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4후퇴
겨울이 깊어지자 현역 다음으로 고령자 제2국민병 1.5개 중대 정도가 시흥군청 뒷마당에 모여 점호를 하고, 새아버지도 남으로 먼저 내려갔다. 급식용 일종을 빼돌려 많은 국민병이 아사로 병사하자 청치적 문제로 크게 번져 책임자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제2국민병 사건은 전쟁중 부패로 생긴 큰 사건에 하나였다.
태평방직 비산동 연립사택에 국군 요양부대(추럭2대 찦차1대)가 들어왔다. 우리집에서는 친절히 거들었다. 모친은 당시 큰 재산인 재봉틀과 새 옷을 사택 지하실 반공호에 넣고 흙으로 봉인하고 피난준비를 하였다. 이후 지하실에 숨긴 재봉틀 옷등 재산은 피난후 주변할머니의 먹이 감이 되었다.
서울서대문구 옥천동 외가에서 할머니와 외삼춘 4녀가 한강을 건너, 걸어서 우리집으로 왔다. 새우잠으로 1박후 남으로 후퇴하는 요양부대 트럭에 매달려 태워달라고 애걸하여 한 대는 모친과 나와 이모둘이 충남옥천으로 가고, 외조모 외삼춘 이모 둘은 대전에 떨어 졌다
. 안양역내 에서는 탄약열차가 고장으로 지붕위 피난민을 내려서 도보로 가게 권하였다. 내리게 할려고 거짓말하는 줄 알고 일부 타고있던 피난민은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중학교 다닐 때 까지 열차잔해로 한동안 열차 바뀌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강원도 평창등에서 화가박수근 가족들은 군가족이라 군용차로 안양에 피난와서 세멘트 바닥위에 가마니를 깔고 있다가, 아는 집 움막에서 며칠을 앉아서 잠을 잤다고 부인의 자서전에 나온다. 피난민은 허가 없이는 지정된 피난지를 떠날 수 없는 규정이 있었다.
당시 옥천은 야간에는 공비들이 내려와 경찰서를 습격하여 초병을 죽이고 항문에 몽둥이 박아 죽였다는 이야기로 공포에 떨었다.
옥천은 산이 많은 금강 상류로 풍광 있는 소읍으로 육영숙여사 친정 육관수 큰 한옥을 가 보기도 하였다. 정원과 툇마루의 정취가 지금도 선하다.
경찰들 하고 남강에 꽝(병에 모래를 넣고 폭약을 넣고 심지에 연결하고 불을 부쳐 물에 던지는 무기)으로 물고기 잡아 천렵한 기역이 난다. 밥과 소금물만 먹다 내가 앞을 못보자 옆집에서 개울에 사는 물고기를 잡아 끌여 먹으라고 하여, 송사리를 잡아 끌여 먹으니 며칠후 앞을 보았다. 당시 술이 부족하여 메칠알콜로 술을 만들어 먹다 실명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들었다.
첫댓글 누구 얘긴가?
고생 많이 했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