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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인(淑夫人) 동래 정씨(東萊鄭氏) 묘지명 병서
평원 목백(平原牧伯) 송후 숙보(宋侯叔保)가 그 망실(亡室) 정 부인(鄭夫人)의 행장을 그 아들 전(前) 사헌부 지평 광연(光淵)에게 주어, 수백 리 길을 걸어서 궁벽하고 적막한 물가로 나를 찾아와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정신이 쇠락하고 문장이 졸렬하므로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였으나, 광연 씨는 상복을 입은 파리한 몸으로 더욱 애절하게 간청하니, 평소의 정의(情誼)를 생각할 때 차마 끝내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행장을 상고하건대, 부인은 계파가 동래(東萊)에서 나왔으니, 상서 좌복야 목(穆)의 후손이다. 복야의 13대손 종부시 첨정 구(球)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매우 징계(懲戒)되어, 문을 닫고 병을 핑계로 세상을 사절하고서 문장 짓는 것을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으며, 호를 괴은(乖隱)이라 하였는데, 이분이 부인의 고조(高祖)이다. 증조 희등(希登)은 장령으로 기묘사화에 죽었는데, 지금도 그때의 상황을 전하는 자들이 너무 참혹하여 차마 말을 하지 못한다. 조(祖) 근(謹)은 7, 80세의 노인으로 중추부 경력을 거쳐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는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고(考) 지경(之經)은 문과 출신 목사로 품계가 통정대부였는데,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비(妣) 강씨(姜氏)는 진주(晉州)의 대성(大姓)으로 우참찬 신(紳)의 따님이고 우의정 사상(士尙)의 손녀인데, 만력 기유년(1609, 광해군1) 6월 10일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비범하여 또래에 비해 특출하니, 참찬공이 매우 사랑하였다. 10세의 나이에 이미 부녀자의 도리를 능히 수행하였다. 목사공이 배천 군수(白川郡守)가 되었을 때 마침 연고가 있어 가족을 데려가지 못하고 부인만을 데리고 갔는데, 음식과 의복을 모두 부인이 주관하였다. 15세 때 배우자를 골라 송씨(宋氏) 집안으로 출가하였으니, 여량(礪良)의 대성으로 예산 현감(禮山縣監) 휘 유(瑠), 호군 휘 세인(世仁), 사헌부 감찰 증 이조판서 휘 초(礎), 예조 참의 증 이조판서 휘 극인(克訒)이 바로 4대의 조상이다. 비(妣) 정부인(貞夫人)은 청풍 김씨(淸風金氏)로 사재감 첨정 휘 흡(洽)의 따님이다.
부인이 시집오자 시부모와 늙은 시첩(侍妾)이 모두 칭찬하며 서로 축하하였다. 김 부인(金夫人)은 본래부터 병을 자주 앓아, 온 집안 살림을 부인에게 맡기니, 부인은 위로는 어른을 받들고 아래로는 가솔(家率)들을 감독하며 밤낮으로 시부모의 명을 어김이 없었다. 시부모를 섬김에는 지극히 유순한 태도로 지물(志物)의 봉양을 극진히 하였으며, 제사를 받듦에는 정성과 공경을 한결같이 하여 산해(山海)의 진미를 모두 마련하였으며, 빈객을 접대함에는 반드시 술과 단술을 곁들여 식사를 즐겁게 하도록 하였으며, 쌀ㆍ소금ㆍ땔감ㆍ기름 같은 작은 일에서부터 집안일을 처리하고 음식을 만드는 일에까지 질서가 정연하지 않음이 없었다. 사사로운 재물이나 사사로운 저축이 전혀 없었으며, 또 감히 사사로이 남에게 빌려 주지도 않으니, 육친(六親)이 모두 존경해 복종하였다. 계유년(1633, 인조11)에 목백공(牧伯公)이 이상한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자, 부인은 비녀와 귀걸이를 팔아 그 돈으로 의원을 맞이하고 약을 조제하여 병구완을 하면서, 거의 2년 동안 띠를 풀거나 상투를 풀지 않았다. 을해년(1635)에 참의공이 서거하였는데, 병자년(1636)에 호란(胡亂)이 일어나자, 궤연(几筵)과 김 부인을 모시고 영해(領海) 사이로 피란가서 온갖 곤난을 다 겪으면서도 궤연에 상식(上食)과 시어머니의 봉양에 부족함이 없었다.
