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복: 바쁘신데도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새로 출범하는 웹진 <시단>에서 마련한 최근 우리 문화의 키치화에 관하여 두분 선생님과 함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한국 문학에 나타난 키치적인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키치라는 말은 그 뜻만큼 난삽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인지, 그것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라든가 또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단순하게 취급을 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 문학에서 키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김춘식: 키치라는 말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여기서 내리기보다는 '키치'라고 하는 문화현상이 90년대에 왜 대두되었는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키치라고 하는 것은 90년대 문학활동을 시작하고 60년대에 출생한 현재의 30대들에게는 두 가지 정도의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데, 하나는 그것이 '근대화 과정' 속에서 이식된 자본주의적인 문화의 자장력 안에서 자신들이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들이 자신의 성장과정 속에서 '키치적인 것'을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이식 문화론의 콤플렉스라던가 서양 문화에 대한 동경이라든가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극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유하의 키치적인 성향을 살펴 보면 시인의 성장과정에서 누적된 근대적인 도시 변두리 문화의 정서와 문화적 키치 의식이 일치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성장기 의식 속에 각인된 변두리 정서를 바탕으로, 성인이 된 이후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키치적인 것'과 자신의 상관성을 깨닫게 되면서 바로 그 '키치적인 것이 나를 먹여살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세대가 등장한 거죠. 키치적인 것이 좋든 나쁘든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서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키치적인 것'으로부터 시나 문학, 문화의 어떤 생산기반을 찾는 '문화세대의 출현'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키치'의 본래적인 의미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키치에 대한 어떤 일관된 정의보다는 오히려 그 말 속에 함축된 '역사적, 문화적인 흔적'이 우리에게는 더 중요하겠죠. 식민지 지배 하에서 근대화를 겪었고, 그 과정 속에서 이식문화라든가 제도를 이식당한 국가에서 독재자에 이루어진 폭력적인 근대적 경제발전의 과정을 피부로 겪은 세대의 성장사는 그 자체가 이미 '키치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재복: 김춘식 선생님이 지금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사실 우리가 키치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 한국적인 어떤 특수한 상황을 이야기해야 하겠지요. 그런 점에서 김춘식 선생님이 말씀하신 제3세계론과 한국의 키치적인 현상이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세대론적인 측면에서 키치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유하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세대적인 측면이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유하 이전에 예를 들면 기성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세대론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어떤 키치에 대한 관점의 차이같은 것은 제가 보기에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춘식 선생님이 지금 키치적인 현상 자체를 현상 그 자체로 보자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 현상으로 본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예를 들면 유하가 가지고 있는 세대론적인 측면에서 보는 키치가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유하 이전에 또다른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보는 키치적인 측면이 있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유하 이전의 세대들은 사실은 키치에 대해서 반감 내지 부정적인 의식들도 없지 않아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춘식: 그것은 이미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80년대의 선배들도 그것이 90년대 문화의 주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입장이지 결코 우호적이지는 않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50년대, 60년대, 70년대 문학세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문제를 제기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키치의 범위를 확장한다면 '근대'라는 것 자체가 혹시 거대한 '키치의 더미'는 아닌가 라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가령 이렇습니다. '세속적인 상품성'과 '키치적인 것'은 거의 맞닿아 있습니다. 과거 수공예품의 경우 한 사람의 장인이 한달, 두달에 걸쳐 만든 제품이 고급품으로서 상류층에게 판매되었다면 '키치적인 상품'은 품질과 형태보다는 대량생산과 보급의 논리에 따라 서민에게 싼 값으로 판매되는 '자본주의적인 대규모 시장성의 원리'에 종속됩니다. 그러니까 질적인 하향화와 대량화, 규격화, 대중화 속에서 '키치'라고 하는 특성이 나타나지요. 그래서 '키치'라는 말은 그 반대쪽에 '엘리트주의'와 '소수의 독선'이라는 대립어를 맞세울 때 그 본래적인 위상이 드러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50년대, 60년대, 70년대 세대도 그들이 젊었을 때는 어느 정도는 키치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을 해요. 당대만의 독특한 문화적인 유행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겠지요.
박기수: 세대론적으로 이야기를 했을 경우인데요, 제가 보기에는 문화론 쪽에서 보아서 키치도 그런 큰 흐름 중의 하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대들이 가지는 기존의 문화에 대한 '저항'의 측면 하나와 기존 문화가 가지고 있는 '통합력' 사이의 균형, 평형 상태를 이루기 위한 시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 김춘식 선생이 말씀하신 이전의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반감이라는 것은 사실 기존 문화 기득권층이 가지는 통합력의 일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또 키치 자체에 대한 문제도 대부분의 문화론적인 용어들이 그렇지만, 이것이 '실체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구성적 개념'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 키치다 아니다 하는 논의보다는 각 세대들의 혹은 특정 시기에 어떠한 키치적인 시도 즉 저항적인 시도가 이루어졌고 그것에 대한 어쩐 통합적 시도가 이루어졌는가에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재복: 커다란 문화적인 현상 안에서 키치를 보자라는 것이 박기수 선생님의 의견이었습니다. 앞에서 논의된 기술복제 시대의 대량 생산 체제 하에서의 키치를 논의하려면 제가 보기에는 자본주의와 키치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박기수: 부르디외의 어법을 빌리자면, 우리가 차별화시키고 구별짓는 것이 기존 권력이 지니고 있는 '자기 보존을 위한 시도'에 다름아니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일괄적으로 예전의 것이고 전통이 있기 때문에 고급하다라는 식의 평가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좀더 문화권력의 자장을 고려한 관점이 요구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지금 이곳'의 문화 현상이나 문학적 징후들에 관하여 질적인 평가에 앞서서 좀더 객관적인 변별화 작업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김춘식 선생의 이야기가 틀리다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면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김춘식: 문화적인 전략으로서의 '키치'와 생산과 소비 차원에서의 '키치'는 서로 다른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90년대 '문학적 키치의 '대명사인 유하가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영화의 제목을 패로디하여 자신의 시집 제목을 <세운 상가 키드의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 패로디는 '키치적인 예술'의 가장 중요한 전략입니다. 이처럼 문화전략으로서의 '키치'는 대중성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중성을 역으로 '전도'시켜 비판하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속성을 지니고 있죠. 예술이 개성을 그 '숙명적인 조건'으로 삼듯이 수공예품이 종종 '고급예술'로 불려지는 것은, 예술이 효율성과 대량 생산, 대중화와는 상반되는 가치관을 지향하기 때문이죠. 즉, 반근대적인 속성이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예술은 '근대성'과 대립함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키치'를 문화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키치가 새로운 문화·예술의 생산력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자본주의적인 세속성과 상품성을 함축하는 '키치' 자체의 속성이 긍정적인 것이기 때문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재복: 저는 조금 다른 문제 제기를 하고 싶은데요, 키치가 기존의 문화에 대한 저항적인 면이 있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키치적인 예술이 출현을 했을 때 현대성이라는 측면을 고려하면 키치와 상대적인 자리에 놓이는 것이 아방가르드 예술입니다. 이 아방가르드는 브르주아 예술에 대한 저항을 주무기로 사용했던 예술 사조인데 비해서 키치는 과연 브루조아 예술에 대해서 저항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느냐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보여지는데, 키치라는 현상 자체를 놓고 보자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부정적인 측면을 소홀히 보아넘겨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박기수: 결국은 그 맥락인 것 같습니다. 아방가르드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전제로 했던 반면 지금 논의하는 90년대 후반, 2000년대의 키치는 자본주의적 저항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죠. 어떤 측면에서는 자본주의의 문화 메카니즘을 철저히 이용하고 즐기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에 대한 가치 평가는 상당 기간 유보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미적인 근대성은 근대에 대한 안티테제 역할을 했지만 키치는 근대의 내부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서 기생 혹은 서식하는 양상이라면 적적한 비유가 될까요. 