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라고 할 만한, 법인으로 등록된 최초의 은행은
바로 한성은행 입니다. 1897년 자본금 20만원으로 시작해 발기인 9명 중 한명인 김종한이 그 전에 전당포 - 한성전당포 - 를 운영하던
건물에서 시작했는데 구한말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방 2개에 마룻방 하나를 갖춘 초가집이라는 초라한 시작이었죠. 서울 종로구 안국동, 지금의
안국병원 자리에 있던 이 은행은 방 하나는 은행장 전용 행장실이고 나머지 하나는 은행원의 업무공간 그리고 나머지 마룻방은 손님들이 대기하는
자리였습니다.
여기 은행장에는 고종의 사촌 이재완이 은행장으로 앉았고, 부은행장에 김종한이 앉았는데, 이 김종한이 또 화려하죠. 순종비 윤씨의 숙부인데 - 그러니까 왕실 인척 - 궁내부 대신에, 함경도 관찰사에, 규장각지후관에 벼슬을 하다가 아니 하는 도중에도 돈에 환장했는지 전당포를 비롯하여 철도회사, 철도용달회사 권업주식회사를 만들고 장사를 하다가 나중에는 친일단체 정우회를 만들어 친일짓을 해서 일본으로 부터 공로로 남작의 지휘를 얻은 인물이지요.
다시 돌아와서 은행 업무를 이분화 한다고 두 총무를 두었는데 좌총무에 이보응, 우총무에 한상용을 두었는데 한사용은 익히 잘 아시는 이완용의 조카 되시는 인물입니다, 흐흘. 아무튼 발기인들 다수가 한자리씩 해 먹고 이제 은행 업무를 해야 하는데 은행 실무를 담당할 행원은... 딱 한명. 그러니까 대두 조직 되시올습니다. 뭐, 사실 이 당시의 은행이라고 말은 하지만 전당포에서 그다지 달라진게 없는게 일본계 자본을 끌어다가 한국인에게 대출하는 정도의 업무를 본지라 요즘처럼 입금하고, 송금하고 뭐 그런 업무가 없었으니 한명의 실무자라도 굴러갈 수는 있었겠지요.
그러나 곧 이 한성은행은 문을 닫습니다, 휴업을 한건데 정부 정책에 따라 움직이는 일종의 공립은행인지라 정치 논리에 따라 움직였는데다가 또 사실 당시에 은행을 애용할 만한 수준이 되지를 못했으니 문을 닫는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죠. 아무튼 이렇게 지내다가 4년 뒤에 다시 문을 열어 운영하다, 자본금을 30만원으로 늘려 1907년 3월에 합자회사에서 주식회사로 업그레이드 해서 영업을 시작합니다. 이때는 자본이 더 있어서 그런지 초가집이 아니라 번듯한 양식 기와집으로 변했습니다.
이때쯤 가면 우리의 화려한 친일파들이 득세를 할 만한 시기인지라 황실과 정부의 재산등을 이용해 돈을 굴려 부를 축적하더니만 1918년에는 무려 일본의 도쿄에 지사를 설립!! 1922년에는 오사카에도 지사를 설립!!! 주식회사인 만큼 일본에 지사를 설립하자 일본인 주주들이 급격히 증가해서 또 부가 쌓여갔습니다. 그러나 1923년 도쿄 대지진으로 몰락하기 시작해서 1928년에 그 유명한 조선식산은행으로 인수되었고 1943년에는 동일은행과 인수합병하여 바로 조흥은행이 됩니다. 이 조흥은행은 2006년 신한은행에 다시 인수합병되지요. 사실 뭐, 요즘에는 최초의 은행에 대한 다른 설들도 나옵니다. 천일은행이나 대조선저마제사회사 같은 것들 말입니다.
참고로... 한성은행 이사로 있던 이해창 - 야구선수 이해창 아님 - 의 후손들은 경기도 남양주시의 내원암 소유의 임야를 일제로 부터 하사받은 땅이랍시고 자기들 소유권 소송을 벌였다가 이듬해 취하하죠. 위에 사람 사진 작은거 있는게 이해창입니다. 이런걸 보다보면요, 돈은 역시 매국해야 잘 버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민족자본 계열은 돈을 잘 못 벌었지요. 뭐... 그렇다고요, 예전에 종로에 조흥은행 사옥 앞에 "민족과 함께해온 100년" 이란 광고를 본게 생각나서 말입지요, 뭐 틀린 말은 아닙지요.
