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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103년8월19일_일요법회_솔성요론 9조, 인도품30장_전성욱교무님설법.hwp
◆ 원기 103년 8월19일 일요법회 <솔성요론 9조, 대종경 인도품 30장>
◆ 설 법 : 전성욱 교무님
◆ 타이핑 : 일반7단 이제선
반갑습니다.
보산님께서는 지금 상주교당에 초청법사로 가셨어요. 낭타원 임명수 교무님이라고 계시는데 우리 교무님을 좋아하셔 가지고 이거저거 막 보내세요. 하도 빚을 많이 져가지고 안 갈 수가 없어가지고, 예~~ 작년부터 오라고 오라고 해가지고 못 간다고 못 간다고 하다가, 결국 져가지고. 거기는 오늘 법인절 기념식을 한데요. 법인절 설법을 해주시라고 하셔서 가셨습니다.
지난주는 저희가 교당 직원연수를 5일동안 다녀왔습니다. 지리산에. 정기를 좀 받은 거 같으신가요? 얼굴만 시커멓게 탔나요? ^^ 열심히 돌아다녔는데 지리산이 참 좋더라구요. 그래서 지리산의 매력에 푹 빠져서 왔습니다. 기운도 참 좋고,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지리산이 좋다, 지리산이 참 신령스런 산이구나 해서~ 내년에도 아마 지리산에 가지 않을까.. 지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지리산 갈 때 학사 친구들이 교당도 봐주고, 공타원님 밥 사먹으라고 돈도 주시고~ 그래서 잘 다녀왔습니다.
오늘 신명래님께서 강연을 해주셨는데, 연마를 많이 하셨죠? 연마를 많이 하셔가지고, 당신이 했던 생활 속에서 겪었던 원망했던 마음이나 혹은 마음공부를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참 공부심이 있으세요. 안암교당 오신지 이제 얼마 안 되셨지만. 얼마나 되셨죠? 일년 조금 넘으셨나요? 훈련 벌써 2번 나셨어요? 횟수로 3년이예요? 아.. 얼마 안 되신 것 같은데, 공부심있게 사시는 분이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출가여행 또 가실 꺼예요? 못가요? ^^
자~ 솔성요론 9조 해주셨는데. <무슨 일이든지 잘못된 일이 있고 보면,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를 살필 것이요.> 그랬습니다. 어렵죠, 이거?! 잘 되세요? 가다가 돌부리에 넘어지면 어떻게 하시죠? 돌~ 확!! 저 돌부리가 왜 저기에 있어가지고 나를 넘어뜨렸나.. 그러시죠? 핸드폰 보고 가다가 어깨를 부딪히면 어떻게 하죠? 아~ 내가 잘못해구나, 가 아니고 누가 부딪혔냐고~ 그렇게~ 안 그러세요? 저만 그래요? ^^ 운전하다가 누가 확~! 끼어들면 막 노려보시죠? 운전하시는 분만 아시나? 뭔가 일이 잘 될 때는 괜찮아요. 근데, 뭔가 일이 잘못됐다 그러면 남을 보고 원망해야 맘이 편한 것 같아요. 이게 보통 그러고 사는거 같아요 우리가. 그래서 대종사님께서 그러지 마라~ 나를 살펴라. 나를 살펴라~~.
우리가 공부할 때 흔히들 착각하는 게 있어요. 뭐냐면, 이 공부하는 것이, 이 마음 공부한다, 솔성이니까- 내 성품을 거느린다, 취사를 고른다 하면, 나를 살피라고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스스로 니가 잘못했으니까 너만 봐라, 다른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어, 너를 힘들게 하려고 이거 하는 거야~ 마치 이렇게 착각을 해. 그래가지고 원불교 공부를 하면 힘들다 괴롭다. 왜? 참아야 되니까, 나를 봐야 되니까.
