 번 보고는 크게 기이하게 여겨 형제를 맺고, 신덕왕비(神德王妃) 강씨(姜氏)의 오빠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고, 전장에 나갈 때마다 반드시 공과 함께 하였다. 공이 이 때문에 북방에서 이름이 나게 되었다.
신우(辛禑)가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대녕(大寧)에 이르러, 무신들에게 두 치의 백금을 표적으로 삼아 활을 쏘기를 명하였다. 강헌왕이 활을 쏘아 거침없이 그 표적을 적중시키니 신우가 매우 기뻐하였다. 공이 강헌왕에게 아뢰기를, “신묘한 무예를 어찌 성급하게 보여 주십니까?” 하였다. 강헌왕이 이로써 그의 지혜를 대단하게 여겼다.
몽고 승상 나하추〔納哈出〕가 수만 기병을 거느리고 홍긍(洪肯)으로 들어왔다. 공이 병사들을 이끌고 함관령(咸關嶺)을 넘어가서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군대를 거두었다. 이튿날 또 나하추와 합란(哈蘭)의 큰 들판 가운데서 싸웠다. 나하추가 긴 창을 휘두르며 곧바로 전진해 들어오자 강헌왕이 거짓으로 패배한 척하며 달아났다.
나하추가 결사대를 시켜 추격하여 거의 가까이 왔을 때, 강헌왕이 말에서 떨어지듯 몸을 떨어뜨리며 위를 올려다보며 적장의 겨드랑이를 쏘았고 공이 협공을 하였다. 나하추가 멀리서 강헌왕을 바라보고는 화살을 쏘았는데 강헌왕이 말안장 위에 일어서니 화살이 가랑이 밑으로 빠져나갔다. 공이 또한 앞으로 돌진하며 강헌왕을 막아 보호하니 나하추가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즉시 달아났다.
왜노가 밤에 강도성(江都城 강화도(江華島))을 습격하여 부사 김인귀(金仁貴)를 죽이고 착량(窄梁)으로부터 승천부(昇天府)에 들어오니 중앙과 지방이 크게 떨었다. 신우가 비빈들을 거느리고 도망을 가려 하여 병위(兵衛)들을 대궐문 밖에 둘러 세워 놓았다.
공이 강헌왕을 따라 해풍(海豐)에서부터 급히 승천으로 달려왔는데 날랜 장수가 백마산(白馬山)을 넘어 공의 군진을 범하였다. 공이 이에 화살을 뽑아 쏘아 죽이니 왜노가 마침내 달아났다. 얼마 안 있어 누선(樓船) 5백 척이 진포(鎭浦)에 들어와 군현을 도륙하고 불을 질렀다. 또 호남(湖南)으로 들어가서 운성(雲城)을 함락시키고 인월역(引月驛)에 진을 쳤다.
강헌왕이 공에게 이르기를, “호남의 천 리 길에 시체가 널려있으니 네가 힘껏 싸워서 이 치욕을 씻어 다오.” 하였다. 공이 군사를 정돈하여 말을 달려 정산(鼎山)에 이르니 왜노 장수가 창을 들고 곧장 강헌왕의 뒤를 쫒았다. 공이 급히 말을 달리며 크게 소리치기를, “뒤를 보십시오.” 하였다. 강헌왕이 몸을 돌려 미처 보기도 전에, 공이 이미 화살을 뽑아 그 장수를 쏘아 그 자리에서 죽였다.
아기발도(阿其拔都)는 나이 겨우 15세였는데, 용맹이 여러 장수들 중에서 으뜸이었으므로 왜노들이 추대하여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았다. 강헌왕이 공에게 그를 생포하라고 명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를 죽이지 않으면 필시 사람을 다치게 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달려 나가 싸웠다.
아기발도는 갑옷을 겹으로 입고 있어서 목과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다. 강헌왕이 공에게 이르기를, “내가 그 투구를 쏘아 맞출테니 네가 그 얼굴을 쏘아 맞추어라. 그러면 아기발도를 단번에 죽일 수 있다.” 하였다. 이윽고 강헌왕이 그 투구를 적중시켜 그를 말 아래로 떨어뜨리니 공이 화살을 쏘아 아기발도를 결국 죽였다. 이에 왜노들이 모두 크게 소리내어 울며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여진 장군 호발도(胡拔都)가 4만 기병을 거느리고 단주(端州)로 들어왔다. 그때 공이 모친상을 당해 있었는데 강헌왕이 사람을 시켜 공에게 말하기를, “사직이 위태로우니 네가 비록 상중에 있으나 나를 위하여 상중에서 일어나 발도를 쳐야 되지 않겠는가.” 하였
공이 영전에 곡하며 절을 하고 나서 마침내 따라 갔다. 강헌왕이 공을 선봉으로 삼아 호발도와 웅성(雄城)에서 싸워 크게 쳐부수어 발도가 도망갔다. 강헌왕이 이르기를, “이모는 전투에 임하여 용감하였으니,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 하였다. 단주가 이미 평정되고 나자 공이 갑옷을 벗고 모친상을 마치었다.
