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洪儒)는 처음 이름이 홍술(洪術)로, 의성부(義城府 :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사람이다. 궁예 말년에 같은 기장(騎將)인 배현경(裴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과 함께 은밀히 계략을 꾸민 다음, 밤에 태조의 집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삼한(三韓)이 분열된 이후 도적의 무리가 다투어 봉기하자, 지금의 왕(궁예)이 용맹을 떨쳐 크게 호령하여 마침내 초적(草寇)을 평정하고 세 지역으로 나누어진 나라 땅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습니다.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한지도 스물 네 해 남짓 지났으나, 이제 끝을 잘 마무리하지 못하고 잔학한 짓을 너무 제멋대로 하며 형벌을 부당하게 행하여 아내와 아들을 살육하고 신료를 죽여 씨를 말리고 있습니다. 백성은 도탄에 빠져 그를 원수같이 미워하니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은나라의 주왕(紂王)의 악정도 이보다 더하지 않았습니다. 포악한 왕을 내몰고 현명한 왕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바라건대 공께서는 은나라와 주나라의 옛 일을 실행하소서.”
태조가 안색을 바꾸며 거절하였다.
“내가 스스로를 충의롭다고 자부하고 있는 터에, 왕이 비록 포악하기로서니 어찌 배반하는 마음을 가지겠소? 신하가 군주를 치는 것을 혁명이라 이르는데, 나는 진실로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은나라 탕왕(湯王)과 주나라 무왕(武王)의 옛 일을 본받겠소? 뒷사람들이 이 일을 구실로 삼을까 두렵소. 옛 사람이 ‘하루라도 군주로 삼았으면 죽을 때까지 주군으로 섬긴다.’고 하였고, 더욱이 연릉계자(延陵季子)는 ‘나라를 차지함은 나의 절조가 아니다.’라 하며 이내 떠나서 농사를 지었다고 하였으니, 내가 어찌 연릉계자의 절조를 간과하리오?”
홍유 등이 다시 요청했다.
“때는 만나기 어려우나 잃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데도 받지 않는다면 도리어 하늘의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 악정의 해독을 입은 나라 안 백성들은 밤낮으로 복수하고자 생각하고 있으며, 게다가 권세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여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 덕망으로는 공과 견줄 사람이 없으니,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의 뜻이 공에게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공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더구나 왕창근(王昌瑾)의 거울에 나타난 글이 저러한데 어찌 하늘의 뜻을 어기고 포악한 왕[獨夫]의 손에 죽겠습니까?”
이리하여 여러 장수들이 옹위하고 나와 새벽녘에 노적가리 위에 앉히고서 군신의 예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며, “왕공께서 의로운 깃발을 들어 올리셨다!”고 크게 외치게 하였다. 궁예가 이 소식을 듣고 놀라 도망 가버렸다.
태조가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자신을 추대한 공신들을 책봉하였다.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을 모두 일등공신으로 삼아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수놓은 비단 옷 및 화려한 이부자리, 무늬가 있는 얇은 비단과 포백(布帛)을 내려주었다. 태조가 청주(靑州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반란이 일어날까 우려하여, 홍유와 유금필(庾黔弼)을 시켜 군사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진주(鎭州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에 주둔하여 이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청주는 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 공으로 홍유는 대상(大相)으로 승진하였다.
태조 2년(919)에 오산성(烏山城)을 예산현(禮山縣 :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고치고, 홍유와 대상 애선(哀宣)을 보내어 유민 5백여 호를 정착시켰다. 19년(936)에는 태조를 따라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으며, 죽은 뒤에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