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5:1-35
찬송가 415장 ‘십자가 그늘 아래’
인간은 본래 범죄를 물 마심 같이 한다(1-16절)
욥기 4장에서 27장에 이르기까지 욥과 그의 친구들간의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구조를 보면, 마지막에 소발의 변론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빼면 대략적으로 욥과 세친구들이 세번씩 갑론을박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욥과 엘리바스의 두번째 논쟁에 해당합니다. 엘리바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이가 많고 신앙의 연륜이 충분하며 신학적 지식도 풍성한 사람입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나이는 장로와 권사와 비슷하며 신학적으로는 교수와 목사에 준하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바스의 발언들을 보면, 스스로 지혜있다 여기며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이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보고 있는지, 또한 이웃의 아픔을 어떻게 해석하길 좋아하는 지, 더 나아가 얼마나 완악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가늠해볼 수 있게 합니다. 엘리바스의 이러한 특성을 잘 생각하면서 그의 변론을 살펴보면 그의 관점과 해석이 더 잘 이해될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많은 자문거리들을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욥과 첫 번째 논쟁을 하던 당시 엘리바스는 인과응보라는 일반적 원리에 입각해 욥의 상황을 해석하고 그에 따라 욥이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 지에 대해 권면하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엘리바스는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 즉 인간의 존재가 보편적으로 부패하기 쉽다는 것과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인과응보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에 입각해 욥의 잘못을 우회적으로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15장에서 시작되는 그의 두 번째 논쟁에서는 첫 번째 논쟁과 내용적으로는 동일하나 더 강하고 노골적이며 단호하게 욥을 책망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논쟁에서 엘리바스의 말에 대해 욥은 그의 말을 수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강한 어조로 반박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뒤를 이어 논쟁에 참가한 빌닷과 소발의 논쟁에서도 욥은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나 두 번째 논쟁을 시작한 엘리바스는 욥에 대한 격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본문 1절에서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를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자면, ‘그리고 즉시 엘리바스가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가 됩니다. 인과응보의 세계에 갇혀 살았던 엘리바스의 입장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욥의 모습은 더이상 용납하기 어려운 불경건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4)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연륜이 많은 엘리바스는 두가지 대척점을 제시하며 욥과 논쟁하는데 그것은 지혜와 무지입니다. 즉 지금까지 욥의 반박들은 지혜와 유익이 없는 것들이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에 대해 모르니 하나님 앞에 그렇게나 자신있게 결백을 주장한다고 질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나이도 많고 신앙생활도 오래했던 자신의 말을 좀 들으라고 야단칩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엘리바스의 질책들도 이러한 관점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8-10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주장하는 욥에게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엿듣기라도 했느냐? 하나님의 지혜를 독점했느냐?’라고 질책합니다. 즉 욥의 대답이 과연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말이 맞느냐라고 반문하며 결코 동의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욥이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주장해봤자 엘리바스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엘리바스는 욥이 호소하는 고난과 고통에 대해 자신은 이미 이해하고 있으며 욥의 불경건한 생각까지 다 꿰뚫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웃의 아픔을 다 이해한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의 생각과 마음을 우리는 다 꿰뚫어보고 있습니까? 그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15장 전반에 드러나는 엘리바스의 언행들을 보면 연륜과 지혜를 앞세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욥의 고난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16)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엘리바스는 고난 당하는 욥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한 죄인인지를 교훈합니다. 그는 ‘악을 저지르는 것을 물마심 같이’ 한다고 표현하며 인간의 본능은 끊임 없이 죄악의 갈증에 노출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인간은 죄 짓기를 좋아하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범죄를 시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욥이 바로 그러한 위치에 있음을 에둘러 지적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의 비극적 결말(17-35절)
계속해서 엘리바스는 악인의 비참한 결말이 무엇인지에 대해 서술합니다.
(20-23)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 그의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고 그가 평안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이르리니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이 숨어서 기다리느니라 그는 헤매며 음식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의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환난과 역경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라
엘리바스는 점점 닥쳐 오는 강하고 파괴적인 세력에 의해 악인은 홀연히 파멸을 당할 것임을 이야기 합니다. 악을 행하면 복을 누리는게 아니라라, 비참하고 참혹한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인에 대한 엘리바스의 주장은 원론적인 면에서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인이어서 형벌을 받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 연단을 받는 의인인지를,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은 시공에 제한되어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다.
욥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욥은 지금 어떤 특정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그 결과만 가지고 욥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엘리바스의 인과응보식 반복된 주장은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욥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입니다. ‘의인은 구원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보편적 진리가 그 본래의 의미를 충실하게 나타내 보이지 못하고 자신의 빈약한 논리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될 때, 그 진리는 왜곡되고 남용될 수 있음을 우리는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31-35) 그가 스스로 속아 허무한 것을 믿지 아니할 것은 허무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즉 그의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포도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경건하지 못한 무리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그들은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으며 그들의 뱃속에 속임을 준비하느니라
마지막 35절까지 이어진 엘리바스의 두 번째 논쟁은 4장과 5장에서 등장한 첫 번째 논쟁의 기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주장이 첫 번째 논쟁 때 보다 강한 어조를 띄고 있다는 것 입니다. 즉 엘리바스는 두 차례의 논쟁에서 모두 기계적 인과응보론에 근거하여 욥의 고난이 그의 죄의 결과임을 강조 했었습니다. 첫 번째 논쟁에서는 비교적 부드러운 어조로 고난의 원인이 욥의 죄에 있으므로 회개 하라고 촉구했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논쟁에서는 강한 어조로 악인의 비참한 생애와 종말을 강조함으로써 친구들의 충고를 거절하고 자기의 의를 거듭 주장하는 욥의 행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행위이며 결국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아파서 누워 있을 때, 어떤 교우님이 찾아와서 “목사님. 왜 이렇게 체력이 약하세요. 약 챙겨먹고 운동 많이 하세요.”라고 말만하고 돌아갔다면 그것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목사님이 이렇게 아프신 것은 목사님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하신 겁니다. 얼른 회개하세요.”라고 한다면 그 말이 저에게 더 큰 고통이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님들. 저는 이 세상이! 바르고 옳은 말보다 사랑과 친절의 언어 때문에 아름답게 변화되어 왔다고 믿습니다. 한 사람을 향한 아주 독특하고 구별된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을 텐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무시한 채, 옳다는 이유로 정의롭다는 이유로!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가슴을 도려내는 훈계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 이해하고 다 공감해줄 수는 없지만, 그저 옆에서 함께 있어주면서 같이 울어주고 손잡아주는 것이 천 마디 정의로운 말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주장을 내려놓고, 고난 속에 있는 이웃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고 기다릴 줄 아는 참된 하나님의 위로자! 꼭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져가는 저와 100주년기념교회 교우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 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평탄하지만은 않은 우리의 삶에 찾아와 주시고, 눈에 비늘같은 것을 벗겨내사 주님을 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욥과 같은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간절히 주님을 찾으며 인내할 힘을 주시고, 고난을 당하는 이웃을 발견한다면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처럼 그들과 함께 아픔을 나눌 줄아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나를 위해 맞춤형으로 인도하시고 감사의 제목이 넘쳐나는 인생을 살게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인과응보의 진리를 맹신한 엘리바스처럼 내가 맹신했던 종교적 요소는 무엇이 있습니까?
2.내가 만약 욥과 같은 형편에 처했을 때 누구로 부터 큰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없다면 어떤 위로나 도움을 받길 원하십니까?
3.욥기는 반복해서 법과 정의의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주님의 사랑으로 이웃과 교우를 품는 참된 위로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김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