근데 우리가 이 마음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고 하는 것이 결국 누구 좋자고 하는 거죠? 나 좋자고 하는 거잖아요? 부모님들이 자녀를 가르칠 때 너 좋으라고 한다 하잖아요~ 이 말을 너 좋으라고 하잖아요. 그 마음에는 하나 거짓이 없어요. 진실로 그렇게 하잖아요. 그죠? 물론 방법에 있어서는 아니기도 하지만은.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은 결국 내 행복을 위해서,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낙원을 건설하자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가 되어있지 않으면, 이 공부하다가 원망을 해요. 계문을 내놔가지고~ 뭘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게 많아가지고~ 날 괴롭게 하는가. 큰 착각이다. 요거를 놓고. 이 법문도 오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어요. “나만 봐야 돼!” 는거 같아가지고, 나만 괴롭게 하는 거 같아가지고. 원망하지 말라니까. 그러지만은 본래 출발이 나를 골라서 나를 해복하게 하자는 것이고 내 주위를 행복하게 하자는 것이지 괴롭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말씀으로 생각해봅니다.
솔성이면, 솔성요론, 앞에 설명을 해주셨는데, 성품을 거느린다 & 다스린다는 그런 뜻이죠. 내 마음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요. 바르게는 도에 맞게, 또 은혜롭게 하는 방향으로 하는 것이죠. 결국은 그렇게 함으로써, 바르게 은혜롭게 함으로써, 낙원세계를 - 우리 모두의 낙원세계를 건설하자 하는 것이 이 조의 취지입니다.
법문에 보면, <무슨 일이든지~> 라고 시작합니다.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 되고, 필요에 따라서, 내가 기분이 좋으면 나를 보고, 기분이 안 좋으면 남을 보고. 내가 잘하는 것이면 나를 보고, 못하는 것이면 남을 보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1월 첫날은 나를 보고, 그 다음부터는 남을 보고. 이렇게 하는게 아니고. 무슨 일이든지! 어느 때든지! 다 해당이 된다는 말씀이지요. 일 일수도 있고 인관관계 일수도 있고, 좋을 때 나쁠 때 상관없어요, 어느 때든지 무슨 일이든지 일이 잘못된 일이 있고 보면~ 그랬습니다.
자~ 일이 잘못되었다. 요거부터 판단해봐야 해요. 잘못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어떤 게 일이 잘못된 거예요?? 내 기분이 나쁘다 손해를 봤다 그러면 잘못된 일인가요? 보통 그렇죠~~. 그게 잘못된 일이예요. 내가 봤을 때는. 그쵸? 근데 공부인이라면 해(害)만 가지고, 나의 이 해(害)본 거 가지고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시비를 봐야죠. 비(非), 이것은 도에 맞지 않다. 그러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죠. 순리대로 되지 않았다거나 또는 자리이타의 도에 안 맞게 됐다던가, 해가 만들어 졌다든가. 그때 나만 보는 것이 아니고 대중에게 어떤가, 자타도 봐야 해요. 자타 간에 이익을 또는 해를 봐서 그 일의 잘 되고 잘못됨을 봐야죠. 그게 이제 공부인의 판단입니다.
근데 내가 잘못되면 내가 손해를 보면, 일이 잘못된 것이다~ 하기 시작하면 이게 걷잡을 수가 없어요. 전제부터 잘못되어있어 가지고. 잘못된 것이 아닌데도 잘못되었다고 해요. 그쵸? 내가 손해를 보면 잘못됐다. 그러면 이제 처음부터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다 그냥 무조건 원망이예요, 그 다음 부터는.
그래서 이해를 따질 때는 자리이타가 되었는가 따져서, 나만 손해를 봤으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대중에 해가 없는가. 나는 잘됐어, 근데 대중에게 해가 있어. 호명님만 잘 되고 여기는 다 망했어. 그러면? 잘된 거예요? 아니죠. 그렇게 안 하자고 우리가 공부를 하고 있는 거잖아요. 다 잘살자고 하는 것인데. 그런데 안 됐으면 ‘아~ 이게 잘못되었구나’ 하고 고치려고 해야 하는데 고칠 생각이 없죠. 그것이 잘못된 거예요 그것이. 그쵸~! 그래서 일이 잘되고 못되고 판단할 때도 반드시 도에 맞는가, 자리이타에 맞는가, 그걸 봐서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실수를 하게 되죠. 실수를.