무자년(1648)에 목백공이 뜻밖의 화(禍)에 걸려 호남의 임피현(臨陂縣)으로 귀양 갔는데, 경인년(1650, 효종1)에 김 부인이 불행히 적소(謫所)에서 별세하였다. 김 부인의 병시중을 들 때부터 부인은 성심을 다해 곁에서 모시면서, 뜻을 거스르지 않고 아픈 곳을 눌러드리고 가려운 곳을 긁어드리며 부축하기를 1년을 하루같이 하니, 김 부인이 운명할 때의 말씀이, 장손부인(長孫夫人)이 당부인(唐夫人)을 칭찬한 뜻과 흡사하였다. 김 부인의 상사에 예(禮)에 정해진 제도대로 3일 만에 대렴(大殮)하고 4일 만에 성복(成服)하고 달을 넘겨 장사 지냈는데, 부인은 이번에도 상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미리 준비하였으므로 비록 피란으로 떠돌아다니는 사이였지만, 시신에 입히고 채우는 복식이나 관(棺)에 넣는 물건들에 조금도 후회스러움이 없었다.
기해년(1659)에 목백공이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는데, 부인이 내아(內衙)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매우 엄격하니 아문(衙門) 안이 숙연하였다. 을사년(1665, 현종6)에 목백공이 시종에서 승지로 발탁되었으므로 부인도 화고(華誥)를 받았다. 경술년(1670)에 아들 광순(光洵)이 횡성 현감(橫城縣監)이 되니, 부인은 그 며느리에게 경계하기를, “조심하고 삼가서 외인(外人)과 접촉하지 말고 장사치들과 교통하지 말고 무당이나 승려의 술수에 현혹되지 말아야 거의 네 남편에게 누를 끼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부인이 스스로를 다스렸던 방법으로 며느리를 가르친 것이다.
신해년(1671) 봄에 아들 광연(光淵)이 헌직(憲職)에서 교체되어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보임(補任)되자, 부인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너는 이미 출신하여 임금을 섬기는 몸이니, 동서남북 어느 곳을 못가겠느냐만 너는 고질이 있는 몸이라 한 번 귀문(鬼門)으로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약하기 어려우니, 이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이 근심으로 인해 병이 되었는데, 이어 아들 광렴(光濂)과 광순의 아내가 나란히 하루 사이에 죽으니, 부인은 크게 슬퍼한 나머지 병이 날로 악화되었다. 여러 아들들이 앞다투어 위안하는 말씀을 올리자, 부인은 “사생(死生)의 이치를 내 어찌 모르겠느냐. 내 나이 63세이니 분수에 이미 만족하다. 시대가 화평하여 무사한 때에 너희들의 손에 죽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이 아니냐.”라고 대답하였다. 이해 5월 10일에 별세하였다. 부고가 나가자, 친척으로부터 마을의 하천(下賤)까지 모두 놀라 슬퍼하며 달려와서 “현부인(賢夫人)이 돌아가셨다.”라고 하였으며, 집안의 종들도 모두 제 부모 죽은 것처럼 슬피 부르짖으며 통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9월 3일에 영평(永平) 선영 곁에 위치한 금주산(金柱山) 건좌손향(乾坐巽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타고난 자질이 온화하고 정숙하며, 성품이 유순하고 아름다워서 상스러운 말과 외설스러운 말을 낸 적이 없고, 나태한 모습을 지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글을 배운 적이 없으나 총명하고 영민(英敏)하고 현철(賢哲)하여, 마음가짐과 절제 있는 행동이 자연스레 《내훈(內訓)》, 《열녀전(列女傳)》 등 여러 책에 실린 도리에 맞았다. 새벽이면 일어나서 반드시 단정하게 쪽을 찌었는데, 비록 작은 병이 있어 몸이 불편할 때에도 손수 쪽찌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손에는 길쌈거리를 잡고 늙도록까지 놓지 않았으며, 의복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음식은 오로지 검소한 것만을 숭상하였다. 별미(別味)가 생길 때이면 입에 넣으려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런 것은 제사에 쓰거나 손님을 접대해야 한다. 부녀자가 맛난 반찬을 먹지 않는 것은 내가 물려받은 곳이 있다.”라고 하였다.