최근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 같은 경우도, 표면적으로는 우리가 알던 특촬물 <울트라맨>에 대한 패로디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울트라> 더하기 <매니아>로서, 특히 <매니아>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자본의 논리에 의해 생산된 <울트라맨>이라는 B급 문화를 자본주의를 내파시키기 위한 기제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몹시 흥미로운 것이죠. 지금 이재복 선생의 말씀대로 기존의 아방가르드와 어떻게 변별되느냐, 기본적인 자본주의에 대해 어떻게 응전하는가, 예술로서 자기 영역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하는 부분을 전략적으로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죠. '지금 이곳' 키치가 가장 기본적인 키워드로 가지고 있는 것이 '즐김'이고, 또 보다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문화의 민주화', '예술의 민주화' 정도를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과연 우리가 문화나 예술이 가지고 있었던 근본적인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직은 긍정적인 답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김춘식: 박기수씨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셨으니, 이제 기존의 논의를 한번 점검해 볼 때가 된 것 같군요. 98년 '대산재단 문학포럼'에서 평론가 이광호, 이성욱 씨가 '키치 논쟁'을 했었는데 그 때 두 분이 서로 현격한 의견의 차이를 보였지요. 같은 포럼에서 황지우 씨는 '문학은 이제 은둔하자'고 했고 유하도 '키치적인 것에 대해서 한계를 느낀다'고 얘기를 했어요. 이광호 씨도 '키치'가 오히려 또다른 권위와 매너리즘의 근원으로 변하고 있다고 비판했죠. 그런데 이성욱 씨는 이 포럼에서의 논쟁 이후에 발표한 다른 글을 통해서 '키치적인 것'은 이미 60년대 세대가 보여준 문화적 특성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당시 경제적 생산력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 문화가 물적 과잉생산에 의해서 소비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로 그 패턴이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일상의 미학화'라는 문화현상이 생기면서 '키취적인 것'이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을 설득력 있는 글로 발표했습니다. 두 논자 사이에 의견 차이가 났던 것은 이광호 씨의 경우 90년대의 상황 속에서 키치가 새로운 문화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지키기보다는 그저 복제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면서 '불온성과 저항정신이 사라진 채' 형식적이고 전략적인 부분만 남은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다고 보았고 이성욱씨는 키치적인 것을 반계몽적인 대중주의의 입장에서 옹호하면서 '마녀 사냥식 키치비판론'의 대두를 경계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의견이 모두 시사성을 가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60년대 세대가 가지고 있던 대중문화가 효율성이나 생산성,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기성문화에 반발함으로서 저항문화로 바뀔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러한 저항의 측면이 '보수화'를 피할 수 없었던 것처럼 여러 논자들이 '키치적인 것'을 '다시 보자'라고 얘기하는 것은 '키치'가 유행화, 패션화 되어버림으로서 그 문화적 불온성을 상실하고 '상품화'되는 부작용에 대해 우려했던 것입니다. 반면 이성욱 씨는 '키치적인 것'을 비판하는 최근의 시각 속에 숨어 있을 수 있는 '보수화', '계몽주의적인 근대담론' '마녀 사냥식의 주체중심 담론'을 경계합니다. 저는 이 두 논의가 다 일정 정도 타당하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가 키치를 이야기할 때도 동일하다고 봐요. '키치'의 속성 속에는 '문화적 민주주의'라는 긍정성과 '유행화', '흉내내기'라는 부정적 가능성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고 봅니다. 90년대 대중의 무의식적 태도에는 '키치적인 것'의 긍적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뒤섞여 있죠. '흉내의 욕구'와 '개성에 대한 결핍감의 표출' 욕구가 그것입니다. 문화 현상을 들면 청바지를 찢어 입는다든가 신발을 구겨 신는다든가 이런 것들은 완성된 제품을 그대로 입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대로 거기에 새로운 변형을 더하는 것이죠. 이런 방식은 기성화되어 있는 것에 대한 어떤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이런 '변형'이 하나의 유행이 되고 그 유행은 다시 '상업주의'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쉽사리 또다른 문화적 권력으로 둔갑하게 마련이죠. 그러니까 과거의 예술 생산의 방식이 나무나, 목재나 이런 자연적인 재료를 가지고 이루어 졌다면, 지금은 반가공품, 사실은 완성품인데 스스로 그것을 반가공품으로 생각해서 자기식으로 변형을 하는 거예요. 완성품 위에 포장과 디자인, 광고, 상표 등의 문화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상품화'의 과정처럼 현대예술은 자연품이 아닌 인공품을 변형 가공하거나, 혹은 실내장식처럼 물건을 사서 자기식대로 배치를 하고 자기 식으로 완성하는 것으로 창조성을 표출하기도 하죠. 그러니까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제공된 프로그램의 '응용적 측면'은 전부 사용자에게 달려 있는 그런 방식이 앞으로의 문화의 특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술품의 '재료'와 '소재' 선택 자체에서도 자연성보다는 인공성이 우의를 차지하게 되리라고 봅니다. 결국, '키치적인 것'도, '인공성'이 피할 수 없는 환경이듯이, 어느 정도는 숙명적인 것 혹은 '환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죠. 결국,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예술적 개성을 어떻게 구현하는가, 어떻게 표출하는가의 문제와 스스로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 90년대적 문화주체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이재복: 지금까지 우리는 이제 키치적인 현상을 현상으로 보자는 말씀이셨고, 그 다음에 문화라는 커다란 범주 안에서 키치를 말했습니다. 이제는 더 좁혀서 한국문학에서 키치적인 현상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주세요.
김춘식: 앞서의 논의와 이어지는데요. 문학을 바라볼 때, '키치적인 것'들은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언제나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60년대 생의 세대가 90년대 문학을 주도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죠. 분명히 얘기하자면 그건 이 시대의 '유행적인 문화현상'을 주도할 수 있었던 세대의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 만큼 중요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90년대 초반의 문학부터 정리를 해보면 시에서는 기형도로 대표되는 신서정, 도시서정이라는 문제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과거에는 자연서정을 가리켜 주로 '서정'이라고 했는데, 기형도를 비롯한 90년대 시인들은 이미 사라지거나 관념화된 '자연서정'보다는 주로 도시 속에서의 개인적인 서정에 대한 문제에 집착을 합니다. 그것을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문제로 생각을 해본다면, 기술 복제 시대에는 아우라가 상실되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오히려 '아우라의 상실' 자체가 아우라를 낳고 있는 것이죠.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 자체가 아우라가 되어버렸을 때 그들이 가지는 정체성 속에서 '상실'은 '아우라'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자연은 이미 대상이 아니라 아우라의 한 근원이죠. 그 점에서 보면 도시적인 건물, 자동차 등 도시적인 환경은 '자연적인 것'의 결핍을 드러내는 하나의 기호나 코드입니다. 기형도의 시처럼, 검은 도시와 침묵의 도시, 죽음의 도시는 상징적인 정서로 말하자면 '상실된 자연'을 다른 반대편에 놓고 그것을 가리키고 있는 기호이죠. 그러니까 도시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데 정작 지향하는 것은 자연 속에 있는 어떤 것,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본질적인 것, 이런 것들을 그리워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개인적인 실존의 차원에서도 자기를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도시적 일상 속의 사회적 정체성이나 타인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코드 등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는 것, 진정한 의미, 삶의 비애라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90년대 문학의 긍정성을 말한다면 처음에는 미숙했지만 90년대 시인의 서정적인 경향이 '자연 그 자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도시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 자기 정체성의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라는 점이죠. 유하, 이윤학, 박형준, 장석남 시인 등의 시를 보면 시 속에 나와 있는 자연의 모습이 인간과 동떨어진 대상화된 자연이 아니라 도시의 '폐허'에 피어 있는 꽃이라든가 그 속에 버려져 있는 오래된 물건을 더 자연에 가까운 것으로 느낍니다. '가속도'의 시대로부터 퇴출당한 사물로부터 오히려 '자연의 성질'을 발견해 나가는 이런 새로운 미학적인 시각이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 합니다. 벤야민은 '기술 복제품은 다 같다'고 균등화시켜서 생각을 했지만, 실제로는 똑같은 나이키 신발이 수억 켤레 생산이 되었더라도 내가 신었던 나이키는 자기의 기억과 손때가 묻어 새로운 아우라의 대상이 됩니다. 이 점을 보면 우리는 결국 키치를 환경으로 가지고 있는데도 왜 그것 자체를 대량 생산시스템의 '소비품'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하는 점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죠. 인간은 어떤 대상이든지 자기의 기억과 관련을 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90년대 시의 미학 속에는 그런 문제의식이 들어 있다고 봅니다. 기억 속의 손때, 기억 속의 추억 이런 것들은 키치적인 것들을 '사적인 것'으로 바꾸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대에도 '문학적 가능성'을 예측한다면, 자기 주변에 놓여 있는 환경을 개인적인 것, 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경향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부정적인 점도 있죠. 나르시시즘이라든가, 지나친 주관화 같은 것을 꼽을 수 있는데, 하지만 저는 아직은 그런 것들이 이 시대의 병적인 현상으로 여겨질 만큼 두드러진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부분을 제외한다면 오히려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주관화, 내면화, 사적인 고백이 가지는 문화적 힘은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을 해요.