자 그래서 시비를 따져보고 이해를 따져보니까 이 확실히 잘못된걸 알았어. 그러면 이제 해결을 해야죠. 잘못된 일이 있고 보면, 해결을 해야 하는데 해결 방법이 두 가지가 있죠. 하나는, 남을 원망할 것~. 또 하나는 자기를 살필 것. 자~ 남을 원망하기 vs 자기를 살피기 어떤 걸 많이 하시죠? 원망까지는 안하더라도, 니가 잘못 더 했자나~ 이렇게 하시나요?
이 분석이 필요해요, 분석이. 즉 시비이해 분석이죠. 왜 이것이 잘못되었는가, 자타 간에. 이걸 분석을 잘 못하면 누가 잘못했는지를 모르고 내가 잘못했는데도 원망만 하고 있거나, 다른 사람이 잘못했는데 스스로 자책만 하고 있거나. 연구력이 필요해요. 그래서 시비이해를 분석하는 능력이 있어야 되겠다. 그래야 이것이 어떻게 해결방안을 찾을까~ 보이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시비이해를 잘 분석하고 말을 잘하고 분석을 잘하는 사람은 이 시비이해를 가지고 나를 고치고 상대방을 이익주고 은혜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걸 잘 따져가지고, ‘네가 잘못했잖아~’ 라고 다른 사람을 상처주고 무기로 쓰기도 해요. 흔히들. 이거 크게 잘못된 공부죠. 시비이해를 잘 분석하라는 것은 그걸 통해서 내 행동을 고르고 그리고 주위에 은혜롭게 하자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상처주자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잘못된 이유가 뭔가~, 그 시비이해를 잘 따져봐야 된다. 우리가 교통사고가 나면 6:4 7:3 이렇게 하잖아요? 그렇게 따져봐야겠죠, 따져볼 건 따져봐야 해요. 따져서 원망하고 “니가 잘못했잖아~~” 원망하고 또는 상처를 주자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원망하는 게 아니고 내 잘못은 없는가 살피라는 거죠.
일이나 물적인 관계 속에서의 시비이해는, 사실 그것도 쉽지 않지만, 어느 정도 드러나죠. 그런데 이 인관관계는 어려워요. 누가 원인제공을 했는지 명확하지도 않고, 했더라도 흘러가다 보면 처음에는 이 사람이 먼저 원인제공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애가 더 잘못한 거야. 이렇게 되기도 하죠. 사실 인간관계는 쉽지가 않습니다. 정확하게 따져보기가. 쉽지는 않아요. 그렇지마는 우리가 인간관계 속에 살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다. 시비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눈이 갈수록 커져야 합니다.
그래서 원인을 딱 따져보니까, 내가 더 잘못했구나. 아~ 니가 더 잘못했구나. 이게 나왔어요. 이게 나왔을 때 어떻게 할꺼냐~ 이게 문제죠. 내가 더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죠? 내가 7이고 저쪽이 3이야, 그럼 어떻게 하죠? 내꺼는 최대한 줄이고 상대꺼를 막 부각을 시켜가지고 니가 더 잘못한 것처럼 해야죠! 그래야 맘이 편하잖아요, 잘못했다고 하기 싫잖아요.
