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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 소설 『러브 스토리』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다. 허나 이 말은 터무니없는 감상일 뿐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완벽한 세상에 산다면 미안하다는 말이 필요 없겠지만,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불완전한 세상에 살기에 그 말이 필요하다. 사랑할수록 더 해야 한다. 사랑이란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엘튼 존의 노래에도 있듯이 “미안하다는 말은 정말 하기 힘들다(Sorry Seems To Be Hardest Word).” 그럼에도 우리가 그 말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는 유일한 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이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나요?” ― 부모를 살해한 한 청년이 나중에 경찰서에서 울부짖은 말이다. 어릴 적부터 심한 학대와 언어적 모욕을 받으며 자란 그는 성년이 되고 나서 딱 한 번, 부모에게 거세게 반항한 적이 있다고 한다. 허나 그때조차도 그의 부모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그를 비난하기만 했다고 한다. 그 일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그는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실화이다.
미안하다는 말이 가진 힘은 의외로 크다. 진심어린 사과의 말 한마디는 상대방의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풀고 용서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다. 깨진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열쇠는 진심을 담아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굳이 상대에게 직접 말하지 않아도 좋다. ‘누구누구야, 미안해~’라고 진심을 담아 마음으로 말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우선 내 마음이 위로를 받고 치유가 된다. 은연중에 그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달이 된다.
『있잖아요 미안해요』는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통해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해 나가는 명상학교 학생들의 체험담이다. 명상학교에서 ‘미안함’이라는 주제로 열린 백일장에서 당선된 30편의 글들을 모아 엮었다.
가장 많이 상처를 주고받는,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큰 미안함을 갖는 상대가 있다. 바로 우리의 가족들이다. 가깝기에 서로 의존하고, 의존하면서도 이해하지는 못하고, 그러기에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인연…. 『있잖아요 미안해요』에 실린 글들의 상당수도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전하고 있다.
슬픔, 미움, 원망, 회한, 외로움, 서러움…, 이 모든 얽히고설킨 감정들이 ‘미안함’이라는 효소를 만나 발효가 된다. 무르익어서 감사의 맛을 머금게 된다. “미안하다”는 말을 아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몇 편의 사례를 요약?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아버지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던 우리 가족
내 탓이에요 | 이수진(34, 중견IT기업과장)
어느 날 집에 채무담당자가 나타나 협박을 했다. 당장 빚을 갚지 않으면 가압류에 들어가겠노라고 했다. 알고 보니 아버지가 가족 몰래 카드빚을 내서 주식투자를 했던 것이다.
당장 빚을 갚지 않으면 집마다 빼앗길 상황에서 우리 가족은 아버지에게 이혼을 종용한다. 그렇게 아버지는 합의이혼을 하고, 파산신청을 하고, 신용불량자가 됐다. 딸의 결혼식에도 못 올만큼 가족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가족들에게 복수를 한다. 중국여자와 위장결혼을 하여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다.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허나 이 모든 것이 어찌 일방적으로 아버지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주식투자를 하기 전부터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가족의 한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았었다. 의도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아버지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셔서 혼자 밥을 드시고, 문간방에 들어가 홀로 잠을 청하시고, 다시 아침에 나가실 때도 가족 누구도 살갑게 대화를 건넨 이가 없었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아버지는 수년간을 그림자처럼 홀로 외롭게 살았다. 경제력이 없는 아버지의 자리란 그렇게 외로운 것일까? 아버지는 그 외로움을 달래고자 친구를 찾았고, 친구 따라서 시작한 주식이 처음엔 10만 원, 20만 원, 불어난 것이 수천만 원이 되었다. 순진하고 착하디착하시기만 한 분이 수천만 원을 잃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지옥이었으랴. 그리고 사건이 터진 후에도 아버지는 철저히 혼자였다.
그러니 가족이라는 인연 안에서 일방적으로 한 사람이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관계는 없는 것이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음을 발견한다. 내가 받은 상처의 원인으로 나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는다.
***** 시아버지에게 던져 버린 라면 한 그릇
라면 한 그릇 | 백호현(39, 전직 국세청 공무원)
맞벌이를 하는 며느리인 ‘나’는 치매기가 심한 시아버지를 모시게 된다. 시어머니가 병환으로 입원하는 바람에 돌볼 사람이 없어 같이 살게 된 것이다.
치매기가 점점 심해져가는 시아버지, 밤새 속옷에 오줌을 지려놓고 은근슬쩍 벗어서 새 내복처럼 개놓는다. 낮에는 쿨쿨 자고 밤에는 집안의 불을 다 켜고 돌아다닌다. 하루에도 다섯 번씩 먹을 것을 달라고 투정을 부린다.
