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11 편
조절자와 혼
. 오르본톤의 한 단독 메신저
. 1934년
111:0.1 모론시아 혼은 우주의 아이이며, 오직 우주 통찰력과 영적인 발견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혼, 그리고 안에 깃드는 영이 있다는 개념은 유란시아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서양의 믿음 뿐 아니라 동양의 많은 믿음이 사람이 인간적 재산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신성한 유산을 가졌음을 깨달았다. 신이 바깥에 두루 계실 뿐 아니라 마음속에 계시다는 느낌은 오랫동안 많은 유란시아 종교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신의 영이 사람의 진화하는 혼을 낳았다는 것을 사람이 깨닫기 전에, 혼은 몸의 다른 기관―눈ㆍ간ㆍ콩팥ㆍ심장, 그리고 나중에는 골―에 거한다고 생각되었다.
아트만 개념인 힌두교 선생들은 조절자의 성품과 계심을 이해했지만, 진화하는 불멸의 혼이 함께 존재함을 구별하지 못했다. 중국인은 양(陽)과 음(陰), 혼과 영을 인식하였다. 에집트인과 여러 아프리카 부족도 카(영)와 바(혼)를 믿었다.
나일 강 유역의 거주자들은 은총을 얻은 각 사람은, 태어날 때 보호하는 영을 수여받는다고 믿었고, 이것을 카라고 불렀다. 룩소에 있는 한 신전의 벽에는 아멘호텝 3세의 출생이 그려져 있는데, 그 어린 왕자가 나일강 신의 팔 위에 그려져 있고, 그 가까이 왕자와 모습과 똑같은 또 다른 아이가 있는데, 그것은 카라고 부른 그 개체의 상징이다. 이 조각은 기원전 15세기에 완성되었다.
111:0.6 카는 관계된 필사자의 혼을 현세의 인생에서 더 나은 길로 안내하는데, 특별히 다음 세상에서 그 인간 주체의 행운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하는 우수한 천재 영이라고 생각되었다.
진화하는 유란시아 필사자의 민족들은 모두 혼 개념에 해당하는 낱말을 가졌다. 많은 원시 민족은 혼이 인간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고 믿었다. 릭 베다는 “나의 지성(mind)이 나의 마음(heart)에 말한다.” 고 말했다.
1. 지성의 선택 무대
111:1.1 조절자가 하는 일은 비록 영적 성질을 가졌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지적 기초 위에 일을 해야 한다. 지성은 인간의 토양이요, 그로부터 영 훈계자는 그가 깃드는 성격자의 협조를 얻어서 모론시아 혼을 진화시켜야 한다.
온 우주의 몇 가지 지성 수준에는 우주의 통일성이 있다. 영이 물질 지성을 지배하는 것은 두 가지 체험에 제약을 받는다. 이 지성이 일곱 보조 지성 영의 봉사를 통해서 진화했어야 하고, 물질 (성격) 자아는 모론시아 자아, 즉 혼을 창조하고 육성하는 데, 깃드는 조절자와 협동하기를 선택해야 한다.
물질 지성은, 성격자가 살고 자의식하며, 결정을 내리고 하나님을 택하거나 버리며, 스스로를 영원하게 만들거나 죽이는 무대이다.
물질적 진화는 너에게 살아 있는 기계, 너의 몸을 마련해 주었다. 아버지 스스로 우주에서 알려진 가장 순수한 영 실체, 너의 생각 조절자를 너에게 부여하셨다. 그러나 네 손 안에, 너 자신의 결정에 지배되는 지성이 수여되었으며, 지성으로 너는 살거나 죽는다. 이 지성 안에서, 너는 이 지성을 가지고 너를 조절자와 같아지게 만들 수 있는 도덕적 결정을 내리며, 조절자와 같아짐은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다.
필사자의 지성은 물질적 일생 동안에 쓰기 위하여 인간에게 빌려 준 일시적 지능 체계이며, 인간이 이 지성을 사용함에 따라서 그들은 영원히 존재할 가능성을 받아들이거나 물리친다. 지성이 무엇을 이해하는가 보다 지성이 무엇을 이해하기를 바라는가, 이것이 살아남는 것을 보장한다. 지성이 무엇과 비슷한가가 아니라 지성이 무엇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가, 이것이 영의 신분을 증명한다.
111:1.6 지성은 그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을 확인하고 그 결과로 사람을 영원히 살아남게 만드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솟아나게 할 수 있는, 우주의 악기이다.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의지, 영의 빛을 받은 의지에 따라서, 이 지성은 고귀하고, 아름답고, 참되고 선하게―실제로 위대하게―될 수 있다.
