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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해전사 최고의 영웅 충무공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듯한 통영시
통영시 [統營市]의 역사
욕지군도의 여러 섬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들이 발견되어 우리나라 신석기문화가 이러한 도서지역에까지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통영반도의 해안평지에는 지석묘 등 청동기시대 유적이 도처에 산재하며 그 분포가 고성지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의 사료에 의해 볼 때, 변진 12국 중의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이나 『삼국사기(三國史記)』 물계자(勿稽子) 열전과 『삼국유사』에 나오는 포상팔국 중의 고사포국(古史浦國) 혹은 고자국(古自國, 지금의 고성)에 속한 지역이었다. 신라는 이 지역을 차지하여 고자군(古自郡)을 두었는데 757년(경덕왕 16) 고성군으로 개칭하였다. 9주 중 강주(康州 : 지금의 진주)에 속한 고성군의 직속 촌락이었다. 995년(성종 14) 고주자사(固州刺使)를 두었다가 뒤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1018년(현종 9) 고성현이 거제현의 속현이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현으로 복구되어 현령이 파견되었다. 1266년(원종 7) 고성현이 주로 승격, 고주(固州)가 되었다. 충렬왕 때 남해현에 합쳤다는 기록이 『고려사』·『대동지지』·『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보인다. 1390년(공양왕 2) 현으로 환원되어 현령이 파견되었다. 임진왜란 때까지는 고성현의 연혁에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당항포(唐項浦) 한산도해전에서 적 수군을 섬멸한 후, 1593년(선조 26)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 통제영을 설치하였다. 그 후 한산도는 우리 수군의 본거지가 되었다.
1603년 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기(統制營基)를 용두포(頭龍浦)로 정하고 세병관 등을 창건하였다. 이듬해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겼는데 이 때부터 통영이라 부르게 되었다. 1870년(고종 7) 고성현이 부로 승격했고 치소를 통제영 안으로 옮겼다가 1872년 고성으로 복귀하였다. 1895년 통제영이 폐지되고 이듬해 고성지방대를 설치, 병졸 400명을 주둔하였다. 1900년 5월 16일 진남군이라 하고 춘원면·도선면·광이면·광삼면·욕지도·사량도와 거제군의 한산면, 가좌도를 합해 1군으로 하였다. 1909년(순종 3) 3월 3일 용남군으로 개칭하고 동면·서면·산양면·도남면·도선면·산내면·광이면·광삼면·한산면·사량면·원삼면·가조면을 1군으로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남군, 거제군을 합해 통영군이라 개칭하고 광이면, 광삼면 일부는 고성군에 편입되었다. 또 춘원면을 통영면으로 개칭하여 통영면·용남면·도산면·광도면·한산면·거제면·동부면·일운면·이운면·연초면·하청면·둔덕면·사등면·장목면·원삼면과 사량면을 합해 원량면이라 하여 16면을 1군으로 하였다. 1931년 4월 1일 통영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6년 산양면의 평림·인평·당동·미수·봉평·도남의 6개 리를 동으로 하여 통영읍에 편입시켰다. 1953년 1월 1일 통영군에서 거제도를 분리하여 거제군으로 개편하였다. 1955년 6월 29일 원량면이 욕지면과 사량면으로 분할, 개편되었다. 동년 9월 1일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됨에 따라 분리되었다. 1968년 한려수도가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71년 거제대교가 완성되었다. 1973년 7월 1일 남해군의 갈도가 통영군에 편입되었으며 동년 동월 동일 용남면의 무전리가 충무시로 편입되었다. 1974년 10월 25일 광도면안정출장소를 설치하여 7면 1출장소가 되었다.
1995년 1월 1일 도농통합에 따라 통영군과 충무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통영시로 되었다. 같은 해 3월 2일 산양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문화동과 중앙동을 문화동으로, 평림1·2동을 평림동으로, 도남1·2동을 도남동으로 통합하여 1읍 6면 17동 1출장소가 되었다. 1998년 명정동·서호동·구평림2동을 명정동으로, 항남동·문화동·태평동을 중앙동으로, 정량동·동호동을 정량동으로, 인평동·구평림1동을 인평동으로, 도천동·당동을 도천동으로 통합하여 1읍, 6면, 11동, 1출장소가 되었다. 1999년 행정기구 통합에 따라 안정 출장소 폐지하고 광도면을 통합하여 1읍, 6면, 11동으로 오늘에 이른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통영시[統營市]의 관광
이 지역은 우리나라 제1의 해상 관광지역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한산도를 비롯하여 4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다도해지역으로, 온화한 기후에 수려한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있다. 또 곳곳에 이순신 장군의 전승 유적지가 많아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일부로 점점이 떠 있는 섬 사이를 누비면서 나가는 해상관광은 이름 없는 무인도의 기암괴석과 동백 숲이 나타나고 흰 모래사장을 둘러싸인 섬들이 전개되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여름철에는 비진도·연화도·욕지도 등이 해수욕장과 더불어 더욱 유명하다. 욕지면에는 오래된 고분군과 백로·괭이갈매기 서식지가 있어 새와 함께 어우러지는 경치가 아름다워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다. 통영항을 기점으로 정기 여객선이 운항되고 부산에서 매일 3회 여객선 페리호가 왕래하며 이 밖에 소형선도 이용할 수 있다.