하~ 잘못했다고 말하기가 참 어려워요~ 그쵸~. 교당에서도 실수를 하고 보면 하, 잘못했다고 바로 이야기 해버리면 진짜 간단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한번 타이밍을 놓치면 하~~ 언제 이야기 하냐 이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 생각해보면 제가 잘못을 했잖아요, 그때 바로 가서 엄마한테 이야기 하면 좋은데, 근데 못 하겠어~ 그래서 한번 쉬잖아요~ 그러면 언제 이야기할 줄 모르는 거야. 그래서 감춰 놨다 감춰 놨다 나중에 곪아가지고. 이야기를 안했는데 엄마가 알게 되면 난리가 나는 거죠. 잘못했다고 이야기하기가 참 어려워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뭐죠? 우리 공부가? 참회거든요, 참회. 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우리 공부가 참회부터 시작하는 건데 이게 너무 어려워요, 참회하기가. 그래도 참회는 빨리 할수록 좋다. 빨리 할수록. 잘못했으면 바로 가서 이야기를 해버려야 작은 일이 되는데, 나중에 이야기 하면 큰일이 되요. 잘 쓰던 그릇을 내가 혼자 뭐하다 깨먹었어요. 그러면 빨리 이야기를 해야 이것을 새로 사다놓던가 하잖아요. 예를 들어서 밥 해먹을 때 큰 그릇이 있죠, 내가 깨먹었어. 가만히 있었어~ 그냥. 나중에 밥 해먹으려고 찾는데 없어. 그러면 이제 난리 나는 거죠. 일이 틀어지게 되잖아요. 잘못하면 바로바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야기를 해도 빨리 하는게. 이게 습관이예요~ 습관. 바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꽁~하고 있다가 어떻게 이야기해야 되나~ 하고 있다가 하는 사람이 있는데. 빨리 이야기 할수록 좋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서로 간에 누가 잘못했나 누가 잘못했나를 알면 흔히 내 잘못을 감추고 상대방 것을 부각시켜서 ‘어떻게 하면 내가 잘못을 면해볼까’ ‘좀 안 좋은 소리 덜 들을까’ 이렇게 하려고 하기가 쉽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내 것을 감추고 상대방을 막 잘못한 것을 드러내가지고 원망하고, 이렇게 하기가 쉽다. 그러니 그러지 말자.
아까 신명래님도 이야기 하셨지만. 원망하는 것은, 왜 원망하고 그러냐. 다 대접받고 싶고 좋은 소리 듣고 싶잖아요. 다~. 나만 그래요? 누구나 다 그러죠. 그것을 잊어버려요. 그리고 내가 좀 이렇게 안 좋은 일을 당하고 보면 아까도 이야기 하셨죠? 사은의 공물이다. 이것만 알면 쉽게 원망심이 안 나는데 잊어버려요. 잊어버리고 살죠, 우리가. 지금 사는 건 내가 열심히 살고 있는 거잖아요. 이것을 잊어버리면 원망심이 그냥 불쑥불쑥 자동으로 일어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사은의 공물이다> 하는 것만 맘에 딱 품고 살면 원망심이 안 나고 또 나도 곧 사그러들고 참회하고 이렇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일을 해결하려고 보면, 누가 잘 했나 잘못했나가 드러나고 보면, 이제 해결을 해야죠. 그런데 밝히는데 있어서, 아까 법문 있었죠? 인도품 30장인가. 남방의 성성이 법문이 있었죠. 그 법문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성성이가 미련한 거예요? 하~ 미련하네, 욕심이 많구나. 술을 갖다 놓은 사람이 잘못한 거예요? 아~ 술을 갖다놓고 꼬셔가지고 말야. 자, 성성이가 잡혀서 죽게 되는 것은 누구 잘못이 더 클까요? 몇 대 몇? 사람이 잘못했어요~ 성성이가 잘못했어요? 술이 뭔 죄가 있어. 성성이가 잘못한 거예요? 이 법문에서는 성성이의 어리석음 욕심을 경계하신 말씀이죠. 그래서 내가 성성이가 되지 말자. 욕심 부려가지고 한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니까, 그 첫 마음을 잘 잡아라 그 말씀이죠.
