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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화강암 암괴 위에서의 자유, 희양산
1. 일자 : 2011. 9. 24 (토)
2. 장소 : 희양산(998m)
3. 행로 및 시간
[은티마을(09:35) -> (사과 밭) -> 호리골재(10:32) -> 고목전망대(11:16) -> 구왕봉(11:28, 879m) -> 희양산 전망대(11:31) -> (험로/밧줄) -> 봉정암 전망(11:47) -> 지름티재(12:06) -> (중식, -12/22) -> 긴 밧줄(13:00) -> 정상 삼거리(13:10) -> 바위 전망대(13:20) -> 정상 삼거리(13:30) -> 성터 갈림(13:44) -> 기암지대(14:09) -> 성터/지름티재 갈림(14:35) -> 희양산 비석(14:45) -> 은티마을(15:15)]
4. 동행 : 홀로
< 희양산 산행을 준비하여 >
‘등산은 무상의 행위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탐구욕과 정보욕에서 오는 행위이며, 등산의 핵심은 등정에 있지 않고 준비하고 오르는 그 과정에 있다’ 한다. 누군가 한 이 말은 내가 산행 전 ‘–--- 산 산행을 준비하며’라는 제목으로 산과의 교감 과정을 거치는 것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이번에 오를 희양산에 대해서도 똑 같은 의식을 행한다.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의 경계를 이루는 희양산은 문경새재에서 속리산 쪽으로 흐르는 백두대간 줄기에 우뚝 솟은 암봉이다. 그 모습이 우뚝하고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처럼 보이는 데다 바위 낭떠러지들이 하얗게 드러나 먼 산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산이다. 실제로 예전 대야산에 올랐을 때 거대한 화강암 암괴가 멀리서도 인상 깊었던 곳이다. 희양산은 정상에서의 조망이 장쾌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또한 산의 남쪽 자락에 자리잡은 봉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절을 창건한 고승 지증대사가 전국 명산을 둘러본 뒤 이곳에 와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 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고 지세를 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명산에 명찰이라는 이야기다. |
이런 희양산이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반열에 오른 이유는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처럼 보이고 바위 낭떠러지들이 하얗게 드러나 있어 주변의 산에서뿐만 아니라 먼 산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으며, 기암괴석과 풍부한 수량이 어우러진 백운계곡 등 경관이 수려하고 마애불상 등 역사유적이 있는 점 등을 고려’되었다 한다. 등산 코스를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일단 시작과 끝은 은티마을이다. 행로는 당일 현장에서 결정할 것이다. 후보로는 지름티재-희양산-성터, 호리골재-구왕봉-희양산-성터, 성터-희양산-지름티재 길이다. 당일 컨디션, 일기, 산행 통제 여부 등이 변수가 될 것이다.
< 희망사항 >
‘희양’의 뜻 풀이는 ‘햇볕이 잘 드는 밝음’이다. 커다란 화강암 암괴로 된 모양새가 워낙 특이하여 빛이 좋은 날에는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산이다. 이 산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두려움이다.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힘겨워 하는 마의 암릉 코스가 존재하며, 봉정암 수도승들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 하여 주요 산행로를 스님들이 통제하고 있고, 급기야 누군가가 돌려 놓은 정상 이정표를 잘못 본 산꾼 중 하나가 낭떠러지 에서 떨어져 죽는 사태가 발생되었다. 그 죽음을 두고 과도한 재산권 행사를 하려 한 ‘봉암사의 중’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혹자는 말한다. 수행도 좋지만 대중을 사지(死地)로 모는 것이 수도자들이 할 짓이냐고? 정말 봉암사 스님이 그 죽음의 원인을 제공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희양은 기(氣)가 무척 센 산임에는 틀림없다. 가을이다. 청명한 날씨에 희양산을 찾아 그 밝은 기운과 정기를 맛보고, 그간 가졌던 두려운 인상을 떨쳐 버리고 싶다. 밝음은 부드러움과 어울리는 말 아니겠는가? 혹 지름티재나 정상 부근에서 ‘호위 스님’들을 만나면, 나 봉정사로 넘어갈 의사가 전혀 없으며,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산에 오르겠다고 양해를 구할 작정이다. 자연은 언제나 자유의 세계이며, 산은 그 자유의 심볼이라 했다. 초가을 화강암 암괴 위에서 나만의 자유를 만끽해 보고 싶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상에 설 때 느끼는 성취감과 자신감을 희양산에서도 경험하고 싶다. |
< 은티마을 가는 길 >
평촌에서 산행 들머리 은티마을까지의 거리를 모젠 길안내로 검색한 결과 140km 남짓이다. 2시간 거리로 적당하다. 맑은 날을 기대하며 주말을 맞는다.
