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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지난 얘기지만, 교문지도 할 때마다 나는 심하게 어색했었다.
뭐랄까 … 나의 존재가 왜소해지는 느낌 같은 것을 받았다.
거칠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교문지도 하는 것이 솔직히 쪽팔렸다.
(올해 나는 미양고등학교로 학교를 옮겼는데, 나의 근무 부서는 오랜만에 생활지도부다)
오늘 나는 교문지도를 했다. (교문지도는 생활지도부 교사들이 몇 명씩 번갈아 가며 한다)
그런데 예전과 달리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 사이 내가 변할 걸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일 큰 원인은 다른데 있는 것 같다.
과거에는 교문지도의 가장 중요한 일이 두발단속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서울의 경우는 ‘학생인권조례’ 제정 후 두발단속은 교문지도의 아주 사소한 일이 되었다. 아직 그렇지 않은 학교도 있다지만 이제 상당수 학교는 학생들의 ‘머리카락 길이’를 가지고 교문에서 더 이상 실랑이를 하지 않는다.
이제 교문지도의 가장 큰 일은 교복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학생에게 교복을 갖춰 입으라고 지도하는 것이 되었는데, 이것은 두발단속에 비해 일이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그로인해 발생하는 학생들과의 갈등과 마찰이 두발단속에 비해 현저히 적다.
두발단속과 복장(교복)지도를 하나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둘은 학생들에게 현저히 다른 차원의 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나에게도 현저히 다른 차원의 일로 받아들여졌었다.
오늘 나는 교문지도를 하며 두발단속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됐으니까 말이다.
오늘 내가 교문지도를 할 때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나는 자연스럽게 교문지도를 했다.
무엇보다 흐뭇한 것은, 교복을 제대로 갖춰 입으라고 말하는 나에게 인상을 쓰거나 무례하게 구는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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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한 글. 졸저 <교육을 잡는 자가 대권을 잡는다>에서.
학교의 무능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관점을 굳건히 하면 수많은 개혁 방안들을 볼 수 있다. 부작용도 비용도 들지 않는 손쉬운 방안들이 널려 있다. ‘두발 자유화’ 정책도 그 중 하나이다. 두발자유화는 포퓰리즘적 정책이 아니라 오히려 학교교육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하는 정책이다.
그동안 두발 자유화는 주로 학생인권 차원에서 접근되어 왔다. 물론 두발규제는 학생의 인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두발 자유화’도 학교의 무능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학교가 다른 나라 학교와 경쟁한다고 해보자. 핀란드라도 좋고 미국이라도 좋다. 아무튼 다른 나라 학교의 교장과 교사들이 그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오로지 수업에 바치고 있을 때, 우리나라의 교장과 교사들이 두발규제와 같은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다. 우리나라 학교 수업의 질이 다른 나라 학교 수업의 질을 넘어 설 수는 없는 것이다.
학교의 경쟁 상대를 학원이라고 생각해보자. 결과는 마찬가지다. 학원 강사들이 자신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온전히 수업에 쏟고 있을 때, 학교 교사들이 자신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두발 규제에 쏟고 있다면 학교 수업은 학원 수업을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두발 규제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도 아니다. 학생들에게 민주 시민으로서의 품성을 길러주기 위해 교사들이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의미와 가치가 있다. 학교는 그러한 교육을 위해 수업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학교는 학원과 분명 달라야 한다. 하지만 학생들 머리카락 길이를 규제하는 것은 그러한 의미와 가치를 조금도 갖지 못한다.
머리카락 길이가 학업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스님들이 무조건 목사나 신부보다 공부를 훨씬 더 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머리카락 길이는 학생들의 공부 잘하고 못하는 것과도 아무런 관련도 없다. 학생들의 머리카락이 길고 짧음은 학생들 학업에 완전히 중립적이다.
이렇게 볼 때 두발규제는 너무나 무의미한 일에 교사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케 하는 행위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교는 그런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여유가 있을 만큼 유능하지 않다.
