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 12. 07(수)
▲경주 헌덕왕릉(慶州 憲德王陵)
※(신라헌덕왕릉 →경주 헌덕왕릉)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종목] 사적 제29호
[명칭] 경주 헌덕왕릉 (慶州 憲德王陵)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수량] 및 면적 18,007㎡
[지정등록일] 1963.01.21
[소재지] 경북 경주시 동천동 80
[시대]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경주시
경주 북천가에 있는 신라 제41대 헌덕왕(재위 809∼826)의 무덤이다. 헌덕왕의 본명은 김언승이며,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재위기간 동안에 농사를 권장하고 당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이 일어나는 등 국내정세가 혼란스러웠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26년에 왕이 죽자 천림사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천림사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왕릉의 남쪽에 절터가 있어 이곳을 천림사 터로 본다. 흙으로 쌓은 둥근 봉토분인데 봉분 밑의 둘레를 따라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둥 역할을 하는 돌을 한단 깔고, 그 위에 넙적한 돌(면석)을 세웠다.
면석사이에는 기둥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다. 탱석에는 무덤을 수호하는 상징적 의미로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는데, 이 무덤에는 현재는 12지신상 중 돼지(해)·쥐(자)·소(축)·호랑이(인)·토끼(묘) 등 5개상만이 남아있다.
둘레돌 밖으로는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설치하고, 둘레돌과 난간 사이 바닥에는 돌을 깔았다.
지금의 모습은 1970년대에 정비된 것으로, 둘레돌의 일부와 돌난간석을 새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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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북천변(北川邊)에 있는 이 능(陵)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6m, 높이 6m이다.
봉토 밑에 판석조(板石造) 호석(護石)을 둘렀는데 밑에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판석(板石)으로 면석(面石)을 세웠으나, 현재 면석은 없어진 것이 많다.
면석 사이에는 탱석(撑石)을 끼워 면석을 고정시키고 아울러 탱석에는 등간격으로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었다. 현재 십이지신상은 해(亥), 자(子), 축(丑), 인(寅), 묘상(卯像)의 5개만 남아 있다. 또 호석(護石) 밖으로는 석주(石柱)를 세워 돌난간을 설치하고 호석(護石)과 난간(欄干) 사이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아 회랑(廻廊)으로 하였다.
난간(欄干) 석주(石柱)는 상하로 두 개의 원공(圓孔)이 뚤려 관석(貫石)을 끼우게 되어 있으나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외에는 아무런 외호물(外護物)이 없다. 아마도 이 능(陵)의 전방으로 흐르고 있는 경주의 북천(北川)이 범람하여 능(陵)의 일부가 유실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 (재위(在位) 809∼826)은 본명이 김언승(金彦昇)이며, 조카인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재위기간에 농사를 장려하고 친당정책(親唐政策)을 폈으나, 김헌창(金憲昌)의 반란과 김범문(金梵文)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국내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웠고, 치적 또한 두드러지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26년에 왕이 죽자 시호를 헌덕(憲德)이라 하고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구당서(舊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831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 천림사(泉林寺)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 왕릉의 남쪽에 사지(寺址)가 있어 이를 천림사(泉林寺) 터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근거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자료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