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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백운산(白雲山 1,222.2m)을 가다.
글 쓴 이 牧 鉦 高 達 五
3월 24일, 지난 17년간을 경유하던 출발기점이 오늘로써 바뀌었다. 성당시장에서 출발하여 동아쇼핑~ 반고개 사거리~ 서남시장 앞~ 죽전 사거리에서 최종 출발하던 것을, 반고개 사거리에서 출발하여 서남시장 앞~ 죽전 사거리~ 북부정류장~ 칠곡IC로 변경하여 좀 더 새롭게 변화를 구하고자 합니다.
약간의 지연 출발이 있었으나 별 무리 없이 많은 회원님들이 적극 참여 해 주셔서 성황(盛況)리에 출발 합니다.(44명)
봄의 기운은 완연(宛然)해서 먼산에 풍광은 아직도 나목(裸木)으로 다가오지만, 가까이서 보면 제법 물이 올라 싹눈이 뾰족뾰족 돋아나고 있도다! 차는 신나게 달려서 현풍 휴게소에서 간단히 조반(朝飯)을 들고는 잠시 주위를 둘러 봅니다.
넓은 광장에는 사람들과 차들로 넘쳐나서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요! 차산차해(車山車海)로다! 어찌나 차가 많은지 진입과 출발이 어렵고, 여자 화장실 앞에는 2열 종대로 줄을 서 있는데, 문자 그대로 장사진(長蛇陣)이다.
심지어는 남자 화장실 까지도 줄을 서 기다릴 정도이니... 상춘객(賞春客)들이 절정을 이루는 것 같으다. 내수(內需) 시장(市場) 경기는 다들 어렵다고 하지만, 주말 행락객 인파는 갈수록 넘쳐나고 있으니,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로다!
차내에서 간단한 진행을 마치고 줄곧 내달아 문산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 가는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발 디딜틈이 없슴니다 그려! 봄은 남쪽에서 온다드니... 하동 섬진강 부근의 “매화축제”가 있어 전국의 관광객이 모여 드는가 봅니다.
그럭 저럭 하동 부근에 이르니 차량 정체가 심하다. 도로상 “전광판”에 “교통사고로 인한 체증이 5Km”라고 떠 오른다. 가슴을 졸이면서 30여 분을 가다 서다를 반복한뒤 다시 순조롭게 달려서 옥룡면 “진틀” 출발기점에 이르니, 시계는 거의 12시가 다 되어간다.
생각보다 날씨가 차고 바람도 꽤 심하다. 심산유곡(深山幽谷)이라 인적은 드물지만, 여러대의 등산객 차량들이 도로 곳 곳에 주차되어 있으며, 뒤이어서 등산로는 산꾼들로 시끌벅쩍 하고 옷차림은 울긋 불긋 오색으로 찬란하다.
무명교(진틀 출발기점 다리)를 건너 경사진 언덕길을 일렬로 오르니 끝간데를 모르겠도다! 산비탈 양지바른 여러 곳에는 펜션과 식당, 민박집들로 즐비(櫛比)하고, 8년전(2005년1월)에 산행 왔을때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풍광이다.
시속(時俗)이 변한다고 하지만 이토록 변했을 줄이야! 개발이라는 미명(美名)아래 산천이 온통 성한곳이 없구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나서 부터는 아름다운 조국의 산천이 더 많은 몸살을 앓고 있슴니다.
당국에 부탁하노니... 건설과 개발도 좋지만 길이 길이 후손들에게 물려줄 조국의 아름다운 산하(山河)를 부디 잘 보존 해 주시길 간절히 부탁 드림니다.
몇걸음을 올라 양지바른 어느 전원주택 앞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을 마치고, 다시 30여 분을 오르다가 적당한 곳에서 남산님들을 기다리며 가져 온 과일과 간식들을 나눠 드시는데, 후미에 벽송(碧松:최영수) 대장님께서 처음 오신 회원 한분이 많이도 힘들어 하신다고 전해 온다.
구윤서(부대장)님과 둘이서 10여 분 이상을 기다려 후미와 다시 합류하니, 다름아닌 대구산악회의 박총무님이시다. 후미에 네분과 여담(旅談)을 주고 받으며 30여 분을 올라 신선봉(神仙峰) 근처에 이르니, 시계는 벌써 13시가 넘어 있다.
진행이 더디기는 하여도 걷는데는 별 무리가 없어 안심하고 오름니다. 오를수록 시야는 넓어져서 옥룡면, 봉강면 일대의 풍광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로 지근한 거리에 호남정맥의 지산(支山)들이 겹겹이 싸여 다가온다.