“큰애야, 나 배고프다. 왜 밥 안 주냐?”
날아갈듯이 밥상을 차려 가져가니 밥이 먹기 싫다고, 팥죽을 끓여 오라고 한다.
팥죽을 준비하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큰애야, 나 흰죽 먹고 싶다” 한다.
다시 부리나케 흰죽을 끓여 대령하니까 이번에는 라면이 먹고 싶다고 한다.
마음공부의 마지막 고지에서 나는 씩씩거리며 라면을 끓였다.
서둘러 라면을 끓여 가져가니까 무슨 라면이 이렇게 뜨거우냐고 소리를 지르며,
“큰 대접에 식혀서 가져 오너라” 한다.
화나는 걸 간신히 참으며 큰 대접에 라면을 붓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식혀서 상 위에 놓는 순간, 그만 나도 모르게 대접을 꽝 소리가 나게 던져버렸다.
‘아차,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걸 어째…?’
밥상 위로 튀어나간 뜨거운 라면 국물과 면발, 시아버지 얼굴로 날아간 국물 파편, 시아버지의 놀란 눈빛과 벌어진 입! 온갖 후회가 몸과 마음을 찌르며 덮어 왔다.
‘마지막 마침표를 이렇게 찍는구나!’
그로부터 1주일 후, 시아버지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라면 한 그릇의 섭섭한 마음을 안고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사랑 없음’에 대한 미안함
사랑 없음 | 박혜원(36, 의사)
아버지의 재혼으로 새어머니와 같이 살게 된 ‘나’는, 비뚤어진 피해의식으로 나 자신을 ‘구박받는 콩쥐’ 쯤으로 여겼다.
대학 진학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의대에 가겠다는 나에게 새어머니는 수심에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네 성적에 무슨 의대를 가니…?”
성적은 문제없다고 말씀드려도 반응이 신통찮았다. 피해의식에 가득 찬 나는 이렇게 단정했다.
‘친딸이 아니라고 내가 잘되는 게 그렇게도 싫은 건가?’
나는 새어머니를 아주 몹쓸 팥쥐 엄마쯤으로 치부한 후, 고집을 피워 의대에 진학했다. 부모님은 비싼 의대 등록금을 대느라 허리가 휘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가 닥쳤다.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나는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어렵사리 학업을 이어나가야 했다. 의대에 가겠다는 괜한 고집이 나 자신에게도 고통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중에야 깨달았다. 사실 새어머니는 나를 사랑했음을…. 적어도 그러려고 최선을 다했음을…. 다만 자신이 낳은 어린 두 자녀의 장래 또한 똑같이 걱정스러웠음을….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바라보고 있었고, 늦게 본 동생들은 아직 어렸다. 그 와중에 의붓딸이 공부하는 기간도 길고 학비도 만만찮은 의대에 진학하게 되면 샐러리맨 아버지의 경제력으론 어린 두 동생의 뒷바라지가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네 성적에 무슨 의대를 가니…?”라는 볼멘소리 뒤에는 어린 두 자녀의 불투명한 장래를 걱정하면서도, 냉랭하기만 한 의붓딸이 어려워 속 시원히 속내를 털어 놓지도 못하는 새어머니의 한숨이 애처로이 묻혀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억측과 원망들에 대해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무엇보다도 나의 ‘사랑 없음’을 사과하고 싶다. 나의 사랑 없음에 상처 받았을 수많은 영혼들에게 많이 미안하다.
***** 나 자신에게 격려장과 박수갈채를 보내다
비(非)선수권 대회 | 이영아(39, 무규칙 퓨전 예술가)
헤드헌팅 회사를 운영하는 한 후배를 알고 있다. 그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기억도 잘 못하는 5살 때 친엄마가 욕조 물속에 머리를 처박아 물고문을 했다고 한다. 또 내가 아는 어느 중년 부인은 어릴 때부터 엄마한테 항상 매 맞는 것은 물론이요,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발가벗겨져서 종종 집 밖으로 내쫓겼다고 한다. 용변 실수를 한다고 새엄마한테 달군 쇠 젓가락으로 항문이 지져진 아이도 있었고, 친아버지가 프라이팬으로 손을 지진 아이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 살아가면서 인간적으로 냉담해지지 않고, 성격이 포악해지지 않으며, 주눅 들거나 열등감이 심하지 않게 자라날 수 있을까?
아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평범하게 자란 사람들이 평범하게 되는 것보다, 얼마나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죽기 살기로 노력해야 그들의 마음에 박힌 독기가 빠져나갈까? 거기에 한 단계 더 나아가 사람이 따듯하고 온순하며 한없이 가볍게 되는 것은 과연 가능이나 한 것일까?