아들을 반드시 바른 도리로 가르쳤고, 사랑스럽다 하여 규제(規制)와 경계를 느슨히 하지 않았다. 매양 집안에 전해오는 장령공(掌令公 친가(親家) 증조(曾祖))의 충효와 정직한 행실로 아들들을 가르쳤는데, 그때마다 한숨지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평생 동안 무당들의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일을 믿지 않았으므로 병을 앓을 때에도 자손들에게 간절히 경계하기를, “상화(喪禍)의 뒤에는 무당이나 승려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현혹시키는 것이 지금 세상의 일반적인 폐단이니, 너희들은 부디 나의 뜻을 본받아 일체를 금단(禁斷)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부인에게는 일찍 죽은 오빠 한 분이 있었는데, 그 자녀를 자기의 자녀처럼 대하였고, 내외 친척에게도 그 친소(親疏)에 따라 인목(婣睦)의 도리를 다하니, 세상의 아내들과 어미들이 모두 모범으로 삼았다. 목백공과 50년을 함께 살며 백발의 나이에도 서로 공경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부덕(婦德)을 어긴 적이 없었으며, 집안 살림을 가지고 남편을 어지럽힌 적도 없었다.
부인은 7남을 두었는데, 광엄(光淹), 광렴(光濂), 광순(光洵), 광준(光浚), 광연(光淵), 광택(光澤), 광속(光涑)이다. 광렴, 광순, 광연은 모두 갑오년(1654, 효종5)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광렴은 출사(出仕)하여 벼슬이 직장(直長)에 이르렀으나, 부인에 앞서 요사(夭死)하였고, 광순은 현감이다. 광연은 병오년(1666, 현종7)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가 바로 나에게 묘지명을 청한 사람이다. 광속은 기유년(1669)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광엄은 대사헌 이만(李㬅)의 딸을 초취(初娶)로 맞이하고, 서윤(庶尹) 이대순(李大純)의 딸을 재취(再娶)로 맞이하였는데, 딸만 셋 두고 아들을 두지 못했으므로 광순의 아들 징은(徵殷)을 계후자(繼後子)로 삼았다. 세 사위는 윤유일(尹惟一), 유중연(柳重衍), 유언(柳遃)이다. 광렴은 장령 정시성(鄭始成)의 딸을 초취로 맞이하여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징헌(徵獻), 징원(徵遠), 징문(徵文)이고, 딸은 생원 조석주(趙錫周)에게 시집갔으며, 판관 김수장(金壽長)의 딸을 재취로 맞이하여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직 모두 어리다. 광순은 찰방 이상재(李尙載)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징은(徵殷), 징구(徵久), 징오(徵五), 징규(徵奎)이고, 딸은 한시대(韓始大)에게 시집갔으나 요사(夭死)하였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광준은 감찰 윤원지(尹元之)의 딸을 초취로 맞이하여 3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이세련(李世璉)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며, 현감 한강(韓崗)의 딸을 재취로 맞이하였다. 광연은 판서 이정영(李正英)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어 광순의 아들 징오를 계후자로 삼았다. 광택은 군수 박수형(朴隨亨)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다. 광속은 판서 김수흥(金壽興)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다. 징은은 1남을, 윤유일은 1남 1녀를, 유중연은 2녀를, 유언은 1녀를, 징헌은 1녀를, 조석주는 1남 1녀를 두었다. 내외 손자 손녀와 증손자 증손녀가 모두 수십여 인이니, 아, 번성하기도 하다.