오르는 중간 중간 험로(險路)와 경사가 심한 곳은 철계단이나 나무계단을 설치해서 안전 산행이 되도록 해 놓았으며, 또 등산로 옆으로는 나무에 이름표를 달아 놓아서 수종(樹種) 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당국의 관심어린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쉬~엄 쉬~엄 여유롭게 오름니다.
신선봉이 가까워 질수록 산세는 험하여 기이한 바위들과 거대한 암봉들이 보는 눈을 현란(絢爛)하게 합니다! 모두들 감탄을 연발하며 기념촬영에 분주합니다! 오르다 쉬고 쉬다 오르기를 반복하며, 마지막 철 계단을 올라 신선봉에 오르니 일시에 가슴이 확 열리고 천하가 한눈에 들어 옵니다.
여러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잠시 천하를 조망(眺望) 합니다. 주위는 철쭉나무들이 무성하나 아직은 꽃눈이 단단하여 개화(開花)는 한참 뒤에나 볼 수 있겠으며, 발 아래는 이름모를 고혼(孤魂)이 잠들어 있슴니다.
이 높은 곳까지 어찌 옮겨 모셨는지... 참으로 그 정성이 놀랍슴니다. 옛 선조님들은 조상님 모시기를 하늘같이 섬기고 받들었슴니다 그려! 백운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지맥이 신선봉에서 우뚝 솟아 그 혈이 단단하게 맺혀 있으니,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돌혈(突穴)의 명당이라 할만 합니다.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이 겹겹이 싸여 있어 문자 그대로 중중포리(重重包裏)다.
옥룡면(玉龍面)과 봉강면(鳳岡面)은 도솔봉(1,123m)에서 동쪽으로 뻗어나린 지맥을 사이에 두고있어 가깝고도 멀게 느껴진다.
이 곳 옥룡면에는 일찍이 나말여초(羅末麗初)에 풍수지리의 원조(元祖)라 일컬어지는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37살에 들어 와 옥룡사(玉龍寺)를 짓고, 35년간 머무르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 낸 곳이기도 하다.
그는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 15세에 불교에 입문하여 곡성 태안사에서 혜철선사로 부터 불법을 배웠으며, 또한 신라의 멸망을 예언하고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도움을 준 이후로 이 곳에서 스스로 “옥룡자”라 칭하며 72세에 입멸(入滅) 하였는데, ‘옥룡’이라는 지명도 선사의 도호(道號)에서 유래 하였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도선국사가 절을 지을 당시 소(沼)가 있었는데, 뱀과 개구리가 많아 이를 퇴치할 묘안을 찾던 중 뱀은 동백나무를 싫어 한다는 것을 알고, 그 곳에 동백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하며, 이 후 동백꽃에 날아드는 벌, 나비를 잡아먹고 자랄 수 있는 기운이 왕성한 흰닭(白鷄)을 키우기로 하였다. 오늘날 “백계동(白鷄洞)”이라는 지명 또한 여기서 유래 하였다고 한다.
옛 말에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했듯이... 이웃 봉강면에는 역사에 걸출한 두 인물이 출생 하여 이 고장을 빛나게 하였으니, 신제 최산두(崔山斗)와 매천(梅泉) 황현(黃玹)이다.
신제는 성종 13년(1482)에 봉강면에서 태어 났으며, 태어날 때 ‘북두칠성’의 광채가 백운산에 내린 까닭으로 “산두(山斗)”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소년시절에 지금의 동곡리 “학사대(學士臺)”에서 “주자강목” 80권을 가지고 들어가서 10년 계획을 하고 공부하다가, 8년만에 동굴에서 나오면서 우뚝 솟은 백운산의 감흥을 “태산압후천무북(泰山壓後天無北:태산이 뒤를 누르니 북쪽 하늘이 없다.)”이라고 한후 다음구절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어린 “초동(樵童)”이 나타나 “대해당전지실남(大海當前地失南:큰바다를 앞에 당하니 남쪽땅이 없다.)”이라 하면서 공부를 더 하라는 의미의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 후 2년을 더 공부하고 22세(1504)에 진사에 올랐으며, 31세(1513)에는 별시문과에 급제 하였다. 이어 신제 최산두는 당시 정암 조광조 등이 주창한 도덕정치, 혁신정치에 뜻을 같이하다가 훈구파의 세력에 밀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맞아 조정에서 축출 당했다.
이때 정암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신제 최산두는 당시 37세의 나이로 화순 동복으로 유배되었는데, 그는 “물염(勿染)”과 “적벽(赤壁)” 사이를 오가며 그 곳에서 후학들을 지도 하였다.
그가 52세가 되면서 귀양에서 풀릴 때 까지 15년 동안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었는데, 인종 때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 와 유희춘 등이 그의 문하생이며, 오늘날 “적벽”이라는 지명도 당시에 그가 지은 것이라 한다.