두발 규제는 그냥 공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두발규제는 규칙을 통해 제정해 놓았다고 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 매일 투여되는 교사들의 어떤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사들의 시간과 에너지라는 비용을 지불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비용이 적지 않다.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어간다. 머리단속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많은 학생들이 학교 규칙에서 정해놓은 길이를 넘어서는 머리 길이를 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교사들의 단속을 피해 조금이라도 더 머리를 기르려 한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매일 매일 조금씩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다. 가난한 학생들의 머리카락도 매일 자라난다. 시간이 흐르면 머리카락 길이는 자연적으로 길어져 어느덧 학교 규정을 벗어나게 된다. 또 두발규제는 그 자제가 큰 애매성을 가지고 있어 끝임 없이 학생들의 불만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머리카락 길이를 몇 센티미터로 정해봤자 일일이 자로 재는 것도 어렵지만, 자로 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머리길이는 그날그날의 습도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학생의 외모나 청결함 등에 의해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중․고등학교의 교문 안에서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 머리카락 길이 때문에 매일같이 실랑이가 벌어진다. 이렇게 해서 교사들의 적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가 두발 단속에 투여된다. 고차원적 교육활동 투여돼야할 교사의 시간과 에너지가 저차원적 머리단속에 투여된다.
그런데 두발규제의 폐해는 단순히 교사들의 시간과 에너지 낭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머리 단속은 유능한 교사의 기준을 왜곡한다.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수업 잘하는 교사보다 머리단속 잘하는 교사가 능력 있는 교사이다. 수업 잘하는 교사가 수업 잘한다고 부장이 될 수는 없지만, 머리단속 잘하는 교사는 머리단속 잘한다는 이유로 부장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수업 잘한다고 교장이 될 순 없지만 머리단속 잘하면 교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사무행정업무가 가장 중요하고, 학생들 규율 잡는 것이 그 다음으로 중요하고, 정규 수업은 마지막이다. 교장들의 행동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많은 교사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2009년 하반기에 교사 십여 명과 교과부 간부들이 참여하는 ‘학교선진화포럼’이라는 연구 모임에서 한 교사가 이러한 내용의 발제를 했을 때 교사들은 물론 교과부 간부들조차 그러한 발제 내용에 대해 조금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학교가 학생들 규율 잡는 일 중에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여하는 것이 두발규제이다. 대한민국 학교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저차원적 일이 정규 수업보다 더 중요한 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 저차원적 일을 잘하는 교사가 수업 잘하는 교사보다 학교에서 더 큰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학교가 유능해질 수는 없다. 두발 규제 잘하는 교사가 수업 잘하는 교사보다 더 큰 존재감을 발휘하는 학교, 두발 규제 잘하는 교사가 수업 잘하는 교사보다 승진에 유리한 학교, 이러한 학교가 유능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괴이하고 이상한 일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학교는 무능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두발규제는 대한민국 학교 교육을 망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인 것이다.
두발 자유화는 단순히 단위 학교에 결정권을 넘겨서는 안 된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전국적 차원에서 두발 자유화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언뜻 생각하면 머리카락 길이 정도는 개별 학교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하지만 학교 자율에 맡기는 순간 두발 자유화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두발규제로 대한민국 학교 교육은 매우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개별 학교의 차원에서는 두발규제를 시행하는 학교가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두발 길이는 학생들의 학습 태도와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두발 길이를 규제하는 규정을 만들게 되면 그 규정을 더 많이 어기는 것은 아무래도 모범생보다는 문제아들이다. 그래서 두발규제를 학교의 자율에 맡기면 말썽을 일으켜 강제 전학 조치를 당한 학생들이 두발 자유화를 시행하고 있는 학교에만 몰려가는 등의 여러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두발규제를 주장하는 교사들 중에는 이런 것을 근거로 두발 규제를 주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모든 학교에서 두발 자유화가 시행되는 순간, 머리카락 길이는 모범생과 문제아를 가르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지금 대한민국 학교는 서로 의미 없는 경쟁을 하고 있다. 서로 자기 학교만의 작은 이익을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 교육의 경쟁력을 갉아 먹는 바보 같은 경쟁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학교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 어느 학교가 다른 학교보다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더 짧게 해서 이익을 조금 보았다고 해보자. 도대체 이런 저급한 경쟁이 우리나라 학교 교육의 경쟁력을 얼마나 상승시키겠는가?