박기수: 90년대 평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최근의 시적 경향을 보면 60년대생과 70년대생을 나누는 것이 우습지만, 소위 70년대 생들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과 서정의 기본적인 맥락은 원체험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경험조차 상실되어 있고, 혹은 아우라 자체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인식과 찾아가야 할 주체로서의 나조차도 상실되어 있다는 인식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찾아가야 할 대상이나 찾는 주체, 그 모두를 잃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찾는 행위가 아닌 헤매임 그 자체를 탐닉하고 잇다고 봅니다. 그 헤매임은 극도의 주관화된 양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시의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 자체도 붕괴시켜버리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와 2000년대를 나누게 될 경우, 지금 김춘식 선생이 이야기한 돌아가야 할 곳이라든가 찾아가야 할 곳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나타나고 있는 키치적인 현상 자체도 2000년대적 헤매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찾고자 하는 것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아우라조차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의 헤매임! 그러다 보니 자자분한 일상이 섞이고 엉키는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역설적으로 이러한 징후들은 소모적인 헤메임이라기 보다는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는 자신을 증거하고픈 욕망의 일단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춘식: 30대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한 것은 세대적인 분절을 전제로 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고 또 60년대생과 70년대생의 경계가 그렇게 명확한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90년대 초반에 20대였던 지금의 30대들도 그 당시에는 자기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지지 못했고 그저 모색하는 단계였다고 봅니다.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과 90년대 초반 문학의 어떤 혼란상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이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던 90년대 초반의 문학적 혼란이 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정립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의 30대 시인들이 90년대 문학의 주류였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입니다. 그리고 지금 2000년 초반은 30대들이 가지고 있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어느 정도는 시큰둥해져버린 시기라고 볼 수도 있어요. 2000년의 문학을 보면 90년대 후반을 달구었던 화두들이 왠지 매력이 없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죠. 왜 그런가, 아마도 뭔가 어떤 새로운 쟁점들을 발견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그들 스스로가 이미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점도 거기에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 경우 어떤 새로운 목소리를 기대하게 되는데 그 목소리가 어디서 나올 것인가 하는 것은, 아마 지금 얘기했던 그 뒷세대들의 몫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 뒷세대들은 지금의 30대들이 90년대 초반에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던 것처럼 아직은 정립된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하죠. 거기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지 지금 뭐라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려운데, 박기수 선생이 얘기한 부분을 거기에 비추어서 말하면 그것은 그저 '과정'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컴퓨터를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92년도에 286 컴퓨터를 썼는데 지금 우리는 완전히 네트워크 세상 속에 살고 있거든요. 겨우 8년이 지났는데 이 정도인데, 아직 10년이나 남겨 놓은 상태에서 2000년대를 70년대 세대들이 '네트워크 세상'이라고 부른다면, 아직 네트워크도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의 이런 진단은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겠죠. 실제로 그들 세대가 의사소통의 단절감을 표현한다고 했는데, 문학에서의 단절감과는 반대로 네트워크 상에서 그들은 훨씬 진보된 의사소통의 체계를 가질 수 있어요. 기술적으로 말이죠. 결국 그들 세대가 진보된 의사소통의 기술에 대한 관심을 전면에 내세운다고 해도 개인적인 내면의식의 소통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봅니다. 제가 중점을 두고 본 30대 시인들이 주로 자연서정이라든가 전통적인 경향들을 많이 지니고 있는데, 젊은 20대들에게는 그런 점이 적다라고 하면 조금 헛도는 것 같고, 오히려 그들의 시가 기호화, 분절화, 파편화되어 있는 점들은 지금의 초반적인 유행현상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부분에서 본다면 똑같이 어떤 부분에서는 서정, 주관, 자기정체성이라고 하는 문제에 맞닥뜨리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환경적으로 우리는 자아를 찾기 힘든 세대이기 때문에 그 '자아' 자체를 부정한다는 태도에는 상당히 위악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너희들 세대가 쉽게 찾았던 '자아'를 우리는 찾기 어려운 세대이므로 더 이상 그런 흉내는 안내겠다는 '위악' 자체가 '자기찾기'의 출발점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제 생각에는 70년대 생들은 '시작점'이 어딘가 하는 그 점에 고민을 하고 있을 뿐이지 분명히 '대응방식은 유사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박기수: 세대론적인 얘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네트워크 얘기가 나온김에 하는 말이지만 결국 디지털 환경에서 문학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지금 길찾기를 하고 있다라는 70년대생들도 결국 디지털 환경과 연관이 되어서 자신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디지털 환경과 연관지어 문학을 보면, 소설 쪽에서는 하이퍼나 인터액티브한 방향으로 갈 수가 있는데 이것은 네트워크에 대해서 철저히 자기 개방적인 자세를 취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의 경우는 인터액티브가 안되더라는 말입니다. 서정의 본류가 극도의 주관성을 전제로하는 것이고 보면, 시는 태생적으로 네트를 구상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매체를 이용해서 보다더 심도 깊은 주관화의 양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이야기 하기는 쉽지만 그것이 작품으로서 생산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토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에 장경기 시인이 시도했던 <멀티 포엠> 같은 것도 많은 매체를 사용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잇는 네트를 구축했느냐는 점에서는 회의적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말하고 있는 다음 세대들의 출발점도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세대만해도 김수영이 학습의 토대였지만, 올해 신춘문예 당선 신인들의 시를 보면서 기형도 등으로 그 토대가 달라져있음을 알 수 있죠. 인식의 토대가 변화했음을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지요. 그런 출발의 차이가 하나고, 두 번째는 문학 환경 자체의 변화에 따라서 시쓰기의 양상 변화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섣부른 전망은 어렵겠지만 돌아가야 할 곳도 없고, 찾고 있는 나도 없다면 이 네트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마련·보존하기 위해 어떠한 응전을 시도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매우 흥미로운 기대를 자아내게하는 지점입니다.