특히 통영항은 임진왜란의 대전승지이며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관문에 위치한 미항이다. 한국의 나폴리로 불릴 만큼 수려한 관광자원과 임진왜란의 유적지가 많아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남망산공원에서 보는 다도해는 절경이다. 통영항 서쪽 한려수도 관문에는 미륵도와 해저로 연결되는 우리 나라 유일의 해저터널인 통영해저터널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이 해저터널 위에 설치된 아치형의 통영교는 통영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관광명소이다. 이 밖에 착량묘·용화사·송장나루터 등의 경승지가 유명하다. 관광호텔·유스호스텔과 그 밖에 숙박시설이 완비되어 있고, 40여 척이나 되는 쾌속여객선·해상유람선을 이용, 한산도와 비진도를 관광할 수 있다. 특히 통영만에 자리 잡은 한산도는 임진왜란 때 한산도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제승당과 그 주변 해역의 호수같이 맑고 잔잔한 바다와 수면 위를 난무하는 갈매기 떼와의 조화는 절경을 이루어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 명소이다.
시내에는 이순신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충렬사가 있으며, 특히 수령 350년 된 울창한 동백나무로 둘러싸여 장관을 이룬다. 통영항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웅장한 건물이 세병관이다. 이는 1604년부터 1896년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서 그 당시 국방을 담당하던 이순신의 얼을 느낄 수 있는 자랑스런 유적지이다. 통영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가 주최하는 통영예술제는 통영 지역의 유일한 종합예술축제로서 통영시의 문화예술관련 단위지부가 수준 높은 문화예술향유 기회를 통영시민에게 제공한다. 이순신장군의 얼과 높은 뜻을 계승하고 한산대첩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한 한산대첩기념제전은 통제영 300년 역사의 전통을 살려 역사와 문화·예술, 수산과 관광이 어우러진 해양축제이다. 동호동에 자리 잡은 시민문화회관은 통영시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장으로 각종 공연과 전시 및 창작공간의 제공 등 다목적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항남동강구안 물량장에 있는 통영문화마당은 지역특성과 문화를 표출할 수 있는 예술의 열린 공간을 조성하여 시민 생활에 유익하고 풍부한 문화휴식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1997년에 개장되었다. 태평동의 향토역사관은 통영과 관련된 사료를 발굴, 수집, 보존, 정리,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바다의 학습장인 통영수산과학관이 산양읍 미남리에 위치하고 있다. 용남면 화산리의 통영옻칠미술관은 400여년의 오랜 전통을 가진 통영옻칠의 역사를 잇기 위해 2006년에 문을 연 미술관이다. 이외에도 도천동의 페스티벌하우스, 도남동의 통영전통공예관, 용남동의 명품진주전시관, 동호동의 남망산조각공원 등이 있다. 그리고 예술공간으로 전혁림미술관, 연명예슐촌, 청마문학관, 청마거리, 윤이상거리 등이 있다. 통영공설운동장은 전국규모의 각종 대회를 개최하며, 시민들을 위한 각종 사회체육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고 있다. 북신동에 자리 잡고 있다. 평림동의 평린체육전지훈련장에서는 전국규모의 축구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특히 동계전지훈련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동호동에 있는 충무체육관은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5레인의 수영장을 갖추고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통영삼도수군통제영[統營三道水軍統制營]
경상남도 통영시에 있는 조선후기 삼도수군통제영 관련 건물터. 사적.
개설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은 조선 후기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3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해상 방어 총사령부의 터로, 1998년 2월 20일에 사적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1603년(선조 36)에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 세운 이후, 1895년(고종 32)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없어질 때까지 292년간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쳐 세병관을 제외한 건물이 대부분 사라진 상태이다.