매일 수만 명의 교사가 수만 명의 학생(학생부 교사들의 교문 지도를 돕는 학생)을 대동하고 아침마다 교문에서 머리단속을 하고 있다. 이제 그 시간과 에너지는 더 의미 있는 일에 투여되어야 한다. 수업 연구나 공부를 해도 좋지만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하고 휴식을 취해도 좋다. 공부를 하건 휴식을 취하건 그 어떤 것도 두발규제 보다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
대한민국 학교는 두발 규제라고 하는 저차원적 행동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이제 정부가 나서 학교의 이 바보 같은 행위를 근절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학생 인권의 관점이 아닌 학교의 능력 향상이라는 관점에서 두발자유화의 정당성을 얘기했다. 나는 지금 입시를 무시하고 입시를 초월한 위치에서 두발자유화를 주장하는 게 아닌 것이다.
입시 교육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교사가 발 딛은 현실이다. 그런데 학교의 하는 일을 보면 입시의 관점에서도 너무나 엉터리 같은 것들이 많다. 입시를 핑계로 대지만 입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 어떤 특정 개인과 집단의 이익이나 취향에 부합할 뿐인 행위들이 입시를 핑계로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학생들의 머리길이에 대한 규제와 간섭인 것이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한마디 덧붙여야겠다.
나는 지금 학생에 대한 통제와 규율을 지금보다 완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개인적 취향은 통제와 규율을 싫어하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학교가 학생들에 대해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지 않고 잘 굴러 갈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규율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화돼도 좋다.
다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엄격한 규율을 적용해야 하는 것은 학생들의 머리카락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은 버틀란트 러셀이 <자서전>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직접 작은 학교를 만들어 교육시킨 경험에 대해 한 말이다.
전통적 학교들에서 당연시하는 자유에 대한 무수한 제약이 싫었다.
금욕주의적 교육을 중시하지 않거나 자제력 훈련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대부분의 현대 교육가들에게 동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짐과 케이트 또래의 아이들을 스무 명 쯤 모아 일반 학교에 다니는 만큼의 기간을 우리가 교육하기로 했다.
(……)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다수의 아이들이 잔인하고 파괴적인 성향을 보였다. 아이들을 자유롭게 풀어놓자 강자가 약자를 벌벌 떨게 만들며 괴롭히는 테러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학교도 세상과 똑 같아서 오직 정부만이 짐승 같은 폭력을 막아 줄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아이들이 수업시간을 벗어나서도 잔혹한 짓을 못하도록 끊임없이 감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집단생활을 하는 어린아이들은 어느 정도의 질서와 일과가 주어지지 않으면 행복할 수가 없다. 저희들끼리 즐기도록 내버려두면 이내 싫증을 내고 약한 아이를 괴롭히거나 파괴적인 쪽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아이들에게 자유 시간을 줄 때는 반드시 어른이 같이하면서 좋아할 만한 게임이나 오락을 제시해주고, 어린아이들에게 기대하기 힘든 계기를 제공해 줄 필요가 있다.
(……)
보건과 청결 부분에서는 거의 자유가 없었다.
(……)
고학년 아이들에게 양치하라고 말하면 이렇게 투덜대곤 했다. “이게 무슨 자유학교야!”
전통 학교에서 무수히 존재하는 자유에 대한 규제가 싫었던 러셀도 아이들에게 한없이 자유를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본성이 선하기만 하다고 믿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러셀은 학생들에게 한편으로는 엄격한 규율을 적용했다. 그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을 막기 위해서이고 다는 하나는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서였다.
내 생각에도 인간의 본성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아이들은 한없이 순수하기만 하다는 생각은 내 경험에 비추어 봐도 지나치게 순진하고 낭만적인 환상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규율 자체를 부정하는 교사는 없다
문제는 어떤 부분에 어느 정도의 규율을 적용하느냐이다. 학교의 규율이 적용되고 있는 학생들의 행위를 몇 부분으로 나누어 보자.
(1) 남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는 행위.
(2)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학생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되는 행위.
(3)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학생 자신에게도 손해가 되지 않는 행위.
이제 러셀을 말을 교훈 삼아 우리나라 학교가 각각의 부분에 맞는 적절한 규율을 학생들에게 적용하고 있는지 성찰해보자.
(1)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다른 학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를 들 수 있다.
학교의 규율이 가장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할 부분이다.
