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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 5:1 |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
드디어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장면입니다. 이는 바로에게는 폭탄적인 선언이었을 입니다. 달리 말하면 선전포고(宣戰布告)인 셈입니다. 이에 대해 바로가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 그리고 이 폭탄적인 선언은 어떤 결과를 몰고 올 것인가?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에게 어떻게 나올 것이며, 결국 모세는 하나님께 무엇이라 불평하게 되는가? 이것이 6장에서 관찰하게 될 과제입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5) 여호와가 누구관대 보내겠느냐
둘째 단원(6-21)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셋째 단원(22-23)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첫째 단원(1-5) 여호와가 누구관대 보내겠느냐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2).
모세가 바로 앞에 들어가서 대언(代言)한 말은 일관되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기리라”(7:16, 8:1, 20, 9:1, 13, 10:3)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① 바로가 노예로 부리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과,
② 그러므로 그들을 보내라는 것과,
③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가 아니라 나를 섬기리라 하십니다.
이에 대한 바로의 반응은,
① 여호와가 누구관대,
②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③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바로의 반응입니다. 바로의 입장에서야 “이제 나라에 이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로 역사를 쉬게 하는도다”(5) 한 대로 많은 노동력을 잃고싶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싸움은 “여호와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는(7:5, 17, 8:10, 22)데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들은 다름 아닌 여호와가 누구인가를 알리기 위한 자기 계시였던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재차 말합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3). 이는 3:18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출애굽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해방만 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나라건설에 있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흘 길쯤 광야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하시려는 것인데 이것은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2)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의 1차 목적지는 가나안이 아니라 시내산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첫 언약”(히 9:18)을 체결해야만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워주신 언약에 의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어음을 갖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 약속이 시내산에서 언약으로 체결(24:7-8)이 된 것입니다.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3:12) 하셨는데 그들은 출애굽 한 후에 시내산에 1년을 머물면서 정성을 다하여 성막을 만들므로 실제로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란 말속에는 이런 의도가 함의되어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육적 출애굽 때에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시내산”에 가서 짐승의 피로 뿌림(24:8)을 받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림자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영적 출애굽 때는 시내산이 아니라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하신 갈보리 산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벧전 1:2)을 받아야함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단원(6-21)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9).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결과는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평안을 준 것이 아니라 더욱 무거운 고역과 수고를 가져다 주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합니다.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말고 그들로 스스로 줍게 하라 또 그들의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로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6-9)고 명합니다. 그러므로 고역이 배나 가중되게 된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할당된 벽돌 수효를 채우지 못하게 되자 “바로의 간역자들이 자기들의 세운바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을 때리는”(14) 박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이점은 복음전도자들도 경험하게 되는 바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줌으로 인하여 그가 시련과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을 목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사람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복음>을 듣지 않게” 하려는 사탄의 궤계인 것입니다.
이는 의외(意外)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바입니다.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3:19-20)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패장들은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21)고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리려하시는데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손 대대로 대물림을 하고 있는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결의도 몸부림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로마서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롬 5:6) 한 연약함입니다. 그들은 자력으로는 물론 하나님께서 구출해 내시려는 데도 일어설 힘조차 없을 만큼 연약한 상태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할 불신자들의 영적인 상태이기도 합니다.
셋째 단원(22-23)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22).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23)고 불평합니다. 모세의 불평이나 백성들의 원망하는 그 마음은 이해할 만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나 오늘 우리들에게 중요한 오해가 있다는 점입니다. “구원”을 만사형통이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쯤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오해입니다.
그리하여 시내산 기슭에서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기도 하고, 내려주시는 만나를 매일 같이 먹으면서도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민 11:5-6) 하고 어처구니없는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광야생활이 고생스러워지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5) 하고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애굽에서 구출해 낸 것을 도리어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아닙니다. 영혼구원운동은 “피 흘리기까지”(히 12:4) 싸워야 하는 영적 전투인 것입니다. 이를 알았기에 바울 사도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할 것이라”(행 14:22)고 미리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7-58)고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형제에게는 이 각오가 되어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