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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무(實存舞)
김 동 리
부산 『국제시장』이라고 하면 사람이 개미떼처럼 언제나 바글바글 뒤끓고 있는 데다. 한번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등과 등을 비비고 어깨와 어깨를 부딪치기 마련이다. 특히 땅까지 좀 질거나 할 때의 착잡이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서 장계숙(張季淑)이란 젊은 여자가, 바로 그 길가에 만년필 상자를 차려놓고 서 있는 김진억(金鎭檍)이란 남자의 바지가랑이에 흙물을 좀 튀게 했기로소니 망칙한 실례가 되거나 크게 탓할 사건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 미안합니다.“
나이 한 스물예닐곱밖에 더 나뵈지 않는 허리가 날씬하˙고 목덜미가 새하얀 여자가 얼굴을 돌려 사과를 했을 때도, 김진억은 그저 고개를 끄떡하여 답례를 했을 뿐, 괜찮다거니, 『천만의 말씀—』이라거니하는 대꾸조차 부질없다는 듯이 여자의 옆얼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것을 일일이 개의하거나 응대하려다가는 장사할 시간도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여자는 지나갔다. 만년필 장수는 여자의 뒷모양을 한 번 더 흘깃 바라보았다. 어딘지 깨끗한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아까의 『아이 미안합니다.』 하던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자글자글 뇌리(腦裡)에 스며드는 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그의 의식은 또다시 그 질척거리는 길바닥과 바글거리는 사람들로 차버렸다. 그리하여 그의 마음은 안정이 되었다. 지금의 그에게 있어서는 이 바글거리는 사람떼와 질척거리는 길바닥과 먼지와, 아우성과, 시장 밖의 저쪽 큰길을 달리는 전차, 버스, 지이프차, 트럭, 그리고 전축 확성기의 소음…… 이런 것 이외에는 아무런 위안도 없다. 저녁이면 대개 한잔씩 나누게 되는 친구와의 술자리도, 사실은 이 착잡과 소음과 먼지에 비겨 결코 더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극장과 다방과 그밖의 모든 오락 방면에는 본
디부터 취미가 없었다. 그는 지금 이렇게 온종일 소음과 착잡의 한복판 속에 서 있는 것이 조금도 괴롭다거나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에게는 유일한 위안이라고 생각되 었다.
이러한 김진억에게 그날의 허리가 날씬한 목덜미가 새하얀 여자래서 따로 기억에 사무쳤을 리도 물론 없었다.
그런 지 한 달포 지난 뒤, 항토신보(港都申報)에 있는 친구가 와서 바로 요 곁에 좋은 밀크호올을 하나 발견했으니 토우스트를 먹으러 가자고 하여, 같이 따라간 것이 그가 만년필을 팔고 있는 자리에서 불과 사십 미터 남짓밖에 되지 않는, 시장 안의 밀크호올 『갈매기』였다. 주인인 듯한, 나이 한 스물예닐곱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젊은 여자는 회색 양복바지에 감색(블랙블루) 스웨터를 입고 있었으나 어딘지 안면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 날씬한 허리, 새하얀 목덜미, 좀 기름한 얼굴에 이지적(理智的)인 두 눈과 쪽 곧은 콧대는, 결코 녹록지 않은 현대적 여성이라는 인상이었다. 게다가 그 도톰하고 아담스런 입술에 여유있게 떠도는 미소는, 자기의 날씬한 체격이나 『현대적』인 미모에 대한 충분한 자신도 가지는 듯한 그러한 표정이었다.
"뭘 잡수시겠어요?" :
여자는 웃음을 띠운 얼굴로, 김진억보다 이영구(李瑛求)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영구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세우고 있던 두 손을 가져다 새삼스레 깍지를 끼며,
"무얼 먹을까?"
하고, 진억을 바라본다. 이마와 관골까지는 정수리에서 콱 눌린 것처럼 가로 퍼졌는데 관골에서 아래턱까지 팽이 끝처럼 날카롭게 쪽 빠져서 학생적부터 팽이니 삼각형이니 하는 별명으로 불리워 오던 터이지만, 게다가 양쪽 눈알이 불거져 나오고 입술이 얇아서 어딘지 재기(才氣)에 날리오는 듯한, 소위 경박재자(輕薄才子)를 연상시키는 얼굴이었다. 이와 반대로 얼굴이 둥글넙적하고 입술이 두툼한 김진억은,
"아무거나 존 대로……."
겨우 대꾸를 하는 듯한 표정이다. 그러자, 영구는,
"아주머니!"
하고, 큰 소리로 부르더니 토우스트와 밀크커피를 시켰다. 그리고는 또다시 큰 소리로,
"아주머니!"
하고 불러서는,
"거 좀 잘 구워 주오다."
자칫하면 잊어버릴 뻔했다는 듯이 원산 지방 사투리를 덧붙였다. 다음엔 진억의 옆구리를 쿡 찌르코 엄지손가락을 세워 여자 있는 쪽을 향해 획 잦혀 보이는 것이 여자를 주목하라는 뜻인 듯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딘지 안면이 있는 사람 같아서 처음 들어올 때부터 진억도 이미 여러 차례나 흘깃흘깃 시선을 보내고 있던 참인데 영구는 또,
"됐어, 됐어!"
우언지 혼자서 더욱 감동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자네 여기 첨 인가?"
영구는 또 큰 소리로 이렇게 묻는다. 본디 말이 많고 수다스러운 그의 성격이기는 하지만, 오늘따라 아직 술도 한잔 걸치지 않은 채 왜 이렇게 목소리도 높은지 알 수가 없다. 밤마다 흡사 저 여자가 들어주거니 하는 태도여서, 진억에게는 더욱 겸연쩍기만 하다.
"내야 본래 이런 데 잘 다니나?"
"음, 그렇지, 자넨 언제나 곰탕 한 그릇에 소주 한 컵 이지·…….“
아주마이, 거 좀 특별히 잘해 주오다."
영구는 또 한번 그녀에게 말을 건다. 서울말도 알지만 사투리도 쓸 수 있다는·듯한 배짱인 모양이다.
"좀, 잠자코 못 있겠나?"
이번에는 진억이 참다 못해 한 마디 쏜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돌고 있다.
"아주머니, 떠들면 안 됩니까, 괜찮지요?"
영구는 또다시 『아주머니』를 부른다.
"염려 마세요.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여자는 구워 낸 토우스트를 쟁반에 옮기며, 이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꽤 명랑한 목소리로 응대를 한다. 그다지 성가시게 생각하지도 않는 듯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자는 손수 커피와 토우수트를 날라다 놓으며 제법 인사까지 차릴 줄 안다. "어때?"
"……."
"홀륭하잖아?"
"……."
"일류 다방에서도 이만치 못할걸."
영구는 연방 토우스트를 입에 틀어박으며, 커피를 마시며, 그러면서도 말은 말대로 그치지 않는다.
토우스트가 없어지자 이번에는 또,
"아주머니, 거 달걀 삶은 거 있지요?"
하더니, 손가락 넷을 펴 보인다. 네 개를 가져오라는 뜻인 것이다.
"자아 들게."
영구는 먼저 하나 덥석 집어 껍질을 까며 진억에게도 권한다.
"어서 들게."
진억은 담뱃갑을 꺼낸다. 그러자 영구는 또,
"자넨 참 달걀 좋아하지 않지……. 아주머니, 거 나마까시. 아주 단 걸로 꼭 두 개만 가져 오세요."
다시 손가락 둘을 쳐들어 보인다.
여자는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왜떡 둘을 집어다 놓는다.
"자아 들게."
영구는 입에 가득한 달걀을 연방 씹으며 왜떡이 놓인 접시를 진억의 앞에 밀어 놓는다. 그러나 이미 담배에 불을 붙인 진억은 왜떡을 도로 영구 앞에 옮겨 놓으며,
"어서 들게."
한다.
진억이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기 전에, 달걀 네 개와 『나마까시』 둘을 다 먹어 치우고 엽차를 훌홀 마시던 영구는 또 한번 큰 소리로 『아주머니』를 부르고는, 턱으로 진억을 가리키며,
"이 손님 기억 없어요?"
한다. 그러자 여자도 반색을 하며,
"글쎄올시다. 저도 어쩐지 안면이 있는 분 같애서…….“
어깨를 꺾어 절을 한다.
"아주머니, 제발 좀 그러지 맙시다. 다같은 이웃에 살면서…….“
영구가 또다시 수다를 늘어놓으려니까 이번에는 진억이 입을 열어,
"아주머니 어디서 왔소?"
영구를 막았다.
"저는 이번 1·4후퇴 때 서울서 내려왔어요, 본래 저의 외가가 경상도기 때문에……."
여자가 더 말을 계속하려는데, 성급한 영구는 그것을 앞질러서 ,
"……그리고, 남편은 군데에 가 계시죠?"
알은 체를 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이 지나갔다. 어느덧 약간 홍조를 띠기 시작한 그녀는, 한순간 전보다 조금 변성된 목소리로,
"선생님 직장은 어디, 이 근처세요?"
하고, 점점 커지는 듯한 두 눈으로 진억을 바라보았다.
진억은 속으로 좀 창피하다는 생각을 하며,
"예."
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역시 상업 방면이세요?"
