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와 조사 누구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다. / 종광 스님
부처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 만나면 조사 죽이라는
임제가풍서 참배는 헛된 일
부처·조사는 이뤄야 할 경지
▲혜능 스님이 입적한 국은사에는 ‘혜능기념당’이 마련돼 스님의 일대기를 전하고 있다.
師因半夏에 上黃檗하야 見和尙이 看經하고 師云, 我將謂是箇人이러니
元來是揞黑豆老和尙이로다 住數日타가 乃辭去하니
黃檗이 云, 汝破夏來하야 不終夏去아 師云, 某甲이 暫來禮拜和尙이니다
黃檗이 遂打하고 趁令去하니 師行數里라가 疑此事하야 却回終夏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여름 안거 중간에 황벽산에 올라갔다가
황벽 스님이 경전을 읽고 계시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저는 장차 이사람뿐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검정콩이나 주워 먹는 늙은 중이었네요.”
그리고는 며칠 있다 하직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러자 황벽 스님이 말했다.
“너는 여름안거를 파하고 오더니, 이제 여름안거가 끝나기도 전에 가려 하는가?”
임제 스님이 말했다. “저는 스님께 잠시 인사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황벽 스님이 임제 스님을 때려서 쫓아버렸다.
임제 스님이 몇 리를 가다가 이 일에 의심이 들어 다시 돌아와 여름안거를 끝마쳤다.
강의) 안거는 불교의 오래된 전통입니다.
인도에서는 우기인 4월15일부터 7월15일까지는 밖으로 돌아다니기가 힘듭니다.
그 기간에는 매일 비가 올 뿐 아니라 땅에 벌레들도 많아 살생을 저지르기 쉽다고 합니다.
이런 전통이 중국과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음력 4월15일부터 7월15일까지 90일 동안
선원에 모여 안거수행을 하게 됐습니다. 이를 하안거(夏安居)라고 합니다. 여름 안거라는 뜻입니다.
이 기간에는 절대 밖으로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임제 스님은 이를 어기고 여름 안거 중간에 황벽산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안거를 마치지 않고 또 떠나려고 합니다. 규칙을 어기면서도 태연자약합니다.
더구나 경전을 읽고 있는 스승 황벽 스님을 향해 하는 말은 가관입니다.
훌륭한 선지식인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검은 콩이나 주워 먹는 늙은 중이라고 놀립니다.
스승에게 이렇게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무례합니다. 그런 임제 스님을 황벽 스님은 때려서 쫓아냅니다.
그런데 임제 스님은 이런 스승의 경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역시 임제 스님입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스승의 경책에 대해 깨달은 것 같습니다.
자기 행동에 대해 되새겨보면서 자신의 문제점을 찾습니다.
그리고 다시 스승에게 돌아가 안거를 무사히 마칩니다.
아마도 이 대목이 임제 스님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고비였을 겁니다.
임제 스님은 대오(大悟)한 이후로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만심에 자아도취마저 심했던 것 같습니다.
스승인 황벽 스님이 더 이상 이를 두고 볼 수 없었겠지요.
경전을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깨달음이 없을 때는 경전의 글귀에 얽매이기 때문에 수행에 장애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깨닫고 난 다음의 경전은 그대로가 깨달음의 표현입니다.
경주에서 서울 가는 길을 알고 있다하더라도 지도를 자주보고 연구를 하면
더욱 자세히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약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의 말을 듣지 않고 그냥 그대로 떠나버렸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임제 스님은 역사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위대한 선사로 남지 못하고 광인으로 기록됐을 수도 있겠지요.
송나라 청원유신(靑源惟信) 선사의 상당법문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노승이 삼십년 전 참선을 하지 않았을 때에 (老僧三十年前未參禪時)
산은 보면 그냥 산이었고 물을 보면 그냥 물이었다(見山是山 見水是水).
나중에 선지식을 친견하고 견처(見處)를 얻고 보니(及至後來 親見知識 有個入處)
산을 보면 산이 아니요 물을 봐도 물이 아니었다(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마음의 휴식처를 얻고 나서(而今得個休歇處)
예전의 그 산을 보니 다만 산이었고 물을 보니 또한 물이었다(依前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
성철 스님의 말씀으로 더욱 유명해진 법문입니다.
이 법문을 잘 음미하면 임제 스님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師一日에 辭黃檗하니 檗이 問, 什麽處去오 師云, 不是河南이면 便歸河北이니다
黃檗이 便打한대 師約住하고 與一掌이라 黃檗이 大笑하고 乃喚侍者호되
將百丈先師禪版机案來하라 師云, 侍者야 將火來하라
黃檗이 云, 雖然如是나 汝但將去하라 已後에 坐却天下人舌頭去在리라
해석) 임제 스님이 어느 날 황벽 스님에게 하직인사를 했다.
황벽 스님께서 물었다. “어디로 가려 하느냐?”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하남이 아니면 하북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그러자 황벽 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임제 스님이 후려치는 손을 붙들고는 손바닥으로 한 대 때렸다.
황벽 스님이 큰 소리로 웃으며 시자를 불러 백장 큰스님이 물려준 선판과 책상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말했다. “시자여 불 좀 가져오시게.”