(2)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학생들에게 담배를 못 피우게 하는 것이다. 학생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그 자체로는 남들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담배 공초를 아무데나 버리거나 담배 연기를 실내에 뿜어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담배는 학생 자신의 건강에는 심각한 손해를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건강이라는 학생의 이익을 위해 학교는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지 못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1)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한 규율이 적용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3)의 대표적인 것으로 머리카락을 들 수 있다. 학생들이 머리카락을 길게 했다고 남들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받는 일은 없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길게 했다고 학생들의 건강이 상하는 것도 아니다. 머리카락을 길러도 학생들에게는 아무런 손해가 없다.
이 부분은 가장 많이 학생들의 자유의지에 맡겨 두어도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사들의 에너지가 가장 많이 투여되고 있는 부분은 (3)부분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우리나라 학교가 학생들에게 많은 자유를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3)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더 많은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1)에 대해서는 학생들에게 더 엄격한 규율을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교사들의 시간과 에너지도 이 부분에 더 많이 투여될 수 있다.
그런데 (1)이나 (2)에 더 많은 규율을 요구하려면 반드시 (3)에서 규율을 완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교사들의 시간과 힘이 제한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학생들에게 너무 많은 규율을 요구하는 것은 효과도 떨어지고 교육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는 규율도 필요하지만 자유도 필요하다. 자유는 없이 엄격한 규율만이 적용된다면 학생들이 반항하고 저항할 것이다. 무엇보다는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 할 수 있는 자율적 인간으로 커나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1)과 (2)의 부분에서 더 많은 규율을 적용하려면 (3)에서 더 많은 자유를 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물론 학부모 중에는 강력한 두발규제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 자식만의 머리를 짧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학생 전체의 머리를 짧게 해달라는 학부모가 있다. 교장과 교사 중에는 이런 학부모의 요구에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그 학부모는 자기 자식만의 머리를 짧게 해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을 왜 남의 자식 머리까지 짧게 해달라고 요구한단 말인가? 다른 학생의 머리가 길다고 자기 자식이 피해를 받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수업 시간에 떠드는 남의 자식은 엄격하게 다스려 달라는 요구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 학생으로 인하여 자신의 자식이 피해를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아이의 머리카락 길이까지 단속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자기자식 머리 짧게 하고 싶으면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식을 설득해야 한다. 왜 그것을 학교의 교사에게 요구한단 말인가? 왜 다른 학생들의 머리카락 길이까지 간섭한단 말인가?
두발자유화와 교복자유화를 항상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약간의 연관성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둘은 별개의 것이다. 두발자유화를 실행하지만 교복자유화는 실행하지 않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교복을 입는 것에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두발자유화는 학교를 무능하게 만들지만 교복착용은 학교를 별로 무능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교복은 학생들의 학습에 도움이 되는 면도 있다. 또 두발자유화는 빈부간의 위화감을 조장하지 않지만 교복자유화는 빈부간의 위화감을 조장할 수 있다.
학생이 입는 옷은 머리카락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머리카락은 그 길이를 길게 하는 데 부자라고 해서 더 유리하거나 하는 측면이 전혀 없다. 머리카락을 길게 하는 데에는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가난한 사람이 걸리는 시간보다 더 짧지 않다.
하지만 옷을 잘 입는 데에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 부자 학생이 가난한 학생보다 훨씬 더 유리하다. 그런데 인간은 이성의 관심을 끌고 싶은 본능, 자신을 멋있게 보이고 싶은 본능이 있다. 청소년들도 옷을 통해 자신의 매력을 높이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서로 옷을 잘 입으려고 경쟁하고 있다. 이런 경쟁은 자칫 옷에 대한 끝없는 투자를 요구할 수 있다. 친구가 오늘 더 비싸고 멋있는 옷을 입었을 때 내일 나는 그보다 더 비싸고 예쁜 옷을 입고 싶은 마음은 청소년이 아닌 인간이라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러한 소모적인 경쟁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사복을 입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교복을 더 많이 원한다.
이런 측면을 생각하면 두발자유화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시행하되 교복의 착용 문제는 단위 학교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교복 착용의 결정권을 단위 학교에 맡기면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교복을 착용하게 할 것이다.
