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간도가 우리 땅인 이유 기독교와 불교를 신봉하는 숫자만 해도 2000만명에 이르고 역사를 종교화한 대종교와 역사를 얘기하는 많은 단체들의 오류 그리고 일제 식민사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 국사계의 많은 교수들 및 학생들 흑인의 랩음악에서 비보이로 전이되고 있는 청소년문화와 한류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우리의 역사를 되찾는 일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민족의 영웅이신 안중근의사님께서 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처단하신지 98주년이고 해방된지도 62년입니다만 아직도 안의사님의 유언은 허공을 맴돌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죽거든 내 뼈를 할빈공원에 묻어두었다가 광복이 되면 고국에 옮겨 묻어달라" 하신 말씀 그러나 현재 그 분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모르는 현실이니 이런 나라가 나라이며 이런 국민이 국민이랄 수 있습니까? 간도땅은 특히 안중근의사님의 의거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간도땅을 잃은건 왜놈들이 청나라와 간도협약이라는걸 체결하여 팔아먹은 1909년 9월4일입니다. 그런데 이 조약의 제목이 바로 간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간도협약은 훗날 우리가 부르는 통칭이고 본 조약명칭은 <두만강 중.한 변계사무조약 >입니다 중국(당시 청나라)과 한국이 <간도를 내주고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이지요 자! 중요한 사실이 여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간도협약은 일본이 우리를 대신해서 간도땅을 청나라에게 팔아먹은 것인데 중국이 저희것을 가지고 왜놈과 거래를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저희것 아니니까 저희것으로 하려고 왜놈에게 비싼 댓가를 치루고 조약을 체결하게 된것이지요 그럼 그 땅이 일본 것인가요 천만에요 왜놈국이 바다건너 섬이라는건 전세계가 다 알고 삼척동자도 잘 아는 얘깁니다 그놈들은 바로 1905년 대한제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매국노 5역적 놈들과 일진회놈들을 키우고 미국과 밀약을 맺고 영국과 동맹을 맺어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아갔던 것 아닙니까
우리대신 왜놈들이 청국에게 팔아먹은 사건이 간도협약입니다 조약의 제목이 <두만강 중.한 변계사무조약>임을 우선 잘 알아야합니다 제1조: 두만강을 중.조 양국의 국경으로 한다 제2조: 일본의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취소하고 용정에 일본간도 영사관을 설치한다....... 이렇습니다. 딱 걸렸지요 <중.한...>조약인데 일본영사관 설치가 왠말입니까 한국영사관을 차려도 시원치않을판 아닙니까? 이제 간도가 남의 영토가 되는 판이니 중국주재 영사관을 차린다는거지요? 왜놈들 하는 짓이 저런데 일본에 한류는 무슨 얼어죽을 한류입니까 조선놈들 얼빵한게 지금까지 이러합니다 한류가 아니라 다 친일파에 다름아닙니다 간도협약이 1905년 을사조약부터 시작된 사항이니 먼저 당시의 상황을 보십시다. 1905년11월15일 일본국천황 특파대신 이등박문이 고종황제를 알현하여 한일협약(을사조약 총5조)안을 제시하고 조약체결 강압적 요구 궁궐 안팍에 하야시일본공사와 하세가와사령관이 일본군을 배치하여 극도의 공포분위기를 조장하였슴 . 왜놈이 우리 황제에게 내놓은 5조의 조약안이 어떤건지 보면 눈알 튀어나오거나 배꼽잡습니다
다음은 그 주요골자입니다 <을사조약> 1. 차후에 일본 외무성이 조선의 외국에 대한 관계및 사무를 감리.지휘한다.. 2. 일본정부는 조선과 타국과의 현존 조약의 실행을 관리하고 앞으로 일본정부의 중재없이는 국제적 성질도 약속하지 않을것을 약속함 3. 일본정부는 그 대표자로 조선황제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설치하고 모든 외교관계를 관리하기위해 경성에 주재하며 황제를 알현할 권리를 가지며 조선의 각 항구나 일본이 필요한 곳에 이사관을 설치하 고.. 일체의 사무를 관리함 4.일본과 한국간의 현존 조약과 약속은 본 조약사항외 모두 효력을 유지함 5.일본정부는 조선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함 이렇게 다섯항 입니다. 어떻습니까?