그런데 우리가 많은 선택의 순간에 놓입니다.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가 성성이예요. 현대 사회 속에서, 사람이 술을 가져다 놓듯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잘못하게 만들어요. 도박하고 술하고. 이런 것들이 다 뭐예요? 유혹하는 거거든요~ 한번만 해 봐. 한번 하면? 한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고. 보이스 피싱에 왜 걸리죠? 첫째, 어리석어서 걸리죠. 둘째, 욕심이 있어서 걸립니다. 욕심이 있어서. 어리석으면 다 걸립니다~. 어리석으면 뭐 상대가 어찌 됐든 상관없어요. 어리석으면 다 걸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리석지 않아야 해요. 그리고 욕심이 있으면, 우리 성성이처럼 욕심이 있으면 탁 걸리게 되죠. 그래서 여기서 보면 사실은 성성이가 안 하면 안 잡히는 거였는데 먹으니까 잡힌 거잖아요. 그니까 모든 걸 성성이가 잘못한 것으로 몰아가게 되죠. 우리도 그런 거 있죠, 사실은. 현대사회를 보면 내가 안 그러려고 해도 강하게 와서 잘못하는 일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원인을 사실 잘 따져봐야 되요. 어떤 게 더 원인인가. 우리가 술은 갖다놓은 사람은 아닌가.
제가 옛날에 어른을 모시고 휴게소에 들른 적이 있어요. 식당에 밥을 먹으로 들어갔어요. 밥을 딱 먹고 나왔어요. 나왔는데 잠깐 물 마신 사이에 어디 가셨는지 안 보여요. 그래서 같이 일행이 있었거든요. 막 찾다가 하도 안 보여서 어디가셨나 어디가셨나 하다가, 같이 가셨던 분이 화장실 가셨다고. 그래가지고 아 화장실 가셨나보다. 아 그러면 - 한명 화장실 앞에 두고 - 화장실 나오시면 같이 차로 오시라~ 하고 저는 차로 왔어요.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시네.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셔요. 그러더니 전화가 왔어요~ “차 어딨냐, 도대체 차 어딨냐” 고. “아이고~ 못 만나셨냐” 고~. “뭘 만나길 뭘 만나. 못 만났다.” 그리고 차를 왜 여기다 댔냐고 막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제. 차 위치를 알려드리고 와서 탔어요. 제가 어떻게 됐죠? 혼났죠 이제. 혼났어요. 제가 잘못한 거 백이죠? 백 아니예요? 아니 차가 어딨는지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지, “차가 여기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으면 안 그랬겠죠? 그래서 혼났어요. 처음에는 수용이 안 되더라고 이게. 아니 같이 밥 먹고 갑자기 사라지셔가지고 아무리해도 안 보이니까. 그래서 사람까지 붙여놨는데 그것이 묘하게 비켜가 가지고. 이게 묘~하더라구요, 일이 잘못되려면. 그런데 그때 나를 볼 수 있냐~ 저도 탁! ‘왜 갑자기 사라지셔가지고 우리한테 말도 없이 사라지셔가지고.’ 그런 마음이 처음에는 났어요. ‘왜 말을 하고 가셔야지~’. 근데 이제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처음에 그냥 “차 여기 있습니다” 말씀드렸어도 이게 문제가 안 되는데. 이걸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면 어떻게 되요? 내 잘못한 것은 생각이 안 나고 그 어른이 잘못했다고만 생각이 나는 거예요. 왜~~ 혼자 가셨냐고 말도 없이.
