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France) 부르봉(Bourbon)의 성립(2) 이길상 다. 루이 13세(Louis XIII / 1610∼43)의 프랑스 (1)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edicis / 1573~ 1642)
겨우 열 살인 그의 장자가 즉위하여 루이 13세가 되었고,앙리 4세의 後妃 마리 드 메디시스는 섭정(攝政)이 되어 프랑스의 정치는 그의 손으로넘어갔다. 그녀는 이름에서 보여 주듯이 피렌체의 상인군주 메디치가(家)출신으로, 토스카나공(公)의 딸이었다. 메디치가에서 프랑스 왕실로 시집 온 것은그녀가 처음은 아니고, 이전에 이미 앙리 2세의 왕비로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있었다. 발루아 왕조의 앙리 2세가 메디치가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결혼,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등의 많은 자녀를 두고 죽은 후, 그녀 역시모후로서 섭정했을 때, 위그노 전쟁이 일어나 프랑스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를수습하고, 신, 구 교도간 화해하기 위해서 그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신교도의우두머리 나바르 드 앙리와 정략결혼을 시키게 되었는데, 이 딸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서 신교파의 거물들이파리에 모여들자 이를 다시 정략적으로 악용, 저 유명한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1572.8)을 감행하였고, 그 때의 신랑이 후일 부르봉왕조를 연 앙리 4세였다. 그 후 앙리 4세는 마르그리트가 왕자를 낳지 못했다는이유로 그녀와 이혼, 마리 드 메디시스와 재혼했는데, 왕자를 낳지 못했다는 것은핑계고 돈 많은 메디치家와 혼인해서 처가의 재력을 빌려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서정략적으로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 되었거나 이로서 프랑스 궁정에는 일대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이탈리아 인의 프랑스 지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마리가 어릴 때 대리고 다녔고, 출가하면서 같이 프랑스로건너온 요부(妖婦)로 이름 난 레오노라 갈리가이와 바람둥이 그의 남편 콘치니 콘치노(Concini,Concino)가 국정을 좌우했고, 쉴리를 비롯한 앙리 4세 때의 중신들은 모두 자리에서쫓겨났다. 이렇게 되자 불만으로 가득했던 귀족들은 쿠데타를 계획하고, 부르봉가계의대귀족 콩데공(公)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파리로 향했다. 이에 다급해진 마리측에서는 막대한 돈을 주기로 하고일단 和議, 급한 발등의 불은 끘으나,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는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하였다. 그러면 누구를 파트너로 삼아야 하겠는가? 여기에서독실한 카톨릭교도였던 마리는 그의 남편, 앙리 4세의 구적(仇敵)인 스페인과 손잡기로 하고 그 방법으로 14살의 루이 13세를 같은 나이인 스페인의 왕녀 안 도트리슈(펠리페3세의 딸)와 결혼 시키기로 하고 국민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전국삼부회를 소집했다(1614.10) (2) 재상 리슐리외(Armand-Jean du Plessis, cardinalet duc de Richelieu / 1585 ~1642)
비록 권위없고 국왕의 주도하는 일방적인 의회라고는하지만 각 신분의 대표들이 170년 이상 한 번도 한자리에 모일 수 없었다면, 그들의요구나 불만은 누가 대변해 줄 수 있는가? "이야기하다" "이야기하는장소"라는 뜻을 가진 Parliament(영:팔리어먼트 프:파라망)라는 낱말이 영국에서는의회(하원)를, 프랑스에서는 고등법원을 가르키는 것도 흥미있는 사실이다. 영국의 젠트리들은 의회(하원)에서, 프랑스의 부르지아들은법원에서 그들의 의사와 권위를 반영했고, 그 결과 젠트리가 주도한 영국의 청교도혁명과명예혁명이 타협적이었다면, 부르지아가 주도한 프랑스의 대혁명(시민혁명)은일방적이었고, 수많은 회생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그리고 나서 이들이 근대시민사회의주역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회의가 양측의 의견대립으로 격앙되어 있을때, 프랑스 서부해안 뤼송의 주교(主敎)로 있던 리슐리외가 일장의 그럴 듯 한 연설로회의장을 압도, 국왕의 결혼 동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이래서 루이 13세는 안 도트리슈와 결혼하였고(1615),젊은 주교 리슐리외는 한 번의 연설로 실권자 마리와 콘치니의 신임을 얻게 되는행운을 잡았고 궁중으로 들어가, 2년 뒤에는 국왕고문회의의 일원이 되어 그의 출세는탄탄대로를 달리는가 싶었다. 그러나, 1617년 4월, 열 일곱 살이 된 루이 13세는친위쿠데타를 감행, 마리의 총신(寵臣) 콘치니를 살해하고, 그 일파를 궁중에서 몰아내고,모후 마리는 감금 시켰으며, 콘치니의 아내 갈리가이는 마녀(魔女)로 취급해서 화형에처하고, 리슐리외 역시 추방하였다. 