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6.
안개
일요일 아침이다. 화요일은 국군의 날이고 목요일은 개천절이었다. 주말이 낀 퐁당퐁당 연휴라서 인지 교육생 숙소동이 조용하다. 며칠 동안 주차장이 텅 비어 있는 걸로 보아 모두가 어디론가 떠났나 보다. 텃밭을 얼쩡거리는 이도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한갓지다. 이 넓은 센터가 다 내 것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추분이 지났으니 가을이다. 지리산이 동쪽에 버티고 있어 아침 해는 느지막하게 떠오른다. 섬진강 물길을 제외한 나머지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구례는 분지다. 섬진강을 따라 피어오르는 복사 안개가 구례를 가득 메운다. 빠져나갈 길을 잃은 안개는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스멀거린다.
안개가 가득하다. 근거리를 제외하면 모든 것들은 안개 저편에 숨어 있다. 이렇게 안개가 짙은 날에는 사성암으로 가야 한다. 오산 사성암에서 보는 운해는 절경이다. 노고단에서 내려다보는 운해 또한 적절한 말을 고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무릉도원! 복숭아나무는 없지만 마을도 길도 강도 안개에 묻혀 자기 모습을 감추고 있다. 신선이 된 느낌이다. 인간 세계에 살지만, 인간이 아닌 듯한 착각이 든다.
평화롭다. 삽자루 뒷짐을 지고 배추밭 고랑을 따라 걷다가 풀 몇 포기 뽑아주며 “고맙다.” 한 마디 던지고 무밭, 갓밭으로 느릿한 걸음을 옮긴다. 이런 게 신선놀음인가. 더군다나 그리 귀하고 비싸다는 김장배추 서른 포기가 빼곡하다. 배추포기가 얼마나 튼실한지 지름이 1m는 되어 보인다. 솎아내고 한 포기씩만 남겨둔 무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의 뜻을 이제야 알겠다.
안개가 낱개로 보인다. 공기 중을 떠다니는 작은 방울들이 배춧잎으로 내려앉는다. 문득 “이것이 이슬인가? 안개인가?” 끝날 것 같지 않은 질문을 던져놓고는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라며 도외시해 버린다. 느린 걸음을 따라 안개도 생물인 듯 움직인다. 배춧잎에 휴대폰 카메라 초점을 맞춘다. 짙은 녹색의 이파리가 가득하다. 물방울을 품은 배춧잎 뒤면은 솜털이 빈틈없이 조밀하다. 낯설다. 처음 보는 장면이 아닌데도 생소하고 신기하며 경이롭다.
머리칼이 축축해진다. 이놈들이 내 몸뚱어리에 제 영역을 표시한 모양이다. 아니면 제 땅을 침범한 외지인으로 취급했는지 온몸이 촉촉하다. 견공들의 영역 표시법처럼 온통 내질러 놓았다. 습한 기운을 툭툭 털어버리고 사람 찾아 떠난다.
곧 안개가 걷히면 어제와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배가 고프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은 기쁘고 행복하다는 말로 바꾸어야 하겠다.
첫댓글 배추모종을 심었네 죽었네 며칠전에 이야기하더니
그 정도면 자라는것이 눈으로 보일듯한데 보이더나??
하루가 다르지. 매일 매일이 다르지. 변화는 금방 보이지. 내가 키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