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鄧小平)의 선부론(先富論)과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남상기(南相琦)
2018년 11월 18일은 중국에서는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이해 시진핑(習近平.66) 주석이 기념 연설을 했다.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개혁.개방 40년 연표’를 보도했다. 1978년 등소평(鄧小平.1904-1997)의 개혁.개방 정책 선포부터 2018년 11월까지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정리한 것이다. 모택동(毛澤東.1893-1976)이 중국에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면 등소평은 사회주의에 시장경제를 도입해 중국을 발전 시켰다. 지금 중국이 미국에 이어 “주요 2국(G2)”이라고 큰소리칠수 있는 것은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 덕이다. 지난 40년 전으로 돌아가 개혁.개방 정책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살펴보자.
◇등소평(鄧小平)의 생애
등소평(鄧小平.1904.8-1997.2. 93세사망)은 중산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81년부터 1989년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했다. 중국 공산당의 소위 2세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후, 정무원 부총리, 재정 부장,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 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문화 대혁명 때 박해를 받기 시작한 이래, 여러 번 모택동의 박해를 받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주은래(周恩來) 총리의 후원으로 복권되어 총리가 되었다.
1975년에는 당 중앙위원회의 부주석, 정치국 위원 총참모장이 되었다. 주은래가 죽기 몇 달 전부터 정부를 효율적으로 이끌어간 등소평은 주은래의 후계자로 널리 알려졌으나 1976년 1월 주은래가 죽자 모택동의 추종자였던 사인방(四人幇)에 의해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죽고 4인방이 숙청된 후 비로소 그해 9월 모택동의 후계자인 화국봉(華國鋒)의 동의를 얻어 복직되었다. 1977년 7월경 등은 이미 고위직을 회복했으며 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화국봉과 권력투쟁을 벌였다. 등이 화국봉보다 노련한 정치력과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화국봉은 1980~81년에 총리직과 주석직을 내놓아야만 했고 이들 자리는 등소평 휘하의 인물들에게 돌아갔다. 조자양(趙紫陽)이 정부 총리가 되었고 호요방(胡耀邦)이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되었는데 두 사람 다 등의 지도노선을 따랐다.
1983년 이후 국가원수직과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직에서 물러났지만 군사위원회 주석직에 머무르며 실권을 쥐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의 강경 진압을 주관하는 한편, 한때 국가 주석직의 교체에 관여하고, 군부 내에 세력을 형성한 양상쿤(揚尙昆)을 몰락시키고 장쩌민(姜澤民)을 후계자로 내정하는 등의 막후 실력을 행사하였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경제정책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통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정치는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경분리의 정책을 통해 등소평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인 등소평 이론을 창시하여 오늘의 번영된 중국을 만드는 초석을 다졌다. 그는 5대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 5대 주석(81년-89년 11월 27일)을 역임했다. 전임은 화국봉(4대),후임은 강택민(6대)이다.
◇모택동 대약진 운동의 대실패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을 폈다. 중공업에 우선적으로 투자해 경제. 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중공업 우선주의 때문에 생필품을 생산하는 경공업은 쇠퇴했다. 함께 밭을 일궈 결과물을 똑같이 나누는 방식의 공산주의식 농업 때문에 농민은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 대약진운동 기간(1958-62) 중국은 식량도, 생필품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가뭄까지 겹치면서 4000만명이상이 굶어 죽기도 했다. 당시 등소평은 사회주의 이념을 고집하기보다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를 일부 도입해야 한다는 실용적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반대했다. 그는 유교 문화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를 실천하자는 문화대혁명(1966-1976)을 일으켜 다시 권력을 회복했다. 당시 등소평은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세력)로 몰려 유소기(劉少奇)와 함께 직무에서 해임됐다. 그는 73년 정계에 복귀할 때까지 공장에서 노동을해야 했다. 모택동이 죽고 문화대혁명도 끝나서야 그는 뜻을 펼치게 된다.
◇선부론(先富論)과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과 ‘선부론(先富論)’으로 요약된다. ‘흑묘백묘론’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뜻이다. 즉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국민을 잘살게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도입해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선부론’은 “일부 사람을 먼저 부유하게 하라”는 뜻이다. 돈을 투자할 대상과 지역에 우선순위를 정한 것이다. 모두가 균등하게 부를 나눠 갖는 공산주의식 평등주의를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능력있는 일부 엘리트가 먼저 부자가 되고, 이들이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된다는 것이었다.
지역적으론 무역이 쉬운 강남 연해 도시부터 개발한다는 방침이 었다. 농촌에서도 실패한 공산주의식 공동 생산, 공동 분배 정책을 폐기했다. 각자 농사를 짓고 의무 할당량을 나라에 낸뒤 나머지수확물은 농민이 갖도록 했다. 농민이 열심히 일할 이유가 생기면서 생산량도 늘기 시작했다. 도시에서는 경제특구 지역을 개방하고 해외 투자자들을 유치했다. 이 과정에서 등소평은 중국의 주요 인재를 서유럽5국으로 보내 자본주의 경제를 연구하고 중국상황에 맞게 적용했다. 등소평이 시장경제를 배우기 위해 직접 자본주의 선진국인 미국. 일본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념이나 정치적으론 대립했던 자본주의 국가와 협력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증국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새로운 ‘개혁.개방’이 필요한 중국
현재 중국은 미국의 패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 GDP(국내총생산) 규모가 세계 2위이다. 하지만 최근미국과의 무역전쟁, 빈부 격차, 국가 부채, 인터넷 통제등 경제 성장의 이면인 여러 문제도 드러나고 있다. 특히 중국은 작년 3월에는 헌법을 개정해 시진평 국가주석의 연임 제한을 없애고 헌법에 ‘시진평의 신시대’를 명시했다. 등소평은 모택동과 같은 독단적 지도자를 막기위해 구가주석의 임기를 10년으로 제한하고 개인숭배를 금지했다. 그는 살아생전 자신에 관련된 동상이나 포스트도 제작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죽어서도 그의 유언되로 화장하여 유골을 수송기에 실어 중국상공에 뿌렸다. 그런데 이게 뒤집힌 것이다. 당장 개혁. 개방 40년의 성과가 시진평의 공으로 돌아갔다. 앞서 말한 개혁 개방연표에 시진평은 125번 나왔는데 등소평은 60번만 언급되었다. 지금껕 중국이 등소평이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고 추앙했던 움직임과 대조적이다. 현재 지도자인 시진평의 업적을 더욱 부각하는 것이다. 중국은 이제 새로운 개혁. 개방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참조: 중국 역대 국가 주석( ※등소평은 1970-80년대 실권자로 국가주석은 아니었다)
1대 모택동(毛澤東,마오쩌둥) 1949. 9-1959. 4 (10년)
2대 유소기(劉少奇,루사오치) 1959. 4-1966 (7년)
(※1966-1983년(17년간) 국가주석 공백상태, 단 1981년 5월 6일에서 1982년까지 송경령(宋慶齡, 손문선생 부인)이 명예주석에 일시 추대된바 있다)
3대 이선념(李先念,리셴년) 1983. 6-1988. 4 (5년)
4대 양상곤(揚尙昆,양상쿤) 1988. 4-1993. 3 (5년)
5대 강택민(姜澤民,장쩌민) 1993. 3-2003. 3 (10년)
6대 호금도(胡錦濤,후진타오) 2003. 3-2013. 3 (10년)
7대 습근평(習近平,시진평) 2013. 3-현재에 이르고 있음.
2018년 11월 18일 중국의 등소평 개혁.개방 40주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