제5조가 아주 애교가 있지 않습니까? 11월16일 고종황제 조약체결 거부/ 이등박문이 매국노 대신들을 위협하여 어전회의 개최를 종용 11월17일 어전회의 고종황제는 대신들에게 결정하도록 하였슴(거부의사표시) 어전회의 대신들 명단: 1.참정대신 한규설, 2.법무대신 이하영, 3.탁지부대신 민영기 4.학부대신 이완용, 5.군부대신 이근택, 6.내부대신 이지용, 7.외부대신 박제순 8.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렇게 총 8명이 우리나라의 운명을 거머진 대신이었는데,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이 나지 않자 이등박문은 직접 하세가와 헌병대장과 수십명의 일본헌병들을 데리고 어전회의장에 들어가 살기를 띄고 노려보며 대신들에게 <가>와 <부>를 선택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위 4번부터 8번까지의 매국5역적이 찬성인<가>를 표결했고 위 1번부터 3번까지는 무조건 <불가>를 썼지만 5대3으로 을사조약안건이 가결되었다고 선언하게된것이지요 * 이 을사 오적 매국노 놈들의 이름을 외우지 못하는 회원들은 앞으로 비바 출입금지입니다 그러나 이 조약의 조인서에는 외부대신 역적 박제순과 왜놈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께의 서명만 있을 뿐 고종황제의 국새와 왜놈왕의 도장이찍혀있지 않고 또 한국외부대신에게 조인의 전권 위임서가 따로 없기 때문에 국제법상 무효임으로 우리는 이 조약을 <을사늑약>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한편 겨우 1776년에 독립선언을 한 미국이 왜놈과 이 조약을 사전승인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이 한국과의 최초의 악연으로 인해 미국은 지금까지 왜놈편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도 잊을수 없습니다) 고종황제가 비록 나라를 빼앗긴 황제이지만 이 때 한칼보여줬고 또 한번 사고를 쳤지요. 1907년 6월29일 네덜란드(히딩크의 고국)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 평화회의에 바로 이 을사늑약의 진실을 전세계에 알리도록 신임장과 친서를 주어 비밀리에 이준.이상설.이위종열사님들을 파견하였는데 만국회의에 상정되지 못하자 이준열사님이 그 회의장에서 배를 칼로 째고 창자를 꺼내어 피를 뿌리며 자결하신 사건이 발생하여 전세계를 경악시키며 폭로되는 바람에 1863년에 임금자리에 오른 고종은 44년만인 1907년 7월19일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야했지요.
세상에 사건 20일만에.......... 이 사건을 지켜본 피끓는 애국청년 안중근의사가 바로 이 사건 직후 독립투쟁의 길을 찾아 백두산 넘어 간도의 용정으로 가게된 겁니다. 용정시 지신향 장재촌에서 권총연습을 하던 안의사님은 다시 블라디보스톸으로 가서 시베리아 의병이 되어(김두성총독, 이범윤대장 안중근참모중장) 함경도의병 홍범도장군부대와 합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8년음력4월 드디어 독자적인 첫 국내진공전투를 감행하게 됩니다. 두만강 최하단의 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 상리에 주둔중인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승리하고 다시 음력6월에 2차로 경흥지역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는데 이때 일본군포로들이 눈물을 흘리며 빌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만국공법에 의거하여 포로들을 석방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안의사님은 참패를 당하고 겨우 연해주의 연추로 귀환하였지요 1909년 새해가 밝자 안의사님은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12명이 왼손 4번째의 손가락 끝 3분의1부분을 절단하는 단지동맹을 맺어 그 피로 <대한독립> 네글자를 쓰고 독립투쟁의 의지를 더욱 굳혔습니다. 드디어 운명의 9월이 왔습니다. 일본은 9월4일 <중.한 변계조약>즉 간도협약을 한국대신 체결하여 간도를 팔아먹은 뒷처리로 러시아의 재무대신 꼬꼬브쳅브와 <만주현안>을 협상하기위해 대련과 심양을 거쳐 10월26일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는 <하얼빈>에 오게된 것입니다. 오전 9시30분경 하얼빈역 플래트홈! 열차에서 내리는 조선침략의 괴수 일본국 추밀원 원장 이등박문은 드디어 안중근의사님의 4발의 총탄에 의해 영원히 지옥행 열차를 타게된 것입니다. 9월4일의 간도협약과 10월26일의 안중근의사님의 의거와는 이렇게 운명적 관련이 된 것이고 우리에게는 안의사님의 유해를 조국에 모시는 일과 간도를 찾아야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한편 중국과는 조선조 숙종때인 1712년에 세운 백두산 정계비의 해석으로 서로의 주장이 맞서면서 고종때인 1885년과 1887년에 간도에 대한 국경회담이 열렸으나 결렬되어 지금껏 답보상태입니다. 