내용
통제영은 1593년(선조 16)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직제를 새로 만들어 전라좌수사에게 이를 겸임하게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삼도수군통제영’으로 통칭되며, 약칭은 ‘통영’이다. 임진왜란 당시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한산 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정유재란으로 한산 진영이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고, 전란이 끝난 뒤에도 거제도 오아포(烏兒浦), 고성현 춘원포(春元浦) 등지로 옮겨 다니며 제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1603년(선조 36)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통제영을 두룡포(頭龍浦: 현 통영시 문화동)로 정한 이후, 이곳에다 터를 닦고 건물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605년(선조 38) 음력 7월 14일에는 여황산 남쪽 기슭에 객사인 세병관(洗兵館), 백화당, 정해정 등을 세웠다. 이후 1678년(숙종 4) 제57대 통제사 윤천뢰(尹天賚)가 영문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높이 1장 반(약 4.6m), 둘레 1만 1730자(약 3.6㎞), 성가퀴 707개 규모의 평산성(平山城)을 쌓았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의 통영성에는 4대문(大門)과 2암문(暗門) 그리고 3포루(鋪樓)가 있었고, 세병관을 위시하여 100여 개의 관아가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강점된 뒤 세병관을 제외한 대·소 관아 100여 동의 건물들이 모두 헐렸고, 그 자리에 학교, 법원, 검찰, 세무서 등이 들어섰다.
1975년 이후에 세병관 및 주변 지역을 정비하고, 1996년 지표 조사를 실시하여 유구를 확인하였다. 통제영 건물 중 현존하는 것은 보물 제293호로 지정된 세병관 뿐이며, 1987년에 복원된 수항루(受降樓) 1동이 있다. 수항루를 지나 우측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2호인 두룡포 기사비(頭龍浦 記事碑)가 있고, 좌측에는 매표소 및 관리사 건물이 있다. 통제사 내아인 운주당(運籌堂), 경무당 지역에는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 건물이 들어섰다. 통제사 집무실이던 백화당과 각종 물품을 납품하던 공고(12공방, 선자방) 지역에는 통영초등학교가, 통제사 참모장의 군영인 중영 및 중영내아 등 지역에는 통영세무서가 들어섰다.
그 밖에 파취헌, 분뇨정 지역에는 충렬여자중학교와 충렬여자상업고등학교가 들어서는 등 대부분의 지역에 공공건물이 들어섰고, 주변 일대는 일반 주택지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왕조의 계획된 수군 군사도시로서, 현재 100여 동의 관아 건물의 위치가 확인되어, 국방 유적지로서의 중요성 및 역사성을 인정받고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대전회통(大典會通)』
『만기요람(萬機要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보』13895호(1998.2.20)
문화재청(www.cha.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오랜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통제영의 성곽과 건물들은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많은 변화를 거쳤다. 따라서 실제 복원을 할 경우 그 시기를 정하는 것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디지털콘텐츠를 활용할 경우 원하는 시기를 쉽게 설정할 수 있고 또한 변천의 양상까지 다룰 수 있어서, 역사·건축 교육용 영상뿐만 아니라 각 병영·수영·읍성 등의 전시관에서 영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최초의 통제영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에 의해 한산진(현 한산도, 1593∼1603)에 설치되었으나 제2대 통제사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하여 진영의 본거지인 한산진은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 36년(1603)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통제영을 두룡포(현재의 통영)에 터를 닦고 설치하여 고종 32년(1895)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없어질 때까지 292년간 조선수군의 본거지로서 유지되었다. 이러한 통제영의 변천을 형성기, 성장기, 유지기, 폐영기를 거쳐 현재모습까지 구분하여 살펴
본다.형성기(1603~1638)
형성기는 통제영을 두룡포로 이전하는 선조 36년(1603)을 전후한 시기이다. 전란이후 피폐해진 각 지역의 복구로 통제영의 체제정비도 기본적인 체계만을 우선 마련하였고, 다수의 외창을 조영하여 재정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제6대 이경준 통제사로부터 선조말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겨우 통제사의 거처와 객사인 세병관, 백화당 등과 기본적인 병고·군창·공고·영고 등의 각종 창고들만이 마련되었다. 광해군대에 이르러서야 영리청과 내아, 사공청 등 일부 통제영의 하부구조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각종 화포류를 담당하는 포수청과 주사화포청 등이 조영되어 가장 기본적인 물적구조을 갖추었다. 한편 이시기에는 통제영 직할의 우후영의 모습도 가장 기본적인 반구정과 군관청이 본영내에 마련되고, 거제와 접한 요충지인 견내량에는 우후가 풍화기에 나아가 지키는 방영이 인조 8년에 그 모습을 갖추었다.