여자는 또 한번 캐어묻자, 진억은 자기의 수세미같이 구겨지고 흙먼지투성이가 된 낡은 호움스펀 양복을 한번 슬쩍 훑어보며,
"바로 요 앞에서 만년필 가게를 보는 친구가 있어서 매일 거기 나와 놉니다."
군색하게 말을 돌려 맞추는 것을, 영구가,
"솔직하게 말해, 솔직 하게!"
아주 호통을 쳐놓고 나서,
"바로 그 만년필 장수올시다……. 그렇지만 본래는 다 원산 굴지의 명문으로 경응대학 출신에……."
"이 사람이 술 취했나?"
진억이 영구의 말을 가로막았다.
"네 그러세요? 그러기에 저도 어딘지 곧장 뵌 듯한 생각이 들었어요."
하더니 또 뒤이어 여자는,
"오오라, 그럼 바로 제가 언젠가 선생님 양복에 흙물을 친 적 있잖았어요. 기억 없으세요?"
하자, 진억도 그때는 그 둥글넓적한 얼굴에 웃음을 띠우며,
"이게 바로 그 양복인가 봅니다."
자기의 수세미가 된 호움스펀 양복을 가리켰다. 몇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 미안합니다."
여자는 또 한번 머리를 수그렸다. 그리고 나서도 웬 까닭인지 진억은 곧장 면구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자, 인제 일어나지."
하고 먼저 궁둥이를 떼었으나, 영구는 바야흐로 무슨 명상에나 잠긴 사람처럼 건너편 바람벽만 멀거니 바라보고 앉아 있다.
진억이 회계를 다 치르고, 또 한번 그쪽으로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야 영구는 비로소 명상에서 깨어난 것처럼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더니 두 손을 양복 주머니에 쿡 찌른 채 입을 쩍 붙이고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온다.
장계숙이 이 복잡한 국제시장 속에서 밀크호올을 시작한 것은 그해 (오십 일년) 삼월이었다.
그녀가 김진억의 바지가랑이에 흙물을 치게 된 것도 실상은 밀크호올을 시작한 지 한 달 가량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까지 일 년 가까이 그녀는 친정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친정댁 신세로 말한다면 『9·28』 직후부터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는지 몰랐다. 『6·25』 중에 남편이 납치되어 생활기능을 잃게 되자, 그녀 살림은 오로지 친정 어머니와 오빠의 손으로 꾸려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1·4후퇴라고 하지만 계숙이 친정 식구에 붙어서 남하한 것은 십이월 초순이었고, 그때부터 오십일년 삼월까지 친정에 얹혀 있었으니, 순전히 친정 법을 먹은 지도 일 년이 가까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많지도 않은 친정 식구에 누구하나 언짢은 기색을 보이는 사람도 없었지만, 친정살이도 오래 되니 지치기는 그녀 자신이 먼저였다.
"어머니 나두 무슨 일 시켜주세요, 이렇게 밤낮 놀이만 하다가 는 말라 죽겠어요."
"글쎄, 무슨 일을 한단 말이냐."
어머니도 깡그리 반대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오빠 쪽에서,
"달린 애도 있고 하니 그냥 집안에서 일이나 거들고 있어."
떠름해하는 얼굴이었다.
바로 그 무렵에, 국제시장에 밀크호올 하나가 났으니 계숙이 맡아보지 않겠느냐고 온 것이, 본디부터 부산에 살고 있었던 외가 아주머니였다. 계숙이 아주 혼자 맡아도 좋고, 자본이 모자란다면 자기가 반쯤 투자를 해도 좋다는 외숙모의 제안이었다. 거기서, 이왕이면 밀크호올보다 차라리 다방이 어떠냐는 말도 나고 또 다방이 겉으로는 고상해 보이지만 사실은 밀크호올보다 『샐럭리』로 나서는 것이 어떠냐는 말도 나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은 외숙모와 함께 밀크호올을 말기로 낙착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외숙모는 부평동에 자키의 가게를 따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일을 같이 볼 수는 없다고, 자본만 반을 댈 테니 그 대신 이익은 삼 분지 일만 배당해 달라는 조건이었다. 게다가 본디 시장에 안면이 많은 외숙모라 재료 구입이나 도매집과의 특약 관계 같은 것도 쉽사리 틔워 주었고, 또 일 년 이상이나 다른 밀크호올에서 경험을 쌓았다는 스무 살짜리 처녀아이까지 무난히 구해다 주었다.
이렇게 출발이 순조로웠을 뿐만 아니라, 원체 위치가 좋아서 처음부터 찾아주는 손님도 적지 않아 역시 시작하기롤 잘 했다고 은근히 기꺼워하는 중에, 다만 한 가지, 세 살짜리 계집애를 이러한 시장 속에서 기르기가 거북할 터이니 그대로 친정에 떼어두라는 친정 쪽의 어머니와 오빠의 의견이란 것이 무언지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게다가 그 계집애란 것이 어떻게 생겨 먹은 성민지 도무지 에미를 따라 나오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외가를 제집같이 생각하고 외할머니와 놀기에만 바빠하는 꼴이 기특하기보다는 얄밉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질의 사소한 감정 문제쯤은 한 달 두 달 지나는 동안에 모두 씻은 듯이 가셔졌지만 이번에는, 이와 좀 다른 성질의 잔잔한 물결이 그녀의 아랫도리를 적셔왔다.
그날, 토우스트에, 밀크커피에, 달걀에 나마까시를 먹고 간 두 분 손님 중, 두 눈알이 일본식 팽이같이 생긴 손님이, 그 뒤 그의 신상을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매일같이 저녁 때마다 들러서는 부질없는 수작을 붙이곤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그 만년필 장사를 한다는, 또 한 분 손님과 같이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혼자 오기도 하는데 그가 허술한 수작을 붙이는 것은 대개 혼자만 왔을 때 였다, 그가 언제나 늘어놓는 수작이란 것은, 자기는 『조도전대학』 영문과를 나온 인텔리라는 것, 직업은 극작가라는 것, 지금은 생활을 위하여 신문에서 문화면을 맡아 보고 있지만, 이북에는 상당한 재산이 있다는 것, 자기의 고향은 이북 원산인데 1·4후퇴 때 가족을 다 버리고 와서 지금은 독신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 만년필 장수 김진억과는 동경 유학시대부터의 친구로 이번에 같이 남하하여 와 있다는 것, 그리고, 극작(劇作)이란 본디 철학과 시와 소설을 다 알아야 쓰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는 인생 문제에 대하여 항상 깊이 연구하고 있지만, 인생이란 결국 『현재』에 충실해야지 과거나 미래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래서 자기는 지금이라도 정정 당당히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적당한 상대자가 없어서 『야단』이라는 것, 또 자기가 이미 그러한 문화인이니 만큼 상대자도 교양이 높고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현대적 여성이라야 한다는 것…… 대개 이러한 내용이었다.
처음엔 어디 그러한 여성이 없겠느냐고 좀 ˙부탁한다고 하기에, 계숙은 그저,
"글쎄올시다. 전 통 그런 방면엔 교제가 없는걸요."
했더니, 그 다음엔, 또 될 수 있으면 계숙씨와 같이 남편이 이북에 납치되어 간 사람이 더욱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남북이 통일되면, 이북에 처자를 두고 온 사람은 그 처자를 도로 만나게 될 것이고 이북에 남편이 끌려간 사람은 남편을 도로 찾게 될 터이니, 그때 가서 새삼스리 헤지느니 어쩌느니 옥신각신 할 것 없이 모든 것은 합리적으로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계숙도 속으론 딴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딴은 그렇겠다고, 헛인사를 주었더니, 이에 더욱 힘을 얻은 영구는 인생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결코 내일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설하는 것이었다. 가령 남북이 통일되기를 기다려서, 이북에 있는 남편이나 처자의 생사와 행방을 알고나서 다시 결혼을 한다고 하지만 남북통일이 언제 될지 그것을 누가 보장할 것이냐고, 만약 자기 생전에 통일이 되지 않으면 독신으로 늙어 죽고 말아야 할 것이냐고, 또 설령 십 년이나 이십 년 뒤에는 확실히 된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청춘을 허송한 산송장이 아니냐고, 현재에 충실하고 현재에 용감한 것만이 현대인의 권리요, 윤리(倫理)이기도 하다고 강조한 끝에, 실상은, 자기는 계숙씨를 무한히 존경하고 있다고, 만약 계숙씨와 결혼을 할 수 있다면 자기로서는 이 위의 더 큰 행복과 영광이 없겠노라고, 정식으로 구혼을 하는 셈이었다.
"선생님, 약주 잡수셨지요?"
계숙은 가볍게 웃어 넘겼다.
"네, 술을 마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술을 마신 취기로써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로 저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중에……."
"얘, 홍차 한 잔 가져오너라."
계숙은 영구의 말을 대수롭게 듣지 않는 모양으로 그의 말이 계속되는 중간을 꺾어서 딴말을 하는 것이었다.
"……주중에 진담이올시다. 늘 가슴속에 넣고 있던 말을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술을 먹었다고 해서 저의 진실성 하등의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구는 어느덧 완전히 동북 지방 악센트로 사투리까지 섞어가며 이렇게 한숨에 지껄여대었다.