이재복: 지금 아주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두분 선생님. 제가 잠깐 정리를 하면 기존의 미학에서는 인식 주체와 대상이 있으면 둘 사이에는 거리가 성립이 되는데 지금은 그 대상 자체를 인식하지 않는단 말이죠. 인식 주체의 어떤 측면에서 보면 자기 도취, 그 속에서 어떤 새로운 예술을 모색을 한다면 그러한 모색 자체가 우리에게 어떠한 진정성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말할 필요가 있을 것같습니다. 아까 하신 말씀 가운데 네트워크가 있는데 이 네트워크는 현실과의 거리의 소멸인데 이 소멸 속에서 자기를 모색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 자체가 혹시 자기 기만은 아닌가, 혹여 사기는 아닌가하는 면도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 두분 선생님들이 키치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을 많이 말씀하시고 계신데 그런 어떤 비판적인 면, 부정적인 면도 이야기를 해 주셔야지 균형이 잡힐 것 같은데요. 그와 관련해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키치와 관련하여 90년대 젊은 시인들의 상상력을 보면 일상적인 측면과 관련이 많이 있거든요. 네트 속에서 보여지는 어떤 키치적인 현상이 있고, 우리의 삶, 일상적인 측면에서 드러나는 키치적인 측면이 있는데 최정례나 이정록 같은 시인들이 보여주는 일상에서의 키치적인 측면,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네트워크적인 측면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김춘식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춘식: 지금의 30대 시인들이 기성품을 환경으로 인식하고 인공적 복제품들이 나를 키웠다고 인식을 하는데 비해 더 젊은 세대들은 네트워크 자체를 자신의 환경으로 인식하고 있어요. 물질적 성격의 인공품이 아니라 사이버 세상 자체가 환경이라고 인식을 하는데 그 양자의 태도는 유사성이 있지만 분명히 차이도 있습니다. 30대들은 복제품, 기성품에 시간과 기억과 손때를 더하면서 그것에 자신의 주관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자신과 세계를 정립했다면, 새로운 세대들의 사이버 환경은 늘 새롭고 결코 낡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경과과정을 느끼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30대들이 가지는 '기억의 투사'가 차단되는 성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새로운 세대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창조력을 투사하는가 하는 점인데, 인터넷 상에서 자신이 스스로가 사용자이자 생산자가 되는 형태로, 일방향 통신이 아니라 쌍방향 통신으로 나가는 것이죠. 과거의 우리가 사용한 물건의 경우 쌍방향 통신의 출구는 하나입니다. 청바지를 찢거나 그 물건에 손때나 기억을 묻히는 것처럼 '변형'을 가하는 것인데 인터넷 상에서는 그것 자체가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폭력적일 만큼 자기 방식대로의 변형을 주는 것이죠. 자기가 실제로 프로그래머가 되거나 더 나아가서는 해커가 될 수도 있고, 수동적으로 수신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송신을 하는 작업에 참여를 하는데 그것이 아까 말한 멀티 포엠의 속성과 일치한다고 봅니다. 그 부분은 또 조금 달리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시와 소설 장르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죠. 그건 이미 시가 아니죠. 고전무용이나 고전음악처럼 장르상의 중심은 남아 있지만 여러 가지 형태로 분화가 이루지게 되겠죠. 시처럼 오래된 장르가 분화의 과정없이 현재까지 유지되어 온 것이 오히려 기적이고, 이제는 분화가 이루어지는 시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멀티 포엠은 시라기보다는 새로운 장르이며, 쌍방향 통신으로 주고 받을 수 있는 시, 통신문학에서 여러 사람이 집체적으로 시를 쓰거나 하는 등의 새로운 방식의 개발은 무한하다고 봅니다. 음악을 넣거나, 다른 매체를 활용하는 것도 그렇고요. 그렇다고 그것을 모두 '시'라고 볼 수는 없겠죠. 다만 시에서 출발한 새로운 예술의 형태일 뿐이며 그런 측면으로는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영화가 20세기에 출현한 뛰어난 중심 예술이었듯이 어쩌면 새로운 예술의 형태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그러나 그것은 '시'와는 다르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고, 시에 한정해서 얘기를 하면 시는 오히려 전통적인 형태를 고수할 것이라고 봅니다. 예술도 전통 예술이 있고, 새로운 예술이 있고, 연극이 있고, 영화가 있고, 모두 전혀 다른 예술로서 공존을 하는 것처럼 따로 공존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가 대중적인 예술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급예술, 전통예술의 형태를 고수할 것이고, 그런 만큼이나 한정된 독자층, 한정된 생산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예술정신을 더 강조하는 그런 형태로 나갈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인터넷상에서 그것이 오고 가는 것에 관계없이 전통적인 형태를 지킬 것입니다. 단지 보급의 형태, 출판의 형태는 달라질 수가 있어요. 제도의 변화를 따라서 유통, 보급은 변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통, 보급의 문제와 생산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문제는 별개의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시는 더욱 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형태로 가지 않을까 합니다.
이재복: 조금 빗나갔는데 제가 아까 질문을 드린 것은 우리가 아무리 넷트 속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체험을 한다고 하더라도 일상이라는 이제까지의 일상이라는 체험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적인 것과 그것으로부터의 혁명이라고 하는 네트 속에서의 일상적인 혁명 그 사이의 긴장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김춘식: 얘기를 하다보니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데 생각을 못하고 그냥 넘어가 버렸네요. 질문에 대한 전제만 얘기를 하고 그 부분을 언급을 못했군요.(웃음)
박기수: 지금 김춘식 선생이 얘기한 부분에 대해서 재미있는 생각이 있는데, 시의 생산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동의를 합니다. 전진규 선생의 말씀이 기억나는 군요. 새 천년이 되면서 시의 위기를 많이 이야기했는데, 시인 자신은 새천년이 시작되고 시제를 거듭하면서 다음 천년이 와도 시는 살아있을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졌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상당히 공감할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시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해서 시가 가지는 영향력이 지금과 같을 것이라는 것은 굉장한 낙관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네트를 전제를 하고는 있지만 시의 형태가 네트 속에 들어갔을 때에는 네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한 접점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점과 점으로 연결이 되는 접점에 따라서 얼마나 많은 개방성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그 자장의 범위를 결정할 것입니다. 시뿐만 아니라 소설 역시 장르적 개방성 혹은 상상력은 질적 전화가 이루어져야만 네트 속에서 그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누가 자신의 홈페이지를 꾸밀 때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가 좋다면 따와서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서 그 안에 넣는단 말이죠. 그랬을 때 시는 그가 만든 전체 프레임 속에 하나의 요소로서 들어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 시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는 엄청나게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김춘식 선생이 생산적인 측면에 비중을 두시는 것은 상당 부분 공감을 하면서, 아울러 이제 디지털 문학환경에서 우리가 고려를 해야 하는 것은 생산도 생산이지만, 향유의 측면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독자는 이제 단지 소비자가 아니라 생비자(prosumer)라는 좀더 적극적인 향유자로 바뀌는 까닭입니다. 주제에서 너무 멀리 나왔나요.(웃음)
김춘식: 독자라는 층위 자체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산자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는데 독자는 어떻게 변하는가 했을 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홈페이지에 시를 올리는 것은 보급, 유통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으로 아까도 제가 이야기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고, 중요한 것은 시를 읽는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는 문제가 들어가기 때문에 굉장히 예측하기 어려운데, 조금 예측을 해보면 시는 미술관에 그림이 전시되듯이 그 시인이 썼던 그 시집, 아날로지성을 가지는 그것이 또 다른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인터넷 속에서의 무한 복제품은 복제품 나름으로 계속 복제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저자의 사인이 있는 책'처럼 한정된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또 다른 층위 분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독자도 매니아와 아마츄어로 나뉘어서 분화가 될 것이고 문학에서도 독자를 불특정 다수 대한민국 국민 자체를 독자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매니아층을 상대로 한 그러한 창작이 이루질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본주의적인 상품시장에 대해 문학은 이제 어떻게 적대적이 되는가. 생산, 소비의 개념이 아니라 전통적인 개념으로서의 작가와 독자라는 개념을 복구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보는데요, 이건 몽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되어 가는 단서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매니아와 창조자는 거의 긴밀한 관계입니다. 가장 단순한 상태에서의 창조자와 수용자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봐요. 불특정 다수는 돈을 주고 사는 생산과 소비자의 입장이라면 예술의 입장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입장을 떠나 있는 창조자와 수용자라고 하는 그런 전통적인 개념이 더욱 중요합니다. 지금 시인이나 작가들이 베스트 셀러에 연연하거나 또는 상업주의 문학의 유혹에 위기감을 느끼거나 하는 것은 그들의 경제적인 생활이나 환경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죠. 분명히 전문인 의식과 내가 돈을 번다고 하는 직업인 의식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점에서 보면 작가들은 늘 그 둘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죠. 일상적인 경험을 어떻게 수용하는가, 표현하는가 하는 것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철저히 '자기의 문제'입니다. 내가 직업인으로서 글을 쓰면 판매를 염두에 두고 현실적인 이익과 연결이 되고, 그런 경우 일상적인 경험은 죽어버립니다. 상품화가 되기 때문이지요. 내 삶 자체를 상품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달하는 생산자가 되는 것은 내 삶을 나를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창조자로서의 전문인 의식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작가로서의 자의식에는 가장 전통적은 것으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문학적 전통 속에서의 자의식을 지키는 것, 그리고 남들에게 돈을 받고 팔 수 있는 작품, 즉 허튼 상품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직업의식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지요.
