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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한 번에 설교하기
본문 : 2:16-19절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2: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주제 :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강론
골로새교회는 바울의 전도로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2:1절에 보면 골로새 형제들을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골로새교회는 바울에게 복음을 받은 “에바브라”(1:7)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촌수로 하면 바울의 “손자”격인 셈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4:18)한 대로 로마옥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골로새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1:7-8절에 의하면 에바브라가 바울을 찾아와서 골로새교회에 이단이 침투했다는 긴급한 보고를 합니다. 이단에 미혹된 이들을 바로 세워주기 위해서 보낸 서신이 “골로새서”입니다. 그러므로 골로새서는 이단(異端)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한국교회에도 적실성이 있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골로새서는 크게 교리와 윤리라는 두 부분(1-2장, 3-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골로새서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두 구절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단문제를 두 가지 주제(主題)로 치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주제의 의미를 바로 알고 붙잡고 있기만 한다면 이단의 미혹을 넉넉히 물리칠 수가 있다 하겠습니다.
① 첫째 주제는 1:18절입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합니다. 에베소서는 “교회는 그의 몸이라”(엡 1:23)고 강조점이 “몸”에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중심주제를 “그의 몸이라”한 “교회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골로새서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강조점이 “머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를 “기독론”(基督論)이라고 말합니다. 이단의 오류가 무엇인가? 기독론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② 둘째 주제는 2:19절입니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합니다. 이단들도 성경을 논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엽적인 것을 과장해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왜 이단에 미혹이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시라는 점에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혹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단에 미혹되지 않는 데는 비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단에 미혹을 당합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1차적으로는 본인 자신에게 있다 해도 성도들의 믿음의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엡 3:17) 세워주지 못한 설교자의 책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① 그러므로 최우선적으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를 아는 것이 “그리스도론”(기독론)인 것입니다.
사도는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를 1:15절에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하고 시작하여 1:20절에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논증합니다.
㉠ 15절에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이점을 요한복음 1:18절에서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 16절에서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다”, 즉 창조자라고 말씀합니다. 이점을 요한복음 1:3절에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 그런 후에 18절에서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고 증언합니다. 우리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에 확고하게 되셨습니까?
② 그러면 둘째로, 그런 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행해주셨는가에 확고해야만 이단에 미혹을 당하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1:20절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즉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왜 죽어주셨는가?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1:20하)고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어주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1:22절에서도,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해주셨다고 “죽으심”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누가 죽어주셨다는 말씀입니까? 누가 화목하게 행해주셨다는 것입니까? “창조주시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위해서 죽어주셨다는 것입니까? 1:21절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하면 안색이 변하는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나를 위해서 죽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10절에서도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에 확고해야만 구원도 얻고 이단에 미혹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행해주셨는가에 확고해졌으니 이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머리를 붙드는 것인가”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이점에서 2장의 문맥을 주목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2: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고 시작하여 7-18절까지 말씀한 후에 2:19절에서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고 말씀하는 문맥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 있는 2:7-18절의 내용이 무엇인가? “머리를 붙드는 것과, 붙들지 않는 것”을 말씀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 2:7절에서는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서론적인 말씀을 합니다.
㉡ 그런 후에 2:8절에서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즉 머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철학적인 설교”가 성도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고 유익을 줄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나 성도들이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헛된 속임수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설교를 10번 100번을 들어도 그것은 복음이 아니요 거듭나게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 아닌 “세상의 초등학문”과 같은 설교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 머리를 붙드는 핵심이 13-15절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13),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14),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15)합니다.
14절에 “법조문으로 쓴 증서”가 있는데 이는 쉽게 말하면 죄 값에 팔린 우리의 “노비문서”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증서를,
㉮ “지우시고,
㉯ 제하여 버리사”, 즉 찢어버리시고
㉰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합니다.
신약성경 중 주님의 승리를 가장 통쾌하게 묘사하고 우리의 죄가 남김이 없이 의문의 여지가 없이 완전히 해결이 되었다는 점을 가장 명명백백하게 증언하고 있는 대목인 것입니다. 이를 믿고 확신하는데 거하는 것이 “머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2:16절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합니다. 17절입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합니다.
18절입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이런 것들은 머리를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중심주제인 19절에서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후에 2:20절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즉 머리를 붙들지 않는다고 책망합니다. 갈라디아 형제들에게는,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갈 4:9)고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단의 오류가 어디에 있고 “머리를 붙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확실합니까?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들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심”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완결이 되었다는 점과 사망의 세력을 잡은 사탄을 멸하셨다는 복음의 중심주제를 붙들지 아니하고 지엽적(枝葉的)인 것들을 구원의 조건인 양 내세웠던 것입니다.