토요일 아침. 뒤척이다 잠을 깬다. 언제부턴가 산행 가는 저녁엔 늘 잠을 설친다. 산에 오를 설렘에 학창시절 소풍 가는 기분이 드니 좋은 현상일진데, 깨어나도 몸이 개운하지 못한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햄버거와 커피를 사 들고 차에 오른다. 최근 더욱 강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거리에 넘쳐나는 커피 가게와 이해할 수 없는 비싼 가격과 그래도 사람들이 북적 이는 현상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늘 아침 스xx, 콩xx, 빈xx 커피 한 잔 값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원두커피와 햄버거에 감자까지 먹을 수 있는 패스트 푸드점에서 조그만 위안을 얻는다. 기호품의 가격 산정 메커니즘은 복잡하기는 하나, 결국 인간의 구매는 ‘성공의 과시’라는 측면을 무자비하게 파고 든다. 인간의 일반적 심리는 내가 이 제품을 산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나를 과시하고 싶을 때 구매력은 커진다.
문제는 성공을 과시하기에는 아직 이른 사람들의 행동에 있다. 우리의 경우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는데도 고급 커피전문점마다 넘쳐나는 젊은이들을 볼 때 마나, 혹 그들이 성공의 과시로 착각하고 있는, 이 중독성 많은 카페인 음료 이면에는 오늘도 생업 전선에서 고생하고 있는 그들 부모가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든다. 얼마 전 TV에서 전세계 스타벅스 매장을 여행하는 외국인이, 강남 사거리 한 지역에 네 곳의 스타벅스 매점이 성업중인 것을 보고는 세계에서 한국인이 커피를 가장 사랑하는 것 같다고 비꼬아 말하는 것을 보고, 우리 나라 사람들의 철없는 서양문화 사대주의와 곧 죽어도 체면을 내세우는 나쁜 습성을 보는 것 같아 쓸쓸했다. 자기 힘으로 돈 한푼 못 벌며 서른이 가까운 나이에 부모에게 손을 벌리면서도 한 끼 밥값만한 가격의 커피를 마셔대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사람들인가 말이다. 마음이 답답해진다.
커피에 대한 사설이 길어졌다. 사회의 그늘이 짙어지니 현명한 소비에 대한 습관을 갖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7시 30분 평촌 출발,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하니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시원해진다. 연풍IC를 나와 머지 않은 곳에 은티마을이 있었다. 9시 30분 이른 시간인데도 주차장은 빈 자리가 몇 없다. 주차료를 내고 행장을 정리하며 올려다 본 하늘 밑에는 예전 대야산에서 본 화강암 암괴는 없고 평범한 산 줄기가 흐르고 있다. 산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 은티마을에서 구왕봉 >
주차장 한 켠에 서 있는 등산안내도 사진을 찍는 것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도로를 따라 조금 오르니 커다란 돌 비석과 장승, 소나무가 어우러진 은티마을 입구가 나온다. 초입의 깨끗한 인상은 지방 행락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똑같은 모습의 음식점으로 인해 그저 그런 것으로 변한다.