계숙은 그의 말엔 거의 귀도 기울이지 않는 듯, 사뭇 진열장 쪽으로만 시선을 내두르며, 이런 경우 남자들이 담배를 태움으로써 어색한 고비를 넘기듯, 이따금씩 홍차 잔을 입술에 갖다 대이곤 하는데 영구는 혼자서 안타까운 듯이 또 말을 계속하였다.
"분명히 말씀을 해 주십시오. 선택의 자유는 다만 계숙씨의 특권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의지는 언제나 전취(戰取)하는 데서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렇챙이도 교양 정도가 높으신 계숙씨께서는 충분히 생각하실 줄을 압니다마는 행복이란 기회를 잃으면 영원히 그 사람에게서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계숙씨, 가부간에 한마디 답변해 주십시오."
영구는 주기와 흥분으로 양쪽 광대뼈와 눈가에 발긋발긋한 홍조까지 띤 얼굴을 거의 그녀의 코끝에 갖다대일 듯이 하며 이렇게 대답을 재촉했다.
"저는 아직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요."
계숙은 또 홍차 잔을 입술에 갖다 대인다.
가뜩이나 홍조를 띠었던 영구의 얼굴이, 순간, 검자줏빛깔로 변하며 그의 팽 이 끝같이 뾰쪽한 아래턱이 신경질적으로 급히 오물거리는 듯했다.
계숙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거의 같은 시간에 영구는 엽차가 반이나 남은 유리컵을 들어서 찰깍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에 놓으며,
"그렴, 충분히 생각해 보십시오. 요담엔 확실한 대답을 들려줄 수 있게스리……."
하고는, 호기있게 일어서 나가버렸다.
정식으로 결혼을 신청하고 돌아간 날 이후로 이영구는 한동안 밀크호올 『갈매기』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와 반면에 진억과 계숙과의 사이에는 뜻 아니했던 우정이 급속도로 성립되었다. 진억이나 영구가, 처음부터 계숙에게 있어 무슨 별다른 뜻의 고객이 될 리도 없었지만, 그 위에 무슨 각별한 경의나 호의를 가져준다고 해서 그것이 또한 귀중하다거나 대수로웠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명색이 청혼이랍시고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한번 던지고는 그 뒤 걸음이 뚝 끊어진 영구가, 그렇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그립다거나 아쉽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무언지 미안하고 언짢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영구에 대하여 미안하고 언짢은 생각이 들면 들수록, 전과 같이 꾸준히 들러주는 진억의 의젓함이 한결 믿음직하게 여겨지는 것이기도 하였다.
"요즘도 이선생 자주 만나세요?"
계숙은 진억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이렇게 물어보았다.
"자주 만나지 못합니다."
진억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암만해도 영구의 청혼건(請婚件)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한참 지난 뒤, 진억은 고개를 들어 계숙을 쳐다보며,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었다.
"요즘 며칠 안 오세요."
계숙은 통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진억이 쪽에서,
"그 사람 본래 그런 사람입니다. 올 때는 며칠이고 연달아 오다가 안 올 때는 또 몇 달이든지 통 나타나지 않기도 하고……."
"그럼 부산에 계시긴 계시는군요."
이렇게 계숙이 곧장 화제를 영구에게 돌리는 것이 무슨 곡절이나 있어 보이는지 진억이 다시 계숙을 쳐다보며,
"외상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아네요, 그런 건 문제 아네요."
"그럼,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그런 것도 아니지만 늘 오시던 손님이 갑자기 안 오시게 되니 궁금하잖아요?"
"글쎄,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걸 지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리고, 요츰 그런 일이 좀 있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고건 차차 두고 보시면 아시게 될 겝니다."
"지금 말씀하실 수는 없어요?"
"그렇지도 않지만 역시 두고 보시는 게 좋을 겝니다."
진억은 언제나 하는 버릇대로 계숙의 얼굴보다는 건너편 바람벽에 빨강 잉크와 파랑 잉크로 『커피 칠백 원(700圓)』 『밀크 칠백 원(700甲)』 『코코아 구백 원(900圓)』 『나마까시 한 접시 천오백 원 (1,500圓)』 하고, 입춘(立春) 장 모양으로 어슷비슷 써붙여 놓은 벽보판(壁報版) 메뉴를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와 같이 나이 사십이나 된 남자가, 이제 겨우 스물예닐곱 밖에 되지 않은 젊은 여자 앞에서 이렇게 얼굴하나 바로 들지 못하고 곧잘 고개를 수그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건너편 바람벽을 바라보기가 일쑤요, 꼭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아야 할 경우에라도 반쯤밖에 고개를 돌리지 못한대서 이것을 그의 순후(淳厚) 한 성격의 탓으로만 돌린다거나 또는 거리의 만년필 장수라는 직업에서 오는 자격지심이라거나 구겨지고 흙먼지 투성이가 된 낡은 양복에서 오는 수치심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디 착실하고, 순후한 성격이기도 하였지만, 이북에 처자를 두고 온 처지에, 비록 현재 독신 생활을 하고는 있을망정, 함부로 젊은 여자들에게 눈독을 들일 것이 아니요, 또 그것이 상대자(젊은 여자들에 대하여 실례가 되는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 무언지 스스럽고 겸연쩍어 차마 할 수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계숙의 경우와 같이 젊고 아름답고 깨끗한 여자이면 여자일수록 그의 스스러움과 겸연쩍음은 더욱 더 심해지는 것으로 그의 착실하고 순후한 성격의 탓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사춘기 소녀들의 남성에 대한 그것과도 비슷한, 그의 특유한 변태적인 애욕의 발로인 듯도 하였다.
김진억의 이러한 수줍고 스스러운 듯한 옆얼굴을 미소로써 바라보고 있던 계숙은 갑자기 안을 돌아다보며,
"코카콜라 두 잔만."
쳐녀아이에게 턱을 끄덕해 보인 뒤, 또다시,
"애기들 생각 안 나세요."
묻는다.
진억은 고개를 반쯤 돌려 조용히 계숙을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그냥 비죽이 웃어 보이기만 하였다.
"약주는 저녁 마다 하세요?"
"대개 한 잔씩 합니다."
진억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나직하게 대답한다.
이때, 처녀아이가 코카콜라를 어디 가져 갈 거냐고 물었다. 계숙은 일어나더니 탁자 위에 얹혀 있던 위스키병을 내리어 한 쪽 잔에만 좀 타서 손수 들고 왔다.
"위스킬 조금만 탔어요."
계숙은 술이 타진 쪽 잔을 진억의 앞에 놓으며 그의 의향을 물어보는 듯이 진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억은 진억대로 웬 술이냐고 묻는다거나, 하는 인사발도 없이,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역시 건너편 바람벽을 향해 혼자서 비죽이 웃기만 하였다.
그 사이 벌써 코카콜라를 반 잔이나 마셔버린 계숙 ―그녀는 본디부터 코카콜라를 몹시 좋아한다――은 어느덧 얼굴에 생기를 띠며,
"전 저녁마다 코카콜라를 한 잔씩 해야 피로가 쉬 풀려요."
하고, 제법 직업적인 상인(商人)이나 된 것처럼,
"보시는 일 과히 무료하잖아요?"
장삿말도 물었다.
"말씀 마세요."
"왜요?"
"본전 까먹고 있쇠다."
진억은 머리를 쓱쓱 긁는다.
"세월이 없어요?"
"세월이 없는 것도 아니지요."
"그럼요?"
"그런 일이 좀 있습니다."
진억은 또 건너편 바람벽을 바라보며 혼자서 비죽이 웃을 뿐이다.
계숙이 안타까운 듯이 재삼 왜 그러냐고 대답을 재촉하자 왜 그런지 물건이 자꾸 축나간다는 것이다. 축나는 게 무어냐고 물은 즉, 장을 보고 들어갈 때 만년필이 든 상자를 받침대와 함께 건너편 가게에 맡겨두는데 거기서 탈이 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런 법이 있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 혼자 맡기는 것도 아닌데……."
"그럼 상자만 맡기고 물건은 싸서 가지고 들어가시죠."
"그렇잖아도 좀 나은 건 이렇게 가방에 따로 넣어서 가지고 들어 갑니다만……."
진억은 곁에 두었던 불룩한 손가방을 들어 보이며,
"이것도 못할 노릇입니다. 들어갈 땐 대개 친구들과 소주를 한 잔씩 하게 되니 짐을 가지고 다니기도 거북하고, 또 저쪽에서도 눈치를 채게 되니 흡사 내가 허름한 것쯤은 숫제 축낼 각오로 나가는 것같이 보여질 우려도 있고……."
"그럼 여기 들여다 두세요, 제가 보관해 드리죠."
"정말입니까. "
진억은 고개를 반쯤 돌려 계숙을 쳐다본다.
"그럼요."
"그럼 낼부터 실행해도 좋습니까."
"좋습니다."
김진억이 만년필 상자를 계숙의 가게에 맡기고 다니기 시작한 뒤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각별히 친근해졌다. 서로의 인격을 신뢰하고 성격을 존경하게쯤 되니 금전 관계 같은 것도 힘자라는 대로는 어렵잖이 서로 융통해 쓰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친근하게 지내는 중에서도 서로의 사생활이라거나 신상 문제 같은 데 대해서는 전혀 저촉을 피하여 왔다. 계숙이 진억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원산에 가족을 두고 혼자 남하하여 와 있다는 정도요, 진억이 계숙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도 남편이 이북에 납치되어 간 이래 친정 쪽에 의탁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그 정도뿐이었다.