여기 은행장에는 고종의 사촌 이재완이 은행장으로 앉았고, 부은행장에 김종한이 앉았는데, 이 김종한이 또 화려하죠. 순종비 윤씨의 숙부인데 - 그러니까 왕실 인척 - 궁내부 대신에, 함경도 관찰사에, 규장각지후관에 벼슬을 하다가 아니 하는 도중에도 돈에 환장했는지 전당포를 비롯하여 철도회사, 철도용달회사 권업주식회사를 만들고 장사를 하다가 나중에는 친일단체 정우회를 만들어 친일짓을 해서 일본으로 부터 공로로 남작의 지휘를 얻은 인물이지요.

<1902년의 한성은행>
다시 돌아와서 은행 업무를 이분화 한다고 두 총무를 두었는데 좌총무에 이보응, 우총무에 한상용을 두었는데 한사용은 익히 잘 아시는 이완용의 조카 되시는 인물입니다, 흐흘. 아무튼 발기인들 다수가 한자리씩 해 먹고 이제 은행 업무를 해야 하는데 은행 실무를 담당할 행원은... 딱 한명. 그러니까 대두 조직 되시올습니다. 뭐, 사실 이 당시의 은행이라고 말은 하지만 전당포에서 그다지 달라진게 없는게 일본계 자본을 끌어다가 한국인에게 대출하는 정도의 업무를 본지라 요즘처럼 입금하고, 송금하고 뭐 그런 업무가 없었으니 한명의 실무자라도 굴러갈 수는 있었겠지요.
그러나 곧 이 한성은행은 문을 닫습니다, 휴업을 한건데 정부 정책에 따라 움직이는 일종의 공립은행인지라 정치 논리에 따라 움직였는데다가 또 사실 당시에 은행을 애용할 만한 수준이 되지를 못했으니 문을 닫는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죠. 아무튼 이렇게 지내다가 4년 뒤에 다시 문을 열어 운영하다, 자본금을 30만원으로 늘려 1907년 3월에 합자회사에서 주식회사로 업그레이드 해서 영업을 시작합니다. 이때는 자본이 더 있어서 그런지 초가집이 아니라 번듯한 양식 기와집으로 변했습니다.

<이해창 한성은행 이사... 이 사람도 매국>
이때쯤 가면 우리의 화려한 친일파들이 득세를 할 만한 시기인지라 황실과 정부의 재산등을 이용해 돈을 굴려 부를 축적하더니만 1918년에는 무려 일본의 도쿄에 지사를 설립!! 1922년에는 오사카에도 지사를 설립!!! 주식회사인 만큼 일본에 지사를 설립하자 일본인 주주들이 급격히 증가해서 또 부가 쌓여갔습니다. 그러나 1923년 도쿄 대지진으로 몰락하기 시작해서 1928년에 그 유명한 조선식산은행으로 인수되었고 1943년에는 동일은행과 인수합병하여 바로 조흥은행이 됩니다. 이 조흥은행은 2006년 신한은행에 다시 인수합병되지요. 사실 뭐, 요즘에는 최초의 은행에 대한 다른 설들도 나옵니다. 천일은행이나 대조선저마제사회사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일제 말기 즈음해서의 한성은행>
참고로... 한성은행 이사로 있던 이해창 - 야구선수 이해창 아님 - 의 후손들은 경기도 남양주시의 내원암 소유의 임야를 일제로 부터 하사받은 땅이랍시고 자기들 소유권 소송을 벌였다가 이듬해 취하하죠. 위에 사람 사진 작은거 있는게 이해창입니다. 이런걸 보다보면요, 돈은 역시 매국해야 잘 버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민족자본 계열은 돈을 잘 못 벌었지요. 뭐... 그렇다고요, 예전에 종로에 조흥은행 사옥 앞에 "민족과 함께해온 100년" 이란 광고를 본게 생각나서 말입지요, 뭐 틀린 말은 아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