청송백(靑松伯) 심공(沈公) 덕부(德符)가 중문령(中門嶺)에서 왜노를 방어하다가 패하였으니, 그 왜노가 마침내 토아동(兎兒洞)에 진을 쳤다. 강헌왕이 군사를 이끌고 합란(哈蘭)에 이르러 장수들을 배치하고 정예병을 뽑아서 산속에 매복시켰다. 공이 이에 조영규(趙英珪) 등 백여 기병과 더불어 말고삐를 바짝 당기고 서서히 행군하니 왜노가 괴이하게 여겨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강헌왕이 출전 명령을 내리자 공이 마침내 선두가 되어 그들을 유인해 오니 왜노가 곧바로 강헌왕의 진을 범하였다. 이에 강헌왕이 거짓으로 군대를 퇴각시켜, 매복시켜 놓은 곳의 가운데로 들어가서는 군대를 돌이켜 왜노들을 쏘아 죽였다. 공이 또한 말을 치달려 공격하고 복병이 또한 일어나니 왜노 군대는 쓰러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 함관(咸關)에서부터 우두산(牛頭山)에 이르는 30리 길에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덮었다.
이때 공이 용감하기가 북방에서 으뜸이었다. 몽고의 여러 부족들은 두려워하여 꼼짝도 못했고 왜노들도 도망쳐서 그 후 50년 동안은 감히 변경을 엿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강헌왕의 좌명 공신(佐命功臣) 중에서 공의 이름이 가장 훌륭하였다.
신우(辛禑)가 군대를 내어 요동을 범할 때 강헌왕을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고 공을 원수(元帥)로 삼았는데, 패강(浿江)을 출발하여 위화도(威化島)에 머무르니 신우가 김완(金完)을 보내어 새서(璽書)를 내리고 군대를 진격시키기를 재촉하였다.
강헌왕이 공에게 이르기를, “삼군(三軍)을 다그쳐서 천자를 범하면 이것은 의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천하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군대를 돌이켜서 나라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천자는 진실로 범할 수 없으니 군대가 요동을 건너지 않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강헌왕이 마침내 군대를 돌이키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익양백(益陽伯) 정 선생 몽주(夢周)가 왕씨(王氏)의 사직이 장차 망할 것을 알고 속으로 근심하여, 김진양(金震陽)과 더불어 힘을 다해 왕씨를 도울 것을 꾀하였다. 공정왕이 주연을 베풀었을 때 익양백이 슬픈 노래로 스스로 맹세하니 장수들이 공에게 그를 쳐서 죽이기를 권하였다.
공이 정색을 하고 이르기를, “익양백은 충신인데 내가 어찌 차마 충신을 해쳐서 스스로 불의에 빠지겠는가?” 하였다. 그 후 고여(高呂)ㆍ조영규 등이 익양백을 죽였으나 공은 참여하지 않았다. 강헌왕이 개국하여 공에게 명하여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삼으니, 북방을 진압하여 여진을 타일러 편안하게 해서 몰려오게 하였다.
여진은 모두 우리 백성이 되기를 원하여 정역(征役)을 복역하고 조세를 바치는 것을 감히 시기를 넘기지 않았다. 수백 년의 오랑캐 풍속이 비로소 의관을 갖추어 입었으며, 장백산(長白山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훈춘강(訓春江)까지 천여 리가 모두 우리 영토에 들어온 것은 공이 이룩한 공로이다.
처음에 공신으로 책정하여 공에게 철권(鐵券)을 내리자, 공이 병을 핑계 대며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니 여러 공경들이 공을 위하여 차탄하였다. 강헌왕이 밤에 신궁(新宮)에서 잔치를 열어 공신들을 불러 술을 마실 때, 악공에게 명하여 〈문덕곡(文德曲)〉을 부르게 하고, 공에게 이르기를, “과인이 여기까지 온 것은 경의 공이다.”하였다.