이 역사는 다음기회에 상세히 밝히겠습니다만 현재 중국은 이 간도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얼마전 4월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중국의 원자바오총리가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기자의 질문에 대해 첫 대답을 "현재 중국과 한국간의 영토분쟁은 없습니다"하고 묻지도 않은 얘기를 꺼낸 배경이 바로 그것이지요. 중국에는 55개 소수민족이 다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들인구가 다 합쳐도 중국 전 인구의 8%정도입니다만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치구가 중국 전 영토의 60%를 넘으니 겁나는 것이지요. 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하는 동북3성과 내몽골, 신강위구루자치구, 티베트등 시계반대방향으로 중국 한족을 에워싸고 있으니 폭동이라도 터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때린놈은 다리펴고 자지 못한다는 말있쟎습니까? 도독놈이 뺏은 것 지켜내랴 얼마나 고심하겠습니까 그보다도 각 민족이 독립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가난하니까 참는수 밖에 없지만 언젠가 힘이되면 터질것입니다
특히 우리와는 간도국경회담이 두번 열리고 중단되었는데 국제적 일반상환기간인 100년이 되는 2009년이 목전에 와있습니다. 작년 우리 국회의원 55명이 간도협약무효및 간도문제제기를 위해 서명까지 했다가 국가의 이익에 도움이 안된다고 접었습니다. 당연히 민간단체에서 들고 일어나 주기를 바랄것입니다. 역사가요. 동북공정은 별거 없습니다. 고구려가 그놈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떠들던 단군조선과 부여의 후예인줄은 천하가 다 아는 얘기니까요 그러나 간도는 다릅니다. 엄청난 크기의 땅입니다 간도협약 즉 <두만강 중국.한국 변계사무조약>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중국것은 아니라는 증명이고 왜놈과 떼놈이 협잡하여 팔고샀다는 얘기인줄 세계가 쉽게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얼빵 엽전들과 왜놈 떼놈에게 기생붙어먹는 반역자놈들이 또 계속 일을 그르치려할것입니다. 역사상 나와있습니다. 민족의 분단과 동포사회 즉 중국조선족, 러시아고려인 사할린 탄광끌려갔던2만5천의 징용자 후손들, 일본의 조총련과 민단, 국내 1만명시대라는 탈북자들과 동남아 여러지역을 떠돌고 있는 탈북자들등 민족의 수난이 아수라장 속에 계속 중 인데도 현재 우리사회는 정권다툼으로 좌익우익논쟁이 뜨겁고 국민들 의식은 난 몰라입니다. 그저 제집만 잘먹고 잘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먼저라 다 줄서기에 한창입니다. 비바회원 여러분! 역사는 바로 우리가 지키고 만들어가는 우리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보배이신 10대회원님들 그대들 몇명이 이다음에 수십만의 일꾼을 키울것입니다. 안중근의사님,이준열사님,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지신 수많은 독립선열님들을 잊지마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실체를 바로 아는 공부를 항상 놓지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간도협약 무효와 간도 영유권 주장을 하여야할 시점입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http://cafe.naver
2. 간도는 왜 우리 땅인가 written by. 이현오
지난 16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는 간도임시정부(총재 건 제)가 주최하는 간도땅 찾기 헌법소원 기자회견이 열렸다. 미 LA에 본부를 두고 있는 간도임시정부는 이 날 국내 활동단체 등과 기자회견을 갖고 당시 우리 대한제국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일제에 의해 1909년 9월4일 일본과 청나라가 체결해 오늘날까지 중국이 불법적으로 점유하게 한 간도협약은 무효라고 강조하고 대정부 건의문과 함께 헌법소원 청구와 일본에도 이를 강하게 제기하겠다고 밝혔다.(관련기사 코나스 8월17일자 참조)
이 날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간도가 왜 우리 땅이고, 오늘날까지 어떻게 해서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어야했는지, 그리고 왜 지금까지 우리 정부를 비롯해서 국민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오지 못했는지에 대한 문제점 등을 낱낱이 짚고 국민운동으로 승화 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다졌다. 특히 간도임시정부 관계자들은, 지금 간도 땅을 되찾고자 하는 것은 당장 실현이 어렵고 때로는 무모하기조차 할 것으로 비쳐지고 있을 것 이라면서도 일제 강점기하에서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선열들이 풍찬노숙하면서도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 일로 매진했던 것처럼 '독립운동을 하는 마음'으로 간도 땅 되찾기 운동에 나설 것임을 대변하기도 했다.