어지러운 공사장 옆으로 난 길로 산으로 들어선다. 작은 삼거리, 좌측으로는 펜션 안내판과 사유지라는 표시가 되어 있고, 우측으로는 아무 표시가 없고 등산 표지기 몇 개 만이 날 유혹한다. 당연히 우측 길을 따른다. 지난 여름 공작산에서 '펜션 사유지 주인'의 만행을 목격하고는 사유지라는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 은티마을 입구>
길은 포장도로가 한 참 더 이어진다. 길 가는 온통 사과나무 밭이다. 붉게 익은 큼지막한 사과들이 농부의 손 길을 기다리고 있다. 짐짓 밭에 들어가지 않고 손 만 뻗어도 쉽사리 서리가 가능할 만큼 사과는 지천이다. 추석이 지나 가격이 하락하여 인부 부리는 인건비도 안 나온다고 한숨짓던 며칠 전 TV에서 본 농부의 얼굴이 떠올라 걱정이 된다. 혹 가격이 더 폭락하면 저절로 떨어져 거름 신세가 되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은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하산 길에 사과 한 봉지 사가지고 가야겠다 다짐한다.
길이 낯설다. 당초 염두에 두었던 지름티재 길을 아침에 호리골재-구왕봉-지름티재로 변경했더니 초입에서 호리골재 가는 길이 헷갈린다. 머릿속에 넣어 두었던 길의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다. 일단 무조건 우측으로 길을 잡고 스마트폰 'e산경표'를 켜서 궤적을 비교한다. 내가 가는 길이 호리골재 가는 길이 맞다. 문명의 이기 덕에 걱정이 사라진다. 은티마을의 고도가 300m 남짓, 완만한 계곡 오르막을 느긋하게 걷는다. 햇살은 강렬하지만 짙은 녹음에 볕이 들어올 공간이 없다. 숲에는 서늘함마저 돈다. 습기가 없어진 공기가 숲에서 더없이 상쾌하다.
길이 조금 가팔라지더니, 공지선이 눈에 들어온다. 저기 보이는 고개가 호리골재이다. 이정표는 없어도 내 몸은 직감적으로 산 기슭을 치고 오른다. 출발 50분만에 어렵지 않게 첫 관문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백두대간 길이다. 커다란 쓰러진 고사목들이 무덤 주변에서 벤치 역할을 해 주고 있다. 벌써 이곳에 와서 휴식을 취하고 길을 떠나는 이들로 고개는 작은 플랫폼이 된다. 그 중에는 새벽 2시에 집을 나섰다는 노 부부도 계시다. 금술이 좋아 부럽고 건강하셔서 감사하다. 그들의 다정한 모습에서 잠시 부모님 생각이 났다.
구왕봉을 향해 길을 나선다. 내 머릿속 거리는 40분, 호리골재 이정표는 50분을 구왕봉까지의 소요시간으로 제시하고 있다. 누가 맞을지 길에게 물어 보아야겠다.
< 고목 전망대에서 / 구왕봉에서 >
백두대간 길에만 들어서면 희양산의 화강암 암괴를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길은 경치 없는 ‘산 어깨 길’로 이어진다. 도중에 네모난 화강암을 마치 돌 쌓듯 포개놓은 광경을 본다. 11시 무렵 작은 전망대에 도착한다. 작은 길 사이로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도움닫기 뛰기를 하면 건너편으로 넘어 가 좀 더 좋은 경치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시도 여부를 망설이다, 단념한다. 초입부터 힘을 뺄 필요는 없다.
작은 오르내리막을 반복하다. 11시 15분 고목전망대에 도착했다. 정상 줄기에서 내려온 화강암 암괴가 시원하다. 5분여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는다. 인물사진은 나무 그늘에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한참을 실랑이 하다 포기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구왕봉 정상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작은 공터에 오석(烏石) 표지, 흔한 풍경이다. 호리골재 출발 근 1시간이 소요되었다. 중간에 쉼을 취한 것을 고려하면 내 생각은 틀렸고 이정표의 시간 예측이 맞았다. 그늘진 나뭇가지 사이로 희양산의 본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밀려드는 인파에 자리를 내어주고 내리막 길로 들어선다.
