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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1)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2022.11.03 목)
본문 : 히 11:6, 엡2:8-9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라는
유명한 철학적 명제를 남겼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생각하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인감됨이 믿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이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의
청문회 과정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늘 기자들 앞에서 “나는 간단치 않은 사람”이라며
늘 준비된 삶을 살아 왔음을 자랑하였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50년 전 엑스레이 사진까지 보관하며
철저하게 준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총리로 지명되었을 때 동료의원들은 물론
기자들까지 무사히 통과될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혹시 기자들이 질문을 하면 즉석에서 자료를
내논다고 해서 ‘자판기’라는 별명가지 얻었습니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또 뭐, 다른 질문 있어요?”라며
있으면 해보라는 식으로 당당하게 행세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전혀 예상 밖으로
양파를 벗기듯 그의 잘못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병역문제, 투기문제, 탈세,
건강보험료, 삐뚤어진 언론관 등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문제들이 드러났습니다. 어떤 만평에서는
전에 청문회에 서보지도 못하고 자진 사퇴한 한
인사가 “저 사람이 총리가 된다면 나는 억울해서
못 살아”라고 말하는 장면도 실렸습니다.
저는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만하면 괜찮지 하며 살곤 합니다.
교도소에 가면 공동적인 현상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다 억울한 사람만 모였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자기 처를 의심하여 전 남편의 가족을 대상으로
인질극을 벌이다가 결국 두 사람을 살해한 인질범이
경찰차에 타면서 한 말이 무엇인지 압니까?
“나도 피해자에요.”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텐데
“또 뭐, 다른 질문 있어요?”
하며 당당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죄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엡2:8-9>
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하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도록 ....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물론 바른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합니다만.....
이는 구원의 조건이 아닌 구원의 결과로
따라와야 할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분명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믿음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믿음이 가져오는 해악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분명한 대상, 그리고 복음의
본질적인 진리를 압축해 놓은 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한 마디로 성경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방대한 성경의 내용을 압축하여 줄인 ‘엑기스’와 같은 것입니다.
비유하면 우리 신체의 골격과 같습니다.
우리 신체에 다양한 모습이 있습니다만
그 근본은 골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 다양한 모습을
한 교파들이 존재합니다.
크게는 가톨릭과 개신교, 개신교 안에서는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등의 다양한 교파가 존재합니다.
특정한 교리를 강조하고, 서로 다른
예배 형식과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모두 한 뼈대(골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사도신경을 핵심적인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양하지만 일치를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에큐메니칼 운동 – 교회 연합 운동).
그래서 우리는 매 주일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이는 우리의 공동의 믿음을 함께 공유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동시에 우리 성도들
서로 간에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신앙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남들이 하니까
그냥 따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백하는 주체는 ‘나’입니다. 신앙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입술로 하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눈으로 따라가는 신앙이 있습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중에 통곡의 벽에 가면.....
할아버지서부터 어린아이까지 율법책을
꺼내놓고(혹은 암송하여) 머리를 앞뒤로 흔들며....
큰 소리를 내어 읽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 옛 선조들이 한문을 읽듯이).
저는 그것이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도 그들의 신앙을
대물림하며 지켜온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 주요 고백은 바로 신26:5-11입니다.
5절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6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7절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8절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절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10절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11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그렇습니다. 신앙은 반드시 입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롬10:9-10>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주기도문과 함께
우리 모두가 다 암송해야 합니다.
또 그 구체적인 의미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한 안경점 광고가 히트를 쳤답니다.
“나는 안경 밖에 몰라요.”
이 광고가 그 해 전 미국에서 광고대상을 받았답니다.
안경 밖에 모르는 안경점 주인이 최고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정작 우리가 믿는 신앙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교회에 대하여 말하라고 하면 시간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해서,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특새 기간동안 연속으로
‘사도신경’을 강해하려고 합니다.
<용어 이해와 역사>
‘신경信經’이란 ‘굳게 믿고 지키려는 생각
혹은 신념’을 의미합니다.
사도신경은, ‘사도신경’이라는 말 자체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12제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는 베드로의 유명한 고백이 나옵니다.
<마16:13-18>
13절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절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절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내가 누구냐”하고 물으실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또 나다나엘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요 1:45~49>
45절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절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베드로와 같은 고백이지만...... 나다나엘은
용어를 조금 달리하려 고백했습니다.