그들이 다같이 대학을 나왔다거니, 본디는 다 양가(良家)의 자녀라거니, 그런 건 모두 알려지면 알았고, 모르면 몰라도 그만이요, 그 이상은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다는 듯한 태도들이었다. 서로의 위인(爲人)을 알고 현재를 보면 그만이라는 생각들이었다.
그것이 영구의 결혼식(혼례)을 계기로 하여 다소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계숙이 그때부터 갑자기 재혼이란 것을 고려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그녀는, 진억이 같은 사람과 결혼을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영구의 결혼은 계숙에게 있어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그가 자기에게 청혼을 하고 돌아간 것이 달포 남짓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 동안에 그렇게도 빨리 혼사가 성립되었을까, 계숙은 일면 놀라며 일면 불쾌하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은 진억이 혹시 잘못 알고 온 것이나 아닐까도 했던 것이, 진억은,
"두고 보십시오, 내일은 당자가 손수 청첩장을 들고 나타날 것입니다."
언젠가처럼 『두고 보십시오.』로 나왔다.
"그럼 그때 선생님이 두고 보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거군요?"
"……."
진억은 말없이 건너편 바람벽을 바라보며 혼자 비죽이 웃고만 있었다. 계숙이 묻는 말을 시인하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계숙은 새침해진 목소리로,
"그이 왜 그렇게 주책없어요?"
비난조로 나왔다.
진억이 당황해하며,
"왜, 무슨,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하자, 계숙은,
"선생님, 정말 이선생한테서 아무 말도 못 들었어요?"
하고 다지는 듯한 태도였다.
"정말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그럼 좋아요. 저도 이선생의 명예를 위해서 말하지 않겠어요."
계숙은 토라진 듯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친구 본래 좀 괴짜니깐요."
진억이 어름어름 변명을 했다.
조금 뒤, 계숙이 먼저 입을 열며,
"이번에 결혼하게 된 이는 처녀예요?"
물었다.
"예예, 그렇다나 봅니다."
"그 여자와 알게 되긴 언제부터예요?"
"아마 꽤 오래 됐을 겁니다."
"언제 쯤이나?……."
"지난 겨울부턴가요."
"어머나!"
계숙은 얼굴이 새빨개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억은 진억대로 무슨 까닭인지 똑똑히는 모르나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는 영구 대신 자기가 계숙에게 톡톡히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아서 부시시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계숙은 진억이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것을 보고도 왜 벌써 가느냐고 인사말 한 마디 던지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영구에 대한 불쾌감은 진억에게까지 파급되어 있는 듯했다.
병적으로 프라이드가 강한 계숙은, 자기야 영구를 어떻게 보든지 문제가 아니요, 영구가 자기에게 두발걸이로 청혼을 했다는 것만 해도 아니꼬운데 게다가 상대자가 쳐녀란 것을 들었을 때 더욱 무슨 모욕이나 당한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진억이 돌아간 뒤 혼자서 조용히 다시 생각해 보니, 자기는 처음부터 영구를 문제시하지도 않았고 또, 영구의 프로포우즈를 일언지하에 물리처버린 것도 자기 차신이었다는 사실이 두드러지게 뇌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보면 근본적으로 정중하지 못한 것은 영구의 위인이요, 자기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는 하등 모욕이나 무시를 당한 것이 아니요, 당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도리어 영구 쪽이라고 자기 자신의 프라이드만은 조금도 다치지 않게 안전지대로 옮겨 놓을 수 있었다. 그러기에 이튿날 영구가 과연 진억의 예언대로 자기의 결혼 청첩장을 손수 들고 진억과 더불어 계숙의 앞에 나타났을 때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쾌감을 얼굴에나마 웃음으로 바꾸어 칠하며,
"오래 간만이에요, 축하합니다."
경쾌하게 인사를 치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계숙의 마음속을 헤아릴 리 만무한 영구는 영구대로 그의 『단도직 입주의』 와 『연극주의』적인 제스처를 발동시켜,
"계숙씨께서는 과연 저의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실 용의가 계십니 까?"
연극조로 말을 걸었다. 순간 계숙은 또다시 울컥 불쾌한 생각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누르며, 갑자기 붉어진 얼굴에 조소(嘲笑) 인지 미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쓰디쓴 웃음을 가늘게 띠운 채,
"좋도록 생각하세요."
한즉,
"그럼 축하해 주신다는 뜻이겠지요?"
다지었다.
"그렇습니다."
"그럼 그걸 증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증명합니까?"
"그날 나와서 신부의 들러리를 서 주시는 것으로써 증명해 주십시오."
"그건 어렵겠어요."
"거절입니까?"
"거절에 가깝다고 생각하십시오."
계숙의 맡과 태도에는 무언지 전과 다른 깔끔한 것이 들어 있는 듯했다.
그러자 영구는 또 언젠가처럼 냉수 컵을 들어서 테이블 위에 잘깍 소리가 나게 놓으며,
"아주머니, 우리 좀 그러지 맙시다."
목소리를 돋구었다.
진억이 등을 밀며,
"자네 이러다 또 실수하겠네."
하고, 영구를 가게 밖으로 밀어내었다.
그날 저녁, 영구를 먼저 돌려보내고 나서 다시 돌아온 진억에게 계숙은,
"이영구 씨 같은 분 제발 좀 오지 않게 해 주세요, 싫어요."
짜증을 부렸다:
진억은 어른에게 꾸지람을 듣는 아이들처럼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세상 살아가는 거 누구나 다 고달픈데 왜 밤낮 와서 집적거리는 거예요, 집적거리기를?……"
“…….”
"선생님이 저와 한 번 환경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세우. 남자는 남자의 세계가 있고 여자는 여자의 세계가 있는 거 아녜요?"
계숙은 웬 까닭인지 진억에게만 화풀이를 하려 들었다.
진억이 크게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으나 계숙이 대신 건너편 바람벽을 바라보며,
"애초에 그 친구가 여기를 먼저 왔습니까, 제가 먼저 왔습니까?"
하고 그도 화가 났는지 사투리까지 섞어가며 한 마디 따지려 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계숙이 좀 누그러진 듯한 목소리로,
"그렇지만 선생님께서도 책임이 있지 뭐예요?"
했다. 진억이 또 한번 바람벽을 바라보며,
한 마디 더 던지고는 그대로 일어나 나가려 한다.
계숙은 진억이 도로 걸상에 앉는 것을 보고,
"코카콜라 내 놨어요."
하며, 일어나더니 여느 때처럼 진억의 잔에만 위스키를 타 주었다.
코카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난 계숙은 먼저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선생님, 삼십 분만 더 앉아 계시다 가세요."
하며, 어느 때보다도 더 아름다운 얼굴로 진억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쪽 곧은 콧대와 길숨한 목덜미는 서릿발이 치도록 희었다.
진억은 말없이 건너편 바람벽을 바라보며 언제나 하는 버릇대로 혼자서 비죽이 웃었다.
"좋으시면 더 하세요. "
계숙은 진억의 잔이 거의 비어져가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진억은 고개를 반쯤 돌려 그 윤기나는 검은 머리털로 위가 좀 가리어진 새하얀 이마 아래 계숙의 이지적인 두 눈을 수줍은 듯이 바라보며,
"괜찮아요?"
하는 것이, 자기는 얼마든지 좋다는 뜻인 듯했다.
"선생님께 지가 화풀이한 벌이에요."
계숙은 상긋이 웃으며 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구가 신혼생활을 시작한 지 달포 남짓 지난 뒤였다. 나뭇잎에 한창 윤기가 흐르는 이른 여름이었다.
이영구 내외로부터 김진억과 장계숙에게 간곡한 초대장이 왔다. 계숙은 물론 그 며칠 전부터 진억을 통해서 영구 자신에게서 이미 여러 차례나 구두로 하는 말을 듣고는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영구란 위인에 대하여 불쾌감을 가지고 있는 그녀로서는 처음부터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건성으로 대답해 두었던 것이 이렇게 백지에 먹글씨로 쓴 정식 초대장을 받고 나니 그냥 거절을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진억이, 오래간만에 국산이나마 새로 맞춘 블랙 그린의 포오라 양복에다 이발까지 하고 진작부터 와서 동행을 청하고 있는 데야 그야말로 각별한 원한이나 있지 않은 이상 끝까지 버틸 수도 없었다.
초대 시간은 오후 네 시로 되어 있었으나, 그녀가 화장을 마치고 연회색 투피스로 양장을 끝낸 뒤 진억과 함께 가게를 나왔을 때는 다섯 시 하고도 반이나 지나 있었다.
"어떤 분들이 초대 받았어요?"
"모르긴 하지만, 계숙씨 이외에 그 친구가 데리고 있는 여기자가 참석하나 봅니다."
"그럼 몇 사람 되지도 않는군요."
"그저 그 정도겠지요."