공이 사례하여 이르기를, “대의를 밝혀 천명(天命)의 터를 닦은 것은 전하의 덕이지, 신이 무슨 힘이 되었겠습니까?”하였다. 그 후에 태조가 근신(近臣)을 보내어 침전으로 불러서 여러 신하와 장수들의 어짊과 불초함에 대해 물었다. 공이 인하여 말하기를, “정도전(鄭道傳)은 간사하여 반드시 종말이 좋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돌아가시고 나서 정도전이 주벌되니 비로소 공에게 선견지명이 있음을 알았다. 공정왕이 보위를 이어받자, 공이 능히 정도전의 간사함을 분별하였다고 하여 또한 추충병의익대정사공신 청해군(推忠秉義翊戴定社功臣 靑海君)에 책봉하였다. 공이 돌아가시고 나니 또한 분충효절동덕좌명 공신(奮忠効節同德佐命功臣)에 책봉하였고 시호를 양렬(襄烈)이라 하였다.
공은 용모가 차분하고 온화하며 단아하여 부인 같았다. 장수가 되어서는 위엄이 사방에 떨쳤으며 그 큰 절개는 빼앗을 수 없었다. 북청(北靑)으로 돌아간 지 10년 뒤에 돌아가셨으니 누린 햇수는 72세였다. 그 돌아가신 해 모월 모일에 부(府)의 동쪽 안대(晏臺)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필인 상산군부인(象山郡夫人) 곡산(谷山) 강씨(康氏)는 예의 판서(禮儀判書) 보대(普戴)의 딸이니, 바로 신덕왕비(神德王妃) 오빠의 딸이다. 아들 4명을 두었는데 화영(和英)은 판형조사(判刑曹事)를 지냈고, 화상(和尙)은 판공조사(判工曹事)를 지냈으며, 화미(和美)는 한성 부사(漢城府事)를 지냈고, 화수(和秀)는 예조 참판을 지냈다.
현손 이정호(李挺豪)는 수찬으로 김안로(金安老)를 논하다 죄를 입어 귀양 가서 죽었다. 7세손 첨절제사 이희당(李希唐)은 선봉으로 왜노를 격퇴하다 백탑(白㙮)에서 전사하였다. 정사공신(靖社功臣) 충장공(忠壯公) 이중로(李重老)는 이괄(李适)을 토벌하다 저탄(豬灘)에서 전사하였고, 이희당의 아들인 출신(出身) 이삼립(李三立)은 학포(鶴浦)에서 적을 방어하다 또한 전사하였으니, 아마도 모두가 공의 유풍(遺風)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공이 북방에서부터 강헌왕을 따라 장수들의 수장이 되어 백여 전의 전투를 치렀으니 북쪽으로는 몽고를 축출하였고 남쪽으로는 왜노를 꺾었으며 여진을 회유하여 땅을 천 리나 확장하였다. 능히 의리를 지켜 천자를 범하지 않았고 충신을 죽이지 않았으니 가히 어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출처 거취에 있어서 그 뜻이 은미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공정왕이 승지를 보냈을 때 공은 승지가 온다는 것을 미리 듣고서 승려를 불러 삭도(削刀)를 가지고 기다리게 하였다. 승지가 들어와 유서(諭書)를 고하니, 공이 관대(冠帶)를 갖추어 절을 하고 받아서는 즉시 뜰에서 그 관대를 불태우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오직 수염만 남겨 놓았다.
아! 이름을 과연 숨길 수 있겠는가?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그 이름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인가? 백세가 지나 반드시 공의 뜻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공의 후손 경우(慶遇)ㆍ익신(益新)ㆍ지식(枝植) 등이 묘(墓)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여 금년 4월에 지식 등이 북청 부사 모후의 서(書)를 가지고 와서 명(銘)을 구하였다. 명은 아래와 같다.