왕권을 장악한 루이 13세는 같이 쿠데타를 단행한측근, 뤼네공(Charles d'Albert Duc de Luynes / 1578 ~ 1621)에게 정치를 일임하고있었는데, 이듬해인 1618년 독일에서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루이 13세와 뤼네는 이렇게도저렇게도 못하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독일의 구교도를 지원하자니 합스부르크가와 스페인의세력을 더욱 키워주는 꼴이 되고, 그렇다고 신교도들을 지원하자니 국내의 구교세력이그냥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국내 문제가 다시 대두, 모후 마리는 아들루이 13세와 대결하기 위해 그녀를 지지하는 세력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은국왕측의 군대가 승리하여 모자간에 앙제(Angers)에서 화약을 맺고(1620),마리의정치복귀는 실패하였는데, 이때 리슐리외는 모후 마리를 위해 각지와 연결시키는일을 담당,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언제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한 가운데재상 뤼네가 죽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루이 13세는 모후 마리와 타협, 그녀를국무회의에 복귀시키고, 그녀의 충실한 신하였던 리슐리외도 다시 기용했다(1621). 그러나 모후 마리의 충실한 신하였던 리슐리외는 이제모후를 버리고 루이 13세를 위한 충성스러운 신하로 변신, 1622년 추기경에 임명되고,1624년에는 국무회의에 참가, 루이 13세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재상이나 다름없는실력자가 되었다. 국왕의 충실한 신하가 된 리슐리외가 추구한 정책은왕권의 강화와 프랑스의 국가 위상을 높이는데 중점을 두고,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는데,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개혁의 단계에서 구세력과의 마찰은 불가피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배신감을 느낀 것은 모후 마리, 그녀는그의 셋째 아들이자 루이 13세의 동생인 가스통 장 바티스 도를레앙((Gaston JeanBaptise d’Orleans / 1608. ~ 1660.)을 앞세우고, 왕족 및 귀족들의 세를 규합,리슐리외를 제거코자 하였으나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관련 자들은 처벌을 받았고,모후는 블루아로 추방되었는데 이것을 "뒤프(사기당한 사람들)의 날"이라고한다(1630. 11). 국내의 敵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신교도들이그들의 영지 통합에 반발, 라 로셀(La Rochelle)에 모여 영국의 지원을 받으면서조직적으로 항거, 루이 13세 자신의 직접 독려(督勵)에도 불구하고, 1년간의 공방전끝에 겨우 진압하였다. 항복한 신교도들은 당연히 보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리슐리외의 처분은 의외로 관대,복종하면 생명의 보장은물론 신앙의 자유까지 허용하겠다고 제안하자, 이를 눈 여겨 보고 있었던 다른 신교도들도시들이 국왕에게 복종을 맹세하여 종교적으로는 평온을 찾았다(1628) 독일의 30년 전쟁에 대한 국왕 루이 13세와 리슐리외의생각은, 프랑스의 국내 사정에 따라 직접 전쟁에 개입하지는 않고, 다른 신교국가들을지원하여 합스부르크가의 세력이 약화되면, 이 틈을 타서 신교국가들을 지원해준대가로 라인강 좌안의 영토를 확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덴마크, 스웨덴 왕국과 독일 내의 신교도 등을지원하면서도 흑막(黑幕) 뒤에 숨어 있었으나, 30년 전쟁이 종교전쟁의 성격에서이탈하여 왕조전쟁으로 양상이 변질되고, 지원했던 신교도측의 전과(戰果)를 기대할수 없게 되자, 더 이상 흑막에 가려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1635년 30년 전쟁에직접 개입하기로 작정하고, 1636년 5월, 프랑스 군은 루이 13세의 처가(妻家)인 합스부르크군대와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 최강을 자랑하던 스페인 육군을당하지 못하고 연패(連敗), 파리가 함락 직전에 이르는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루이13세와 리슐리외는 직접 시민들 앞에서 프랑스의 위기를 호소하고,... 무술을 좋아했던 루이 13세 자신이 무더위 속에서도갑옷을 입은 체 하루 17시간을 마상에서 진두지휘하는 정력(?)을 보였고,...비가오나 눈이 오나 선두에는 루이 13세의 모습이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 국민들의애국심도 폭발, 스페인 군을 물리치고, 전세는 프랑스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3) 루이 13세의 기행과 루이 14세의 탄생 재상 리슐리외의 고민 가운데는 루이 13세의 뒤를이를 후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14살에 정략 결혼한 스페인 왕녀 안 도트리슈가 석녀(石女)라서임신을 못한 것이 아니고, 루이 13세가 찾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의 눈처럼 하얀 손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웠다는매혹적인 이 왕비를 루이 13세가 싫어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스페인을적국으로 싸우는 입장에서 스페인의 여자가 곱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라는 것과,모후와 오래 다툰 루이 13세의 정신적 공허감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추측만 난무할뿐이다. 