< 구왕봉에서 희양산 >
구왕봉 출발 3분 만에 기막힌 바위 전망대 위에 섰다. 고사목과 소나무 멀리 희양산의 우유 빛 암괴, 아득히 보이는 마을. 전형적인 우리 산야의 모습이다. 늘 보아도 새롭고 아름답다. 희양산 암봉의 모습은 미리부터 기대를 너무 크게 했는지 생각만큼 거대하지도 특징적이지도 않다. 인수봉에 비견된다는 말은 허언인가 보다. 그래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먼 곳을 바라보는 눈 길에는 호기심이 가득 차 있다. 하늘이 참 맑다. 시야가 큰 간데 없이 멀리로 향한다.
< 구왕봉 바위 전망대에서 본 풍경 >
다시 10여분을 걷자 또 다른 바위 전망대가 나타난다. 희양산의 암괴가 훨씬 더 가까워졌다. 멀리 봉암사의 전경도 눈에 들어온다. ‘닭’의 흔적은 찾을 길 없는 다소곳한 절집이 아늑해 보인다. 이 전망바위를 지나며 길이 몹시 험해지기 시작한다. 바위 협곡 사이로 흙과 바위와 나무뿌리가 뒤엉켜 미끄럽고 위험한 길이 계속된다. 말로만 듣던 ‘백두대간 중 최고의 난코스’ 구왕봉-희양산 구간에 접어든 것이다.
험로가 계속 이어진다. 구왕봉-지름티재 코스는 30분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시간지체가 많다. 879m 구왕봉에서 600m 대로 고도가 떨어진다. 다시 희양산으로 오르려면 죽었다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목책과 감시탑이 있는 지름티재에 도착하였다.
< 희양산을 배경으로 / 지름티재 풍경 >
한시름 놓았다. 긴장이 풀어지니 배가 고프다. 지나는 사람들이 보던 말던 길 가 돌에 퍼지러 앉아 식사를 한다. 예전에는 봉암사 중들이 (잠시 후 희양산 정상 가는 길에 예의 없는 땡중을 만난 후로는 오늘은 스님이란 용어 대신 중이라 칭하기로 했다.) 희양산 정상으로의 출입을 막았던 곳인데 오늘은 지키는 이들이 없다. 다행이다.
식사를 하고 났더니 출발 후 거의 3시간이 지났다. 어긋맷기로 설치된 목책 뒤편으로 봉암사로 가는 길이 희미하게 나 있다. 절 안에 무엇이 있기에, 그리고 수행하는 행자들이 왜 대중과 저리 떨어져 지내려 하는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 바위와 지지대 / 정상 밑 험로 >
희양산 정상으로 길을 나선다. 바위 길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긴 흙 길이 이어진다. 길가에 커다란 바위가 보이고 그 밑의 누군가가 나무로 지지대를 만들어 놓았다. 저 큰 바위가 작은 나무에게 의존하랴마는 그 해학이 돋보인다. 잠시 웃고 길을 간다. 고도가 점점 높아진다. 뒤돌아보는 구왕봉이 우뚝하다. 그리 힘겹게 밧줄을 잡고 내려 왔건만 지금 보는 모습은 순하기 그지없다.
괴산 방향의 산야도 눈에 들어온다. 멀리 너울지는 산 줄기 밑으로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그 뒤편으로는 희고 누런 속살을 다 드러내 놓고 있는 채석장이 흉물스럽게 서 있다. 개발의 그늘을 보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 많은 이들의 또 가른 이익을 위해 이왕 벌여놓은 일이라면 잘 활용하고 마무리는 정성 드려 잘 해 주길 바란다.
13시 무렵, 고도계는 900m 즈음을 표시할 때, 갑자기 직벽에 가까운 밧줄 암릉이 눈 앞에 나타난다. 길에 지체가 이어진다. ‘58년 개띠’산악회 남녀들이 뒤엉켜있다. 국민학교 동창들인가 보다. 여자들은 스틱 갈무리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내 경험으로는 이런 바위 산에서의 스틱은 완전히 애물단지로 전락하므로 소지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데, 이들은 모두가 한 손에는 스틱, 또 한 손으로는 줄을 잡고 낑낑대고 있으니 보기에 딱하다. 긴 줄이 이어지는데 한 술 더 떠 하산하는 사람들과도 엉킨다.