성장기(1638~1720)
성장기에 이르러 통제영 건설은 삼도수군을 관할하는 위용에 걸맞게 건물들이 계속적으로 조성되었고 성곽을 지어 완전히 정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인 인조 18년 서리청, 인조 28년 교련당, 운주당, 호소각 등 본영의 주요 기구들이 마련되었고, 효종대 등패청과 파취헌, 현종 9년 고마창이 마련되었다. 현종 14년 군뢰청, 삼랑창 등 많은 공해가 조영되었고, 숙종 1년 우후영에 집사청, 화포청, 사공청, 우후군뢰청 등 대대적으로 보충되었고, 숙종 3년에는 수항루가 세워졌다. 통영성은 숙종 4년을 전후한 시기에 통제사 윤천뢰에 의해 본격적으로 건립이 추진되었다. 성문과 누각을 짓고, 숙종 20년에 동·서·북쪽에 망루의 구실을 하는 포루를 세웠다. 그리고 숙종대에 선군직청, 어변군관좌우청, 영노청 등 통제영의 각종 관청이 정비·설립되었다. 사실상 통제영 건설이 마무리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유지기(1720~1895)
유지기는 경종대에서 고종 32년까지로, 통제영이 가장 번성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일부 통제영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낡은 건물들을 보수하거나 개건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영조 16년 그 동안 방치되었던 한산도 제승당을 중건하고, 보역창, 섬향고, 평무고 등 주로 통제영의 내창등이 다수 건립되었다.
통제영은 크게 통제사가 제반 의전을 치루던 객사인 세병관 영역과 내방하는 손님을 맞이하는 통제사 접견실인 백화당 영역, 통제사 참모장들이 업무를 보며 기거하는 중영 및 내아 영역, 통제사가 업무를 보는 운주당 영역으로 크게 구분질 수가 있다. 백화당 영역 서쪽으로는 통제영 시대의 각종 수공업품들을 생산하였던 십이공방이 자리하고, 그 하단에는 각관의 색리들이 수직하던 잉번청을 비롯한 교방, 노인청, 등패청, 군기청 등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중영은 일제시대까지 군청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내아는 중영을 중심으로 서측에 배치되었다. 망일루를 지나면 서측에는 산성청이 동측으로는 좌청이 자리하고 있다. 보석을 따라 분명루를 통과하면 노청, 군뢰청, 영리청이 남향으로 배치하고 그 뒤로 운주당 영역에 접어들게 된다. 삼문을 지나면 집무실인 운주당과 경무당, 후원으로 득한당, 파취헌, 육의정, 의두헌이 있으며, 경무당 옆 신성문을 통과하며 내아가 있다. 이렇듯 통제영은 각 전각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정리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폐영기(1895~1945)
폐영이후 통제영의 모습은 1916년 조선 총독부에서 발간한 ‘통영지도’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은 축적이 1/10,000 지도로서 건축물, 석축, 도로, 고목나무 등이 모두 표현되고 있다. 당시 세병관은 통영면 대화정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병관을 중심으로 서측으로 백화당, 남측으로 중영, 동측으로 운주당이 배치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 표현된 석측과 도로는 현재와도 유사한 점이 많으며 특히 세병관 앞 석축과 진입계단은 현재와 동일하다. 먼저 백화당 주변배치를 보면 백화당 뒤 석축과 공내헌, 십이공방 등이 배치되어 있고 그 건물들이 당시에는 소학교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병관 서측 아래에 고목나무가 있으며 그 밑에 있는 구조물이 잉번청 위치와 일치하고 있으며 중영아래 표현된 석축은 현재에도 있다. 중영 좌측으로부터 구조물은 응수헌과 반구정으로 추측된다. 세병관 동측을 보면 운주당을 비롯하여 병고, 경무당이 있고, 운주당 전면에 영리청, 영노청, 군뢰청이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영리청 건물은 현재 사찰(법륜사)로 사용하고 있으며,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된 아방, 부관청 등이 배치되어 있다.
현재모습(1945~현재)
지금의 통제영 모습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의도적인 훼철과 해방이후 근대화에 따른 주택건립, 선창의 매립으로 인해 빠르게 훼손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객사인 세병관이 현존하여 현재 이를 중심으로 망일루, 지과문 등이 복원되었다. 또한 선창에 있었던 수항루를 망일루 옆에 복원하였고, 두룡포기사비를 이건하여 망일루 뒤편에 두었다. 더불어 최근에 운주당, 경무당, 내아 등이 복원되었다. 통영시에서는 통제영 복원사업을 5단계로 추진하고 있다. 제1단계는 세병관 주변의 망일루, 지과문, 주변 협문 등을 옛 모습대로 복원, 제2단계는 지원·지청자리에 운주당을 중심으로 경무당, 병고 및 삼문, 내아 등의 관아건물과 부속채를 복원, 제3단계는 통영초등학교 일대에 백화당을 비롯하여 공내헌 십이공방 선자방 등을 복원, 제4단계는 통영세무서 일대로 중영을 비롯하여 중영내아 산성청 등을 복원, 제5단계는 기타 외곽지역을 복원할 예정이다. 현재까지는 제2단계가 완료되었고 제3단계가 진행중이다.
출처:(문화원형백과)
▲ 장사도의 유일한 다리 무지개다리를 건너
2022-07-14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