이재복: 그런데 지금 김춘식 선생의 얘기를 듣고 굉장히 낙관적이고, 이상적인데 그 긴장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아주 힘들다고 봐요. 우리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아까의 그 키치적인 것이 문제가 되기보다는 그 키치적인 것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의 논리가 더 무섭다고 하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김춘식: 자본의 논리는 저도 동의를 하는 부분입니다. 다만 시는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만 있으면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대량 생산품은 모두 키치적인 것으로 변질될 수 있는데 그게 자본의 논리죠, 자본의 힘은 모든 것을 키치화하지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자본이 모든 것을 키치화할 때 자본도 특화하고 싶은 것 아니겠어요. 자본을 대량적으로 투여한 스펙타클한 영화라든가 돈이 많이 들어간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하는 관념을 생산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거죠. 그렇다면 시에 있어서도 돈이 많이 들어가면 좋은 시가 나오는가, 이건 좀 다르겠지요. 제가 자꾸 전통적인 부분으로 돌아가는 것은 시는 골방에 앉아 있는 시인이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쓸 수 있기 때문이죠. 가장 단순한 형태이지만, 그 시스템은 자본이 파괴하기 힘들지요. 시에서의 자기 만족이나 위로는 시를 읽는 모든 독자와 생산자에게 결코 없어서는 안되는 부분이거든요.
이재복: 제가 지금 김춘식 선생의 이야기를 듣다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가 키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한쪽의 면만 이야기를 하기가 쉬워요. 잡종적, 저급하다, 비심미적인 이런 식이기가 쉬운데 지금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순수와 잡종, 고급과 저급, 엘리트와 대중, 심미성과 비심미성을 동시에 고려를 할 때에 키치의 존재가 드러날 것으로 여겨지구요, 이 부분에 대해서 박기수 선생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박기수: 저는 이 문제를 문화와 관련을 시켜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최근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영화가 있는데 이게 아주 저자본 영화입니다. 이것이 기존의 우리 인디 영화들이 가지고 있었던 측면에서의 실험성이나 자기 함몰성에서는 상당히 자유롭고, 그러면서 오히려 그러한 자기 나름대로의 키치 성향을 보여줌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양상인데, 저자본 영화의 일반적인 공식을 깨고 헐리우드식 공식을 가져다가 헐리우드식 양산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에 대한 성공적인 견제에 성공하면서, 동시에 대중성을 확보함으로써 자본의 획득에 성공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이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 주변을 압도하고 있는 키치적 양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기존 문화에 대한 저항적 측면을 가지고 대중성을 담보해야 한다면, 아까 이야기한 '사기'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만약 그 저항적 측면을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는 즐김과 소비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가장 이 시대의 키치적 징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자본에 대한 견제나 현실에 대한 응전이 아니라 다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일과적인 웃음이나 일차적 쾌락 등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다.
김춘식: 키치라는 것은 정체성이 없다라고 저는 생각해요. 근대문화 전체를 놓고 키치에 대해 생각하면 그것이 '키치적인 것'의 속성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근대문화는 생산품을 자기식대로 사용하는 즉 사용자(user)들의 창조력이 투영된 산물이라고 보여지거든요. 예를 들어 지금 여기 인사동에 우리가 모여 있는데, 밖에 나가보면 골동품들이 무척 많아요. 골동품도 처음에는 생산품이었지요. 그런데 손때가 묻으면서 아우라가 생기고 우리는 그 손때의 아우라를 느끼는데, 과연 그 때의 아우라는 무엇인가? 우리는 문화생산자로서 '키치적인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때가 묻지 않은 물건을 때가 묻어 있는 물건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때가 묻지 않은 '새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낡은 것'을 만드는 거예요. 아까 일상적 경험을 문학 속에 어떻게 수용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시킨다면 일상적 경험이 '날 것'일 때에는 신상품이고, 일상적 경험 속에 기억과 손때가 묻어 있을 때에는 골동품이 되지요. 추억이 묻어 있고, 흔적이 묻어 있고, 이런 것이, 그런 형태의 아우라를 남긴 것이, 문학을 먹여 살린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문학에서의 키치를 얘기하는 것은 소재나 대상으로 한정된 키치를 말하는 것과 그것을 예술품에 수용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골동품들도 처음에는 예술품이 아니라 일상생활용품이었던 것인데, 그리고 '생활용품'이라는 것은 다분히 '키치적인 것'인데, 이런 것이 예술품으로 되는 과정을 통해서 근대적인 제도가 예술을 어떻게 수용했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술품에 '개성'의 흔적이 묻어 있다는 것은 아직도 포기를 못하는 것이지요. 작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골동품에는 흔적과 손때가 있지요. 그래서 예술품이 된 것인데, 마찬가지로 시나 예술품의 근대적인 출발과정에서도 이름이나 개성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예술품을 대신하는 기호로 쓰였고 동시에 어떤 사람이 만들어낸 '생산품'이라는 원본 확인을 해주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원본이냐보다는 그속에 들어 있는 것이 얼마나 낡았는가, 얼마나 손때가 묻어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어떤 가공을 거치고, 어떤 시간의 흐름을 겪었는가를 중요하게 받아들이면서 '미적 진정성'의 규범이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고 봅니다. 시인들이 소재로 받아들이는 일상적 경험조차도 그저 '날 것' 자체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방과 사기, 조작적 면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그 속에는 분명히 거짓이 섞이게 마련이죠. 그런 점에서 그것을 구별해 낼 수 있는 평론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합니다. 시인이나 창조자가 자신의 인생을 문학과 예술 속에 어떻게 담는가 하는 문제 즉, 그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는가 하는 문제는 어떤 정석이 있는 것은 아니고 또 흉내낼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문학에서의 개성이라는 것도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런 만큼 심미안은 섬세해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일반 독자의 층위보다는 매니아 층과 평론가들이 담담해야할 몫이라고 봅니다.
