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13살, 둘째 9살, 막내 7살, 그러다 보니 이렇게 열심히 놀이터에 나온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이젠 같이 놀아주기보다는 그저 안전지킴이 역할에 그치지만, 이조차도 아직 몇 년은 더 해야 할 듯하다. 지난 주말에도 만 보 넘게 걸으며 어디론가 부지런히 다니는 중 동네 언니에게서 온 연락, 집에서 책보며 졸고 있단다. 언니네는 둘째가 6학년이라 나갈 일도 별로 없다며 애들 어릴 때 많이 다녀주란다. 나는 언니가 부럽기만 한데.
평일엔 동네 곳곳 놀이터를, 주말에는 좀 멀리 있는 남의 동네 놀이터나 공원까지 진출한다. 제주에는 저자인 편해문 선생이 조성한 ‘순천 기적의 놀이터’ 같은 특색 있는 놀이터가 별로 없지만, 바다 풍경 놀이터나 비행기 이착륙을 볼 수 있는 놀이터, 여러 미로공원까지 찾아보면 가볼 만한 곳들이 있다. 물론 내 눈엔 고만고만한 놀이터 같은데, 미끄럼틀 모양, 그네 등 구조물의 작은 차이에도 아이들은 노는 맛이 다른지, 놀이터만 보이면 무조건 달려간다.
주말엔 늘 어디론가 나가는 것이 일상인 우리 집, 귀찮고 힘에 부칠 때도 많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서는 건, 그렇게 다리가 아프게 놀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 이따 105동 놀이터에서 조금만 더 놀면 안돼?” 하며 뽕을 뽑아(?) 놀려고 하는 아이들 때문이다. 그렇게 놀아도 아직 덜 논 것이다. 마지못해 10~20분 좀 더 놀게 허락해 주고 나면 아이들은 신난 얼굴로 “엄마, 오늘도 정말 즐거운 하루였어” 하며 행복해한다. 나가기 귀찮다던 첫째도 “집에만 있었으면 핸드폰이나 보고 그랬을 텐데 나오길 잘했어.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인생샷도 찍고 말이야.” 한다. 아이들의 이런 얘기를 들을 때면 마치 열심히 기획한 교육에 만족한 참가자를 보듯 씨익 웃음이 지어진다.
맛난 요리를 먹는 아이들 모습에 엄마들은 배가 부르다는데, 나는 잘 먹는 모습도 좋지만 잘 노는 모습에 더 배가 부르다. 그래서 요리 식단표 짜는 것보다 놀이밥 식단표 짜는데 더 진심이다. 바다로, 숲으로, 올레길로, 도서관으로, 만들기 체험으로, 같은 반찬도 연달아 먹으면 맛이 없듯, 갔던 곳은 연달아 가지 않으려는 편이다. 편식하지 않게 놀이밥을 챙겨주려 고심한다. 이 책의 제목처럼,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집에서는 층간소음을 고려해 가급적 정적인 놀이를 하게 되는데, 사다리 게임 (주사위로 100칸 가기), 같은 카드 찾기, 스택 버거(버거 재료 카드를 뒤집어 놓고 위치와 순서 기억해 제시된 버거 만드는 게임), 루미큐브 (1~13 숫자가 적힌 4색 큐브를 18개씩 나눠 가진 뒤, 같거나 연속 숫자 셋 이상을 조합해서 가진 큐브를 빨리 내려놓는 게임) 등 코로나 시기에 사다 들인 각종 보드게임을 돌아가며 한다. 지겨우면 오목이나 알까기를 하기도 하고, 가끔 숨바꼭질이나 보물찾기도 하는데, 시시해 보이는데도 그나마 동적인 놀이라 그런지 아주 좋아한다. 가끔 이용하는 비행기나 기차에서도 아이들의 놀이는 계속되어야 하기에 대비하지 않다가는 낭패 당하기 쉽다. 스도쿠, 색종이, 그리기 등 간단하면서도 시간 때울 수 있는 뭔가를 준비하고, 그나마도 없으면 앞좌석 뒤에 꽂힌 여행책을 가지고 페이지 넘겨 사람 많으면 이기는 게임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어디에서든 놀아야 한다.
첫째는 여러 단계 수를 생각해내야 하는 루미큐브를 곧잘 하고, 막내는 뒤집어 같은 카드 찾기 게임은 진작에 나를 따라잡았다. 최근에는 알까기까지 접수해서 검정알 하나로 흰 알 세개를 날려버리는 기술까지 연마했다. 이와 달리 둘째는 승부욕이 강해, 지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운이나 순발력으로 이기는 보드게임보다 개인기로 승부 보는 피아노, 달리기, 구름사다리 같은 개인 종목을 좋아한다.
잘하고 좋아하는 놀이를 보며 나 역시 아이들의 미래를 슬쩍 엿본다.