뭔가 잘못되고 보면 내 잘못은 잘 안 보이고 상대방의 잘못만 보여 가지고 해결은 안 되고 원망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원인 제공을 누가 했냐? 혹은 누가 큰 잘못을 했냐? 그것도 중요하지마는 그 안에서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가, 그걸 살피자. 그게 공부인의 자세다. 그래서 내가 미리 이야기 안 한 것 그것이 잘못이죠. 그래서 항상 ‘아~ 어디가나 먼저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하는 것이고. 또 그러면 그 어른의 잘못은 전혀 없냐? 그렇지 않죠. 중간에 이야기를 하고 갔으면 문제가 없잖아요. 예. 내가 그 입장이 되었을 때 나는 말을 하고 가고 또는 미리 전화를 해 볼 수도 있고. 그래서 내가 이쪽 입장도 돼 보고 저쪽 입장도 돼 봐서 내 취사를 고르는데 방향을 잡는 것이 공부인의 자세라는 거죠. “니가 잘못했네 못했네~” 해서 “왜 그렇게 했냐?” 가지고 상처주려고 하고 따져가지고 내가 이랬다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시비판단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어떻게 취사를 골라 갈 것인가, 그 방향으로 잡아야 공부인의 자세지, 그러지 않고 시비 따져가지고 다른 사람 상처주려고 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어디가든 원망이고 어디가나 화합이 아닌 분열이고 싸움이 되고 다툼이 되고 그렇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자기를 살펴라~
자기를 살피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참회죠, 참회.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가.. 살펴서 “잘못했습니다~”. 우리 참회하는 공부를 자칫 잘못하면 자책하는 공부로 바꿔가지고 스스로를 막 생채기 내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거 공부 아닙니다. 참회는 나를 생채기 내라는 게 아니예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 못난 놈!” 해가지고 나를 막 이렇게 하는 게 아니예요. 너는 그런 놈이야.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야 하고 상처주고 스스로 자책해서 나를 아프게 하자는 게 아니예요. 참회는. 진실로 참회를 하면 내가 오히려 힐링이 되는 거예요. 내가 깨끗해지는 거예요. 내가 새로 태어나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만 되는 게 아니고 상대방도 풀어주는 거예요. 그 마음을. 참회를 혼자 막 자책하고 해가지고. 또 말도 안해요, 잘못했다고 이야기도 안 해. 스스로만 막 하고 있어요. 해결이 안 되고 나만 상처주고 있는 거죠. 그런 참회가 아닙니다. 너 참회해! 하면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 참회가 아니죠.
자기를 살피라는 것은 먼저 나의 잘못이 없는가 봐서 참회를 해라. 그리고 내가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게 좋았을까. 앞으로 어떻게 할까. 본래 마음에 바탕해서, 감정이나 욕심아나 습관이나 업력에 끌려서 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 마음으로 바라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보산님께서는 “상시일기만 잘 써도 이 솔성공부에 족하다.” 이 이야기를 하셨는데. 왜 일기를 쓰냐? 아까 말씀드렸지만, 바로 일기를 안 쓰면 갈수록 포장이 되고 내 잘못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 잘못만 드러나고. 이렇게 되요. 시비를 가려 놨던 것이 나를 숨기고 다른 사람 잘못만 드러내는 것으로 갈수록 변한다는 거죠. 그래서 그때 바로 써 놔 버려야 시비가 분명히 드러나고 원망이 아니라 스스로 참회하고 내 취사를 고르게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지. 오래오래 묵혀두면 내 잘못은 눈 녹듯 사라지고 다른 사람 원망할 것만 그대로 남아있어 가지고 두고두고 원망을 한다는 거죠. 그래서 그때그때 처리를 해야 합니다.