후사가 없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안했다. 모후를 중심으로 반리슐리외 진영에서 王弟 가스통을 업고 자주 변란을 일으킨 것도 이런 것과 무관하지 않았고, 그리고가스통을 후계자로 지명해야 된다는 여론도 제기되었다. 답답한 리슐리외는 이탈리아에서 푸대접 받고 있었던천문학자이면서 유명한 점성술사였던 캄파넬라(Campanella, Tommaso / 1568 ~1639)를몰래 대려 와 그의 예언을 듣기도 하였는데, 그의 예언에 따르면, 왕자는 태어나고, 왕자가 태어나기 전에 王弟 가스통이 왕위에 오르는 일은 없다,.....예측 불허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는방법으로 점을 쳤다는 것은 동서가 다를 것이 없었지만,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의 예언은 적중하여 얼마 후 왕자가 태어났다. 루이 13세가 성 불구자거나 독신주의자는아니었다. 그의 애정편력은 이상하게도 정신(廷臣)의 아내들과 플라토닉한 우정에빠지기도 하고, 여자에게 싫증을 느끼면 미남 청년을 궁중에 불러들여 이들과 노는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르던 어느날 국왕과 우정을 교환하던 귀부인 중,한 사람이(루이 드 라 피아에트) 홀연 수도원으로 들어가자, 루이 13세는 몹시 상심(傷心)하여수도원으로 그녀를 찾아가는 날이 많았다. 수도원을 찾아갔던 어느날,그녀와 정신없이 이야기를하다가 보니까 날이 저물었고, 돌아 오는 길에 폭풍우가 몰아치자 안 도트리슈의궁으로 찾아가 거기서 하룻밤을 지냈다. 이래서 안 도트리슈는 결혼한지 실로 23년만에 첫 아기를 출산하였는데(1638. 9. 5) 이가 후일 절대군주의 상징인 루이 14세가되었다. 20년 넘게 기다리다가 하늘을 한번 쳐다 보고 딴 것은별도 달도 아닌 태양이었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태어난 것이다. 5살에 왕이 되고(1643),남편의 사랑을 등지고 살았던 안 도트리슈는 루이 13세의 유언장을 파괴하고, 모후로서정치 전면에 등장하여 프롱드의 난을 진압하는 등 루이 14세에게 절대왕정의 길을열어주고, 만년에 수도원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또 하나 기막힌 사실은 생 마르(Cinq Mars, HenriCoiffier de Ruze / 1620 ~ 1642)라는 미남 총신(寵臣)이 있었는데, 그가 루이 13세의총애를 받기 시작한 1638년은 그의 나이 18세로서, 둥근 두 눈, 순진한 얼굴, 활기넘치는 육체미를 가진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고 한다. 국왕이 이 미남한테 반해서 정신을 못차린다는 소문이퍼지자 황태자를 낳은 덕택에 소박을 면한 왕비 안 도트리슈는 국왕의 이런 기행을막기 위해 미녀를 구해다 바치기 까지 했으나, 국왕은 이를 사절하고, 문제의미남을 고관으로 임명하고,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 주었다. 사태는 날이 갈수록 그야말로 점입가경(漸入佳境),젊은 총신(寵臣)은 몸치장이나, 놀음으로 돈을 물 쓰듯 할 뿐 아니라, 왕의 돈까지가로채서 제 애인에게 뿌리고, 해괴한 곳을 무상출입했고,... 오히려 국왕이 생 마르의옷자락을 붙들고 말썽 없도록 해 달라고 사정하는 판국이 되었다. 재상 리슐리외는 왕을 친구처럼, 생 마르를 아들처럼대하면서 두 사람의 해괴한 관계를 조정하려 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것이 아니고, 이를 이용하는 세력들이 있게 마련이고, 이런 정황(情況)이 실제로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으나 그것은 소문일 뿐 확실한 물증(物證)이 없었다. 리슐리외가 걱정했던 것은 섣불리 생 마르의 부정을왕에게 건의했다가,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로부터 반격을 당한다면 오히려자신이 추방되는 처량한 신세가 되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었다. 이런 리슐리외의 불안은, 1642년 루이 13세가 스페인의지중해 연안 지방 르루숑을 친정(親征)했을 때도, 신병으로 몹시 수척한 육신을 특제들것에실려 같이 참전했는데, 이유는 왕과 생 마르 사이에 어떤 결탁도 막고 이를 감시하기위해서 였다. 실제로 왕제(王弟) 가스통이 중심이 된 반리슐리외진영에서는 스페인과 연계해서 쿠데타를 계획하였고,문제의 미남 寵臣 생 마르도가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리슐리외를 암살코자 했으나 호위가 너무 엄격해서실패했다. 그러다가 결국 꼬리가 잡혔는데, 프랑스와 전쟁 중인스페인이 생 마르와 불미한 계획을 비밀히 체결한 문서가 발각되어 리슐리외의 손에들어갔고, 그는 처형되었다(1642년 9월). 3개월 후인 그 해 12월에는 리슐리외가 병으로 죽었고,그 5개월 후에는 루이 13세도 타계했다. 이들이 저승에서 다시 만났다면...???.....이시기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이 무르익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 - 영국 스튜어트왕조의 성립 |
출처: 이길상의 세계사풀이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