이재복: 제가 아까 문학이라고 하는 특히 시에 초점을 두고 좁혀서 얘기를 해달라고 주문을 드렸는데 굉장히 일반론적인 측면으로 흐른 것 같습니다.(웃음) 제가 키치라는 것을 이정록 씨가 보여주는 일상성과 전망의 측면에서 말씀을 드린 것인데 자칫하면 이 일상이라는 것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시에서는 매너리즘을 배제해야 하는데 그 일상에서의 매너리즘이 시에서의 매너리즘이 될 수 있지 않는가, 매너리즘의 측면에서 보면 키치적인 위험성들이 다분이 내재하고 있는 시를 쓰는 시인들이 바로 이정록이나 최정례 같은 시인들. 아까 김춘식 선생이 유하라는 시인을 말씀하셨는데 유하 시인의 경우 <세운 상가 키드의 사랑>은 <세운상가>라는 공간에서부터 그것을 소재로 선택했을 때부터 그 자체가 굉장히 키치적인 것을 염두에 두고 그 시를 썼다는 느낌이 강해요. 그러면서도 키치적인 이야기를 오래 했지만 그러면서도 정말로 키치적인 것이 우리 시에 있느냐 라고 하는 것도 제가 보기에는 회의적이란 말입니다.
박기수 : 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유하와 초기의 장정일의 작품인데 그런데 문제는 시간성의 부분도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유하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의 경우 느꼈던 감흥이 두 번째 시집에서 안온다는 점, 그리고 유하가 왜 자신의 시의 두 축으로 여기는 패러디적인 요소와 하나대적인 자연서정의 요소중에서 최근에는 하나대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왜 초기보다 성공적이지 못한가? 황지우, 이성복, 그리고 키치라는 말도 시간적인 맥락에서 그런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키치의 특징적인 성격이 반복, 일상성은 반복을 전제로 하는데 반복보다는 오히려 1회성이 더 강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키치에 있어서 지속성을 전제로 하는 것 자체도 우리에게 있어서 논의에서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시간의 때를 인위적으로 입히는 노력들 혹은 시간을 일부러 영원성을 접어두고 현재성, 시간적인 현재성에 주목을 해서 오히려 과도하게 소급시키려는 노력들, 이런 자세가 오히려 더 키치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이를테면 컨츄리꼬꼬식의 패션이라든가, 이러 식의 것을 우리가 보면서 즐기거든요. 그것이 우리의 시간대에서 일부러 거스르고 소급했다는 것을 보면서도 그 자체가 재미있거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번에 김춘식 선생이 <한겨례21>에 쓰신 것도 읽으면서 굉장히 아주 정통에 많이 힘을 실어주고 자기 중심을 거기에서 잡으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저는 좀 그쪽보다는 좀더 변화쪽 미래지향적이라는 얘기를 쓰면 좀 오해가 있고, 키치적인 면들도 우리 전통미학적인 측면에서 말고 새롭게 본다라면 이게 왜 지속되어야 하는가 시인은 왜 평생 시를 써야 하는가? 좋은 시를 썼으면 거기서 끝날 수도 있지 않는가? 그러니까 단발적인 부분들도 키치적인 양상으로 인정이 돼야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서태지도 마찬가지로 1집을 내면 2집을 기대하는데 그게 아니라 1집 내면 끝내 버릴 수도 있는 그게 사실은 더 또 1집 끝낸 그 상태에서 또 다른 접점을 마련해서 누군가가 또 다른 생산을 해내는 부분 그런게 정말로 우리 지금 문화적 배경에서 보일 수 있는 어떤 키치적인 극단적인 어떤 양상이 아닐까? 그래서 얼마 전에 학생들이랑 무슨 얘기를 하다가 객담 비슷하게 하는 얘긴데, 시게임을 하나 만들어 보자. 네트워크 얘기를 하니까 그 얘기를 하더라고. 금요일 날 11시 만나자 전부. 프리첼 같은데서 방을 하나 만들어서 만나는데 동시에 시를 올리는 거야 한 줄씩. 쫙 올려서 올라온 순서대로 시를 조합하자는 거지. 그래서 조합을 해서 그걸 하나의 시로 보면 안되겠는가. 뭐 안될거야 없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양식에서는 아무 것도 허용이 안되는 기준들이고. 그리고 소위 말해서 대중성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거기다 게임의 요소를 집어넣자. 이를테면 그렇게 올렸는데 10행을 쓴 아이에게 뭐 경품을 준다라든가. 이런 식의 것을 한번 해 보자라는 거 근데 그렇게 됐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시에 대한 어떤 신뢰들 그런 거는 완전히 제거해야지 그 얘기가 가능한거지. 그러니까 한 친구가 절충안으로 내논 게 그럴듯한 시인들 몇을 놓고 필터링을 하자라는 거지. 중간에서 그러고 나서 올라온 것에서 시평을 주자. 이런 식이지. 그럴 경우에서 그것도 그 얘기를 한 친구도 변화의 부분에 맞추고는 있지만 기본적인 토대는 아주 본질적인 우리가 생각하는 시 쪽에 중심을 두고 있다는 얘기지요. 꼭 객담처럼 되어버렸지만요.
김춘식: 저는 객담으로 들리지는 않고 가장 키치적 본질을 잘 지적한 말이라고 생각해요. 그 재즈(JAZZ)라고 하는 것은 일회성의 예술이지요. '키치'의 속성 안에도 그런 즉흥성이 있기 때문에 지금 박기수 선생이 얘기한 그 부분이 바로 키치예술의 가장 핵심적인 원리를 지적했다고 보이네요. 최근에 와서 젊은 시인들의 시적 전략으로 사용되는 '키치적인 것'은 일회성이죠. 유하나 장정일도 재즈의 일회성을 무척 중요시 했죠. 저도 유하의 시학을 '재즈(Jazz)시학'이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 이 시인은 대중적인 것의 속성을 정말 잘 알고 있는 시인이죠. 저는 그의 이런 미학을 존중해요. 그래서 전통적인 미학에 의해서 그것이 이례적이라거나 불문율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고 보고 있고, 박기수 선생이 말한 그런 게임도 가능하다고 봅니다.(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독자 층위의 분화는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겠지만) 매니아층은 대중적 기반 위에서 서는 거지, 대중적 기반이 없이 매니아 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요. 그건 독선적인 엘리트주의죠. 아까 말했듯이 연필 하나와 종이만 있으면 시를 쓸 수 있었던 시인들이 왜 존중받느냐? 술마시다가도 창조력을 언제 어디서라도 발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죠. 기분 좋으면 쓰지만 수천금을 줘도 쓰기 싫으면 안 쓴다 이거죠. 뭐 이런 것들은 예를 들면 고급 독자와 작가 사이에 어떤 긴밀한 묵인이에요. 하지만 일반 대중에게 시는 '유희적인 것'이어야 하는 부분도 있는 거죠. 웃음이라는 건 진지한 것에 반대되기 때문에, 진지한 것을 '씹음(?)'으로써 웃음을 주죠. 키치적인 것은 '권위'를 우습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랭보라는 시인이 영화 '넘버 3'에서 삼류시인의 별명으로 나오고 하는 것은 처음엔 진지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그 '권위'를 그냥 안두기 때문에 우수꽝스럽게 된 대표적인 예이죠. 허위적인 권위를 까뒤집는데는 키치적인 전략이 아주 중요한 도구라고 봐요. 그래서 유하가 성공했던 건, 진실되지 않은 '미학적 권위'를 깨뜨림으로써 창조적이라고 인정받았기 때문이죠. 그 점에서 나는 키치적인 전략이라고 하는 것이 미학적으로 여전히 유효하고, 동시에 아까 박기수 선생이 얘기했던 것처럼 대중으로 내려오면 즐기고 유희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드는 데도 충분히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이재복: 키치의 미학적인 요소 중의 하나가 약간 즉흥성이라고 말했는데 굉장히 중요한거 같아요. 문학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적 환경에서 즉흥성이라는 자체가 하나의 미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있지 않은가 최불암시리즈도 일종의 즉흥성이라고 일단 존재론적 측면에서 존재 자체로 보자는 시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되는 건 과연 그게 얼마적 생산적 측면을 담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상과의 거리 유지 자체가 소멸되버린 상태에서 인식 주체의 측면만 강조하면서 유희나 재미만 추구한다고 할 때 그 자체가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가. 