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특수교육연구소장 석인수입니다.
우리아이들의 발달지체영역이 무지개 스펙트럼 처럼 다양하다는 이유로, 또 우리 아이들의 개별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는 내 아이에 적합한 교육을 찾아 헤맵니다. 어느 치료가 좋다더라 하면 행여 내 아이에게 꼭 필요한 교육이 아닐까 싶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우리의 아픈 현실을 봅니다.
정신지체아를 위한 교육, 정서장애아를 위한 교육이 다르고 정서장애아 중에서도 과잉행동장애아에 대한 교육이 다르고 자폐아에 대한 교육이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다른 것에 대한 교육이 우리 아이 발달에 차지하는 비중은 10-20%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나머지 80-90%는 어떤 장애유형이든 동일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이마다 다른 10-20%를 과대하게 생각하여 그곳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우리가 바람직한 발달을 기대하기에 어려움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작 집중해야 할 것은 80-90% 동일한,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즉, 발달이 느리다는 것입니다. 지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초보적인 얘기같지만 이 초보적인 문제제기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특수교육이 너무 특수성을 강조하고 특수한 교육과정 전문가를 배출하면서 보편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특수교육이 유아교육 기초 위에 있지 아니하고 별도로 존재하면서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특수교육하기 전에 보편적인 유아교육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아이들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특수교육이전에) 까꿍과 박수와 칭찬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해맑게 웃는 엄마의 포근한 미소입니다. 이것이 우리 아이 발달의 80-90%를 차지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잃어버리고 자폐아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적용하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기초로 돌아가고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아이들의 교육!
부모가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부모가 하셔야 합니다.
저희 아이가 발달장애 1급에서 일반아이가 되기까지 그 과정에 숨어 있는 일반교육을 들어보세요.
<아버지인지 아저씨인지? 이제 정체성을 보이셔야 합니다.>
안녕하세요? 대구특수교육연구소장 석인수입니다.
우리나라 장애부모의 특성을 살펴보면 옛 선조들의 행실(?)을 그대로 닮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들은 선비복을 입고 저 만치 앞서가면 우리 어머니들은 아이를 등에 업고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바지런히 따라 다니셨죠.
우리 어머니들은 세계 어느 어머니와 견주어도 빠지지 않을 만큼 헌신적입니다. 열성적입니다. 희생적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들은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특히 경상도 아버지들의 퇴근 후 가정에서 한다는 3마디 말
"아(이)는? 밥뭇나? 자자." 는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미국에서 특수교육 워크샵이 있는 날이면 아버지들이 장애아의 손을 잡고 워크샵에 참석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하물며 중국에서는 일요일 공원에는 아버지와 아이들로 넘쳐납니다. 엄마는 찾아보기 힘들답니다.
일본과 한국의 아버지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들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구조가 아버지들의 등골을 휘도록 밤늦게 까지 일을 시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제가 부모교육을 다니면서 지켜 본 변화로 최근의 아버지들에게서 변화의 조짐을 보게 됩니다. 예전보다 아버지가 참석하시는 분들이 많이 늘었다는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여전히 가정에서 아버지가 해야 할 역할이 정립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무언가 도움이 되고는 싶은데 딱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계십니다.
장애아엄마교육이 아니라 장애아부모교육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장애아아버지교육으로 초대합니다.
부산개금종합사회복지관 051-893-5034 에서 12월 10일(토) 오후 4시 발달지체아 아버지교육합니다. 어머니도 물론 환영합니다.
지난 번 부산 두레나무 학교 부모교육에 오시지 못한 부산 가족들을 초대합니다.
<부모가 열심히 해야 우리아이들이 발달하는가(1)?>
우리아이 발달에 성공해서 책을 내신 분들의 수기를 읽다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 분들은 모두 초인적인 사랑을 갖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 같이 대부분의 범인들이 보기에 그 성공사례는 우리를 주눅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책을 덮고 용기를 얻어야 하는데 반대로 '상대적인 패배감'에 시달리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 그런가? 2가지 마음이다.
하나는, 저 부모는 저렇게 훌륭해서 자기 자식을 장애의 굴레에서 건져내었는데 나는 뭐하고 있었나? 하는 과거에 대한 자괴감이다.
또 하나는, 책 속의 부모처럼 나도 열심히 해야 하는데 도무지 저렇게 열심히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는 무력감이다.
그래서 정서장애도 신체장애처럼 한 번 장애면 모두가 영원한 장애라고 굳어지면 최소한 부모노릇 못한 것으로 죄의식을 갖지 않아도 되었는데, 누군가 가끔씩(1년에 1권정도) "나는 내 아들 치료했다" 하는 책을 펴내면 상대적으로 그 나머지 99%의 부모들을 더 낭떠러지로 밀어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한마디로, 다 못할 때는 내가 살 수 있었는데 누구는 '되더라' 라고 한다면 그때부터 우리네 마음은 1000근이 누르기 시작한다. 물론 10근의 희망이 저울의 반대추에 매달려 중심을 잡겠다고 데롱데롱 애쓰지만..
