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재현 교수의 삶을 돌아보며
- 사랑안에서 진리를 말한 친구에게-
의료윤리연구회 초대회장 이 명 진
첫 만남
박재현교수와의 만남은 1982년 3월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동기로 만난 것이 첫 만남이었다. 학창시절 박 교수는 온순하고 얌전한 학생이었다. 수수한 들꽃 같았다. 설치고 활발한 나와는 달리 박 교수는 정적이고 내성적이었다. 외유내강 형이었다. 본과 4학년 때였다. 엄청난 공부 량에 치어서 아무도 맡기 싫어하는 과대표를 박 교수가 자원하여 맡았다. 힘든 본과 4학년을 과를 잘 이끌며 숨은 리더십과 책임감을 보여 주었다. 이때 보여준 박 교수의 희생정신과 봉사정신은 잊을 수가 없다. 아직도 동기들은 박 교수를 과대표로 부른다. 마음속에 영원한 과대표로 인정하고 있다. 그 만큼 동기들은 가슴 속에는 박 교수의 평안한 리더십에 따르고 싶어 했다. 정말 신비스러운 매력을 간직한 친구였다.
조용하면서도 자기주장을 소신 있게 표현했다. 양보할 줄 알면서도 설득할 줄 아는 묘한 능력을 가진 친구였다. 박 교수는 졸업 후 의사들이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일반외과를 택했다. 일명 칼잡이가 되었다. 일반외과 의사로서 삶을 시작한다.
두 번째 만남
졸업 후 박 교수를 다시 만난 건 안양으로 이사를 가면서 출석한 교회에서였다. 예배를 드리는데 3부 성가대에 재현이가 서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박 교수와 두 번째 만남이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후로 수년 간 교회 안에서 의료선교회 활동을 함께 했다. 의료윤리를 가르치는 교수의 모습도 멋지지만 외국인 근로자 교우들을 돌보며 치료하는 박 교수의 모습은 슈바이쳐가 환자를 돌보는 모습 이상의 아름다운 장면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마 이 무렵 수술용 글러브에 대한 피부 알레르기 반응이 심하게 나기 시작한 것 같다.
외과 전문의의 생명인 손에 글러브를 사용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접하게 된다. 그 당시 박 교수는 그가 학창 시절부터 참여하던 누가회에서 개최한 생명의료윤리 강연을 우연히 듣게 된다. 그 강의는 그의 인생에 새로운 터닝 포인트가 된다. 그의 삶에 의료윤리가 다가온 것이다. 임상 전문의로서 임상경험과 의료윤리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재원으로 자신의 모습을 가꾸어 가게 된다. 바쁜 임상 전문의의 삶을 쪼게 가며 의료윤리를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당시 필자는 의료윤리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박 교수가 공부하는 의료윤리에 대해 냉소적이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뱁새가 황새의 생각을 따르지 못 한 것이다. 같은 교회를 섬기다가 어느 날 박 교수는 구세군교회로 옮기면서 같은 교회에서 만남은 끝난다.
세 번째 만남
박 교수와의 세 번째 만남은 필자가 의료윤리에 대해 눈을 뜨면서였다. 당시 박 교수는 의료윤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에 의학교육학 교실을 맡고 있을 때였다. 원래 조용한 성격이라 자신의 일신상의 변경 사항을 주변에 잘 알리지 않았다. 우연히 동문회 장학금 수여식에 참여했는데 박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의료윤리를 공부하며 이것저것 궁금한 것도 많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은데 그를 만난 건 나에게 멋진 재회의 만남이었다. 가까운 곳에 우물을 두고 멀리 돌아다니다 샘물을 만난 것 같았다.