막내도 하기 쉬워 다같이 자주 했던 사다리 게임은 몇십 년 만에 다시 하면서 참 괜찮은 놀이다 싶었다. 처음에 1등을 하다가도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지 못해 끝내 지기도 하고, 꼴찌 하다가도 운 좋게 찬스카드를 써 1등과 자리를 맞바꾸기도 한다. 그럴 때면 “얘들아 인생도 그래, 처음에 잘 나간다고 우쭐할 필요도, 지금 못한다고 너무 좌절할 필요도 없어. 인생은 마지막까지 살아봐야 돼.”라며 인생에 대한 조언도 흘린다. 그 덕분인지 처음에는 지면 마냥 슬퍼하고 억울해했던 막내도 이번엔 져도 다음 판엔 찬스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웃으며 깨끗이 승복한다. 아이들은 이렇게 즐겁게 놀면서도 인생의 진리를 어깨너머 배운다.
“놀면서 숱하게 지고 이기고,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지 않은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 무언가에 좌절했을 때, 아이들은 어떻게 그것을 넘어설 수 있을까? 놀이는 실패와 좌절을 넘어서는 수많은 상황과 만나게 해주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회복의 힘을 길러 준다. 어떤 놀이든지 놀이가 몸에 푹 익기 전까지 미숙하고 자주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자꾸 해보고 부딪히다 보면 언젠가는 되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놀이는 이런 과정과 경험을 즐겁게 되풀이하게 한다. 이런 놀이 속에서 아이들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앞으로 힘껏 헤쳐 나아갈 수 있는 삶의 기술을 익힌다. 잘 걸으려면 많이 넘어져 봐야 한다. 이처럼 놀면서 몸으로 익힌 용기와 긍정의 힘은 놀이 바깥 세계에서 살아 움직인다.(p.000)” 라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어릴 때 열심히 노느라 책을 많이 읽지 않은 탓에 방학 숙제 독후감은 늘 책 뒤 줄거리 베끼기로 때웠던 내가, 지금 사걱세 기자단 글쓰기를 한다. 물론 부족한 실력 탓에 남들보다 몇 배 많은 시간을 들이고 밤새 쓰느라 고생스러울 때도 있다. 신청하기 전부터 뻔히 보이는 고생길, 그래도 선택했고 어찌어찌 해내고 있다. 할까 말까 고민하는 선택의 순간에 종종 도전을 선택하는 것도 어쩌면 놀면서 익힌 용기 덕분이지 않을까.
지난 주말 제주 시내 놀러 갔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 어느 초등학교 놀이터를 발견하고는 또 아이들이 달려간다. 그 땡볕에 ‘지옥탈출’을 하며 노는 우리 아이들 다리에는 멍 자국이 어찌나 많은지 누가 보면 맞은 줄 알겠지. 이런 내게 또 반가운 문구가 눈에 띈다. “아이들이 작고 자주 다치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크게 다치지 않는다.(p.000)”
아이들이 소소히 상처를 입더라도 크게 다치지 않고 건강히 자랄 수 있기를, 이 세상에는 하기 싫은 일보다 재미있는 일이 훨씬 많다고 느끼기를,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될 어떤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툴툴 털고 일어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는 오늘도 열심히 골고루 챙겨 먹일 놀이밥 식단을 짠다. 이번 주말엔 또 어디가서 뭐하고 놀지?
오랜만에 늦은 시간 진한 커피 마시고는 잠 안와서 빈둥대다 미뤄둔 숙제나 해 봅니다. ^^;;
그나저나 페이지 기재를 못했는데, 누가 좀 도와주세요~^^;;;;
첫댓글 "맛난 요리를 먹는 아이들 모습에 엄마들은 배가 부르다는데, 나는 잘 먹는 모습도 좋지만 잘 노는 모습에 더 배가 부르다. 그래서 요리 식단표 짜는 것보다 놀이밥 식단표 짜는데 더 진심이다." 이 문장 첨가하시니 제목과 연결도 잘되네요. 잘 노는 모습에 배가 부르다는 표현도 공감이 갑니다.
"할까 말까 고민하는 선택의 순간에 종종 도전을 선택하는 것도 어쩌면 놀면서 익힌 용기 덕분이지 않을까." 이 문장도 좋아요.
퇴고를 거치며 선생님이 생각하는 놀이의 효용이 구체적으로 잘 드러난 글이 되었습니다. 확실히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이번 달 글 짝궁인데 피드백이 늦어서 죄송해요. 다음 글은 바로 댓글 쓸게요.
미소샘^^;; 여전히 부족한게 많을텐데 나아진 부분만 의견 주신 것 같아요..담엔 아님 지금이라도 편히 개선 의견 주셔도 되세요^^
그리고 짝궁인데 저도 지난번 합평으로 퉁쳐서 죄송해요. 무엇보다 이번 샘글은 너무 완벽하였기에 저는 이래도 되지 않나 혼자 생각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