오늘의 이단들이 내세우는 것들도 동일한 수법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붙들지 않는다는 말씀은 골로새교회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 교회냐, 거짓 교회냐를 분별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요점인 것입니다. 이점에서 “머리를 붙들도록” 견고하게 세워주지 못한 설교자의 책임을 통감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오늘의 대부분의 설교는 “머리를 붙들게”해주는 설교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에 긴급하게 요청되는 점은 성도들에게 “머리를 붙들게” 해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해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는가를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 “머리를 붙들라”고 강조하기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해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는가 하는 점을 확고하게 세워주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머리”라는 주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분은 사도 바울 외에는 없습니다. 바울의 서신인 고린도전서에만 “머리”라는 말이 17번 등장하고 에베소서에도 4번 등장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디에 근거해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시라는 점을 깨닫고 힘 있게 증언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점을 에베소서 5:23절에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한 증언을 통해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라 한 것은 창세기 2장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보시고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지어주셨습니다. 어떤 방도로 지어주셨습니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는 아담의 몸이요, 아담은 하와의 머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미처 모르셨단 말인가? 아닙니다. 이를 통해서 깨닫게 하시려는 중요한 계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서 마지막 아담(고전 14:45)의 배필이 되는 것이 가능했는가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깊이 잠들게 하심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오,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신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해서 우리의 머리가 되셨는가에 확고해졌으니 그러면 2:9절을 보겠습니다. 머리되시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합니다. 이어지는 10절이 중요한데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고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어찌하여 이단에 미혹을 당하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빈 깡통인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쭉정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련한 모습을 하고 “주십시오, 주십시오”하다가 이단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골로새 성도들에게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충만”해지는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여졌는지 아십니까? 바로 “머리와 몸”이라는 관계성 때문입니다. 머리만 충만하고 몸은 텅텅 비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찬양하는 것이 시편 133편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시 133:1-2)합니다.
대제사장인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 기름이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즉 손끝 발끝까지 흘러내립니다. 이 그림자를 통해서 대제사장이시며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기름 부으심”이 몸 된 교회의 모든 지체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흘러내림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머리에게 되어 진 모든 일(죽으심과 다시 사심, 고난과 영광)은 동일하게 몸에도 되어 진 일이라는 것이 연합교리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머리와 몸”은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2:3절입니다. “그 안에는”, 즉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합니다. 그런데, 2:6절입니다. “너희가 (모든 보화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2:6)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란 “충만”할 뿐만이 아니라, “모든 보화”를 소유한 자들인 것입니다.
“충만, 보화”만이 아닙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합니다. 이점을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합니다. 얼마나 놀랍고도 영광스런 말씀입니까?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으로 몸도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머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이단에 미혹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3:4절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리의 낮은 몸도 주님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는 뜻입니다. 이보다 더한 영광스러움이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교회가 담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 1:28절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합니다. “전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까?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즉 환난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이단에 미혹을 당하지 않도록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우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 바울은 이를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1:29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씀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주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 안에 계시어 그를 종으로, 도구로, 의의 병기로 사용하여 증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을 다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할 책임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몸 된 지체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는 말씀은 골로새 교회에 국한된 말씀이 아니라 현대교회가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고 철학과 같은 세상 초등학문으로 설득하려 한다면 이는 분명 머리를 붙들고 있지 아니한 설교자인 것입니다.
㉡ 축복을 “십자가의 피”보다 더 많이 말하고 있다면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머리를 붙들고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 기사와 이적과 방언이나 신유 등을 그리스도의 대속이나 칭의 교리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면 이는 머리를 붙들고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런 설교로는 성도들을 “머리를 붙들게” 해주지를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고 오늘과 같은 날이 이르게 될 것을 경고했습니다. 그 때가 지금이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베도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고 권면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을 차려야 할 혼란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꽉 붙잡고 계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성숙(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열심히 배우십시다. 그리고 전파하고, 가르치고, 자랑하십시다. 그 분 자신을 소유한 것으로 만족하고 항상 기뻐하십시다. 그리하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롬 8:37) 될 것입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실”(벧후 1:11) 것입니다. 아멘.
“머리를 붙들면”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가 나옵니다. 감사하게 됩니다. 머리를 붙들면 환난 날에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머리를 붙들면 넉넉히 승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한 골로새서입니다. 이것이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다”가 "신 천지 아웃"하는 부끄러운 한국교회입니다.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몸을 아끼고 사랑하듯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
주께서 우리게 명하시니 그 명령 따라서 살아가리 (218장)
첫댓글 할렐루야!!
귀한 생명의 말씀 감사합니다
격려, 고맙고 힘이 됩니다. 아멘.
목사님~~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