진억은 눈을 내리깔은 채 의외로 우울한 듯한 목소리였다
계숙은 계숙대로 처음부터 내키지 않는 걸음이긴 하였으나, 오래간만에 화장을 제대로 하고 몸에 꼭 맞는 가벼운 외출복에다 달포 전 외가 혼사 때 처음 신었던 새 구두로, 그 복잡하고 소란한 국제시장을 빠져나와 이렇게 쾌속로로 달리는 차장 밖의 푸른 나무와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 벌써 여름이 다 됐네요."
계숙은 외사촌들의 사투리 말씨를 흉내내어 가며,
"저 수풀 속에 수원지가 있다지요. 선생님 가 보셨어요?"
하고 진억을 바라보는데, 그러나 진억은 고개를 들어 계숙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리킨 수풀 쪽을 멀거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영구 내외가 신접살림을 하는 집은, 동대신동 막바지 『피란상명여학교』로 올라가는 산기슭 밑의 일본식 주택 이층 『육조다다미』 방이었다. 남쪽은 전부가 문이요, 서쪽에 또한 창문이 열려서 초여름 훈풍은 유감없이 불어왔다.
"귀빈들께서 소생의 누옥에 왕림해 주셔서 다시없는 영광이올시다."
영구는 만족한 듯이 그의 장기인 연극조 화술을 써가며 이렇게 인사를 했다. 손님은 과연 진억이 말한 대로 영구와 같이 있다는 여기자 하나뿐이요, 영구의 처가쪽 식모라는 서른 살 남짓 되어 뵈는 이주머니 하나가 일을 거들어주러 와 있을 뿐이다.
영구는 계숙이 자리에 앉자 이내 진억을 보며,
"역시 술부터 할까?"
인사 삼아 한 번 물어보더니,
"거야 주인이 알아 할 일이지."
라는 진억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아내를 보며,
"음식을 내오도록 하시오. "
딴은 점잔을 빼노라고 했다.
그의 아내라고 하는 사람은 살이 뚱뚱하게 찐, 키가 나지막한, 볼에 보조개가 움푹 패이는, 어딘지 아직도 여학생 티가 나는, 스물네 살의 젊은 여자로, 그 자리에 같이 와 있는 여기자와는 여학교 동창이라는 것이었다.
영구 처는 영구의 지시대로 곧 일어나 식모 아주머니와 함께 음식상을 내어왔다.
"아무꺼도 채린 게 없습니다."
영구 처는 영구의 상 위에 덮어 놓았던 흰 종이를 벗기고 나서 경상도 말씨로 이렇게 인사를 했다.
"이만하몬 상당히 채릿십니대이."
영구가 그의 처를 향해 경상도 사투리로 흉내를 내었다.
"친정댁이 경상도세요?"
계숙이 한 마디 건넸다.
"예에, 본대는 경상돈데 서울 가 살다가 1·4후퇴 때 도로 안 내리왔십니꺼."
영구 처는 어딘지 시골사람 같은 힘든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영구가 손가락을 꺼떡 들며, 어이 사이다 하면 예에, 어이 컵, 하면 예에, 어이 냉수, 하면 예에,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시키는 대로 일어났다, 앉았다, 들어갔다, 나왔다하며 도무지 명령일하에 일순의 유예도 주저도 없었다.
이에 비하면 몸도 홀쭉하고, 키도 더 나지막하고 핼쓱한 얼굴에 똥그랸 두 눈이 꽤 영리해 뵈는 여기자는 처음부터 진억에게 노골적인 호의를 보이며, 그가 권하는 대로 술도 한 잔 홀짝 내었다.
"장여자 한 잔 내오다."
영구가 계숙에게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사정한다는 시늉을 했다.
"자 신혼 부부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진억도 곁에서 권했다.
그러고 보니 계숙의 앞에는 술이 석 잔이나 고스란히 그냥 놓여져 있었다. 처음 한 잔은 자기의 것을 그대로 두었고 다른 두 잔은 영구와 진억이 각각 그 첫잔을 내고 건넨 것들이었다.
"죄송하지만 저 술 못해요."
"물 마시듯 마시믄 됩니다."
"정말이에요."
계숙은 이렇게 한결같이 뻗대기는 하였으나 사실상 잔이 모두 자기 앞에만 몰려it있고, 진억과 영구는 잔 하나를 가지고 서로 건네고 있는 것이 미안했다. 그리고 오늘같이 이렇게 크지 않은 잔이면 한두 잔 마셔보아야 문제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저 조금만 들겠어요."
자기의 잔을 들어 반 넘어 주전자에 지운 것을 그것도 두 번에 노놔서 간신히 마신 다음,
"저는 이댁 주부께 드리겠어요."
빈 잔을 영구 처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남은 두 잔의 술을 모두 그대로 주전자에 따른 뒤 진억과 영구에게 하나씩 돌려주었다.
영구는 술이 빨리 취하는 모양이었고 진억은 술이 돌아도 평소와 같이 역시 조용하였다.
영구 처와 여기자는 사교 댄스에 대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영구가 불쑥 계숙을 건너다보며,
"장여사께서 추시겠다고 하시면 제가 축음기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한즉, 계숙이 대답도 하기 전에 여기자가 가로막으며,
"그건 실례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하자, 영구는 어느덧 여기자 곁으로 뛰어오더니 거의 억지로 끌어 일으키며 탱고를 추자는 것이다.
"축음기 가져 오세요, 축음기……."
여기자는 겨드랑이 밑의 영구의 손을 떼어내느라고 이리 꼬불 저리 꼬불 내두르며, 자지러져 웃었다.
영구는 여기자를 놓고 이번에는 그의 처의 팔을 잡으며,
"자, 탱고를 춥시다. 탱고를……."
하고, 이 좁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뒤틀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여기자가 계숙을 보며,
"춤 추시죠?"
했다. 출 줄 아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계숙은 안다고 하기가 싫어서 배우다 말았다고 대답했다.
그 동안 춤을 추다 만 영구가 이번에는 여기자를 밀치고 계숙의 곁에 앉으며,
『단조직입주의』 식으로,
"장여사, 김 군과 결혼하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불쑥 혼담을 끄집어 내었다. 양쪽 곁에 장계숙과 김진억 당사자가 각각 앉아 있는, 그것도 배반(―盤)이 낭자한 자리에서 불쑥 혼담을 끄집어내는 것은 그의 말대로 그의 『단도직입주의』적 성격의 소치인지 그렇지도 않으면 그와 반대로 도리어 악의적인 파괴행 위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있었다.
"결혼이 그렇게 쉽게 되나요?"
계숙은 영구를 거북하게 보면 볼수록 어찌 된 까닭인지 결연히 나와졌다.
진억은 변소에 가는 체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버렸다.
"결혼이 쉬운 거냐고요? 그럼 내가 장여사께 한 가지 묻겠습니다.! 이 세상에 쉬운 일이 무엇이냐고요. 이 세상에는 한 가지도 쉬운 것이 없다면 없는 반면에, 한 가지도 쉽지 않은 것도 없다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궤변 아녜요?"
"천만에, 궤변이 아닙니다. 가장 진보된 현대 사상이요, 현대철학입니다. 극작가란 철학이나 시나 소설을 다 알아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나는 항상 현대 철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입니다마는, 현대 철학에 와서는 과거와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있는 것은 현재뿐입니다. 이것이 과거 철학과 근본적으로 판이한 점입니다."
"선생님, 그건 찰나주의와 어떻게 다릅니까?"
이번에는 여기자가 물었다.
"찰나주의와도 다룹니다. 찰나주의는 어디까지나 순간적인 향락을 추구하는 사상이지마는 실존주의는 순간이고 행복이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서나 우리 인간의 존재를 기준으로 해서 우리 인간의 의지(意志)와 판단과 행동 그 자체에다 절대적인 의미를 두는 겁니다. 찰나주의보다 열 배나 심각하고 엄숙한 사상입니다."
"그래서 그 사상이 들어가면 결혼 같은 것도 아무렇게나 하게 되는 거예요?"
계숙이 또 한번 물었다.
"아무렇게나가 아닙니다. 엄숙한 선택입니다."
"그런 게 무슨 엄숙한 선택이에요?"
"그러면 장여사는 그 이외에 무슨 다른 엄숙한 생(生)의 목적이 있습니까?"
"그거야 살아간다는 거지요."
"살아서 가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
계숙은 대답이 얼른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마침 자리에 돌아온 진억이,
"가긴 어디로 가? 자네 같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다른 사람은 천당으로 가고, 극락으로 가겠지."
하여, 세 사람의 여성을 한꺼번에 웃겨 주었다.
"야아, 야아, 자네는 나가서 만년필 장수나 하게. 자네가 무슨 개뿔이나 안다고?"
영구는 진억보다 나이 한 살 아래지만 옛날부터 친한 사이기 때문에 주석 같은 데서는 흔히 『너』 『나』 하고 욕설까지 나오기 일쑤였다.
"자네는 나가 연극이나 놀게. 실존주의는 무스거 말라 빠진 실존주의야. 생의 목적이 없다면 한껏해야 니힐리즘이나 페시미즘이겠는데 그따위는 누구나 중학 시절에 한 번씩 다 치른 거지 뭐야?"
진억도 술이 돌았는지 손을 흔들어가며, 영구쯤 문제없다는 태도다.