또 매천 황현(1855~1910)은 한말의 대학자요, 시인이자 우국지사이며, 그는 명재상 방촌(尨村) 황희(黃喜 1363~1452)의 후손이지만 인조반정 이 후 가계가 몰락하여 한미한 집안으로 농민이나 다름없는 잔반층(殘班層)이었다.
고종 20년(1883)에 29세 때 “특설보거과(特設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 초장에서 장원 하였으나, 그가 몰락한 가문출신임을 알고 차석으로 떨어뜨렸다. 이를 간파한 매천은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 하였는데, 31세 되던 해에 부모님의 간곡한 뜻에 따라 고종22년(1885)에 생원시에 응시, 장원을 하여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그러나 시국의 혼란함을 알고 곧 낙향하여 구례 만수동(이사갔음)에서 “경안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독서와 사색으로 은거(隱居) 하였다. 이어서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갑오경장(1894), 을미사변(1895), 을사보호조약(1905)으로 이어졌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그는 비분강개하여 아편덩이를 삼키고 자결 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매천야록(梅泉野錄)”, 과 “오하기문(梧下記聞)”이 있으며, 그의 마지막 절명 시(詩) 한구절을 옮겨 봅니다.
추등엄권회천고(秋燈掩卷懷千古:가을 등불아래 책 덮고 옛 일을 생각하니)
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지식인 노릇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렇다. 사람 노릇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물며 지식인 노릇이야 더 말해 무삼하리요! 오고 간 인사(人士)들이야 냇가에 모래알 보다도 더 많겠지만, 인류에게 기억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가! 시계는 13시 47분을 가르킨다. 모두들 시장끼가 더하여 신선봉 바로 아래서 적당한 곳에 모여 앉아 점심을 먹슴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드니... 밥맛이 꿀맛이다.
필자를 비롯하여 벽송님, 구윤서님, 김해진님, 대구산악회의 박총무님외 2명, 김규수님과 그 일행 2명 등이 빙둘러 앉아 드시는데... 밥 한그릇에 반찬은 20여 가지가 넘으니, 이보다 더한 진수성찬(珍羞盛饌)이 또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벽송님은 특식(特食)으로 빵과 삶은 계란을 점심으로 준비 해 오셔서 밥에다 빵을 곁들여 드시니, 이 또한 별미(別味)가 아니겠는가!
점심후 20여 분을 쉬~엄 쉬~엄 걸어올라 백운산 정상에 오르니 ‘정상표석’도 새로 세워져 있으며, 자연석에다 “白雲山上峰”이라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새겨져 있어 보기에도 아름답다.
여러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드리고 사방을 둘러 봅니다. 지나 온 신선봉은 손에 닿을 듯 하고, 북동쪽의 지리산 일대는 시계(視界)가 멀지 않아 선명하게 볼 수 없어 아쉬움을 더해 줍니다.
이곳 백운산(1,222.2m)은 백두대간의 영취산 부근에서 서남으로 뻗어 나온 지맥을 따라 장안산, 팔공산, 진안의 마이산, 전주의 모악산, 추월산, 무등산, 보성의 사자산, 제암산을 거쳐 돌아 다시 승주의 조계산을 지나 백운산에 이르고, 그 잔여지맥은 매봉, 갈미봉, 쫓비산, 국사봉을 거쳐 망덕산에서 그 맥을 광양만에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호남정맥(湖南正脈)이라 한다.
백운산은 광양시의 진산(鎭山)이요, 풍수적으로도 대단한 길지(吉地)여서 일찍이 도선국사는 “녹존파군성(綠存破軍星)”이라 하여 “병화불입지지(兵禍不入之地:전란의 재난이 없는땅)”의 땅이라 하였다.
또 백운산 계곡이 끝나는 지점인 ‘수어호(水魚湖)’에서부터 비평리, 황죽리, 어치리에 소재한 12개 마을을 합하여 “백학동(白鶴洞)”이라 한다. 백학동은 지리산 청학동과 대조를 이루는 곳으로, 청학동은 도교적 색채가 짙은 신비주의적 이상향의 상징이라면, 백학동은 유교적 색채가 짙은 현실주의적 이상향의 상징이다.
아울러 이곳 광양시는 동쪽으로는 섬진강(蟾津江)이 휘감아 흐르고 남쪽에는 바다를 마주하고 있어 천혜의 명당이다. 하여 풍수적으로 “남수북산동천(南水北山東川)”이요, 또는 “배산임수동천(背山臨水東川)”이다.
천년전에 도선국사는 오늘날 광양시의 풍요로움을 미리 예언 하셨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없다 하리요!