용맹하신 양렬공이시여 / 桓桓襄烈
북방에서 떨쳐 일어나 / 奮于朔方
우리 강헌왕을 보좌하시어 / 佐我康獻
무용을 떨쳤도다 / 戎旅是揚
강헌왕의 위대하신 무공은 / 康獻聖武
진실로 하늘이 내리셨으니 / 寔天所降
사방의 나라를 깨끗이 정벌함에 / 濯征四國
오직 공이 따랐도다 / 惟公之從
공이 산융을 정벌할 때는 / 公伐山戎
수많은 군사들이 민첩도 하니 / 烝徒捷捷
추악한 무리가 머리를 조아리며 / 羣醜稽首
두려워 떨지 않음이 없었도다 / 莫不震讋
공이 섬오랑캐를 정벌할 때는 / 公伐島夷
동궁에 광휘가 어리었으니 / 彤弓有煇
저들의 괴수를 섬멸함에 / 殲彼大首
공을 아룀이 지체되지 않았도다 / 奏功不遲
북방이 이미 다스려지고 / 北邦旣靖
남쪽도 이미 편안해진 데에는 / 南土旣寧
삼지창과 용무늬 방패에다 / 叴矛龍盾
신령스런 준마가 있었도다 / 有駿其靈
저 신우(辛禑)가 천자에게 복종하지 않고 / 彼辛不庭
요동으로 군대를 진격시키니 / 于遼進師
공이 이르기를, 천자는 / 公曰天子
범할 수 없다 하였도다 / 不可犯之
익양군이 죽기를 맹세하자 / 益陽矢死
그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 將加以刃
공이 이르기를, 충신을 / 公曰忠臣
어찌 남겨두지 않을 것인가 하였도다 / 如何不慗
공의 마음가짐은 / 惟公秉心
저 명신을 바탕으로 하였으니 / 質彼明神
그 의리는 분명하였고 / 顯顯其義
그 어짊은 빛났도다 / 赫赫其仁
황금 도끼 이르는 곳은 / 金鉞所臨
여진이 내왕하였고 / 女眞來王
천 리 땅을 회유하여 / 懷柔千里
우리 영토를 넓혔도다 / 廣我昄章
공은 위대한 용기를 지니시어 / 公有大勇
전투만 했을 뿐 아니라 / 匪直也戰
저 붉은 슬갑을 버렸으니 / 舍彼朱芾
일찍이 연모한 적도 없었도다 / 曾莫之戀
공정왕이 아름다이 여기시어 / 恭定嘉之
공을 초야에서 불러오려 / 徵公于野
빛나는 새서를 보내니 / 皇皇璽書
시골 마을이 황송하여 떨었도다 / 竦動里社
공이 절하고 새서를 받고 나서 / 公拜受書
조복을 불태우고 / 乃焚朝服
그 머리카락을 잘라버려 / 乃斷其髮
작록을 사절하셨도다 / 乃絶爵祿
북산은 우뚝 솟았고 / 北山巖巖
황수는 넘실거리도다 / 潢水瀰瀰
아름답도다 그 명철하심이여 / 休矣明哲
훌륭한 명성이 길이 전해지리라 / 令聞永垂
태묘에 배향되셨으니 / 從食太廟
그 은택이 무궁하리로다 / 其澤孔長
내가 지은 이 명시는 / 我作銘詩
돌에 새겨 아득히 전해지리라 / 刻示茫茫
<끝>
[註解]
[주01] 수충분의익찬경운개국공신 …… 이공 : 이지란(李之蘭, 1331~1402)으로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식형(式馨)이며 양렬(襄烈)은
시호이다. 여진족 출신으로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어 무공을 떨치며 충성을 다한 인물로서 조선의 개국 공신이다. 본성은 퉁〔佟〕, 본
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로서 퉁두란으로 통한다.
아버지는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이다.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아 천호가 된 후 1371년(공민왕20) 부하
를 이끌고 귀화하여 북청(北靑)에 거주하면서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음으로써 청해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고려 때의 이
름은 이두란(李豆蘭), 조선에 들어와 이지란으로 개명하였다.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주02] 홍무(洪武) : 명나라 초대 황제인 태조(太祖)의 연호로, 1368~1398년이다.
[주03] 북청(北靑) : 함경남도의 북동부 땅으로 북쪽은 험한 산악 지대이고 남쪽은 동해안에 이른다. 오랫동안 여진이 점거한 지역이었다.
청해(靑海)라고도 한다.
[주04] 건문(建文) : 명나라 제2대 황제인 혜종(惠宗)의 연호로, 1399~1402년이다.
[주05] 특배(特拜) : 특례로 벼슬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주06] 지정(至正) :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의 연호로, 1341~1370년이다.
[주07] 광성(匡城) : 경흥(景興)의 별칭으로 함경북도 북쪽 끝, 두만강 밑에 있다.
[주08] 의비(懿妃) 최씨 : 이성계의 어머니이다.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부인으로서 추존된 시호가 의혜왕후(懿惠王后)이며, 별호
는 의비이다. 영흥(永興)부원군 정효공(靖孝公)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주09] 개강(价江) : 함경북도 북쪽 끝, 지금의 온성(穩城)에 있다.
[주10] 패왕(覇王) : 이성계를 가리켜 한 말이다.
[주11] 신덕왕비(神德王妃) 강씨(康氏) : 태조 이성계의 계비이다. 본관은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문하찬성사를 지낸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소생으로 방번(芳蕃)ㆍ방석(芳碩)ㆍ경순공주(敬順公主)가 있다. 곡산은 신천(信川)이라고도 한다.
[주12] 신우(辛禑) : 고려 제32대 왕 우왕(禑王)을 폄하하여 이른 말이다. 재위 기간은 1374~1389년이다.