"야아, 야아, 너 기껏해야 경응대학 영문과 나왔다는 것, 그리고 일제시대에 책가게 봤다는 것, 고거 아니야? 너 밑천 누가 모를 줄 아니?"
"자네같이 유치한 애들을 상대해서, 하긴 입을 섞는 내가 잘못이지."
"그럼 너 대답해 봐라. 너는 지금 생의 목적을 인정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너는 지금 무슨 목적으로 여기 앉아 있니?"
영구는 가뜩이나 불거진 두 눈을 까뒤집으며 그 팽이끝 같은 턱으로 진억을 찌를 듯이 대어들었다. 그러나 진억은 입가에 미소까지 띠어가며,
"그럼 자네는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여기 초대했는가?"
여유작작한 부드러운 목소리다. 그러자 세 사람의 여인이 또 한번 소리를 내어 웃었다.
"자네 같은 바보 천치 속물(俗物) 하고는 이야기가 안 돼."
영구도 약간 기가 질리는 듯, 그 무엇에 눌린 듯한 가로만 퍼진 이마를 수그리며 바른쪽 손으로 계숙의 허벅다리를 쿡 짚었다. 계숙이 깜짝 놀란 듯이 자리에서 뒤로 물러나 앉자, 이번에는 여기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미쓰 강, 꼭 한 곡만 상대해 줘."
또 팔을 끌어 일으키자, 『미쓰 강』도 이번에는 선선히 따라 일어서며,
"여기서 어떻게 추어요. 선생님도……."
하고, 바른쪽 손을 쳐들었다.
진억이 벙글벙글 웃으며 상을 한쪽 구석으로 치워주니, 영구는 술기운이 벌겋게 오른 얼굴을 『미쓰 강』 의 이마 위에 대이다시피 하며,
"축음기 대신 내가 멜로디를 부릅니다. 자아, 『사랑의 부루우스』!"
비오는 부산항에서
사랑은 사라져 가네
자욱한 안개 속으로
다시 못 볼 나의 사랑은…….
겨우 몸을 두 번째 돌리려다가 음식상에 걸린 채 영구가 쓰러지자 『미쓰 강』도 그 곁에 엎어져버렸다.
영구가 『블루우스』를 춘다고 여기자를 끌어 일으키고, 이내 상에 걸려 쓰러지고 할 무렵, 계숙은 영구 처에게만 인사를 하고 먼저 빠져나와버렸다. 진억 이 뒤따라 나왔다.
"이왕 나오신 걸음에 바닷가까지 나가 보실까요?"
진억이 오늘은 대담하였다.
“오늘은 바로 들어가겠어요."
"그럼 차나 한 잔……."
두 사람은 보수동 네거리의 『상록』이란 다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도 두 사람은 애정이라든가 이성이라든가 하는 이야기는 비치지도 않았다. 진억은 다만 그가 매일 짐을 맡기는 일에 대하여 감사하다는 뜻을 말했고, 계숙은, 진억과 칼이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는 『선생님』이 이웃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언제나 마음이 든든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여름 한철이 지났다. 여름 동안에도 꼭 한 번 두 사람만이 송도로 나갔으나 피차의 감정 문세 갈은 것에 대해서는 어느 쪽에서도 언급이 없었다. 그보다, 그 무렵 계숙의 밀크호올 안에서 코카콜라를 마시다가, 다른 이야기를 하던 끝에 계숙이 어느 실업가(무역)의 후처 자리에 혼담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진억이 머리를 푹 수그린 채 오랫동안 얼굴을 들지 않기에 계숙이 맘속으로 공연한 말을 했다고 뉘우쳐지기도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로 인하여 무슨 다른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해 가을비가 질금거리는 날이었다. 아침에 날씨가 드는 것을 보고 시장으로 나왔던 진억이, 낮이 다 되어 또다시 빗말이 뿌리기 시작하기에 도로 짐을 걷어 『갈매기』로 왔더니 계숙이 진억에게 점심을 같이 하자고 했다. 중국집을 갔다. 요리 두 접시에 배갈 한 병을 시켜 진억에게 맡기고 계숙은 물만두를 먹으며,
"선생님 장사 일 고단하시잖아요?"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단하지만 하는 수 있느냐고, 그렇게라도 하고 날을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즉, 그럼 당분간 다른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 없다고 한즉, 그럼 자기가 한 가지 제안해도 죽냐고 해서 좋다고 했더니, 실상은 전에 이영구에게서 진역이 옛날 책가게를 봤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거 어울리겠단 생각을 했다면서 지금 또 책가게를 시작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자본이 문제라고 한즉, 조그만 가게 같으면 자기가 낼 수 있노라는 것이었다. 진억 이 우선 흡족한 얼굴로,
"신본입니까. 고본입니까?"
한즉,
"그건 선생님 맘대로 하세요."
했다. 진억은 그럼 자기에게는 고본점의 경험이 있으니 고본올 해보겠노라고 만족하게 대답하며 그 안에 계획서도 꾸며 보겠노라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바로 그 이튿날부터 연 닷새 동안이나 만년필 가게에도 『갈매기』에도 진억은 나타나지 않았다. 필시 앓는 모양이라고 짐작은 하였으나, 미리 주소를 알아두지 않았기 때문에 찾아가 볼 수도 없고 연락을 해볼 수도 없었다. 엿새째 되던 날은 항도신보사에 이영구를 찾아서 진억의 소식을 물어보았다. 영구는 반가운 얼굴로 계숙을 맞아, 근처에 있는 다방에 인도하고는, 그렇지 않아도 계숙을 찾아가 조용히 상의하려고 하던 차이라고 하였다. 무슨 이야기냐고 한즉, 계숙이 진억이와 결혼을 해주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 진억의 병은 순전히 홀아비 생활에서 원인된 것이라 했다. 무슨 병이냐고 한즉 병명도 똑똑히 모르나 대체로 홀아비병일 게라고만 또 한번 되풀이했다. 그런 병명이 있느냐고 한즉 병명이 아랑곳 있느냐고 『신경쇠약증』이라고 하면 알 만하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또 계속하여, 사람이란 밥을 굶어도 못 살지만, 이성에 주려서도 살 수 없는 것이라 했다. 특히 남자는 그러하고, 남자 가운데서도 진억과 같은 중년 남자가 더욱 그렇다는 것이었다.
계숙은 영구의 이야기가 듣기에 거북하였으나, 주소를 얼른 대어 주지 않기 때문에 그냥 참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구는 계숙이 듣기만 하고 앉아 있어서 더욱 신이 나는 모양으로, 혼담에서, 성욕론에서, 결국은 또 철학론에까지 뻗쳐서 『현대 사상』이 나오고 『실존주의』가 나오고 『자유』와 『선택』과 『고민』과 『책임』과 『존재』와 『현재』와…… 이런 따위 술어가 헤아릴 수없이 등장되고 되풀이되곤 하였다.
"그럼 좀 부탁합니다."
하고 계숙이 그에게서 진억의 주소를 알아낼 것도 단념하고 일어서려니까, 그때야 영구도 같이 일어나며, 자기가 직접 인도를 해주겠노라고 하였다.
영주동 큰길에서 차를 내려 산으로 오 분 이상이나 걸어올라가 있는, 주인이 세를 놓으려고 판자로 덧붙여 지은 한 평 가량이나 되는 조그만 방이었다.
영구가 먼저 들어가 문을 여는데 진억은 자리에석 일어나며, 그렇지 않아도 오늘쯤 나가 보려다가, 이왕이면 하루 더 조리해서 나가려고 쉬고 있는 중이라 했다. 계숙이 진작 찾아오고 싶었으나 주소를 몰라서 늦어졌다고 한즉, 진억은 그 수줍은 듯한 웃음을 비죽이 띠우며 수고를 끼쳐서 죄송하다고 했다.
이튿날 『갈매기』에 나타난 진억은 계숙이 대접하는 홍차를 마시며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더니 계숙에게 할 말이 있으니 조용한 데로 좀 나가자고 했다. 시장 가까이 있는 다방으로 가서 진억은 또 먼저와 같이 우두커니 앉아 있더니 무척 힘든 말을 하려는 사람처럼 몇 번이나 머뭇거리고 나서 겨우 입을 뗀 것이 자기는 계숙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다고 말한 다음, 그러기 때문에 계숙의 자본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고 하였다.
"처음 계숙씨가 그 말씀 했을 때 저는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나중 집에 가서 천천히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틀였습니다."
"좀더 명확히 말씀해 주실 수 없겠어요?"
"어떤 점에 대해서 말입니까?"
"싫어지신 이유를……."
"싫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럼요?"
"괴로워졌습니다."
"그럼 괴로워지신 이유를……."
그러자 진억은 또 그 수줍은 듯한 웃음을 비죽이 띠울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닷새나 앓으셨어요?"
"예에. 거기에도 다소 원인이 있는 듯합니다."
진억은 거북한 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계숙의 얼굴에 갑자기 슬픈 빛이 어렸다. 그녀도 고개를 수그렸다. 한참 동안 침목이 흘렀다. 계숙이 또 먼저 고개를 들었다.
"저에 대해서 오해하신 건 없으세요?"
"전혀 없습니다."