진화된 지성은 순수한 기계적 통제와 참된 영 성품, 이 두 가지 지적 극단 사이에, 거대한 집단의 진화하고 올라가는 지성들이 개재하며, 이들의 안정성과 차분함은 성격자의 선택, 그리고 영의 신분에 달려 있다.
그러나 사람은 수동적으로 노예처럼, 의지를 조절자에게 넘겨주지 않는다. 조절자는 사람의 지성을 조종하지만, 결코 그의 뜻에 어긋나게 지성을 지배하지 않는다. 조절자에게 인간의 뜻은 가장 중요하다.
지성은 너의 배, 조절자는 너의 키잡이, 인간의 의지는 선장이다. 필사자인 배의 주인은, 상승하는 혼을 영원한 생존의 모론시아 항구로 인도하는 신성한 키잡이를 믿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너의 동의를 받아서, 이 충실한 키잡이는 시.공간의 장벽을 넘어 신성한 지성의 바로 그 근원과 그 너머, 심지어 조절자들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에게까지, 안전하게 너를 데려다 줄 것이다.
2. 혼의 본성
111:2.1 지성의 본질은 기능적 통일이다. 따라서 그릇되게 안내 받은 자아가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고 선택함으로 저지되고 방해 받을 때에도, 지성은 어김없이 이 구조적 통일성을 보인다.
필사인의 물질 지성은 모론시아 천을 담은 우주의 베틀이며, 깃드는 생각 조절자는 그 천 위에 지속하는 가치와 신성한 의미를 지닌 한 우주 인품―궁극의 운명과 끝없는 생애를 가진 살아남는 혼, 잠재 최후자―의 영 무늬를 짜 넣는다.
사람의 성격은 물질 몸에 있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묶여 있는 지성 및 영과 동일시된다. 그러한 지성과 영이 작용하는 이 관계는 새롭고 독창적이고 고유한 우주 가치, 즉 혼을 낳는다.
그러한 불사의 혼을 진화로 창조하는 데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1. 인간의 지성, 그리고 그에 선행하고 그 지성에 미치는 모든 우주 영향.
2. 이 인간의 지성에 깃드는 신다운 영. 그러한 분신 속에 본래부터 있는 모든 잠재성.
3. 물질 지성과 신다운 영 사이의 관계, 이것은 그러한 관계에 기여하는 어느 쪽 요인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가치를 뜻하고 의미를 지닌다. 이 독특한 관계의 실체는 물질도 영도 아니며, 모론시아이다. 그것은 혼이다.
중도인들은 사람이 진화시키는 이 혼을, 하급 또는 물질 지성, 그리고 상급 또는 우주 지성과 구별하여, 중간 지성이라고 이름 지은 지 오래다. 이 중간 지성은 정말로 모론시아 현상이니, 그것이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지성은 우주에서 봉사하는 초물질 자질을 소유하며, 이것은 도덕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도덕적 성품이 생겨나는 것을 보장하고, 그렇게 함으로 관련된 영적 봉사, 그리고 깃드는 생각 조절자와 진정한 창조적 접촉을 가지게 한다.
인간 지성이 접촉함으로 그렇게 영적으로 변화되는 불가피한 결과는 혼이 차츰 태어나는 것이다. 혼은 하나님을 몹시 알고 싶어 하는 인간 의지에 지배되는 보조 지성이 우주의 영적 세력과 함께 연락하여 일함으로 합동으로 지은 산물이며, 그 우주 세력은 만물을 지으신 바로 그 하나님의 실제 분신―신비의 훈계자―의 전반적 통제를 받는다.
3. 진화하는 혼
111:3.1 조절자와 융합하기 전에 어느 때라도, 진화하고 상승하는 인간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기를 선택할 수 있다. 조절자와 융합하는 것은 상승하는 필사자가 영원히, 조건 없이, 아버지의 뜻 행하기를 택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사는 동안에 필사자의 의지, 결정하고 선택하는 성격의 힘은 물질 지성 회로에 거한다. 땅에서 필사자의 성장이 진행됨에 따라서, 이 자아는 귀중한 선택하는 힘과 더불어, 태어나는 모론시아 혼 개체와 점점 더 동일시된다. 죽고 나서, 저택 세계에서 부활한 다음에, 그 성격은 모론시아 자아와 완전히 동일시된다.