낑낑대고 밧줄 암릉을 기어오르는데, 내 귓가로 무언가가 휙 지나간다. ‘돌이다’ 순간적으로 소리를 지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먹만한 돌이 엄청난 속도로 아래로 내리 꽂힌다. 돌의 궤적이 눈에 그려진다. 다행히 오르는 사람들을 피해 떨어졌으나, 간이 콩알만해 졌다. 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조심해서 걷고 돌을 굴렀으면 위험 신호를 보내야지, 누가 다치면 어쩔라 그래’ 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위에서 미안하다는 짧은 답이 올뿐이다. 정말 큰일날 뻔 했다. 동일지점에서 몇 년 전 초봄, 한 백두대간 종주를 하던 중년의 남자가 떨어지는 돌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이송 중에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사건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어렵사리 정상 삼거리에 도착하니 11시 10분, 마의 10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잠시 숨을 고른다. 실수로 돌을 굴린 아저씨가 사과를 한다. 어쩌겠는가? 사고가 없었으니 천만 다행이다.
정상 삼거리에는 출입금지를 알리는 봉암사에서 쓴 표지판과 금줄이 쳐 있다. 누군가 ‘봉정사’란 글 밑에 X자를 쳐 놓았다. 중과 산꾼들 사이에‘치열한 말의 전투’가 많았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도 금줄을 뚫고 ‘닭의 머리를 닮았다’는 밝은 산의 정상으로 발을 들여 놓는다.
< 정상 가는 길 / 정상 바위에서 본 산 너울 / 희양산에서 본 봉암사 >
5분여를 걷자 커다란 암반지대가 나타난다. 구름 밑으로 대간의 산줄기가 길게 이어진다. 백두대간의 능선은 때론 바람이 되어 너울지고 또 때론 바다가 되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지나온 구왕봉 줄기가 눈 앞에 선하다. 멀리 봉정암의 모습도 훨씬 더 선명하게 보인다. 잠시 경치에 취해 주위를 둘러보는데, 밀집 모자를 삐딱하게 쓴 날카로운 인상에 수염이 듬성듬성 난 땡중이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내려 가란다. 금줄을 쳐 놓았는데 왜 올라오냐고 짜증이다. 사정을 정중히 부탁하려 하는데 막무가내다. 뒤따르던 일행들도 멈춰 선다. 인원이 많아지자 땡중은 올라가 보아야 소용없다고 말하더니 황급히 밑으로 내려간다. 위에서 또 제지를 받더라도 일단 오르기로 한다. 내가 뭐 예서 봉암사로 내려갈 것도 아니고, 수행에 방해가 될 만큼 큰 소리를 지를 것도 아니니 떳떳하게 바위 길을 올라선다. 그 놈의 사유지가 문제된다면 내 다시 이곳을 오지 않으리라, 사람이 다니는 길을 어찌 자기들만 소유하려 하는가? 그러고 하는 수행이 정말 효과가 있을지 의문시된다.
< 희양산 정상 부근에서 >
한참을 더 정상 방향으로 간다. 먼저 갔던 산꾼들이 내려 오며 험한 꼴 당했으니 내려 가는 것이 좋을 듯 하다고 조언한다. 봉암사가 선명하게 보이는 바위 난간에 서서 초가을의 산들을 바라보다 되돌아 내려온다. 비록 정상석은 보고 못했지만 희양의 모든 것을 경험했다 할만하다.
< 희양산 정상에서의 풍경 >
가을날의 하늘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푸르다. 밝은 빛의 산에서 보는 희양산 주변은 온통 푸른 기운이 감돈다. 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이 어설픈 내 글의 기댈 언덕을 마련해 줄 것이라 생각하니 든든하다.