창조적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박기수: 우리는 진지한 것으로부터 가볍고 즉흥적이고 이례적인 것을 얘기했데 반대로 광고쪽에서 가볍고 키치적인 것에서 진지하게 만들어 새로운 의미를 주는. 예를 들어 미야자키히야오의 작품 중에 <원령공주> 중에서 생명의 신으로서의 사슴신이 나오는데 최근 기아의 차광고 중에 사슴이 나오는 적극적인 패러디가 시도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예로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에서 나우시카가 거대한 동물들과의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의 경우도 영화 <스타쉽트루퍼스>에서 거의 흡사하게 다루어지고 거의 같은 의미로써 사용됩니다. 들다 대중문화의측면에서 크게 차이가 없겠지만 조PD의 음악이나 서태지 같은 경우에도 제도권내에 들어와서 이것을 키치로 볼것이냐. 키치로 본다라면 거꾸로의 방향으로 그런 면이 우리가 처음에 전제했던 키치 자체가 지니고 잇는 저항성과 견제력 이런 부분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김춘식: 제가 맨 처음에 유하, 장정일씨가 90년대의 포문을 열었던 사람이라고 얘기했듯이 키치적인 것은 사실 90년대의 진지한 상상력, 90년대 후반 문학의 서정주의의 뿌리입니다. 유하가 문제적인 이유는 하나대와 압구정동의 두 공간이 한 시집에 실렸다는 점 때문이기도 한데 하나대와 압구정동이라고 하는 유하의 시적 공간은 90년대 '문화적인 키치의 두 얼굴'을 축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사라진 것으로써의 진실성에 해당되는 자연, 영혼, 신성, 신비라고 하는 것과 현실적이고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것이라는 양면성이 그것이죠. 지금 박기수 선생이 얘기한데로 장난스럽다가 갑자기 진지한 것으로 돌변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죠. 저도 신세대지만 신세대들은 관심이 있는 것은 진지하지만 조금 관심이 떨어지면 웃음으로 넘기려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의 시적 경향은 전략적인 부분에서 태도의 진지함과 웃음의 미학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의도적인 전략과 그 의도적인 전략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몸부림이라고 하는 두 가지를 모두 지니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젊은 시인의 시는 전략을 의도적으로 쓰거나 시적 전략을 시인의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죠. 이때 전략에는 유희도 포함됩니다. 유희와 키치적인 것을 포함하면서도 그 태도는 오히려 진지합니다. 진지함이 묻어 있는 웃음, 유희가 '진정한 예술이다'라는 의식적 지향도 간혹 볼 수 있죠. 90년대 대중문화에서 진지한 영화에 웃음 안나오는 영화가 별로 없죠. 웃음의 미학이라는 것을 확실히 안다는 것이죠. 과거에는 시가 엄숙한 표정만을 지었다면 지금의 시는 삶하고 똑같이 희노애락의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된다는 거죠. 특히 웃음의 미학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 되었다는 거죠. 이 점은 인간의 영혼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을 찾은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구원이라는 문제나 전통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볼 때도, 구원받으려면 꼭 엄숙한 표정을 지어야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라는 거죠. 그런 면에서 키치의 가능성이라는 건 잣대를 놓고 재는 게 아니라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환경이고 현상이고 우리의 정체성의 일부이기 때문에, 관심이 없이 정체성 확인은 안되잖아요. 그 점에서 '키치적인 것'은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볼 필요가 있죠.
이재복: 이제 시을 중심으로 키치를 계속 말씀을 하셨는데 소설에 나타난 키치적 영향을 한번 얘기해 보지요.
김춘식: 요즘 소설에 대해서는 시보다는 다소 부정적입니다. 소설은 오히려 키치적인 것을 단순한 '포장' 정도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지니치게 진지한 표정을 의도적으로 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소설에서의 주관성을 지적하는 부분과 시에서의 주관성을 지적하는 부분은 좀 다르다고 봅니다. 물론 그 사회적인 원인은 키치적인 것의 양면성 때문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보이지만, 그것이 문학 속에 반영되는 형태를 보면 요즘의 소설이 너무 독자의 취향을 의식하고 있어요. 매니아층이나 대중을 동등하게 인식함으로서 작가의식 정립하는 게 아니라 그저 눈치를 본다 거죠. 진지한 소설의 형태를 취함으로써의 매니아에게 호소하는 편과 키치적인 것을 다루는 재미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고 봅니다. 문학성을 인정받은 작품 중에도 자기 폐쇄적이거나 지나치게 일그러진 자아의 초상에 집착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고, 또 지나치게 키치의 두가지 속성, 신비주의에 몰입한다거나, 아니면 아주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경향 이 두 가지를 어정쩡하게 혼합하는 형태로 나가는 경향도 있다고 봅니다. 이창동이라는 소설가는 이 점에서 참 상징적인데, 소설가 이창동이 소설은 쓰지 않고 영화감독으로 성공했다는 사실은 소설이 상대적으로 영화에 위축되고 있는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줍니다. 그의 영화 <박하사탕>은 대중적인 정서을 함유하고 있으면서도 그가 가진 문제의식에서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뛰어난 영화입니다. 그런 점에서 비추어 보면 과연 최근의 소설이 그의 문제의식과 작가정신을 질적으로 따라잡고 있는가 하면 아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소설은 이제 그저 많이 팔렸다고 해서 권위를 인정해주지는 않습니다. 과거라면 많이 팔리는 것도 의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죠.
이재복: 소설에 대해서는 좀 부정적인 측면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작가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장르 소설이라는 제도상의 문제로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와 소설이 다른 이유가 시는 대상보다는 인식주체를 이야기한데 비해 소설이라고 하는 대상, 세계 현실을 강조하다보니 인식 주체가 가진 어떤 유희적인 측면 또는 재미, 신비주의 등을 소설이란 장르를 통해 어필하기가 좀 힘들지 않겠습니까? 성석제, 윤대녕, 신경숙 등의 작가들이 있지만 그런 측면에서 핸디캡 같은 게 오히려 한국문학의 현상에서 보면 앞으로 소설이 더 암울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김춘식: 시는 대중하고 이미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시집이 많이 팔릴 걸 생각하고 쓰지는 않습니다. 일단 써보고 자기가 요즘에 어떤 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자기의식의 점검으로 돌아가는데 소설은 여전히 눈치를 봐야합니다. 긴장 관계라기보다는 작가들이 독자에게 다소 끌려 갈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고 하겠죠.
이재복: 이건 출판 유통에 관련있겠죠. 출판사에서 시보다는 소설쪽에 상업성을 기대하기에…….