자기를 살피는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요. 보산님께서 예전에 설교하실 때 예를 들으셨더라구요. 우리 교도님 중에 헌배를 하니까 막 원망하는 마음이 나가지고 어떻게 할지를 모르다가 헌배를 했데요. 헌배를 천배를 딱 하고 나니까 그 위의 직장 상사가 되게 밉고 다 잘못한 거 같았는데 헌배를 딱 하고 나니까 미안한 마음이 나고 ‘아~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생각이 났다는 거예요. 이 원망했던 마음에서 아 내가 잘못했구나 미안하구나 하는 마음이 났을 때 내가 잘못한 걸로 바뀐 거죠? 그러면 내가 불행해졌을까요? 나는 후련해지고 기분이 좋아지죠. 깨끗해지고. 저도 이런 경험을 했거든요, 간사 때. 아이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안 했어 내가. 그런데 너무 억울한 거예요. 억울해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에라이~ 이층에 올라가가지고 막 절을 했어요. 몇 배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한 삼사백배 했나. 땀이 막 나고. 이상하네~ 원망심이 갈수록 없어지더라고요.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다가 다 놔지고 내가 잘못한 것만 쏙! 올라오더라고. ‘아~ 내가 이거 잘못했구나!’ 하고 내려가서 교무님께 “죄송합니다~” 하고 절을 하고. “하 제가 이걸 잘못했네요~” 한 적이 있어요. 시비를 잘 따져가지고 담에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해야지 생각으로 하는 것도 좋지만 탁 비워놔 버리면 이게 시비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또 내가 할 방향도 그 안에서 드러나기도 하더라구요. 잘못하면 헌배를 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긴 했는데. 비움을 통해서 시비가 분명해지고 또 내 솔성이 골라지기도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참회 하고 비우고, 이것이 나를 살리는데 아주 좋다~ 그런 생각을 해보구요.
우리가 시비판단 해가지고 7대 3이네~ 3대 7이네~ 막 이렇게 결론이 났으면. 일이 잘 못된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잘못이 안 되게 하는 방법이 있어요. 뭘까요? 상대방이 7이고 잘못했고 원인제공도 다 했어요. 내가 3이예요. 잘못이 조금 있긴 있어요. 그러면 이것을 처음부터 이 사고가 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요? 7과 3이 만났으니까 10이 돼서 사고가 된 거죠? 내가 3을 안 해버리면 사고가 안 나요. 뭔 말이여~ 그게~, 도대체. 자! 자동차 사고가 나면 이렇게 비율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내가 3을 안했으면 사고가 안 난다고. 누가 확~! 끼어들었지만 내가 방어운전을 하고 주의심을 가지고 있었으면 탁! 순간적으로 반응을 해서 사고를 제공을 안 해서 사고가 안 날수 있다고요. 근데 아~ 휴가 가니까 좋다~ 이러면서 밖을 막 쳐다보면서 가다가 갑자기 끼어드니까 으! 하고 받았어요. 내가 3을 제공한 거죠.
인간관계도 그래요. 내가 3을 제공하지 않으면 10이 안 되서 사고가 안 납니다. 때로는 내가 7이기도 하지만. 그럴 때는 더 그러겠지요. 내가 3을 제공하지 않으면 10이 되지 않아서 사고가 안 나요. 잘못된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거죠.
내가 상대방의 비(非)를, 갑자기 상대가 끼어드는 것을 내가 막을 수가 있어요? 야~ 끼어 들지마~ 끼어 들지마~ 하면서 갈 수 있어요? 못 하잖아요? 외부에서 주어진 환경은 내가 막을 수 없어요. 다른 사람의 기분을 지금 내가 맨날 신경쓰면서 바꿔줄 수가 없어요. 어떻게 올지 모르잖아요. 사고 안 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나를 ‘0’으로 만들면 되요. 영. 이게 뭐죠? 중생이 가지고 있는 삶을 놓자는 거예요. 부처님이 뺨 싸다귀를 탁~ 맞으면 왜 때렸어? 하고 달려드실까요? 우리는 그러잖아요. 그러면 싸움이 나기 시작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내가 영이 됐어요, 부처님처럼 영이 됐어요. 그러면 뺨을 맞아도 오히려 그 사람이 미안해지게 되요. 때린 놈이 미안하게 되요. 그리고 오히려 은혜를 만들어요. 그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고 좋은 관계로 만들어 버려요. 그런데 우리는 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주기만 하면 그걸로 딱 붙여가지고 힘을 만들어서 싸움을 하는 거죠.