혼자서 이 책 저 책을 공부하며 궁금하던 것을 낮이나 밤이나 시간 날 때마다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 때마다 시원시원하게 공부할 방향을 내게 알려주는 과외 선생님이 되어 준 것이다. 답답하고 정리가 안 되는 부분들을 물어 볼 때 한 마디씩 전해주는 지식들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버둥거리는 병아리의 알 껍질을 깨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생명윤리, 연구윤리, 프로페셜널리즘, 죽음과 삶 등에 관한 다양한 주제에 대해 그가 아는 지식을 아낌없이 퍼주는 넉넉한 지식인이었다. 이 무렵 자신이 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라는 책을 권해 주었다. 박 교수가 CBS라디오 방송에 1년간 생명윤리에 대한 방송을 한 내용을 모아 발행 한 책이다.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고 감동을 받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윤리는 잘못된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지만 남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에만 쓰여 진다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진정한 힘이 생긴다. 이 진리를 박 교수는 알고 있었기에 책이름으로 사용한 것 같다.
책을 권해준 후 나에게 권해 준 교육과정이 있었다. 성산생명윤리연구소에서 1년 과정으로 진행하는 생명윤리상담사 교육과정이다. 시간마다 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귀한 배움의 시간이었다. 의료윤리에 대한 지식이 자라나자 필자는 지식을 의사동료들과 공유하고 함께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고 싶다는 비젼을 가지게 되었다. 의료윤리연구회를 구상하게 된 것이다. 박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초대 자문교수로 도와 줄 것을 요청했다. 박 교수는 흔쾌히 승낙을 했고 그를 통해 지금 알고 있는 많은 교수님들을 소개받게 되었다. 의료윤리연구회의 주제 선정과 강사 섭외를 하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가장 엑기스 같은 지식을 아낌없이 전해주던 그로부터 2012년 여름 갑작스런 요청을 받는다. 경희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1학년 의사와 사회 강의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 죠지 타운 대학의 케네디연구소에 연수를 떠나면서 나에게 자신의 강단을 맡긴 것이다. 평소 받은 은혜와 빚이 있어 거절하지도 못 하고 승낙했다. 부족한 친구를 믿고 자신의 강단를 맡겨준 나에 대한 깊은 신뢰에 감사했다.
네 번째 만남
어느 덧 한 해가 지나면서 박 교수와의 마지막 만남이 이루어졌다. 박 교수는 2013년 7월말 귀국을 앞두고 엉덩이 부위에 심한 통증이 있었다고 했다. 급히 귀국한 후 바로 검사를 했다. 결과는 박 교수를 아는 모든 이에게 청천벽력 같은 충격의 소식이었다. 폐암이 전이되어 척추 뼈와 엉덩이뼈에 금이 간 것이 통증의 원인이었고, 뇌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암성 통증이 친구를 아프게 했던 것이다.
급히 연락을 받고 달려간 병실에서 그의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실 지도 모르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해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박 교수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의 삶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통증만 가라앉으면 바로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했다.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사명을 지키고자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하는 감동을 주었다. 박 교수는 바로 표적치료가 시작되었다. 첫 반응이 좋았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였다. 박 교수의 상태는 점점 추락을 하더니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말을 할 수 없었던 박 교수는 아내의 말을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사랑하는 아내에게 차마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이 미안했던 것일까? 그렇게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도 채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늦은 여름, 인생의 가을을 접어서기도 전에 친구 박 교수는 하나님 곁으로 가버렸다.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가버렸다. 학교강단과 학회와 그가 참여했던 많은 활동들이 멈칫했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 큰 숙제로 주고 떠났다. 박 교수가 다 하지 못 한 삶과 사명을 대신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숙제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의 발자취와 영향력이 너무나 컸기에 그 누구도 그를 대신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그는 화장 후 들꽃처럼 수목장으로 마감했다....
수수하지만 품위 있는 들꽃 같은 박재현 교수.
그가 사랑하고 아끼던 두 아들과 천사 같은 아내를 두고 삶을 마감하며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사명감을 불태우면 열강을 하는 교육자의 꿈을 접어야 하는 순간,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못 다한 사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겨두고 떠나면서 얼마나 미안했을까?
박 교수, 자네의 빈자리가 우리에게 너무나 크다네.
우리 모두 자네를 너무 아끼고 사랑했기에 아쉬움이 더 하다네.
이 땅에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실천해온 작은 거인 박재현 교수
이제 고통도 눈물도 없는 주님 곁에서 편히 쉬시게. 곧 만나세. 친구.
2103년 12월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