진억은 한참 동안 또 고개를 수그리고 있더니, 도로 고개를 들며,
"그보다도 계숙씨에게서 과람한 신세를 지게 되니, 그와 동시에 저의 마음이 복잡해져버렸습니다. 저의 주제로는 주체할 수 없는, 완전히 분수에 넘는 감정 이지요."
진억은 목이 메인 듯이 더 잇지 못했다.
계숙이 슬픈 얼굴을 들며,
"그건 그거고 사업은 사업 아니겠어요?"
"저는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요?"
"가령 지난 여름만 해도 계숙씨는 어떤 실업가에게서 혼담이 있었다고 말씀하시잖았어요?"
"……."
"만약 그 혼담이 성립됐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경우라도 사업 계속될 수 있을까요?"
"물론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것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때 제가 그 말씀을 드린 것은 제가 그것을 거절한 뒤였기 때문예요. 그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선생님께서 만약 상대해 주신다면 사전에 선생님의 양해를 받기 전에 단독으로 결정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계숙은 말을 마치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정강마루가 사뭇 와들거렸다.
진억은 고개를 수그린 채 낮은 목소리로 말을 더 계속하였다.
"어느 의미에서나 제가 계숙씨께 감정을 운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파렴 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계숙씨께서 그만치 말씀하시니 그럼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을 고치겠습니다."
계숙은 웬 까닭인지 곧장 느껴 울고 싶은 충동에 전신이 와들와들 떨려옴을 깨달으며, 그 와들거리는 두 무릎을 두 손으로 힘껏 누르고 있었다.
그해 동짓달에 진억과 계숙은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는 이미 계숙의 밀크호올에서 멀지 않은 국제시장 변두리에 책가게까지 잡아두고, 진억은 서울에 고본을 구입하러 갔고, 계숙은 그의 집과 살림을 돌아보러 갔던 것이다.
그들이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는 통행금지 시간도 훨씬 지난 열한 시 십오 분 전이었다. 여섯 시 삼십 분에 도착할 것이 네 시간 이상이나 연착이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손님 청하는 아이를 따라 역에서는 멀지 않은 여관으로 갔다. 그리하여 아이가 인도하는 대로 같은 방에 들어갔다. 여관에서도 딴 방으로 쓰겠느냐고 묻지 않았고, 그들 쪽에서도 따로 그것을 주문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쪽보다는 훨씬 추운 서울의 밤이라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서로 상대자의 체온을 요구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쪽에서도 침구를 같이 하자고는 하지 않았다. 더구나 진억은 양복바지까지 입은 채 자리에 들어갔다.
이튿날은 여관을 종로 쪽으로 옮기었다. 계숙은 효자동에 있는 그녀의 집을 돌아보고 저녁에는 진억과 함께 역시 여관에 와서 잤다. 그렇게 서울서 나흘 밤을 묵은 뒤 그들은 도로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그 걸음이 그대로 그들의 혼행이요, 신혼여행올 겸한 것으로 되었던 것이다.
서울을 다녀온 바로 다음 달부터 계숙의 몸에는 생리적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계숙은 먼저 그 어머니의 양해를 구한 뒤, 친정식구들만의 승인 아래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구 월에 계숙은 아들아이를 낳았다.
계숙이 몸을 푼 지 달포 채 못 되었을 때였다. 진억이 책가게를 보고 있는데, 하루는 어떤 낯선 군인이 찾아와서 여기가 김진억씨의 가게냐고 물었다. 자기가 김진억이라고 한즉, 군인은 경례를 새로 붙이고 나서 자기는 동부전선의 최천선에 있다가 잠깐 휴가를 맡아왔다면서 경희라는 여자를 아느냐고 물었다. 진억이는 얼굴빛이 질리며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군인은 다시 선생님의 큰따님의 이름이 경희냐고 고쳐 물었다. 진억이 그렇다고 한즉, 군인은 그제야 안심을 하며, 바지 뒷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어 넣었던 쪽지 한 통을 내어주었다.
겉에는 『김진억씨 좌하』라 쓰고, 안에는 『아부지전 상서』라 씌어 있었다.
아부지 그 동안 객지에서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우리 가족은, 아부지가 배로 떠나신 지 사홀 만에 『뻔들아주머니』네 식구들과 함께 걸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처음 『속초(柬草)』까지 와 있었는데 그 이듬해 봄에 국군이 속초까지 쳐들어왔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북으로 달아났지만 저희들은 아부지가 계시는 이남으로 올 생각으로 굴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유 월달에 우리 가족은 또 걸어서 양양까지 왔습니다. 그리하여 양양서 박 대위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박 대위님에게 많은 수고를 끼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무사합니다. 이남으로 내려가재도 아부지의 주소를 몰라서 못 갑니다. 하루바삐 아부지를 만나기를 고대합니다.
시월 삼십일 경희 올림
편지를 읽고 난 진억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군인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가, 생각난 듯이 가족들이 폐를 많이 끼쳐서 죄송하다고 인사말을 했다.
군인은 또다시 경례를 붙이고 나서, 실상은 금년 봄에도 양양서 부산 오는 동료가 있기에 주소를 좀 알아오라고 부탁을 했었는데 그 군인이 사흘을 찾아도 못 찾고, 그냥 돌아왔더라는 것이었다. 이번에 자기를 『함경남도 사무소』에 가서 재부함남인(在釜咸南人) 성명 전부를 조사한 뒤 한 사람씩 물어가서, 결국은 국제시장에 만년필 장사하는 윤선기라는 사람에게서 진억이 여기서 책가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진억은 군인에게 점심 대접을 한 뒤, 실상은 자기도 가게를 보고는 있지만 가게 주인은 따로 있고 생활이 막연하니 자기가 우선 방칸이라도 마련한 다음 다시 기별할 때까지 고생이 되겠지만 좀 더 참아달라는 요지의 부탁을 하고 현금 이십만 원을 군인에게 주며 이것으로 아이들의 신말이라도 사다주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본디 자식에 대한 정이 놀라운 진억은 군인이 다녀간 뒤부터 네 아이의 얼굴이 노상 눈앞에 아물거려 정신이 어지러울 때가 많았다. 잠을 자다가도 흔히 『경희야!』 『성호야!』 하고 아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가 있어, 본디 마음속은 선량한 편인 계숙이지만 진억의 이러한 잠꼬대에는 상당히 신경이 질리는 모양으로 그럴 때마다 한 이틀씩이나 진억이와 통 말을 건네지도 않는 채 냉전 상태에 빠지곤 하였다.
이러한 계숙이 괘씸하다기보다도 오히려 미안하고 죄송스럽게만 생각되는 진억은 진억대로 그렇다고 해서 요즘 가뜩이나 파리해진 계숙에게 그 군인이 전해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도 없고, 그 늘어가는 흰 털과 반비례로 약해져 가는 것은 심장뿐이었다.
게다가 그해 겨울엔 일찍이 없던 큰 화재로 인하여 국제시장이 온통 잿더미가 되는 통에 밀크호올 『갈매기』도 재가 되고 말았다. 진억이 책가게만은 다행히 국제시장 변두리에 있어 타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한 짐을 대개 이쪽에다 옮겨놓을 수는 있었지만, 그러나 책가게에는 뒤에 따로 방이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 세 식구 ―밀크호올에 있던 처녀아이는 당분간 쉬게 했다.-―가 당장 거처할 곳이 없어졌다.
진억과 계숙이 동거를 시작하고, 아기를 낳고 밀크호올을 태우고 한, 일 년 남짓 되는 동안, 영구에게도 변화는 적지 않았다. 결혼한 지 일 년 남짓밖에 되지 않은 그의 아내와는 어느새 이혼을 하고, 직장도 『항도신보』에서 『현대세계』라는 잡지사로 바뀌게 되고, 주소도 동대신동 막바지에서 동광동 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그가 들어 있는 동광동 집은 본디 『농은』 사택인데 해방직후 『귀환동포 수용소』로 쓰기 시작한 것이 그 뒤 줄곧 거주자들의 『자치 아파트』같이 되어 방 하나하나씩이 독립된 집처럼 매매되는 형편에 있었다. 그런데 영구가 갈 곳이 없어 쩔쩔매는 것을 장사하는 친구가 자기는 다른 집을 사 가면서 영구에게 임시로 빌려준 것이었다.
영구는 진억이 방을 구한단 말을 듣고 뛰어와서 마침 잘 되었다고, 지금 자기가 있는 집에, 자기와 마루 하나 건너 좋은 방이 났으니 빨리 와서 흥정을 하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방에 오기만 한다면 뒤로 통하는 복도를 막을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자기네들 두 집만 완전히 독립된 것처럼 조용히 살 수 있고, 또 두 칸 반이나 되는 마루도 그들만이 완전히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계숙이 영구와 같이 가서 살펴보고 오더니 집은 과연 영구의 말대로 값이 싼데 비하여 독집같이 편리하게 쓸 수는 있겠으나, 영구가 혼자 자취를 하고 있으니, 그들이 가게 되면 얼마나 염치없이 나올지 알 수 없고, 또 그 『실존주의』인가 하는 놈의 강의를 아침 저녁 들으라고 할 테니 어떻게 견디어 내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진억은 우선 거처할 곳이 딱하니까 임시로나마 붙잡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그리로 옮기게 되었다.