이것이 다른 장애영역과 다른 정서장애아를 둔 부모의 또다른 아픈 세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책 속의 저자처럼 동일한 방식대로 열심히 따라해 본다. 여행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하면 산과 들로 발이 부르트도록 다닌다.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고 하면 '이판사판'격으로 매달린다. 마라톤이다. 수영이다...
일주일만에 입술이 부르트고 온 몸이 쑤신다.
먼지가 소복히 쌓인 창고를 청소할수록 가라앉아 있던 온갖 먼지들이 기세등등하게 일어나 우리를 질식시킨다.
또 다시 절망한다. 아이를 바라보다가 "니는 지지리도 복도 없다. 좋은 부모에게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평생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 하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제가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그동안 책을 내신 분이나 매스컴을 타신 분들의 수고를 폄하할 의도는 머리털만큼도 없습니다. 그 분들에게서 많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큰 스승으로 모시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제가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지난 8년간 특수교육에 몸을 담으면서 또 8년동안 전국을 다니며 우리 부모님들을 만나면서 느끼게 된 것이 우리 정서장애아 부모들이 너무 외롭고 고독하더라는 것입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지요. 우리아이들의 성공사례가 꽃이지만 그것이 대중에게 전달될 때는 남은 우리 부모들이 그 꽃에 의해 상처를 받을 수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열심히 해야 우리 아이들이 발달하는가?(2)
그러면 성공한 부모들은 책을 출간하지 않아야 하는가? 매스컴에도 나오지 않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책도 내고 매스컴에도 자주 자주 나와야 합니다.
문제는 이를 바라 보는 남은 우리 99% 부모들의 시각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무엇에 주목해야 하느냐입니다. 헬렌켈러를 위대하게 한 교육프로그램이 아니라 인간 설리반이 어떤 사람이냐를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뼈를 깎는 수고를 해야만, 마라톤을 해야, 수영을 해야, 아이가 발달한다는 생각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분들이 왜 그런 프로그램을 도입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아이는 우리 부모의 힘만으로 낳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자손들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선조들의 숨은 공로(?)가 있습니다. 마라톤 재능이나 수영재능은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지 않습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부모가 잘하는 것, 부모가 재미있는 것을 활용하고 적용해야만 효율성도 뛰어날 뿐더러 부모가 지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아이들의 교육은 반복하는 힘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라도 부모가 이해하지 못하고 재능이 없다면 일회성 이벤트 교육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교육프로그램이라도 부모가 배워서 집에서 반복하지 않는다면 커텐안의 교육은 조금 더 자주하는 이벤트교육에 불과할 뿐입니다.
평범하지만 부모가 좋아하는 요리, 실뜨개, 종이접기 기타 수많은 일들이 우리아이 교육에 더욱 적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례로, 미국의 한 유치원에서는 일주일 내내 요리만 하는 곳이 있는데 최고인기라고 합니다. 요리만 하면 언제 셈하기를 가르치느냐 반문할 수 있겠지만 시장보는 것 부터 수업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실뜨개를 잘 하시는 분은 감각통합, 작업치료, 주의집중 훈련 너무 의존하지 마시고 하루에 뜨개질 1시간이라도 꾸준히 해 보세요. 단, 직업훈련 시키듯이 하시면 안됩니다.^^
정리하면, 부모가 열심히 해야, 뼈를 깎는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해야 우리 아이들이 발달하는가? 저는 이 질문이 우리를 너무 비참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해야' 대신에 '즐겁게 해야' 가 더 맞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Yes! 즐겁게 하면 우리 아이들이 발달합니다.
한 예로, 저는 아이들을 산에 데리고 가면 일부러 교육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흔히 푸른 것이 눈에 좋다더라. 소나무껍질에 부비면서 까칠까칠하나 하면 감각통합이다. 해서 열심히 하시는데
그렇게 사시면 인생이 우울해 지지 않나요?
저는 아이를 산에 맡기고 산림욕을 합니다. 내가 즐겨야 또 산에 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이를 산에 데리고 와서 교육한다고 애쓰면 화병이 나서 또다시 산을 찾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산에 와서 즐겼으니 또다시 산을 찾을 것입니다.
아이도 처음에 산에 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냇가에 앉아 돌만 던집니다.
그러면 저도 옆에 앉아 돌을 던집니다. 아마 아이는 물파장을 즐기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 큰 돌을 던집니다. 파장이 더 큽니다. 그러다가 아들 녀석이 큰 돌을 주워 옵니다. 이것이 곧 인지교육입니다.