두발은 자유화하면서 하면서 왜 옷은 강제적으로 교복을 입게 하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머리카락과 옷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머리카락은 생물학적 측면이 강하고 옷은 문화적 성격이 강하다. 머리카락은 신체의 일부이다. 머리의 길이를 얼마정도로 할 것인가도 물론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지만 머리카락은 아무튼 신체의 일부이다. 따라서 머리카락의 길이의 길고 짧음은 가급적 머리카락 소유자의 의사에 맡겨 두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러나 옷은 머리카락에 비해 문화적 요소가 더 강하다. 문화 공동체의 구성원이 스스로 자발적 규제를 할 수 있는 당위성이 머리카락에 비해서 더 큰 것이다. 즉 자신이 교복을 입는 것을 찬성하는 경우 다른 학생들도 교복을 입게 요구할 수 있는 당위성이 머리카락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큰 것이다. 그래서 설사 머리규제를 원하는 학생이 다수라고 할지라도 소수의 학생에게 머리카락 규제를 요구할 수 있는 당위성은 적은 반면 교복을 원하는 학생이 다수라면 소수의 학생에게 교복을 입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당위성은 상대적으로 큰 것이다.
두발자유화는 단호히 시행하고 교복 착용의 여부는 학교 자율에 맡기는 것은 균형감 있는 결정이다.
내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를 자세히 읽고 그 균형감각에 감탄한 것은 바로 두발자유화는 단호히 시행하되 교복 착용의 결정권은 학교 자율에 맡긴다는 내용에서였다.
첫댓글 선생님, 너무나 논리적이면서 공감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두발과 교복의 차이, 분명하네요! 그리고 러셀의 자서전 오늘 신청 들어갑니다. 직접 읽어보고 싶네요. 그래도 저는 교복지도도 쫌 불필요해 보여요. 교육 입는 것까지는 샘의 말씀에 동의해 학교 자율로 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학생들 맘대로 개성을 발휘해서 입으면 어떤가요? 그게 꼭 지도가 필요할까요?ㅎㅎ 미국 학교에서는 교장 및 여러 교사가 나와서 등교지도를 하는데 대부분 교통을 정리하는 것과 아이들이 다칠까봐 혹은 아침인사하려는 거랍니다. 교문에 서계신 선생님이 지도보다는 밝은 환영의 인사를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쫄아서 정문을 지나지 않도록이요.^^
여고 1학년때만 교복을 입고 그때부터 두발자유화를 경험한 세대입니다. 당시에 핀클 파마(드라이 비슷한)를 하면 학칙위반이었는데 저는 곱슬머리라 오해를 받는 바람에 수돗가에서 물묻힌 후 다시 선생님께 검사를 받은 굴욕이 떠오르네요 ㅜㅜ 선생님이 무척 미안해하셧지만 반항 쩔었던 저는 인사도 안하고 교무실을 나왔었어요. 10년후 우연히 서점에서 뵙고는 그때 일을 사과드렷엇던 ㅋㅋㅋ(실은 그때 임신중이어서 착하게 살려고 )
저희때는 고2때 교복입을지 투표하고, 고3되니, 우리만 자율복장이고, 후배 2학년부터 교복을 입었어요. 그때 학교 여자샘들은 교복반대, 나이드신 남자샘들은 찬성이었는데, 어쨌든 저는 절대로 치마 못입겠다 주의여서, 당연 반대했죠. 어쨌든 저와는 상관없이 바로 아래학년 후배부터 교복 입어서 저는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ㅋㅋㅋ
저희 막내딸이 어린이집을 요새 가기 싫어 해요 이번 주 당번 선생님이 인상이 별로 안 좋아요 제가 애를 데려가도 무뚝뚝 표정으로 맞아 줍니다 울딸 그 선생님이 싫데요 학창시절 꼭 교문에서 인상쓰고 단속하시던 선생님 표정입니다 교문에서 별명도 불러 주고 웃으면서 맞이 해 주면 시작부터 즐거울건데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교복도 여자애들은 특히 여름에 왜 불편한 치마 입을까 반바지도 좋을것 같고 윗도리도 편한 티를 입을면 될건데 했는데...다행히 큰딸 학교에선 작년부터 폴라티에 반바지를 입게 하더군요 좀 실용적으로 변한게 넘 맘에 들더라구요^^
오~~넘 좋은 학교네요. 변합시다!! 변해요~~
저 개인은 교복을 엄격히 입자는 쪽이 아닌데 ~ 제가 근무하는 부서가 그렇다보니 그렇게 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