매화꽃 피어서 온 누리에 滿發하니
향기는 우주에 充滿 하구나!
올적에는 맨 몸으로 달려 왔건마는
갈적에는 매화 향기에 젖어 가누나!
하산길은 한결 수월해서 걷기도 편안 합니다. 30여 분을 걸어나려 두 번째 헬기장에서 백운사 방향의 갈림길에서 얼마를 기다려도 후미에 6명은 오질 않는다. 핸드폰으로 대 여섯차례 연락을 해 봐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
하는 수 없어 구윤서님, 대구산악회원님과 셋이서 20여 분을 내려오다 벽송 대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오는데, 출발기점인 “진틀” 방향으로 하산하고 있으니 걱정말라 하신다. 편안한 마음으로 한참을 내려와서 백운사(白雲寺)에 들려 간단한 참배(參拜)를 하고 잠시 조망(眺望)합니다.
대웅전은 근래에 지은 건물이라 고색(古色)어린 멋은 없으며, 정면3칸 측면2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양식이다. 그 왼편 높은 벼랑 끝에는 산령각(山靈閣)이 진좌(鎭坐)하고 있으며, 정면3칸 측면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양식이다.
도량(道場)내 전각(殿閣)의 수는 대웅전, 산령각, 요사채 등 비교적 단촐하다. 주산은 웅장하고도 힘있게 솟아 있으며, 청룡 백호도 그만 그만하고, 안산(案山)은 비교적 멀고 허(虛)하다. 사격(寺格)의 규모로 봐서는 암자(庵子)라 함이 더 적당 하겠으며, 지근한 거리에 비보숲(裨補林)을 조성하여 계곡의 허(虛)함을 보완 했으면 좋겠다.
도량을 한바퀴 휘~ 돌아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한참을 내려 오니 체중이 쏠려 발가락에 많은 부담이 온다. 30여 분을 내려 왔을까? 앞서가던 백문주(부회장)님 내외분과 꼬추까루(산구호)서부장님, 김명숙님과 그 일행을 만나 다시 합류하니, 갑자기 시끌벅쩍 활기가 넘쳐남니다.
산기슭으로 내려갈수록 진달래도 많이 피어서 봄의 향기(香氣)를 더해 주십니다. 원래 계획은 ‘묵방’으로 하산(下山) 하기로 했지만, 쉬운길(씨멘포장도)로 나려오다 보니 용문사(龍門寺)가 저만큼 보입니다. 큰길에 도착하니 3월의 긴 긴 하루해도 어느 덧 서산에 기울어서 저녁 노을에 찬란합니다.
천리를 멀다 않고 달려 온 그대는 누구인가
흰구름 벗하며 노니는 저 백운산은 알리라
춘삼월 매화 향기는 온 세상에 넘쳐 나는데
홀로 핀 매화 그대는 진정 향기를 아시는가
단기 4346년(서기 2013년)3월 24일
광양시 백운산(白雲山 1,222.2m)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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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산님들! 잘 계시는지요? 사진 자료가 충분치 못해 문맥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슴니다. 이점 널리 이해 하시길 바라며,
당일 "백운산" 산행에 동참하신 "대구산악회원님, 거목산악회원님, 달서산악회원님"을 비롯하여 모든님들에게 다시한번
깊은 감사를 드리오며, 다음 산행 때 까지 내내 건강하시고 가내 행운을 빌겠슴니다. 감사합니다.
백운산 유래 차내에서도 많은 준비를 해오신 고회장님의 역사강의
이렇게 산행후기 작품까지 올리시니 그 정성 감탄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산행후기는 남산의 영원한 발자취며 산인들의 후대의 길이남을 좋은 자료가 될것같습니다.
오랜 장문쓰시느라 많은 수고하셨고 고회장님 가정에 늘 평화와 행복이 함께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벽송님이 다녀 가셨군요! 고맙슴니다. 회원 상호간에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한 지금이 행복합니다.
언제나 남산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시는 벽송님의 정성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모든일이 잘 될것이라 믿슴니다.
부족한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 감사드리며, 우리함께 건전하고 가장 모범적인 산악회를 후배님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하셨으면 합니다. 벽송님의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백운산에 얽힌 역사 문화 유래를 한꺼번에 배우고 갑니다.
산행도 힘이 들었을텐데도 등산인을 위하여 수고 많았어요
황고문님이 오셨군요! 많이 고단하실텐대 몸은 편하신지요? 지난날 남산을 위해서
노력하셨던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라니다.
금성님의 사진 자료도 활용 했으며 감사드림니다.
백운산 "학사대"와 "매천 황현선생"의 사진 자료를 확보하여 "산행후기"에
활용하였사오니,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자료 제공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