[주13] 대녕(大寧) : 황해도 해주(海州)의 별칭이다.
[주14] 나하추〔納哈出〕 : ?~1388. 원말 명초의 무장이다. 집안 대대로 요동지방에 군사적 책임을 맡았다. 원나라 말기에는 심양(瀋陽)을
근거지로 하여 스스로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칭하며 만주 지역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공민왕 11년(1362)에 수만 대군을
이끌고 북청(北靑) 홍원(洪原) 등지에 침입하였으나 함흥 전투에서 이성계에게 대패하였다.
이때의 공을 기리기 위해 정도전(鄭道傳)이 조선 태조(太祖) 2년(1393)에 〈납씨가(納氏歌)〉를 지어 올렸다. 나하추는 이후 명나
라에 항복하고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다. 운남(雲南) 정벌 도중 죽었다.
[주15] 홍긍(洪肯) : 함경남도 홍원(洪原)의 옛 이름이다.
[주16] 함관령(咸關嶺) : 함경남도 함주(咸州)와 홍원(洪原)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주17] 합란(哈蘭) : 함경남도 함흥(咸興)의 옛 이름이다. 고려 때 윤관(尹瓘)이 여진을 몰아내고 함주 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를 두었으
나 이후 원나라의 영토가 되어 합란부(哈蘭府)로 개명되었고,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桓祖)가 이곳을 수복하여 성을 쌓고 함주 지사
(咸州知事)를 설치하였다. 관북지방의 국경 요새로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주18] 착량(窄梁) : 손돌목을 말한다. 강화도와 김포군 사이 좁은 해협의 입구로서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물살이 매우 급한 곳이다.
[주19] 승천부(昇天府) : 경기도 풍덕군(豐德郡)의 옛 이름이다.
[주20] 해풍(海豐) : 경기도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에 속하였던 군이다.
[주21] 진포(鎭浦) : 전라북도 군산(群山)에 있는 포구로서 금강(錦江) 하구(河口)이다.
[주22] 운성(雲城) : 전라도 운봉현(雲峯縣)을 말한다. 지금의 전북 남원(南原) 지역이다.
[주23] 인월역(引月驛) : 운봉현(雲峯縣)의 동쪽 16리 되는 곳에 있다.
[주24] 정산(鼎山) : 전라도 운봉현(雲峯縣), 지금의 전북 남원(南原)에 있는 황산(荒山)의 동북쪽 산록이다.
[주25] 아기발도(阿其拔都) : 고려 군사들이 무공이 뛰어난 왜군의 소년 장수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아기’는 우리말의 ‘어린 아이’이며,
‘발도’는 몽고말로서 용감무적(勇敢無敵)한 사람의 명칭이다. 즉 ‘아기용사’라는 말이다.
[주26] 누선(樓船) …… 달아났다 : 《태조실록》에 의하면, 고려 우왕 6년(1380) 8월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주27] 호발도(胡拔都) : 여진족의 추장이다. 호발도는 본명이 아니라 ‘오랑캐 용사’라는 뜻이다. 명나라 태조에게 투항하여 명나라의 사주
로 고려 우왕 8년(1382) 1월부터 침공해 들어와 동북면을 어지럽히다가 8월에 길주(吉州) 평원에서 이성계의 군대에게 참패당하
여 도주하였다.
[주28] 단주(端州) : 함경남도 남동부에 위치한 단천(端川)의 옛 이름이다.
[주29] 웅성(雄城) : 함경북도 북서부에 위치한 길주(吉州)의 별칭이다.
[주30] 청송백(靑松伯) 심공(沈公) 덕부(德符) : 1328~140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자는 득지(得之), 호는 노당(蘆堂). 허당(虛
堂),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우왕 6년(1380) 진포에서 왜적을 격파하였고, 동북면상원수로 북청과 함주의 경계인 요외평에서 왜
적을 물리쳤다.
1388년 요동 정벌차 나갔다가 위화도 회군에 참여했다. 조선개국에 참여하여 회군공신 1등에 추록되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
다. 시호는 공정(恭靖)이었다가 정안(定安)으로 바뀌었다.
[주31] 중문령(中門嶺) : 함경남도 중부에 위치한 홍원(洪原)에 있다.
[주32] 토아동(兎兒洞) : 함경남도 중남부에 위치한 함흥(咸興)의 북쪽에 있다.
[주33] 조영규(趙英珪) : ?~1395.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이다. 이성계의 사병(私兵)으로서 천거되어 벼슬을 받았다. 이성계의 휘하에
종군하여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웠고, 이방원과 모의하여 정몽주를 격살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개국 이
등공신에 녹훈되었다.