우리가 솔성을 하자는 것. 솔성을 하자~ 우리의 성품을 그대로 발현시키고 바른 취사를 하자~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욕심 감정 업력 습관 이런 것을 하나하나 비워내고 녹여내서, 내가 잘못할 수도 있지만 내가 잘못한 게 별로 없어도 내가 솔성의 도를 잘 닦아서 나를 닦아내고 보면 사고를 안 나게 할 수 있다. 오히려 안 좋은 상황을 은혜롭게 만들 수도 있구나.
그래서 잘못되고 보면 막 원망하고 니가 잘못했네 따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가. 이 잘못된 일에 내가 관여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고를 것은 무언가.. 그것이 공부인의 자세고, 그렇게 할 때 영원히 사고가 안 나게 하는 방법으로 갈 수 있다 이거죠. 내가 미흡한 삶을 해결해야 사고가 안 나는 거예요.
아이고~ 그럼 맨날 나만 참아야 되고 나만 손해 봐야 되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죠? 그게 공부예요. 그렇게 할 때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손해가 아니예요. 내가 불행해 지는 것 같지만 오히려 행복해지는 것이고 나를 상처주는 것 같지만 그게 상처가 아니고. 나를 새롭게 하고 나를 골라지게 하는 길이다. 그래서 부처님처럼 욕심 습관 업력 감정 따라서 사고를 안 내는- 어떤 상황이 와도 내가 영으로 만들어서 오히려 사고가 아닌 잘못된 일이 아닌, 그 은혜로운 방향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그런 공부를 우리가 방향을 잡고 가자. 그래서 뭔 일이든 간에 잘못된 일이 있고 보면 남을 봐가지고 원망하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살펴서 내가 고칠 것은 없는가 보고 또 상대방의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을 내가 한 적은 없는가, 또 앞으로 하지 말아야지~ 하고 스스로 취사를 골라 가는 것이 공부의 자세라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할 때 결국 내가 행복해지고 내 주위를 행복하게 만들어 갈 수 있다. 원망해가지고는 행복은 갈수록 멀어질 것이고, 남만 봐가지고서는 일을 갈수록 해결이 요원해질 것이다. 그래서 나를 살피는 공부를 솔성요론 9조에서 이렇게 하고 계십니다.
혹시 질문 있으시면 하시고. 예~
네. 아~ 그렇게 하면 바보라고 한다구요? 아 가만히 있으면. 예~~ 내가 손해를 보고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알고 밥풀떼기로 안다. 그래요?
자! 우리가 시비를 따지지 말라는 게 아니죠? 시비는 분명하게 알아야 해요, 시비를 모르고 내가 잘못했겠거니 맨날 잘못했겠거니~하면 시비판단은 갈수록 멀어지는 거예요. 그게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시비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까 7대 3이냐 6대 4냐, 이거 분명히 가릴 줄 알아야 되요. 그거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잘못 아시면 안 돼. 그거는 해야 되요. 그래서 누가 어떻게 잘못했고 어떤 잘못이 있는지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어떻게 하죠? 결과가 나오면 우리가 어떻게 해요? “니가 잘못했고만~!!” 하고 막. 이야기는 해 줘야죠~. 내가 이런 것은 잘못했는데 너도 이런 것은 잘못됐더라. 이렇게 이야기 하세요? 아니죠? 감정을 가득~ 실어가지고 최대한 아프게. 야! 니가 이말 들으면서 아파야 돼. 니가 잘못했으니까. 나도 아프니까 너도 아파야지!! 그러면서 막 최대한 아프게, 아픈 말을 찾아가지고 찌르죠. 그렇게 하지 말자는 거죠. 그리고 시비가 나왔다고 해서 원망하지 말고. 시비판단은 분명히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는 사람은 연구력이 없는 사람이예요. 대종사님 공부 그거 아닙니다. 분명히 알아야 돼요. 잘못이 있으면, 억울한 일이 있으면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런데 원망심으로 너~ 상처받아라 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하게 판단해야 된다. 이걸 안하면 다른 사람 일 못해도 못해요.
예.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타이핑 공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