다음은 이 날 기자회견장에서 간도되찾기운동본부 육락현 명예회장이 밝힌『간도는 왜 우리 땅인가』주제 강연록을 요약 정리한 내용임.
■간도는 왜 우리 땅인가
▲ 머리말 우리나라 민족성을 말살시키는 역사학 수난의 시대는 일본강점기 36년 동안 우리역사를 왜곡하고 말살시키는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대한민국의 광복은 강대국에 의해 남과 북으로 이념이 다른 분단된 민족이 되고 말았으며, 분단은 우리의 역사교육도 이념이 다른 교육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남북이 분단되고 간도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민족은 내 영토에 살고 있으면서 이방인으로 1세기가 넘게 살고 있다. 200만 조선족이 생활터전을 이루고 있는 지역은 강 하나를 두고 모국과 경계를 하고 있는 관계로 중국은 2004년 동북공정으로 우리 고구려사를 중국지방정부라고 선포했다.
▲간도는 어느 지역인가? 간도는 좁은 의미로 백두산정계비와 관련된 두만강 이북, 토문강 이동 지역인 동간도 혹은 북간도와 압록강 이북 지역인 서간도도 포함한 남만주를 가리킨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산해관 이동의 심·요지역과 연해주를 포함한 만주 전체를 일컫는다. 간도분쟁 당시에 우리 선조들이 생각하는 간도 명칭의 개념은 동으로는 토문강에서 송화강을 거쳐 흑룡강 이동의 연해주를 포함한 지역을 의미하였고, 서로는 압록강 대안을 포함하여 고구려의 영토였던 요양·심양 일대(소위 심요선)까지의 봉금지역이 포함되었다.
▲중국의 동북공정 목적은 간도지역의 영구 차지 속셈이다 55개 소수민족을 포괄하고 있는 중국에게 가장 큰 위협요소는 신장 위구르, 티벳, 내몽골, 연변 등 소수민족 자치구의 분리독립 위협이 국가의 가장 큰 위협요소이다. 이에 중국은 과거 무력 점령한 티베트와 신장, 내몽골 지역을 중국사에 포함시키는 서북공정을 완성시키고 한중수교 이후 동북3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조선족 문제와 만주, 간도의 역사적 연원을 둘러싼 불안요인이 대두되자 이 지역의 혼란을 막기 위해 동북공정을 시작했다. 특히 국제법적으로 무효일 수밖에 없는 간도협약에 근거해 간도지역을 불법 점유하고 있는 중국이 한반도 통일 분위기가 현실화되자 조만간 간도 지역에 대한 영유권 분쟁이 다시 제기될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를 확보하고자 본격적으로 왜곡에 나선 것이다. 그러므로 동북공정의 목적은 1909년 무효인 간도협약에 의거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간도지역의 영유권 고착화에 있음이 명백해 진다. 또 동북공정은 문화전쟁이며, 역사 및 문화패권주의 성격이 강하다. 즉 중국 영토내의 역사와 문화는 모두 중국의 역사이며 문화로 간주한다.
▲ 간도는 왜 우리 땅인가? - 조·청 국경선을 압록강 두만강이 아니며 모두 그 이북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정계비구역약도(규장각 15504)'와 '백두산정계비도(규장각26676)' 및 '로마 교황청의 조선말 조선지도'(1924년 제작)에 동간도는 토문강 이동 지역임. 1718년 청의 황여전람도를 원본으로 한 서양 지도 중 당빌의 '조선왕국지도', 1740년의 듀알드, 1750년 보곤디, 1794년 윌킨스가 제작한 지도에는 압록강북의 봉황성 일대에서 두만강 위쪽의 연길 일대로 이어지는 동간도지역으로 국경표시가 되었다. 이와 같은 국경선이 1909년 간도협약이 체결되기까지 유효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우리가 간도를 선점적으로 개간했다. 청나라와 조선이 1727년 맺은 강도회맹에 의해 봉금지역이 된 간도지역은 무주지로서 양국이 공동관리하는 지역이었다. 무주지는 국제법적으로 먼저 선점하여 개간하는 쪽이 영유권을 가지게되는데 간도에 대한 우리의 개간은 무주지 선점이론에 의한 영토획득의 의미가 있다. - 조선 조정에서 실질적인 행정권력을 행사하였다. 조선 조정에서 1900년과 1903년 서간도 및 동간도(북간도)를 행정적으로 평안북도 및 함경도에 편입시켰으며, 주민에게서 세금을 징수해 행정과 군사훈련비로 충당했다. 또 이 지역에 대한 치안 및 경비를 수행했고 조선 관병들이 중국의 유민 침투를 저지하기도 했다. 이는 명백히 국가의 행정단위로써 기능을 했다는 증거이다. - 간도에 대한 역사적 연고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반만년의 역사 중 우리민족이 3천3백년이 넘게 지배했다. 특히 청나라 시대(1667년)이후에는 한족은 출입자체가 금지되었으며, 현재의 만주지역에 한족이 거주한 것은 12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고려시대 윤관 장군이 9성을 개척하고 두만강 북쪽 700리의 공험진의 선춘령에 국경비를 세웠다. 세종 때 김종서는 6진을 개척했다.
