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5. 1. 3. 21:54
●을사오적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한국측 대신 가운데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대신으로,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내부
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권중현(농상부대신)이다.
▲을사조약 체결의 재현모습
▲을사조약 체결 기념사진
■2010년 8월 기사_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550811
이완용은 사망 직전 지금의 재산으로 환산할 경우 600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당시 이완용의 재산은 지금의 가치로 200억 원에 이르는 100만원을 갖고 있었는데,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의 대가로 10만원(20억원), 한일병합 조약 체결의 대가로 15만원(30억원)을 챙겼다.
무상으로 빌린 국유지를 제3자에게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수법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으며, 이런 재산을 이용해 군산. 김제. 부안 등의 비옥한 논을 집중 매입해 일제 초기 이완용이 보유한 토지규모가 여의도의 두배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완용은 이 토지를 1915년에서 1917년 사이 일본인 대지주에게 처분해 현금을 보유하면서 당시 경성에서 '현금왕'으로 불리며 사채놀이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이완용의 후손으로 부터 환수한 토지는 공시지가로 7,000만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이완용의 증손자 되는 이윤형은 1992년 '조상땅 찾기' 소송으로 서울 서대문구 일대의 땅2,372㎡(712평 - 당시 시가 30억원)를 되찾은뒤 팔고 나서 캐나다로 이민했다
■2010년 1월 기사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113008007
을사오적은 숱한 암살시도에 시달렸고 칼을 맞기도 했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본강점기 전반에 걸쳐 각종 협약과 합의를 체결하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지른다. 게다가 이완용과 이근택의 후손들은 국가에 귀속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수십 차례 걸쳐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조선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군림했던 이완용의 후손은 재산 소송에서 일부 승소해 땅을 되찾았으나 주변의 비난에 땅을 팔고 국외로 도피했다. 을사오적 가운데 이지용은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했고, 박제순의 상속자 박부양은 10대의 나이에 일본에서 자작 작위를 받고 당시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2005년 11월 기사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225314
수년전 작고한 이씨 아버지는 이완용의 땅을 되찾겠다며 1990년부터 소송을 낸 장본인이다. 이씨는 “아버지가 잘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지나치듯 언급한뒤 더 이상의 언급은 피했다. 반면 부인은 “물질적으로 받은 거 없이 정신적 고통만 물려받아야 하는게 이치에 맞냐”며“땅도 찾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이씨는 그동안 크고 작은 고통 속에 살아온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떳떳하지 않지만 지금 와서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부인은 남편 가계의 비밀을 언제 알았느냐는 질문에 “오래 전에 알았다”고만 답했고, 결혼 전에 알았느냐는 물음에는 말끝을 흐렸다.
을사조약 당시 군부대신이었던 이근택의 증손자는 전화통화에서 “매도당하기 싫다”며 전화 인터뷰조차 피했다.
그는 지방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최근 정년 퇴임했다. 몇해전 세상을 떠난 그의 친형은 지방 국립대에서 총장을 지냈다. 이씨는 그동안의 인생역정을 질문 받고는 “어떻게 살긴 어떻게 살아. 대한민국이 보살펴줘서 잘 먹고 잘살았다. 괴롭히지 말아 달라”며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취재팀은 권중현, 박제순, 이지용 등 다른 을사5적의 후손 행적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 한 후손의 지인은 “자손들까지 모두 역적으로 몰아붙이는 분위기 때문에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근택 후손
○장남 이상우 : 공주대 총장 역임(1998사망)
○차남 : 공주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박제순 후손
○자 박부양 :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과 나란히 조선 귀족 모임인 동요회 이사를 지내면서 일제 강점기 내내 부귀영화를
누림.
○손 박승유 : 서울대 음대와 남가주대학 음대를 졸업 후 강원대 음대 교수 역임.
●이완용 후손
○증손 이윤형 : 광복후 은신, 60년대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
그 뒤 17년간 캐나다 생활, 1980년대 말, 국내에 들어와 이완용 땅 찾기 소송에 승소하여, 수십억원을 챙김.
○삼손 이병주 : 밀항으로 일본에 귀화(일본 정부 환대)
증손 이석형(이병주의 아들) : 1979년, 이완용 부부의 묘(전북 익산군)를 파내 화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