황벽 스님이 말하였다. “비록 그렇다하더라도 그냥 가져가라.
나중에 앉은 자리에서 천하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게 될 것이다.”
강의) 황벽 스님이 임제 스님에게 선판과 책상을 준다는 것은
인가를 넘어 깨달음의 빛이 임제에게 넘어갔음을 말합니다.
‘벽암록’에 따르면 백장 스님은 황벽 스님에게 선판과 방석을 전해줬고
위산 스님에게 주장자와 불자를 전해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임제 스님은 인가의 증표와 같은 선판과 책상을 주겠다는 황벽 스님의 말에
시자에게 불을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불을 질러 태워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이미 깨달아 스스로 우뚝 섰는데 스승들의 그림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황벽 스님의 말씀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지고 있으면
훗날 앉은 자리에서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게 될 것이라는 대목이 그렇습니다.
임제 스님이 깨달았다고는 하나
눈이 어두운 세상 사람들은 필히 증표를 요구하게 될 것은 뻔합니다.
그래서 방편으로 가지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임제 스님을 아끼는 황벽 스님의 배려가 아름답습니다.
後에 潙山이 問仰山호되 臨濟莫辜負他黃檗也無아 仰山이 云, 不然하니다
潙山이 云, 子又作麽生고 仰山이 云, 知恩에 方解報恩이니다
潙山이 云, 從上古人이 還有相似底也無아
仰山이 云, 有하나 祇是年代深遠하야 不欲擧似和尙이니다
潙山이 云, 雖然如是나 吾亦要知하니 子但擧看하라
仰山이 云, 祇如楞嚴會上에 阿難이
讚佛云, 將此深心奉塵刹하니 是則名爲報佛恩이라하니 豈不是報恩之事닛고
潙山이 云, 如是如是로다 見與師齊하면 減師半德이요 見過於師라사 方堪傳授니라
해석) 뒷날 위산 스님이 앙산 스님에게 물었다.
“임제가 황벽 스님의 은혜를 등진 것은 아닌가?” 앙산 스님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위산 스님이 물었다. “그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앙산 스님이 대답했다. “은혜를 알아야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법입니다.”
위산 스님이 다시 물었다. “옛사람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었는가?”
앙산 스님이 대답했다. “있습니다만 너무 먼 옛날 일이라 스님께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위산 스님이 물었다. “그렇긴 하지만 나도 알고 싶으니 자네가 말해보게.”
앙상 스님이 말했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능엄경’을 설하시던 회상에서
아난이 부처님을 찬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깊은 마음으로 티끌처럼 많은 국토를 받드는 것이 곧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부처님의 은혜에 보은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위산 스님이 말했다. “그래, 그래. 견해가 스승과 같으면 스승의 덕을 반이나 감하는 것이고
견해가 스승보다 앞서야만 비로소 법을 전해 줄 만하다고 할 것이다.”
강의) 스승이 인가의 증표를 주겠다는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태워버리겠다는 임제 스님의 행동은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의 은혜를 저버린 것은 아닌지
위산 스님이 제자인 앙산 스님에게 묻고 있습니다.
인가의 증표인 선판과 책상을 태워버리겠다는 임제 스님의 말은
황벽 스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임제 스님에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친 사람이 바로 황벽 스님입니다.
철저함에 있어서는 황벽 스님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위산 스님은 이런 면에서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을 뛰어넘은 점이 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청출어람(靑出於藍)입니다.
스승의 은혜를 갚는 것은 스승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임제 스님은 황벽 스님의 은혜를 크게 갚고 있다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
師到達磨塔頭하니 塔主云, 長老야 先禮佛가 先禮祖아
師云, 佛祖를 俱不禮니라 塔主云, 佛祖與長老로 是什麽冤家오 師便拂袖而出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달마 조사의 탑이 있는 절에 갔다.
그 절의 주지 스님이 말하였다. “장로께서는 부처님께 먼저 절하십니까?
달마조사에게 먼저 절하십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부처와 조사 모두에게 절하지 않는다.” 주지가 말했다.
“부처님과 조사가 장로와 무슨 원수라도 됩니까?”
임제 스님이 곧바로 소매를 떨치고 나가버렸다.
강의) 달마 조사의 탑을 관리하는 절의 주지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처님과 조사 중에 어느 분께 먼저 절을 하느냐는 질문은 상당히 날카롭습니다.
그러나 이런 장난에 걸려들 임제 스님이 아닙니다.
임제 스님은 누구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임제 가풍에서,
형상으로 조성된 불상이나 탑에 참배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더구나 스스로 우뚝 선 임제 스님에게는 더더욱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주지의 반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부처와 조사가 장로와 무슨 원수라도 됩니까?” 질문이 날카로운 비수 같습니다.
그러나 임제 스님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가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지는 임제 스님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와 조사는 참배의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이뤄야 할 경지입니다.
그러나 주지는 부처와 조사의 형상을 부처와 조사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실제 길은 걷지 않고 지도책을 펴놓고 절을 하는 격입니다.
이에 대한 집착을 끊어주려는데 주지는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하고 있습니다.
고함도 아까웠을 겁니다. 임제 스님께서 그냥 일어나실 수밖에 없었겠지요.
2013. 09. 12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