[주34] 좌명 공신(佐命功臣) : 조선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다른 이름으로 1등의 서열에 해당되었다. 공식 명칭은 좌명개국 공신(佐命開
國功臣)이다. 좌명(佐命)이란 하늘의 명령을 돕는다는 뜻으로, 임금의 명령을 받고 임금이 될 사람을 보좌함을 뜻한다.
[주35] 위화도(威化島) : 압록강 하류에 있는 강 속의 섬으로, 평안북도 의주에 속한다.
[주36] 익양백(益陽伯) …… 몽주(夢周) : 고려 충신 정몽주(鄭夢周, 1337~1392)로 1389년(공양왕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익양군 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해지고, 순충논도좌명 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 호를 받았다.
[주37] 김진양(金震陽) : ?~1392.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자정, 호는 초려이다. 정몽주 등과 더불어 이성계 세력과 대립
하였다. 1391년 좌상시(左常侍)로 있으면서 이성계 일파를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장형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귀양지
에서 죽었다.
[주38] 익양백이 …… 맹세하니 : 정몽주가 〈단심가(丹心歌)〉를 불러서 고려에 대한 충절의 마음을 드러낸 것을 말한다.
[주39] 고여(高呂) : ?~1402.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이다. 이성계의 휘하에서 1380년(우왕6)의 황산대첩, 1385년의 함주(咸州). 북청
(北靑) 전투 등에서 왜적을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정몽주를 격살하고 이성계를 추대한 공으로 수충좌리개국 공신(輸忠佐理開
國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태조가 양위하고 함흥으로 돌아가자 시종하였다.
[주40] 훈춘강(訓春江) : 함경북도 북동쪽에 위치한 경원(慶源)의 북쪽에 있는 강으로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에, “근원이 여진 땅에서 나와서 동림성(東林城)에 이르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알타리(斡朶里) 야인
이 사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주41] 철권(鐵券) : 임금이 공신에게 내렸던 증거물로서, 기와 모양의 쇠로 만든 패(牌)에 그 공적과 상훈(賞勳)을 기록하였다.
한(漢)나라의 고조(高祖)가 공신들을 봉할 때 사용한 것에 그 유래가 있다고 한다.
[주42] 문덕곡(文德曲) : 조선 태조 2년(1393) 7월에 정도전(鄭道傳)이 지어 올린 가사를 바탕으로 관현(管絃)에 올린 악곡이다. 내용은
태조의 문덕을 찬미한 것으로 개언로(開言路)ㆍ보공신(保功臣)ㆍ정경계(政經界)ㆍ정예악(正禮樂)의 4장으로 되어 있다.
[주43] 정도전(鄭道傳) : 1342~1398.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ㆍ학자이다.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이
다. 이성계를 추대한 조선 개국의 핵심적 주체로서 각종 제도의 개혁과 정비를 주도하여 새 왕조를 개창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공으
로 분의좌명개국 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정치적으로 이방원(李芳遠)과 대립하다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살해
되었다.
[주44] 공은 …… 같았다. :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1794년에 지은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의 〈이지란(李之蘭)〉에 의하면,
조정에서 이지란의 사당에 초상화를 걸어놓고 봄가을에 제향을 올리게 하였는데 홍양호가 북변에서 벼슬을 살면서 그의 사당에 가
서 화상에 참배하였는 바 “그의 체격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며 얼굴이 미인과 같아 두 볼이 붉고 눈동자가 샛별처럼 빛났다.
[體不過中人, 貌類好女, 兩頰紅眸如曙星.]”라고 하였다.
[주45] 7세손 …… 전사하였다 : 임진왜란 때이다. 백탑은 함경북도 길주(吉州) 부근에 있는 지명이다.
[주46] 이괄(李适) : 1587~1624.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성공시켰으나, 아들 이전(李旃)이 반역의 무고를 받아 영변에 금부도사가 당도하
자 난을 일으켰다. 서울에 입성한 지 이틀 뒤에 관군에 참패하여 이천(利川)으로 도망하였는데 부하 장수 기익헌(奇益獻) 등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주47] 저탄(豬灘) : 황해도 평산부(平山府)에 있는 강이다. 이괄이 저탄에 이르렀을 때, 이중로가 해서 방어사(海西防禦使)로서 강을 지
키다가 전사하였다.
[주48] 출신(出身) : 무과 급제자를 말한다.[주-D049] 이희당의 …… 전사하였으니 : 병자호란 때이다. 학포는 함경도 안변도호부(安邊都
護府)에 속했던 현(縣)이다.
[주50] 산융(山戎) : 북방의 오랑캐, 여진족을 말한다.