귀감이 될 만한 사람들을 ‘선수’라고 칭한다. 산 타는 데 선수인 엄홍길. 춤추는 데 선수인 강수진, 그 외에도 사람들의 찬사와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선수들…. 그들이 힘써 쏟은 에너지와 노력들은 가히 찬사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삶’이라는 이름의 진정한 경기는 대부분 시상대와 무대 밖에서 이루어진다. 각종 세계 선수권 밖의 선수들이라 그 경기는 이름 하여 ‘비(非)선수권 대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해서 돈이 절실하고 못 배워서 한이 되었으며, 사랑을 못 받아 가슴이 황폐하고 건강이 허락지 않아 몸이 괴로우며, 학대 받아 삐뚤어지고 무능해서 기를 펴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이름 없는 이들 모두가 이 대회의 대표선수들이다.
비 선수권 대회 선수들을 대표하여 나 자신에게 박수갈채와 격려문을 보낸다. 귀하게 대하지 못함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 격 려 장 ≫
비 선수권 대회 선수 이영아
이 선수는 극심한 우울증 속에서도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심지어는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므로
이에 격려장을 수여함.
기립 박수! 브라보! 브라비시모! 예보! 올레! 울라랄! 따봉!!!!
짝짝짝 짝짝짝짝 짝짝짝짝 짝짝짝짝짝짝짝짝~~~~~~~~~~~~~~~~~
***** 내 손짓만 바라보고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로 죽은 동생
청평호에서 | 김진성(40, 무역회사 운영)
너무도 착했던 그리고 늘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저의 동생은, 여섯 살 되던 해에 길 건너편에서 손짓하던 저만 바라보고 길을 건너다가 집채만 한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장 사랑하던 형제의 죽음을 그렇게 경험한 후 저는 평생 죄책감을 내 안에 두고 동생 몫까지 두 배를 살아야한다는 의무감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늘 인생이란 허무하고 덧없다는 생각을 그리도 자주하게 되었지요.
사무치도록 미안하고 모든 것을 바쳐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오늘처럼 물가에 앉아있을 때면 이내 마음속으로 동생의 이름을 불러보곤 했습니다. 언젠가 한없이 가벼워져 하늘 끝 한 점에서 만나게 된다면,
“사랑하는 나의 착한 동생아~ 이제 형을 용서할 수 있겠니?”
하며 뜨거운 가슴으로 꼭 안아주고 싶습니다.
***** 당신은 왜 나에게 베푸는 건가요?
신문로 | 이정목(42, 자영업)
중학교 시절 단짝 친구였던 B는 머리에 큰 화상 자국이 있었고, 어머니와 단둘이서 극심한 가난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동정심이 일었다. 매점에서 점심을 사주기도 했고, 버스 회수권이나 토큰을 나눠 주기도 했다. 어느 날 B가 나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왜 나에게 베푸는 거지?”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또박또박 대답했다.
“내가 너에게 약간씩 베푸는 건… 이미 난 누군가에게 베풂을 받은지도 모르고, 앞으로 누군가에게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지. 여기서 말하는 그 누군가는 과거의 너였을 수도 있고 앞으로의 너일지도 모르지….”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감동적인 대답이었다. B 역시 그런 나의 대답에 큰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이제야 제대로 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뻐하며 진정으로 나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왔다.
그때부터 나는 점점 B가 부담스러워졌다. B는 나를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로 생각했지만, 나는 B를 그렇게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존심 강하고 눈치 빠른 B는 나에게 조금 실망하는 듯 보였다. 더 이상 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B에게 인색했던 순간들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그에게 얼마나 베풀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B가 나에게 주었던 무한 신뢰와 순수했던 우정을 냉정하게 저버린 이기적인 죄책감, 바로 그것이다.
살면서 절대로 듣지 말아야 할 질문이 한 가지 있다. “당신은 왜 나에게 베푸는 건가요?”라는 질문이다. 상대방이 베푼 것을 눈치 챌 정도라면 그건 이미 베푼 것이 아니리라.
무엇보다도 이 친구가 제게 가르쳐준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이미연은 귀한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울보에 말없고 내성적이고, 늘상 풀죽어 있고, 제가 생각해도 예쁜 구석이 없었던 제게 친구가 말해주었습니다.
“너는 특별해. 너는 예뻐. 그러니까 힘내!”