< 희양산 정상에서 은티마을 >
다시 정상 삼거리에 섰다. 입간판에 쓰여져 있는 ‘봉암사’란 말에 ‘X표시’를 한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아까 그 땡중 말에 의하면 원래 지름티재에서 이곳까지도 원래는 출입금지였는데 풀었다 했는데, 이왕 부처님의 자비를 베풀려면 정상으로 가는 길도 관계당국과 협의하여 안전시설을 보완하고 스님들 수행에 방해가 되는 않는 방안을 강구하여 개방한다면 우리 불교 최고의 도량이 도매금으로 매도 당하는 사태는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봉암사도 나름 정상 출입을 금하는 사정이 있겠지 만은, 지금같이 전국에 걸쳐 불어오는 등산 열풍을 이겨내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으니 말이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 큰 사고나 충돌이 나기 전에 안전하고 봉정암에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개방 방안이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
< 성터 길 모습 / 희양산 바위 >
정상 삼거리를 돌아 성터를 향해 내려선다. 오를 때와는 다르게 길의 사정은 편하기 그지없다. 의외다. 성터는 정상삼거리에서 10여 거리로 시루봉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다. 출발 4시간이 지났다. 발 길을 재촉해 본다.
은티마을로의 하산 길은 별 특징이 없다. 마치 관악산에서 서울대 입구로 하산하는 길의 느낌을 준다. 산 중턱 부근에 특이한 모양의 바위들이 서 있다. 굵은 연필로 스케치 밑 그림을 그린 것 같기도 하고, 힘센 장사가 공깃돌 놀이 혹은 돌 쌓기 놀이를 한 것 같은 기묘한 모양의 돌 들이 길가에 산재해 있다. 특이한 풍경이다.
작은 개울을 지난다. 물이 맑다. 웃옷을 벗고 더워진 몸을 차가운 계곡물로 식힌다. 몸도 마음도 개운해진다. 14:35분 정자가 보이고 갈림 이정표가 나타난다. 성터 길과 지름티재가 나뉘는, 내가 당초 오르려고 했던 길에 섰다. 산행을 마칠 무렵 생각해 보니 만약 내가 지름티재로 올라 정상 부근에 올랐다가 하산했다면, 내게 희양산은 별 특징 없는 그저 그런 산으로 기억될뻔했다. 오늘 산행 최고의 풍광은 물론 희양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었지만, 호리골재 넘어 구왕봉에서 바라본 희양산의 모습도 그에 못지 않았다. 호리골재로 오른 것은 잘한 일이었다.
< 성터/호리골재 갈림 / 날머리에서 본 희양산 >
은티마을 사과 밭 입구에서, 노인 한 분이 사과를 팔고 있다. 만원을 주니 큼지막한 사과 15개를 준다. 왠지 돈의 값어치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과를 내게 건네줄 때 본 노인의 강단 있어 보이는 얼굴에서 수심도 함께 보아서 일 것이다. 빈대떡에 소주 한 잔 마실 돈에 애써 키운 사과 한 포대를 넘겼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 에필로그 >
맑은 가을날 찾은 희양산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내 마음 속에 들어왔다. 그 거대한 화강암 암괴가 있는 구왕봉에서의 풍경과 희양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 능선의 도도한 흐름은 감동이었다.
희양산이 내 머릿속에 들어온 후, 실제 오르기 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2년 전 초가을 버스 차창으로 보이던 사과나무에서‘일엽지추’란 말을 실감하며 오른 대야산 정상에서, 힘겨움 속에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희한한 모양의 산을 보고 ‘멀지 않은 시일 안에 내 저곳을 오르리라’라고 마음 먹였었다. 그 후 마음 속으로 한 약속이지만 실행하지 못함이 늘 짐이 되었다. 오늘 막상 희양을 경험해 보고 나니 새로운 욕심이 생긴다. 또 다른 백두대간 능선 길 ‘조령산’을 올라 보고 싶다.
문뜩‘약속은 인간을 구속하지만 약속을 할 수 없을 때 삶은 슬퍼진다.’란 말이 떠오른다. 체력과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있을 때 무언가를 끊임없이 약속하고 행하는 삶을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