[주51] 동궁(彤弓) : 붉게 색칠하여 장식한 활이다. 옛날 중국에서 천자가 정벌 등의 공이 있는 제후에게 하사한 것으로서 전쟁에 나갈 때
에 지니고 갔다고 한다.
[주52] 내왕(來王) : 제후가 정기적으로 천자에게 조회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여진이 우리 조정에 내공(來貢)한 것을 가리킨다.
[주53] 붉은 슬갑 : 원문의 ‘朱芾’은 고대 예복에 붙이는 장식물로서 무릎을 덮는 것이다. 천자나 제후의 복색으로 고귀한 신분을 의미한다.
[주54] 새서(璽書) : 국왕의 옥새(玉璽)를 찍은 문서를 말한다.[주-D055] 황수(潢水) : 낙동강을 말한다.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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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輸忠奮義翊贊景運開國功臣,輔國崇祿大夫門下侍中贊成事,同判都評議司事兼判刑曹事,判義興三軍府都節制使,靑海伯襄烈李公神道碑銘。幷序
洪武二十有五年。康獻卽位。策輸忠奮義翊贊景運開國功臣襄烈李公。爲靑海伯。加輔國崇祿大夫門下侍中贊成事,判刑曹事。公固辭。歸于北靑。留不返。建文二年。恭定特拜右侍中。遣承旨召之。不至。恭定猶賜功臣祿。以終其身。四年夏四月癸亥。卒于北靑。賜吊祭。輟朝二日。永樂八年。命配享康獻廟庭。公諱之蘭。字式馨。北靑人也。初諱豆蘭。姓佟氏。入國朝。賜姓李氏。曾祖浮海入元。以功封五千戶。至公皇考諱雅遠。仕女眞。官至征西大將軍。公旣貴。贈補祚功臣領議政府事。初征西在女眞時。有大星。垂于井甃。望氣者曰。此啓明也。其下必生魁傑人。已而。公生。及旣壯。爲人勇敢善騎射。元至正中康獻從征古匡城。懿妃崔氏。夢老人來言。价江有射者。伯王之輔也。會公射鹿价江上。康獻一見大奇之。結爲兄弟。以神德王妃康氏兄女。妻之。每出師。必與公俱。公由是知名朔方。辛禑西狩至大寧。命武臣射。以白金二寸爲之的。康獻射輒中其的。禑甚喜。公白康獻曰。神武何示之遽邪。康獻以是多其智。蒙古丞相納哈出。率數萬騎入洪肯。公引兵踰咸關嶺。大戰良久。乃收兵。明日。又與納哈出。戰于哈蘭大野中。納哈出揮矟直前。康獻陽北。納哈出令敢死士追之幾及。康獻垂身若墜馬。仰射其腋。公夾擊之。納哈出望見康獻。乃注矢。康獻起立馬鞍上。矢出胯下。公又突前捍衛之。納哈出知不可敵。卽遁去。倭奴夜襲江都城。殺府使金仁貴。由窄梁入昇天府。中外大震。禑率妃嬪欲出奔。兵衛環立闕門外。公從康獻。自海豐疾趨昇天。有銳將踰白馬山。犯公陳。公乃抽矢射殺之。倭奴遂遁。未幾。樓船五百艘入鎭浦。屠燒郡縣。又入湖南。陷雲城。屯引月驛。康獻諭公曰。湖南千里之塗。死者相枕。爾力戰以洒此耻。公整兵馳至鼎山。倭奴將引矟直躡康獻後。公躍馬疾馳。大呼曰。請視後。康獻回身未及視。公已抽矢射其將。立殺之。阿其拔都年僅十五。勇冠諸酋。倭奴推爲上將軍。康獻命公生得之。公曰。不殺必傷人。因趣戰。阿其拔都著重甲。不見頸面。康獻諭公曰。我中其胄。爾中其面。阿其拔都可殪也。旣而。康獻中其胄。墜之馬下。公乃射。阿其拔都竟殺之。於是。倭奴皆大哭。棄兵遁去。女眞將軍胡拔都。率四萬騎入端州。公方居母夫人憂。康獻使人言於公曰。社稷將危。爾雖在憂服之中。爲予起復。擊拔都可乎。公哭且拜。遂從行。康獻以公爲先鋒。與拔都戰于雄城。大破之。