여성의 고백도 있습니다. 마르다의 고백입니다.
<요 11:23~27>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절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절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또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빌2:10-11>
10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베드로, 나다나엘, 마르다, 바울의 고백의 핵심은
똑같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전설 같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는 사도들이
둘러앉아 한 구절씩 고백한 것을 모으니...
사도신경이 되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 고백의 원조가......
사도들에게 있기에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형태의
‘사도신경’이 완성된 때는 언제일까요?
사도신경은 단 번에 작성된 것이 아니라
수백 년의 기간을 통하여 서서히 만들어졌습니다.
대략 3단계가 있는데 곧 로마의 세례문답,
로마신경, 그리고 사도신경으로 발전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세례를 베풀 때 그들의 신앙고백을
들을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였습니다.
‘로마의 세례문답’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전에
세례문답을 하였는데, 그것은 다음의 질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당신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당신은 성령을 믿습니까?”
이 세 번의 질문에 세례후보자는 각각
“믿습니다(credo)”라고 대답하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단들 때문입니다.
이단들로부터 순수한 신앙을 방어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내용이 첨가되기도 하면서 그 모양을 다듬어 나갔습니다.
초대교회 시대 때 나타난 많은 이단들과 싸우면서
교회는 많은 신조 혹은 신경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로마신경’입니다.
그것은 로마의 세례문답을 서술형으로 고친 것입니다.
390년에 루피누스(Rufinus)에 의해 소개된
로마신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그의 유일하신 아들이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셨으며,
사흘 날에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올라 아버지의 오른편에 좌정하셨고,
거기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교회와 죄의 사함과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 이후 300여 년 동안 서방의
여러 교회들이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신조에 맞게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현재의 사도신경과 유사한 후기 사도신경은
AD 6세기나 7세기에 가서야 나타나는데.......
초기의 사도신경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몇 구절이 추가되었습니다.
즉, "지옥에 내려가셨다가"(He descended into hades)라는
구절이 추가되었고......
교회라는 단어 앞에 "우주적 혹은 가톨릭"
(catholic)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었으며,......
"성도들의 교통(the communion of saints)을
믿사오며"라는 구절,.....
그리고 "영원한 생명(the life everlasting)을
믿사옵나이다"라는 구절이 추가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도신경은 8세기에
현재와 같은 언어로 확정되었고.....
가톨릭교회에 의해서 공적으로 인준되었습니다.
<맺는 말씀 – 믿음을 구하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
저와 성도님들의 공동의 정체성은
주일마다 모여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데서 나옵니다.
크레도 에르고 숨! Credo ergo sum!"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사도신경을 수 없이 반복하여
외운다고 해서 믿음이 저절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신조 하나 하나를
참되게 믿기를 구해야 합니다.
믿음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기는' 것입니다.
믿어져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하고 생각하고 연구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시려
할 때에 그 아버지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막9: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그렇게 믿음을 구할 때 성령께서 마음을 만지십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만지실 때 '믿어지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믿음은 나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고
시야를 활짝 열어줍니다.
그래서 그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레마의 말씀).
나의 두뇌보다 훨씬 큰 진리가 내 마음을
내리 덮는 것입니다.
한 번 내리덮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다 되지 않습니다. 늘 그 상태에 머물러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새 영적
세계가 새빨간 거짓말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생활을 하루도 거르지
말아야 하고, 더 깊은 믿음에 이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믿음은 요란한 게 아닙니다
. 생명은 요란한 것이 아닙니다.
조용합니다. 소리가 별로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힘이 있고, 자라고, 변화시킵니다.
나무가 자라는데 소리가 납니까?
그러나 나무에게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바위의 틈을 뚫고 들어갈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든 교회든 너무 요란한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를 처음 믿을 때 과거에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세계에 접하게 될 때
오는 감격과 흥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신경을 따라 걷는 이 영적 여정을 통해
참된 믿음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 물질의 유혹 앞에서 꿈적하지 않고.....
- 인생의 풍랑에 요동하지 않으며...
- 마침내 죽음의 위협 앞에서 흔들림 없는
믿음에 이르기 소망합니다.
그 믿음으로써 이 땅을 천국처럼 살고
마침내 천국에 이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