이 불사의 혼은 처음에 전적으로 모론시아 성질이지만, 발달 능력을 소유하기 때문에, 신의 영들과 융합할 가치가 있는 참 영 수준까지 반드시 올라가며, 보통은 사람의 지성에서 그러한 창조 현상을 시작한 우주의 아버지의 바로 그 영과 융합한다.
인간의 지성과 신성한 조절자는 충분히, 지성은 어느 정도― 진화하는 혼의 풍채 및 차별되는 성질을 의식한다. 혼은 인간 지성과 신성한 영, 이 둘의 품질을 함께 가지지만, 영의 통제와 신의 지배를 늘이는 방향으로 끈질기게 진화하며, 지성 기능이 의미하는 것들은 참된 영 가치와 일치하기를 추구한다.
필사자의 생애, 즉 혼의 진화는 시험 기간이 아니라 교육이다. 최상의 가치가 살아남는 것을 믿는 것이 종교의 핵심이다. 진정한 종교적 체험은 최상의 가치를 가진 것과 우주적 의미가 있는 것들이 뭉쳐서 하나의 우주 실체로 실현되는 데 있다.
111:3.6 지성은 양(量), 실체, 의미들을 안다. 그러나 질―가치―는 느껴진다. 느끼는 것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서로의 지성 창조와 실체화된 것들의 연합된 영이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가치의 실현이며, 시간 세계에서 너희가 시작하는 것을―마칠 가치가 있다면―너희는 영원 속에서 확실히 마칠 것이다.
4. 내적인 삶
111:4.1 인식하는 것은 바깥 세계로부터 받은 감각 인상을 개인의 기억 형태 속으로 맞춰 넣는 지적 과정이다. 이해는 이 인식된 감각의 인상(印象)과 관련된 기억 형태가 동적인 원칙들의 망으로 통합되거나 조직화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의미는 인식과 이해의 조합에서 파생된다. 의미는 완전한 감각 세계나 물질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와 가치는 오직 인간 체험의 지성, 즉 초물질 분야에서 파악된다.
참된 문명의 진보는 모두, 인류의 이 내면의 세계에서 태어난다. 참으로 창조적인 것은 오직 내적인 삶이다. 어느 세대라도 젊은이들이 감각과 외적 세계의 물질 중시를 추구할 때 문명은 도저히 진보할 수 없다.
내면 세계와 외면 세계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젊은이의 4분의 3이 물질만 중시하는 직업에 들어가서 외면 세계의 감각 활동에 전념할 때 어떤 문명도 위태롭다. 젊은이가 윤리ㆍ사회학ㆍ우생학ㆍ철학ㆍ예술ㆍ종교ㆍ우주론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문명은 위험에 처한다.
오직 인간이 체험하는 영 영역에 초의식 지성이 부딪침에 따라서 초의식 지성의 상급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격은 본래부터 창의적이지만, 단지 개인의 내면에서만 기능한다.
111:4.6 눈의 결정은 반드시 육각형의 형태이지만, 결코 어느 두 결정도 같지 않다. 어느 두 아이도, 아니 쌍둥이의 경우에도, 결코 똑같지 않다. 성격은 종류를 따라가지만 반드시 독특하다.
행복과 기쁨은 내면의 생활에서 기원을 가진다. 혼자서 진정한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 고독한 삶은 행복에 치명적이다. 가족과 국가조차도, 다른 이들과 나누면 더욱 즐거운 삶이 될 것이다.
너희는 외부 세계 환경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너의 성격은 앞서는 원인 작용에서 아주 자유롭기 때문에, 창조적인 내면의 세계는 너의 지시에 달려있다. 성격은 제한된 의지의 주권과 관련된다.
사람의 내면의 삶은 참으로 창조적이기 때문에, 이 창조성이 자발적이고 전적으로 우연한 것인지, 통제되고, 지시되고, 건설적인 것인지에 대한 책임은 각 사람에게 있다. 창조적 상상력이 활동하는 무대가 이미 편견ㆍ미움ㆍ두려움ㆍ분개심ㆍ앙갚음ㆍ편협으로 차 있을 때, 어떻게 그 상상력이 훌륭한 열매를 맺을 것인가?
생각은 외부 세계의 자극에서 기원을 가질지 모르지만, 이상은 오직 사람의 내면세계의 창조 영역에서 태어난다. 오늘날 세계의 나라들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에 의해 인도되지만, 그들의 이상은 빈곤하다. 그것은 빈곤ㆍ이혼ㆍ전쟁, 인종적 증오가 설명한다.