拔都亡去。康獻曰。李某臨陣勇敢。無出其右也。端州旣平。公釋甲以終母喪。靑松伯沈公德符。禦倭奴于中門嶺。敗績。倭奴遂屯兎兒洞。康獻率師至哈蘭。部署諸將。選精兵伏於山中。公乃與趙英珪等百餘騎。按轡徐行。倭奴怪之。不敢犯。已而。康獻令出戰。公遂先登引致之。倭奴直犯康獻陳。於是康獻陽退兵。入于伏中。乃反兵射殺倭奴。公又躍馬馳擊之。伏兵且起。倭奴軍無不披靡。自咸關至牛頭山三十里。僵尸蔽野。當是時。公以勇敢雄朔方。蒙古諸族。皆慴伏倭奴。亦遁五十年。不敢窺邊。故康獻佐命之臣。公名最盛。辛禑出師犯遼東。以康獻爲右軍都統使。公爲元帥。發浿江。次于威化。禑遣金完賜璽書 。趣令進兵。康獻諭公曰。脅三軍而犯天子。此悖義也。與其得罪於天下。曷若班師。以安一國之元元乎。公對曰。天子誠不可犯也。師不度遼爲正也。於是。康獻遂班師。國人大說。益陽伯鄭先生夢周。見王氏社稷將亡。內憂傷。與金震陽謀竭力以扶王氏。恭定置酒。益陽伯悲歌自誓。諸將勸公擊殺之。公正色曰。益陽忠臣。吾何忍賊害忠臣。以自陷於不義哉。其後高呂趙英珪等。殺益陽伯。而公不與也。康獻開國。命公爲都兵馬使。鎭朔方。風諭女眞。而綏來之。女眞皆願爲國民。服征役。納租賦 。無敢後期。數百年被髮之俗。始襲冠帶。由長白抵訓春江千餘里。皆入版圖。公之功也。初策功臣。賜公鐵券。公稱疾。閉門不出。諸公卿爲之嗟歎。康獻夜宴于新宮。召功臣飮。命伶人歌文德曲。諭公曰。寡人之至於斯。卿等之功也。公謝曰。章大義。以基天命。殿下之德也。臣何力焉。其後康獻遣近臣。召入卧內。問羣臣諸將賢不肖。公因言鄭道傳姦。必不令終。及公旣歸。道傳誅。始知公之有先見也。恭定嗣位。以公能辨道傳姦。又策推忠秉義翊戴定社功臣靑海君。公旣卒。又策奮忠効節同德佐命功臣。謚曰襄烈。公容貌靜和端麗。如婦人。及爲將。威震四方。其大節不可奪也。歸北靑十年而卒。享年七十有二。以其卒之年。某月某日。葬于府東晏臺之原。配象山郡夫人谷山康氏。禮儀判書普戴之女。卽神德王妃兄女也。有子四人。曰和英。判刑曹事。曰和尙。判工曹事。曰和美。判漢城府事。曰和秀。禮曹參判。玄孫挺豪。以修撰。論金安老。坐貶死。七世孫僉節制使希唐。先登擊倭奴。死于白㙮。靖社功臣忠壯公重老。討李适。死于豬灘。希唐子出身三立。禦敵于鶴浦。亦能死之。豈皆有公之遺風歟。公自朔方從康獻。爲諸將首。百餘戰。北逐蒙古。南挫倭奴。懷柔女眞。闢地千里。能守義不犯天子。不殺忠臣。可謂賢矣。然去就出處之際。其志微。人莫之識也。當恭定之遣承旨也。公預聞承旨之來。招浮屠持刀以待。及承旨入宣諭書。公冠帶拜而受之。卽庭中。焚其冠帶。因斷髮。唯存其髯。嗚呼。名果可逃邪。豈髮不斷。不可以逃其名邪。百世之下。其必有知公之志者矣。公苗裔慶遇,益新,枝植等。謀所以立碑於墓者。今年四月。枝植等以北靑府使某侯之書。來乞銘。銘曰。
桓桓襄烈。奮于朔方。佐我康獻。戎旅是揚。康獻聖武。寔天所降。濯征四國。惟公之從。公伐山戎。烝徒捷捷。羣醜稽首。
莫不震讋。公伐島夷。彤弓有煇。殲彼大首。奏功不遲。北邦旣靖。南土旣寧。叴矛龍盾。有駿其靈。彼辛不庭。于遼進師。
公曰天子。不可犯之。益陽矢死。將加以刃。公曰忠臣。如何不憗。惟公秉心。質彼明神。顯顯其義。赫赫其仁。金鉞所臨。
女眞來王。懷柔千里。廣我昄章。公有大勇。匪直也戰。舍彼朱芾。曾莫之戀。恭定嘉之。徵公于野。皇皇璽書。竦動里社。
公拜受書。乃焚朝服。乃斷其髮。乃絶爵祿。北山巖巖。潢水瀰瀰。休矣明哲。令聞永垂。從食太廟。其澤孔長。我作銘詩。
刻示茫茫。<끝>
江漢集卷之十三 / 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