진억과 계숙이 동광동으로 옮기자 영구는 과연 흡족한 얼굴로 저녁 마다 그들을 찾아와서는 실존주의를 강의하기에 게으름이 없었다. 특히 영구가 강조한 것은, 계숙과 진억이 처음엔, 『생(生)』에 무슨 예정(豫定)된 목적이나 이념(理念)이 있는 것처럼 실존주의를 반대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실존』 그 자체에 항복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는 그들은 지금 부부가 되어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계숙은 영구의 실존주의 강의가 듣기 싫어서 일부러 집에도 늦게 돌아올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가 다시 국제시장으로 옮겨 나가려면 아직도 일이 개월은 더 참아야 했다. 그 밀크호올 자리에는 이웃가게와 합동으로, 판잣집이 아닌 이층 건물을 신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어느 날一그 무렵 계숙은 임시로 다른 동무와 함께 양품점을 내고 있었다. ㅡ진억이 마침 놀러나온 영구와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어떤 열댓 살쯤 나 뵈는 소녀 하나와 열 살 남짓 되어 뵈는 사내아이 하나가 책가게 앞에 나타났다. 두 아이는 갸웃갸웃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진억은 가슴이 설렁했다. 아이들은 그러한 진억과 시선이 마주치자 곧 가게 안으로 뛰어들어오며,
"아버지!"
하고, 소리쳐 불렀다.
진억은 처음 그것이 꿈인지 아닌지를 분간하려는 듯이, 걸상에 앉은 채 정신나간 사람처럼 눈을 두어 번 끔벅끔벅해 보았다.
영희가 손등으로 눈을 가리며 느껴 울기 시작했다. 성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진억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너, 너희들 언제 왔니?"
진억이 비로소 걸상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물었다.
"지금 왔어요, 어머니도 저기 있는데……."
영희가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영구가 먼저,
"어디?"
하고 가게 앞우로 나가더니,
"아이, 저기 과실전 곁에, 겨무데기 위에, 보퉁이랑 셋씩이나 놓고, 꼬마랑, 안고 앉아 계시네."
하고, 연방 손가락질을 해가며, 진억이더러 얼른 나와보라고 재촉을 했다.
진억이 영구가 서 있는 가게 앞으로 향해 두어 걸음발을 옮겨놓을 때였다. 저쪽 행길 건너 가게의 유리창문이 거울같이 그의 머릿 속에서 기우뚱함을 느끼며,
"아이, 어지러워…….“
하는 소리와 함께 가게 문턱 위에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진억은 영구의 부축을 받아 차에 오른 뒤, 병원까지 갔을 때는 다시 정신이 돌아와 있었다. 그의 귀에는,
"졸도라도 염려 없습니다. 심한 현기증 같은 겁니다."
하는 의사의 말소리 까지 들렸다.
두 시간쯤 뒤, 그가 다시 차를 타고 동광동으로 갔을 때는 아이 셋과 아내가 이미 거기 와 기다리고 있었다. 진억이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영구가 딴은 민첩한 행동을 하노라고 한 짓이었다.
진억이 방에 들어오자 자리에 누웠다. 눈도 감은 채였다. 온 얼굴에 새까만 기미가 끼고, 나이도 한 쉰이나 가까이 되어 보이는 그의 아내는 남편을 위로하는 말인지 원망하는 말인지,
"뉘기 아바이 속으 모르오. 뉘기 아바이더러 생활으 책임지라오, 내사 두 해 동안 법으 해 팔고도 넉넉 살아왔소. 여기서도 난 밥으 해 팔겠소. 아이들이 하도 아바이 보고 싶어하이. 왔지, 아바이 걱정시키러는 앙이 왔소……."
하고, 그의 친정(정평) 쪽 사투리를 섞어가며 넋두리 비슷이 말했다.
큰딸은 어디 갔느냐고 이번에는 영구가 물었다. 부인은 좀 머뭇거리더니 출가를 시켰노라고 했다. 그리고는 또 말을 이어, 작년 가을에 여기 한 번 다녀간 그 박 대위라는 군인이 사위가 된 것이라고 첨부하였다.
진억은 괴로운 듯이 손을 들어 영구를 부르더니 일단 여관으로 자기의 가족과 짐을 모두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나중 계숙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영구가 진억의 가족 네 사람과 보퉁이들 ㅡ큰 것은 영구의 방에 옮겨 놓은 채 ―一을 다시 여관으로 옮겨 간 뒤였다. 밖에서 그냥 진억이 졸도했단 말을 돋고 들어온 그녀는 바로 진억의 곁으로 가 그 이마를 짚으며,
"좀 어떠세요?"
나직 하게 물었다.
진억이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대꾸도 없는 것을 보자 계집애(식모아이)를 돌아다보며,
"의사 다녀 갔니?"
하고 물었다.
계집애는 무언지 겁에 질린 듯한 얼굴로 대신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퀭해진 눈으로 계숙을 바라보았다. 무슨 곡절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니, 이선생은 안 들어오셨니?"
계숙이 이렇게 또 바쁜 듯이 묻자, 계집애는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목소리 로,
"손님 하고 나갔어요."
했다. ˙
“어떤 손님……."
“이북서 오신 손님…….”
"이북서."
계숙은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러자 계집애는 이내 턱으로 진억을 가리키고 나서, 그 겁에 질린 듯한 퀭해진 눈으로 계숙을 말끄러미 쳐다본다. 순간 계숙은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거의 들리지도 않는 가는 목소리로,
"아이들도?"
하고 물었다. 계집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기 아주머니하고……."
하자, 계숙은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불에나 덴 것처럼 당황히 돌아서 나갔다. 섬돌 위에 벗어 둔 구두를 신고, 무슨 급한 일이나 있는 것처럼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이내 도로 돌아 들어오더니, 또다시 돌아서 밖으로 나갔다가 또 한번 다시 돌아 들어왔다.
"얘, 저기 가 활명수 한 병 사와."
계숙은 계집애에게 이렇게 시키고 나서 자기는 바쁜 듯이 버들상자를 열어 젖히고 옷 보퉁이를 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반쯤 꾸리다 말고 도로 방구석에 그대로 동댕이를 쳐 버린채, 활명수를 받아 한숨에 꼴칵꼴칵 마시며,
"얘, 이 애 좀 깨워서 업어라."
이번에는 잠들어 있는 어린애를 가리켰다.
그때 마침 여관에서 돌아오는 영구가 『드라이진』 한 병을 들고 진억이 누워 있는 곁으로 오며,
"사상의 빈곤이야, 사상의 빈곤! 사상이 빈곤한 자는 알콜의 힘이라도 빌려야 하는 거야, 자아 일어나게, 진억이 일어나 같이 한잔하세."
하고, 컵에 가뜩 부은 술을 눈도 감은 채 누워 있는 진억의 얼굴에다 디밀었다. 그는 오다가 이미 한잔 좋이 걸친 모양으로 벌써 반쯤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이선생 미안하지만 저 마루에 나가 잡수세요. 병자가 있으니까요."
계숙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병자? 병자는 무스거 병자? 사상의 빈곤이야, 사상의 빈곤! 사상이 빈곤한 자는 알코르 힘이라도 빌려야 사는 거야! 자아 아지마이 어디 한잔! 졸도르 하고 싶소? 졸도르 앙이 하겠으면 이 잔 들어요. 이술으!"
영구는 컵에 가득 부은 술을 계숙에게 내밀었다.
증오와 경멸의 불길이 활활 타는 눈으로 영구를 노려보고 섰던 계숙은 대어들어 따귀라도 갈길 듯이 두어 걸음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서더니 다음 순간 그녀는 컵의 술을 받아서는 한숨에 반 넘어 쭉 들이켜버렸다.
"됐어 ! 됐어! 부라뽀야, 부라뽀오!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이제는 아는 거야! 됐어, 됐어! 부라뽀오! 부라뽀오!"
영구는 기쁨에 못 이긴 듯이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 엉덩이를 흔들며 춤추는 시늉을 내었다.
식모아이가 뛰어나와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뺏으려 하자, 계숙은,
"얘, 놔 두어, 나, 이선생하고 같이 마실 테다!"
하고 계집애를 밀쳤다.
"오오 이에수! 오오 부라뽀오! 오오 엑지스탄시알리점! 오오 마이 미세스! 오오 마이 하아트!"
영구는 반 미친 사람처럼 두 팔을 벌린 채 온몸을 뒤틀며 엉덩이를 흔들어대었다.
"그렇지요, 이선생! 저도 춤출 줄 알아요, 거, 이선생 잘 추시는 거 있잖아요. 무슨 부루우스라는 거!"
계숙은 어느덧 영구의 가슴 앞에 다가서며 그의 손을 잡았다.
"오오 이에스! 마이 비이너스 오오! 마이 하아트!"
영구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마루로 나가, 언젠가 그의 신혼생활 때 『미스 강』을 끌어 일으켜 억지로 추던 『사랑의 부루우스』란 것을 흥얼거리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스텝을 떼어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두 걸음도 옮기기 전에 이내 홀드를 풀고 다시 붙잡으려는 영구의 손을 뿌리쳐버린 채 옆으로 비출비츨 두어 걸음 옮기려다 말고 그대로 마루 위에 쓰러져버렸다.
-끝-
2016년 11월19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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