111:4.11 이것이 문제이다: 만약 자유 의지 인간에게 내면의 창의력이 부여된다면, 이 자유의지 창의성은 자유의지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인식해야 한다. 창조성이 파괴성으로 바뀌면 억압ㆍ전쟁ㆍ파괴와 직면한다. 악은 붕괴와 궁극적 파괴로 향하는 창의성의 일부분이다. 모든 갈등은 내적 삶의 창조 기능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악하다. 그것은 성격 안에서 내전의 일종이다.
내면의 창조성은 성격을 통합하고 자아를 통일함으로 인품을 고귀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것은 언제까지나 진실이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오직 내면의 현재 창조성이 수고함으로 앞날을 바꿀 수 있다.
5. 선택을 거룩하게 바치는 것
111:5.1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그와 같은 내적 삶을 가치 있게 창조한 그 하나님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생물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 이상이다. 나누는 것은 하나님 같다―신답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과 나누어 가지며, 한편 그들은 다시 여러 우주의 신다운 아들과 영 딸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진다.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완전에 이르는 열쇠이다.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은 살아남는 비결이요, 살아남아서 완전에 이르는 비결이다.
필사자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그래서 하나님은 필사자 속에서 살기를 뜻하셨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같이, 그는 인간의 의지에 복종하여 사람 안에 살고, 사람에게 깃들기로 찬성하였다.
사람의 성격이 인간의 의지를 아버지의 뜻에 굴복하겠다고 선택할 때, 평화를 얻고, 죽음 후에 살아남으며, 다음 인생에서 완전하게 되고, 영원까지 봉사하는 것, 이 모두가 이제 (영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한 인간의 선택은 의지를 거룩하게 바침이요, 의지의 확장, 의지를 영화롭게 하고, 의지를 완성한다. 그러한 선택은 피조물인 아들의 성격이 영인 아버지의 성격과 소통하는 단계까지 그 의지를 높인다.
111:5.6 인간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처럼 택하는 것은 필사 인간이 영 아버지를 영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이 선택은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인 긍정적인 확인으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나의 뜻입니다” 이다. 이렇게 선택하면, 머지않아 하나님의 분신과 융합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 두 성격의 창조 속성은 사람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 사이에 또 하나의 영원한 협동 관계가 태어난 것이다.
6. 인간의 역설
111:6.1 필사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많은 문제는 우주에 대하여 그가 두 가지 관계를 가진 데서 생겨난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을 초월할 수 있다. 사람은 유한하지만 무한의 불꽃이 깃들고 있다. 그러한 이중 상황은 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있는 숱한 사회적ㆍ도덕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사람의 자아를 초월하는 데 요구되는 용기는 자만의 유혹과 자신의 신격화의 유혹에 무릎을 꿇을지도 모른다. 물질 수준에서 사람은 자기가 자연에 종속되며, 한편 영적 수준에서 현세의 유한한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한 역설은 유혹, 잘못의 가능성, 잘못된 결정과 떼어낼 수 없으며, 자아가 뻐기고 거만하게 될 때, 죄가 생겨날 수 있다.
죄의 문제는 유한한 세계에서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유한의 사실은 악하지도 않고 죄가 되지도 않는다. 유한한 것을 악용하고, 왜곡하고, 곡해하는 것이 죄와 악을 낳는다.
영은 지성을 지배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성은 에너지를 통제한다. 사람의 지성은 본래부터 에너지를 통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의 특권이다. 그러나 사람의 지성은 물리적 우주의 에너지 비결을 통달한 그 한도 안에서,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
사람이 물리적 실체를 수정하고 싶을 때, 물질을 통제하고 에너지를 지휘하는 수단과 방법을 발견한 그 범위까지 사람은 성공한다. 육체 작용을 총명하게 사용함으로 지성은 다른 기계 작용, 아니 에너지 관계와 살아 있는 관계까지도 창조할 수 있고, 이것들을 이용해서 이 지성은 우주에서 그 물리적 수준을 더욱 통제하고, 지배할 수도 있다.
111:6.6 사람은 사실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찾을 수 있고, 사람은 사랑이 없어도 하나님의 율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의 법칙과 신의 사랑을 발견하고 자신의 진화하는 우주 철학 안에서 이것들을 체험으로 조화하기까지, 사람은 결코 첫째 근원 중심의 성품, 만물을 둘러싸는 그 성품의 무한한 균형미, 숭고한 조화, 지극한 충만함을 이해할 엄두도 낼 수 없다.
물질적 지식이 늘어나는 것은 생각의 의미와 이상의 가치를 더욱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은 내면적 체험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지만, 그가 손수 발견한 진리를 일상 생활에서 생기는 잔인한 실제 요구에 적용하려면 사실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 필요하다.