▲ 간도협약이 무효인 이유 일제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늑약에 근거해 조선을 대신하여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게 되는데 을사늑약 자체가 강압적으로 맺어진 대표적인 국제조약으로 이미 국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을사늑약이 설령 유효하다 해도 간도협약은 피보호국(조선)의 이익을 증가시키거나 유지시키는 조약이 아니라 이익을 해치는 조약이므로 보호조약으 성격상 무효가 된다. 간도협약이 유효하더라도 당사국인 청·일간에만 유효하지 당사국으로써 배제된 대한제국에는 효력이 없다.(1909년에 대한제국은 아직 독립국가로 존재하고 있었음) 1952년 중·일간의 평화조약에서 이미 1941년 이전의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선언되었고, 한일간에도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의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과거 제국주의 시기의 모든 조약과 협약이 무효가 되었는데 오직 간도협약만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 간도문제에 대한 현재 상황 2009년 8월28일 18대 국회의원 50인이 서명해 '간도협약 원천무효결의안'이 국회 외교통일통상위원회에 상정된 상태이다. 북한은 1962년 대 중국과 북중변계조약을 맺어 현재의 국경을 확정했다. 북한은 중국의 경제 원조 등의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간도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광복 후 국사교육의 소홀로 간도지역의 역사와 간도분쟁사를 국민들에게 홍보하지 않았으며,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우리 역사의 시원지인 간도 역사를 무시하고 연구조차 되징 않았으며, '간도협약의 무효'를 중국에 통보하지 못했다.
▲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 간도협약 무효를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통고하도록 해야한다. 간도협약을 무효화시키고 간도협약 이전의 영유권 분쟁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 제출된 간도협약무효결의안이 상임위를 거쳐 국회본회의에서 반드시 통과되게 해야한다. 또 국제적으로 간도를 분쟁지역화하기 위해서는 외교통상부에서 외교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간도협약 무효를 중국측에 통고하도록 해야한다. - 간도동포 문제의 중요성 간도를 지키며 실질적인 주권 발현을 하고 잇는 것은 간도동포들이며, 현재의 연변 조선족자치주는 이들의 유일한 희망이다. 영유권 분쟁이 발발할 경우 국제법상 영유권 분쟁지역인 간도의 현지 주민 의사가 중요한 결정변수가 될 수 있기에 간도동포들의 존재는 우리 한민족에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중국은 향후 간도가 분쟁지역화 될 것을 미리 예상하고 간도동포의 동요를 막고 간도동포를 급격히 한족으로 동화시키는 사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간도에 대한 영유권확보에 있어서 현재의 간도동포의 와해를 막고 민족의식과 간도지역의 역사를 고취시키는 사업은 대단히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다. - 간도에 대한 대국민 영토의식 함양 중국의 동북공정 궁극적 목표가 간도영유권의 고착화에 있음을 간파하고 역으로 우리는 간도의 영유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헌법상 우리의 영토를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정한 제3조 내용을 북방영토를 포함한 내용으로 수정해야 하며, 교과서와 역사서 및 각종 지도에 간도지역이 포함되도록 해야한다. -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을 결단코 중단시켜야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왜곡·말살하려는 작업이다. 이와같은 저들의 비인간적인 획책을 좌시해서는 안된다. 동북공정은 문화전쟁이다. 이제 우리 고대의 우수한 문화를 발굴해 계승하여야 한다.(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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