나는 목백공과 관사(官舍) 사이에서 교분을 맺어 말년의 벗으로 의탁하였고, 여러 자제들도 모두 부지런히 나와 종유(從遊)하였으니, 나를 비루하거나 졸렬하게 여기지 않고 찾아와서 명(銘)을 청하는 것은 까닭이 있다. 목백공은 이름이 시철(時喆)이고, 자는 숙보(叔保)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동래의 산수 뛰어나서 / 萊山鍾靈
우수한 인물 배출했네 / 萊水毓英
뛰어난 선비 많거니와 / 髦彦旣多
간간이 여사도 태어났네 / 女士間生
아름답다 부인이여 / 懿歟夫人
덕이 곤정에 부합하여 / 德協坤貞
군자의 배필되어 / 克配君子
부부 사이 화목했고 / 如瑟如琴
가족과도 화합하여 / 宜家宜人
화락하고 즐거우니 / 和樂且湛
신령이 돌봐 주어 / 神之聽之
자손이 번창했네 / 子姓振振
기운 떨어진 작은 병에 / 天和少愆
슬픈 일 이어져서 / 情鍾相因
규중 의범 어제 같은데 / 閨儀如昨
저승길 재촉했네 / 長算遽催
부부의 의리 지극하니 / 胖合義摯
친척들 슬퍼했네 / 親黨興哀
금주산에 무덤 쓰니 / 金柱之原
산 길게 뻗고 물 돌아 흐르는 곳일세 / 山長水匯
내 그 무덤에 지명 씀은 / 我誌其竁
우매한 자들 경계하기 위함이네 / 用飭稚昧
平原牧伯宋侯叔保。狀其亡室鄭夫人之行。授其子前司憲持平光淵。跋涉數百里。謁余於窮鄕寂寞之
濱。屬以幽堂之誌。余神思衰落。文且拙。謝非其任。則光淵氏纍然憂服。哀懇愈至。顧念平昔誼情。有不忍終辭者。按狀。夫人系出東萊。尙書左僕射穆之後。十三傳而至宗簿寺僉正球。深創己卯之禍。杜門謝病。以文章自娛。號乖隱。於夫人爲高祖。曾祖曰希登。以掌令死於乙巳士禍。至今傳者猶慘愴不忍言。祖曰謹。以大耋由中樞府經歷。加階通政贈戶曹參判。考曰之經。文科牧使。階通政。贈禮曹參判。其媲姜氏。晉州大姓。右參贊紳之女。右議政士尙之孫。以萬曆己酉六月初十日生夫人。幼有異質。絶出等夷。參
贊公鍾愛之。十歲而婦道克脩。牧使公守白川。適有故未搬家。獨與夫人行。凡飮食服御。夫人實尸之。年十五。擇對。歸于宋氏。礪良大姓。禮山縣監諱瑠,護軍諱世仁,司憲府監察贈吏曹判書諱礎,禮曹參議贈吏曹判書諱克訒。卽其四世也。妣貞夫人淸風金氏。司宰僉正諱洽之女。夫人入門。而公姑媼御皆嘖嘖交賀。金夫人素善病。擧家事委之。夫人上承下董。夙夜無違。事尊章。極其婉嫕。志物備盡。奉祭祀。一於誠敬。山澤畢具。供賓客。必以酒醴而侑之。自米鹽薪稾煩細之事。至井臼廚竈之間。無不秩然可觀。絶無
私貨私畜。亦不敢私假與。六親皆敬服焉。歲癸酉。牧伯公遘奇疾幾殊。夫人鬻簪珥。延醫合藥。不解帶束髻者殆二年。乙亥。參議公捐館。丙子之變。奉几筵侍金夫人。避兵于嶺海之間。備經險艱。而下室之饋。北堂之供。無憾焉。戊子。牧伯公遭无妄。配湖南之臨陂縣。庚寅。金夫人不幸於謫所。爰自侍疾。夫人竭心盡誠。左右侍奉。抑搔扶持。罔不順適。經年如一日。金夫人臨歿。宣言恰如長孫夫人稱唐夫人之意。如時月之制。夫人亦皆預爲之備。雖竄謫流離之際。凡附身附棺者。無少有悔焉。己亥。牧伯公莅密陽。夫人內政
甚嚴。衙門之間。肅如也。乙巳。牧伯公由侍從擢拜銀臺。夫人與受華誥。庚戌。子光洵宰橫城。夫人戒其婦曰。小心敬愼。毋接外人。毋通商貨。毋惑巫卜浮屠之術。庶可無累夫子。蓋夫人以所自治者詔之也。辛亥春。子光淵褫憲職補鏡城。夫人聞而泣曰。汝旣出身事主。東西南北。何所不可。第汝痼疾在身。一出鬼門。生還難期。以是耿耿爾。遂憂念成疾。繼以子光濂及光洵之婦。幷死於一日之內。夫人大傷慟。病日惡。諸子競進寬譬之說。答言死生之理。吾豈不知。吾年六十有三。涯分已足。趁此時平無事之日。死於汝輩