필사 인간이 자연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과 현세를 초월하는 영적 힘을 지닌 것을 볼 때, 필사 인간이 불안한 느낌에 시달리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이다. 이런 어렵고 난처한 문제들 한가운데서, 오직 종교적 확신, 살아있는 믿음만이 사람을 지탱할 수 있게 한다.
사람의 필사 본성을 어지럽히고 그의 영적인 온전성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위험 중에서 교만이 가장 크다. 용기는 씩씩하지만 자기중심은 자만심이요, 자살에 이른다. 합리적 자신감을 개탄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초월하는 사람의 능력은 그를 동물계와 구별하는 것이다.
교만은 개인, 집단, 인종 또는 국가에서 발견되든, 사람을 속이고 중독시키는 죄를 낳는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진실이다, “교만은 오래가지 못한다.”
7. 조절자가 부딪치는 문제
111:7.1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면서 펼쳐지는 불확실성은 모험의 본질이며, 영적 안전, 그리고 영원한 안전, 우주의 아버지의 신성한 동정심과 무한한 사랑을 아들인 사람이 무조건 신뢰함으로 안전을 얻는다.
너의 혼에 대한 조절자의 충실한 부르심이 멀리서 울리는 것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이 고난의 세상을 통해서 네가 나그네 길을 가는 동안, 조절자는 인생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없다. 너의 현재 물질 세계의 평범한 문제들과 어렵고 벅찬 이 모든 씨름을 하는 참된 동기, 마지막 목표, 영원한 목적을 나타내는 그림을 조절자가 항상 떠올리게 한다면, 너는 무척 위로와 영감을 받고, 아주 황홀해지고 흥미가 생길 수 있다.
네가 시간 세계의 장애물 한가운데서 수고하고 너의 필사 인생의 나그네 길에 성가신 불확실한 미로에서 갈팡질팡하는 동안, 너는 왜 우주 관점에서의 깨우침과 영감을 받으려 하지 않는가? 왜 조절자가 네 생각에 영적 변화를 일으키도록 허락하지 않는가?
유란시아의 인류는 다른 기원을 가진 여러 종족과 핏줄의 혼합이다. 이는 조절자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가 매우 어려워지고 사망 후 조절자와 수호천사의 문제를 추가시킨다. 내가 샐빙톤에 갔다가, 한 운명 수호자가 그 필사 주체에게 수고하는 어려움을 참작하는 공식 진술문을 발표한 것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이 세라핌은 이렇게 말했다:
111:7.5 “내가 겪는 문제의 상당 부분은 나의 주체의 두 성품 사이에 그치지 않는 싸움 때문이었다. 큰 포부를 가진 욕구가 동물 같은 게으름에 부딪치고, 우수한 민족의 이상이 열등한 종족의 본능과 섞이며, 위대한 지성의 높은 목적이 물려받은 원시적 유산의 충동으로 반대에 부딪친다. 멀리 내다보는 훈계자의 장거리 관점이 시간 세계의 인간적 근시안으로 무효가 되고, 하늘가는 존재의 진취적 계획이 물질적 성질의 욕구와 갈망으로 인하여 수정되며, 우주 지능이 번쩍 떠올린 것은 진화하는 종족의 화학 에너지 명령으로 취소된다. 천사들의 권고가 동물의 감정으로 인하여 반대에 부딪치고, 지능이 받은 훈련이 본능의 성향 때문에 물거품이 되며, 개인의 체험은 종족의 쌓인 성향으로 반대에 부딪친다. 최선의 목적이 최악의 흐름에 빛을 잃고, 천재의 날아오르는 힘이 평범의 인력(引力) 때문에 가라앉으며, 착한 것의 진보는 나쁜 것의 타성에 젖어 늦어진다. 아름다운 자의 예술은 악의 존재로 인하여 더러워지고, 건강한 부력(浮力)은 질병의 무력함에 중화되며, 믿음의 샘물은 두려움의 독에 오염된다. 기쁨의 샘물이 슬픔의 강물로 말미암아 쓰디쓰게 되고, 기대하는 즐거움이 쓰라린 현실로 인하여 사라지며, 삶의 기쁨이 죽음의 슬픔에 늘 위협을 받는다. 그러한 행성에 그러한 인생이라니! 그래도 생각 조절자가 늘 도움을 주고 재촉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상당한 정도의 행복과 성공을 얻었고, 바로 지금 저택 나라의 심판실까지 올라갔다.”
[오르본톤의 한 단독 메신저가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