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삼국지 129
(소설 삼국지 )
제1권 천하대란
제8장 산동기의(山東起義)
1) 주비와 오경의 음모
동탁이 일개 병주 목의 신분으로 혼란한 틈을 타 조정을 손아귀에 쥐고 권력을 남용하니 명문 출신의 고위 관료들이나 자사나 태수 급의 지방관들은 내심 불만을 품었다.
동탁에게는 기성의 관료집단이 수긍할 정통성이 없었다. 상국의 벼슬도 황제로부터 합법적으로 수여 받았다기보다는 제멋대로 늑탈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동탁은 전통적인 명문거족의 출신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누구도 수긍할 만한 공적이나 위업이 없었기에 사족들은 권력을 농단하는 동탁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동탁의 집권 초기에 이부상서(吏部尚書) 주비(周毖)와 성문교위(城門校尉) 오경(伍瓊)이 동탁에게 협력했다. 동탁을 활용해 환(桓), 영(靈)제 시절의 폐정을 바로잡아보려는 생각이었다.
주비는 원래 량주 무위(武威)군 출신으로 같은 량주 출신인 동탁과는 다소 인연이 있었다. 오경은 여남(汝南)군 출신으로 젊은 시절 동군 출신의 원소와 함께 협행을 하며 어울렸던 사이였다. 이들은 동탁에게 접근해 그의 신임을 얻었다. 조정 내에 자발적으로 접근하는 자들이 있으니 동탁으로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주비와 오경은 동탁에게 천하의 명사들을 발탁해서 중용할 것을 권했다. 사족들의 중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동탁은 이 말을 옳게 여겼다. 동탁은 주비와 오경 및 상서(尚書) 정태(鄭泰), 장사(長史) 하옹(何顒) 등에게 명해 조정 내에서 환관들에게 빌붙어 더럽고 사악한 짓을 일삼던 자들을 바닥 청소하듯 쓸어내고, 그동안 발탁되지 못하였거나 스스로 은둔하고 있던 명사들을 발탁해 임용하게 했다. 정태나 하옹은 영제 시절에 교현, 허소 등과 더불어 다 지인지감이 있다고 이름이 났던 사람이었다.
정태와 하옹은 은거하고 있던 처사 순상(荀爽), 진기(陳紀), 한융(韓融), 신도반(申屠蟠) 등을 조정에 초청했다. 산림에 은거하고 있거나 학문에만 몰두해온 명사들을 초빙해 조정의 정통성을 보완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들 이외에도 많은 은둔 거사들이 조정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순상은 원래 순욱의 숙부이고 하진에 의해 초청받았던 순유에게는 할아버지 뻘이었다. 원래 순상의 부친 순숙(荀淑)은 영천군 출신으로 벼슬은 불과 낭릉현령을 지낸 것에 불과했지만 순제, 환제 연간에 명사로서 명성이 높았다. 순숙은 아들이 여덟 명 있었는데, 그들 또한 모두 자질이 뛰어나 팔룡(八龍)이란 이름을 얻었다. 순상은 팔룡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는 조정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평생 환로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과 후학 육성에만 노력을 기울였다.
순상과 관련해서 어리(御李)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한번은 순상이 당인들이 영수로 추앙하던 이응(李膺)의 수레를 몰 기회를 얻었던 적이 있었는데, 순상이 이응과 가까이할 기회를 얻은 일이 너무 기뻐 기꺼이 그의 수레를 몰았으며 이 일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고사로부터 ‘어리’는 존경하는 이를 사모하거나 만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아마도 무척 순진했던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순상은 평원상(平原相)으로 발령받아 임지로 향하던 중 겨우 완릉(宛陵)에 이르렀을 때 광록훈(光祿勳)으로 진급했고 진급한 지 불과 삼일 만에 다시 사공(司空)으로 파격적으로 승진했다. 조정의 부름을 처음 받은 날로부터 삼공의 지위까지 오르는 데 불과 93일이 걸렸다는 진기록을 남겼다. 진기(陳紀)는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에, 한융(韓融)은 대홍려(大鴻臚)에 임명되었다. 진기와 한융은 다 당고의 금을 당했던 선비들이었다. 이들은 다 동탁의 포악함이 두려워 마지못해 취임했다.
그러나 신도반(申屠蟠)은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동탁은 끝내 신도반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신도반은 난세에도 불구하고 칠십여 세까지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동탁은 당고인사들과 세상을 등졌던 이름난 선비들을 초빙해 조정의 요직에 임용했으나 평소에 친밀하고 아끼는 측근 인사들은 단지 직계 부대의 장교로서만 봉직하게 했다. 이는 동탁이 조정에 크게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조를 대체하고자 하는 동탁의 야욕이 점차 들어나자, 주비와 오경은 동탁을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진행시켰다. 원소의 말에 의하면 동탁은 유씨의 후손을 더 이상 섬길 필요가 없다는 본색을 들어냈다고 했으니 용인할 수 없었다.
이들은 동탁의 신임을 악용하기로 했다.
동탁에게 건의해 상서(尚書) 한복(韓馥)을 기주자사(冀州刺史),시중(侍中) 유대(劉岱)를 연주자사(兗州刺史),진류(陳留) 인 공주(孔胄)를 예주자사(豫州刺史),동평(東平) 인 장막(張邈)을 진류태수(陳留太守),영천(穎川) 인 장자(張咨)를 남양태수에 임용하게 했다. 이들 중 한복은 영천군 출신으로 원래 원씨 가문의 문생고리 출신이었고, 유대는 동래군 모평현 출신인데 그의 조상이 모평후에 봉해졌었으며 백부 유총(劉寵)이 태위를 지낸 황실 가문 출신이었다. 공주와 장막, 장자 등은 오경, 허유 등과 더불어 소싯적에 다 원소와 막역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주비와 오경은 원소가 벼슬을 버리고 도망한 것을 단순히 구명도생을 위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세를 모아 동탁에게 반기를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원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재들만 골라 경사와 가까운 지역의 지방관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이부상서 주비의 수하에서 주비, 오경 등과 의논하며 인사를 실무적으로 처리한 사람이 상서랑(尙書郞) 허정(許靖)이었다. 조조에게 ‘치세능신 난세간웅’이란 인물평을 해주었던 허소의 사촌형으로 함께 ‘여남월단평’을 간행했던 사람이었다. 주비와 오경은 주목과 태수로 나가는 한복 등이 원소를 중심으로 결맹해 동탁 토벌군을 일으키면 안에서 내응할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