之手。良非幸歟。是年五月初十日屬纊。訃出姻黨親戚以至同里下賤。皆驚怛奔走曰。賢夫人喪矣。家中僮指。莫不悲號痛割。如喪其父母。九月三日。窆于永平先塋之傍金柱山乾坐巽向之原。夫人天資溫淑。性度柔嘉。鄙褻之語。不出於口。惰慢之容。不設於身。未嘗學習文字。而聰明英哲。立心制行。自符於內訓,列女傳諸書。昧爽而興。笄縰必整。雖有微恙。自力無怠。手執麻枲。到老不釋。服用不喜芬華。飮食專尙菲薄。每得美味。不肯近口曰。此可以供祀事待賓客。婦人不御嘉膳。吾有所受之耳。敎諸子。必以義方。不以
慈愛弛其規警。每以掌令公忠孝正直之行傳信於一家者。訓誨諸子。未嘗不歎息流涕。平生不信巫祝祈禳之事。疾病猶諄諄戒子孫曰。喪禍之餘。以左道惑亂者。今世通患。汝輩須體余意。一切禁斷可也。夫人有一兄早歿。撫其子女。無間己出。以至內外親黨。隨其戚疏。莫不盡其姻睦之道。爲婦爲母。皆取範焉。與牧伯公同居五十年。白首相莊。始終無違德。亦未嘗以有無相溷也。夫人擧七男。曰光淹,光濂,光洵,光浚,光淵,光澤,光涑。光濂,光洵,光淵。皆中甲午司馬。光濂筮仕至直長。先夫人夭。光洵縣監。光淵丙午文科。
卽乞銘者。光涑。己酉司馬。光淹初娶大司憲李曼女。後娶庶尹李大純女。有三女而無子。以光洵子徵殷爲嗣。尹惟一,柳重衍,柳遃其三壻也。光濂初娶掌令鄭始成女。生三男一女。男曰徵獻,徵遠,徵文。女適生員趙錫周。後娶判官金壽長女。生一男一女。皆幼。光洵娶察訪李尙載女。生四男三女。男徵殷,徵久,徵五,徵奎。女適韓始大夭。餘幼。光浚初娶監察尹元之女。生三女。長適李世璉。餘幼。後娶縣監韓岡女。光淵娶判書李正英女。無子。以徵五爲嗣。光澤娶郡守朴隨亨女。生一女。光涑娶判書金壽興女。生一女。徵殷有
一男。尹惟一一男一女。柳重衍二女。柳遃一女。徵獻一女。趙錫周一男一女。內外孫曾男女。摠數十餘人。噫盛矣哉。余與牧伯公。定交於寮寀之間。實托歲寒之義。諸郞亦皆游從甚勤。其不鄙陋拙。來徵銘語。有以也。牧伯公名時喆。叔保其字也。銘曰。萊山鍾靈。萊水毓英。髦彥旣多。女士間生。懿歟夫人。德協坤貞。克配君子。如瑟如琴。宜家宜人。和樂且湛。神之聽之。子姓振振。天和少愆。情鍾相因。閨儀如昨。長算遽催。胖合義摯。親黨興哀。金柱之原。山長水匯。我誌其竁。用飭稚昧。
[주D-001]장손부인(長孫夫人)이 …… 흡사하였다 : 당(唐)나라 때 산남절도사(山南節度使) 최관(崔琯)의 증조모 장손부인이 나이가 높아 치아(齒牙)가 없어 밥을 먹지 못하자, 최관의 조모 당부인이 수년 동안 시어머니인 장손부인에게 젖을 먹이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장손부인은 죽을 때 집안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며느리의 은혜를 갚을 수 없으니, 며느리의 자손들이 모두 며느리처럼 효도하고 공경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최씨의 가문이 어찌 창대(昌大)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新唐書 卷182 崔琯列傳》
[주D-002]화고(華誥) : 임금이 고관(高官)의 부인에게 봉호(封號)를 내린 것이다.
[주D-003]귀문(鬼門) : 음기(陰氣)가 모인 북방(北方)을 이른다.
[주D-004]인목(婣睦) : 인은 이성친(異姓親)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고, 목은 동성친(同姓親)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다.
[주D-005]곤정(坤貞) : 부녀자의 정숙한 도리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