김춘식: 최근의 소설에 대해 제가 부정적으로 얘기했지만 애착이나 애정이 없는 건 아닙니다. 90년대 소설을 애정을 가지고 보면 볼수록 어떤 문제에 대해서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데 제도적인 측면의 영향이 시보다는 소설에 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와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소설가의 작가의식이 현저하게 후퇴한 것도 사실이죠. 키치적인 요소는 실제로 시보다는 소설 속에 틈입하기가 훨씬 용이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시 속에 키치적인 요소가 들어가면 '새로운 정신'으로 변화하는데 소설 속에 키치적인 요소가 들어가면 상업화되기가 쉽습니다. 윤대녕의 신비주의도 다소의 키치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고 김영하의 재치라던가 묵시록적인 이야기, 나르시시즘도 키치적이라고 할 수 있죠. 이 두 작가의 소설에서 90년대 문학의 환상성, 즉 판타지적인 이야기성이 발견되는 것도 한 예라고 하겠죠. 하지만, 초기의 윤대녕, 김영하의 소설은 문학적 생산력이 도출될 수 있는 새로운 창조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으로 가면 이 두 소설가조차도 많은 면에서 오히려 영화를 비롯한 영상매체의 대중적 상상력에 오히려 뒤떨어집니다. <식스센스>, <콘택트>, <동감>과 같은 영화에서 보여준 섬세한 '신비주의'와 존재의미에 대한 질문을 담은 상상력을 신경숙, 조경란의 소설이 동일하게 보여주지만, 결과적으로는 영화의 상상력을 뒤쫒아 가고 있는 셈이죠. 이 두 여성 소설가의 작품에는 이미 죽은 화자가 등장하죠. 즉, 죽은 영혼이 화자로 등장하는데 이런 시도는 문학작품에선 독특한 것이지만 영화에 비하면 이미 한발 뒤처진 것입니다. 결국, 대중적 상상력을 소설이 뒤따라가면서 베끼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죠. 특히, 소설가 중에 대중문화 매니아가 많다는 점은 이런 문제점을 좀더 명확하게 나타냅니다. 대중문화의 영향을 무의식적으로 받는 과정에서 그 영향에 수동적인 입장으로 노출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죠.
이재복: 김영하 같은 경우도 영화적 상상력이라고 하면서 문학적으로 그 상상력을 높이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영화에 미치지 못하거나 따간다는 것입니다. 문학 안에서만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앞으로의 시대가 문학에서 문화로 가는 시대라면 그런 것들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부분들도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김춘식:소설은 대중문화의 일부입니다. 소설의 재미나 흥미는 언제나 사회적인 문제로 환원해서 의식됩니다. 평론가의 입장에서 보면 김영하, 운대녕의 소설은 90년대 초반의 대중적 무의식을 많이 반영하고 있죠. 어느날 사라지는 회사원이라든가, 조직사회에서의 개인의 소외, 현대사회의 위선과 문제점들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의 무의식적인 욕망의 탈출구를 노출시켰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인데, 사실은 그런 표면적인 폭로보다는 좀더 본질적인 문제로 깊이 내려가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죠. 시에서 저는 본격문학과 고급문학에 힘을 실어 주려고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 한국문학 전체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하다. 한국문학에 애정을 가지고 대할 때마다 우리는 '존재의 심연' 속으로 잠수해 들어간 진정 깊이 있는 문학에 대한 아쉬움을 공유하게 됩니다. 소설의 입장에서 보면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 소설이 좀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독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철저한 장인정신의 요구일 수도 있죠. 장인의식은 철저화 해야할 자기정체성이지, 그저 "나는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다"라는 의식은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신경숙씨가 어머니한테 책을 보여 드렸더니 "소설이 뭐냐"라고 물어서 "글씨를 모아 놓은 거예요."라고 대답했다는 얘기는 90년대 초반의 문학적 경향을 대변하죠. 소설이 아니라 글쓰기라고 하는 개념 속에서 상상되는 것, 여기에는 소설의 장르규범을 무너뜨리는 획기적인 발상이 들어있는데, 결국 무너진 장르는 다시 일정하게 응집력을 갖추어야 스스로의 존재영역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이죠. '글쓰기'로 확장된 소설의 개념은 이제는 다시 재고 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모든 글쓰기를 소설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죠. 과연 소설가로서의 나는 어떤 소설을 쓸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 함께, 자기 정신의 철저성이 투영될 수 있는 '작품'을 90년대 소설은 결핍으로 안고 있는 것이죠. 사실 90년대 문화의 가장 큰 결핍이라는 것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순히 소설이라는 장르 개념에 묶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진정으로 글이란 무엇인가를 물어볼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쓰려는 욕구가 얼마만한 결핍으로, 거의 터질 지경까지 이르고 있는가를 묻고 싶은 거죠.
박기수: 생산자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주변 환경도 중요합니다. 가령 김영하도 초기의 번뜩거림이 많이 무뎌진 이유가 아주 자기 소모적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싫고 싶지 않아도 모든 계간지에 살어야만 하는 소모적인 문단 구조도 문제죠. 윤대녕 처럼 비범한 작가가 평범해지는 것을 보는 것은 다소 고통스런 일입니다.
김춘식: 작가를 아끼기지 않고 혹사하는 제도적 구조가 문제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사람들의 문제의식은 희박합니다. 에너지를 아껴 써라, 하면서도 청탁은 하는 이런 방식의 이중적인 제도나 환경이란게 여전히 현존하는 상황에서 작가의 창조력은 소진되버리게 마련이죠.
박기수: 같은 맥락에선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작가에 대해 많은 관심은 다다익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런걸 접하고 발표할 수 있는 매체가 한정 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숱한 작가들이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는 그런 부분이 우리문학을 전반적으로 편향되고 일방적이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김춘식: 평론을 하는 입장에서의 자기 반성이지만 가능성 있는 작가를 발굴하는 게 평론의 역할인데 소설가에게 지나치게 완성태를 요구하곤 합니다. 평론가로서는 안정된 작가를 선정하고픈 욕구가 있고 믿었던 작가에 대해서는 끝까지 같은 관계를 유지해야한다는 강박관념들이 있기 때문에 소수 작가들에게 평론이 집중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 평론의 경우도, 물론 아주 좋은 평론도 많았지만, 지나치게 몇몇 작가에게 집중되면서 비슷비슷한 평론이 많았다는 점도 아쉬움이죠. 그러나 아쉬움이 큰 만큼이나 앞으로 소설이 개척하거나 문제의식을 갖고 새롭게 시도해야할 부분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시가 소설보다 긴장감이 강한 것은 극단에 몰렸기 때문인 것같아요. 소설은 긴장감을 안가져도 할수 있는 여건이 많기 때문에 시는 죽었는가? 하고 얘기해도 소설은 죽었는가? 라고는 얘기 안해요.
박기수 위기감도 위기감이지만 오히려 아예 그 부분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았습니까? 포기하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상대적으로 오히려 자율성을 확보한 것은 아닙니까?
이재복: 결론적으로 키치의 존재론에 대한 전망을 해주세요
김춘식: 이제까지의 정리인데 키치의 긍정성은 애정을 가지고 바라봐야 하는데 키치에서 문화적 생산력이나 응전력을 우리는 발굴할려고 하면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랍고 봅니다. 전에 우리가 키치는 숙명이다, 환경이다 라고 했는데 이 문화가 사실은 전부 키치적인 거죠, 키치가 대중문화 전부를 대변한다고까지 봐요. 거기서 어느 만큼의 창조력을 공급받을 수 있느냐 하는 데 이 시대의 예술과 문화, 문학의 창조자들이 해나갈 과제 있다고 봅니다. 그 키치에 대해 긍정과 부정을 말하기보다는 그 자체가 이미 환경이기 때문에 과연 어떻게 대응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박기수: 김선생님의 얘기는 동의하고 하고 그 대응의 부분에 대해서 좀 더 구체화하면 키치라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유효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논외로 하고 키치적인 상상력이나 영향력이 우리 문학이나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하는 면에서 저는 키치가 지니는 매체적 상상력의 가능성에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매체적인 상상력 자체가 문학 혹은 문화의 패러다임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미학이나 신문방송학 쪽의 연구 성과에서도 드러난 바와 같이, 매체적 상상력이 문학의 패러다임 전환에 긍정적 기여를 할 것이라는 다소의 낙관론을 조심스럽게 밝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