내가 특별해? 내가 예뻐? 힘이 들 때 친구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친구가 가르쳐 준 대로만 살았어도,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 같은데…. 살면서 자꾸 잊어버리고 저의 존재를 못마땅해 했습니다. 제 자신을 힘들어했습니다. - 친구의 선물
우리집 왕따 아버지께
아버지는 여기저기 병원을 돌다가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안착하셨죠.
저는 아버지가 어찌 되어도 울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요. 싫었으니까요. 그리고 인생이 이젠 자유로워질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의사로부터 가망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 나니…. 참 신기했어요. 잠깐 화장실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울지 않을 자신 있었는데, 그냥 나오는 눈물을 참을 도리가 없었네요. 이런 것이 핏줄인가 싶었어요.
- 우리집 왕따
크게 미인은 아니나 조물주님의 정성으로 빚어나온 줄 내 미처 깨닫지 못하여 외모마저도 예쁘고 귀한 줄 20, 30대에는 정말로 몰랐더라.
내 머리 허예지고 지방질 가슴에서 아랫배로 이동한 불혹의 나이에 이 사실 알았으니, 귀한 줄도 모르고 피기도 전에 시든 나의 외모에게도 미안하기 그지없네.
세상 여자들아 세상거울 보지 말고 하늘거울 쳐다보세.
조물주님 눈동자엔 송혜교와 한 가질세.ㅋㅋㅋ~~~~~
- 비 선수권 대회
나의 엄마는 스킨십을 모른다. 자식인데도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하셨다. 엉거주춤. 그게 싫었다.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드라마에서 모녀간에 살을 비비고 끌어안고 다정하게 말하는 걸 보며, 어렸을 때는 그게 드라마 속의 과장된 허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러다 그것이 허위가 아니라는 걸 서서히 알게 되면서 무뚝뚝하고 쌀쌀한 엄마가 싫었다. 나보다 엄마 자신을 먼저 생각한다고 여기며 엄마에 대한 미움을 키워갔다.
-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기?
“그리 맘에 안 들면 내 집에서 나가라. 내 밥 먹지 말아라~!”
얌통머리 없는 기집애 생각한다. 치사하지만 얻어먹는 입장은 맞다. 하지만…,
“이 집이 어떻게 아빠 집이에요? 엄마 집도 되지. 그리고 그렇게 밥 멕이는 게 싫으면 왜 낳았냐고, 누가 낳아달라고 했냐고욧!…. @#$%##~~~!!!!”
숟가락이 날라가고 말이 송곳이 되어 이리 쓩~ 저리 쓩~. 이쯤 되면 즐거운 밥상은 막 나가는 밥상이 된다.
- 아버지의 손
불쑥불쑥 이 세상 통틀어 내가 제일 불행하다 느꼈던 그 시절이 실은 엄마가 있음으로 해서 그나마 안락하고 행복했음을, 온몸으로 당신의 최선을 다해 우리 가족의 지킴이, 안식처가 되어 준 ‘우리 엄마’야말로 내 인생의 귀인이시다.
- 내 인생의 귀인
그런데 영화를 다 본 교수님께서 큰 실수를 하셨다. 많은 학생들 앞에서 “넌 영화하지 마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냥 더 분발해야겠다는 말을 ‘세게 하시네’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다음 말은 오랫동안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이 확실히 남자들에 비해 작품이 떨어진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뻑’하고 전구 터지는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그냥 무심하게 넘길 수도 있었지만, 교수님의 말씀은 단지 여학생들을 독려하는 차원이 아닌 다분히 진심이 묻어 있음을 난 알았다.
- 세상의 남자들이여~
언젠가 어머니께서 지나가듯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도 마음이 힘들고 몸도 아팠겠지만, 우리는 마음이 다 타서 까맣게 재만 남았을 게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저는 아차 싶었지요. 집안에 한 사람이라도 아플 양이면 온 집안 식구들이 같이 아파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죠.
‘내가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순 없구나! 그동안 가족들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었을까.’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그때부터 저 자신과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어요. 건강했을 때의 모습을 간직하며, 그대로 살아가기로 결심을 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나갔죠. 몸이 회복되는 동안 운동도 하고, 명상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방청소도 하고, 간혹 부모님을 웃겨드리기도 하고.
- 팔이 하나 더 생겼어요
몇 달 전에도 저소득층 일제 조사한다고 어느 분께 전화를 했는데, 몇 년 전에 나에게 상담을 받고 가면서 길에서 서럽게 울었단다. 1시간 동안 전화를 붙잡고 대화를 나누며 오해를 풀고 사과를 드렸다. 심한 우울증을 겪는 분이었고 피해의식도 있는 분이긴 했지만, 나의 언행으로 상처를 받으셨기에 진심으로 사과를 드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