그러면 저는 또 순서를 가르칩니다. 너 한번, 나 한번. 이것은 사회성 교육입니다.
돌을 많이 던진 녀석이 포만감을 느꼈는지 비로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최소한 Joint Attention을 이룬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특수교육입니다. www.zape.co.kr의 육아일기 중에서
<취학, 통합교육을 준비하는 우리 부모에게>
해마다 이 맘때면 우리아이를 둔 가정마다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초등취학 때문이다. 유예냐? 진학이냐의 갈림길과 특수학교냐? 일반학교냐의 네 갈래에 서서 머리에 쥐가 날 정도가 아니라 소가 날 정도다.
이 일을 먼저 겪은 선배(?)로서 조언을 드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학교가 군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부모님들은 아이가 치열한 생존의 전쟁터에 들어가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염려한다. 아이가 다칠 신체적, 심리적 부상(?)에 미리부터 패배감에 휩싸인다. 그러나 우리가 지각해야 할 점이 있다.
학교는 인간을 만드는 곳이다. 아직 배움이 부족한 철부지 아이들에게 질서와 협동과 하나됨과 인격과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다. 유치원과정까지 한글을 떼지 못한 아이들은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쳐 준다. 비싼 교육비도 없다.
우리가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통합교육환경이다. 유치원과정까지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했던 그 통합교육환경이다.
그 배움의 현장에 들어가기 전에 아이가 유예한다는 것은 아직 부족해서 어느 정도 채워서 들여보내겠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목욕탕에 들어가기 전에 떼가 많아서 부끄러우니 집에서 좀 씻고 가겠다는 것과 같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학교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졸업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에 있는 기간 동안 세상을 많이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해 주어야 한다.
학교에서 구타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일반 아동도 당하는 것이다. 아이가 부족하면 매를 맞으면서도 배워야 한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맞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철없는 아이들은 서로 싸우면서 자라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회에 나와서 매맞는 것이다.
왕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아이들은 왕따를 당하지 않는다. 왕따는 자기가 왕따를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받는 아이에게 집중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까? 아이에게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정작 두려운 것은 부모다. 부모마음일 뿐이다. 두려워 할 것이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두려워서 자기 골대에 부지런히 자살골을 넣고 있는 게다.
담임선생님이 두려운가? 일반아동 학부모가 두려운가? 그렇다. 그들은 조금 두렵다. 그러나 그들의 앙칼진 목소리를 한번은 경험해야 한다. 그들이 내 심장에 꽂는 비수는 조금 아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한번으로 끝난다. 오기라는 것이 있다. 한번 세게 맞으면 간이 붓는다. 그래. 한번 해 보자 싶고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된다. 대한민국 아줌마는 용감하다. 그 중에서도 우리아이 엄마들이 가장 강하다.
이제 학교환경을 분석해보자.
통합교육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통합교육을 하는 곳이 없다. 통합교육환경이라는 것은 장애아와 일반아가 차별없이 교육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완벽한 지원이 갖춰진 환경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준비없이 아동만 그냥 받는다.
5분도 집중할 수 없는 아이에게 40분동안 부동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기를 요구한다. 일반아동과 함께 앉아 있게 해 주는 대신 일반아동과 똑같이 행동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통합교육'이 아니라 '통일교육'이다. 유니폼을 맞춰 입히는 교육이다.
교사도 준비되어 있지 않고 아동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학교시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통일교육속으로 아이를 던져 넣어야 하는가?
의무교육이기 때문이다. 일반아이들과 어울려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간절한 애원이기 때문이다. 뭔가 일반아이들에게서 얻게 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구걸통합'이라고 잔인하게 표현한다.
나는 우리 부모들에게 분명한 조언을 드리고 싶다. 내 아이의 시계는 교육부시계와 다르다는 것이다. 교육부시계는 멈추지 않고 줄기차게 돌아가지만 내 시계는 스톱워치 기능이 있다. 내가 필요해서 내 아이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일반교육에 넣어 볼 뿐이지 교육부의 소집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내 아이를 교실에 징집(?)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가 힘들어하면 스톱워치기능으로 정지하고 아이를 학교에서 다시 데려오면 된다. 일년 쉬다가 다시 필요에 의해 교육비가 들지 않는 공교육을 주체적으로 활용하면 된다. 사회에 나와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기본 교육은 초등1,2,3학년 과정만으로 충분하다. 분수가 나오는 4학년 과정은 우리 엄마들도 생활속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아이가 세상에 나와서 이 사회의 건전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학교교육의 진정한 목표이다. 우리는 그 참된 목표에 충실히 부응하면 되는 것이다. 학교가 나를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학교에서 차린 뷔페메뉴에서 필요한 것을 골라 먹는다고 보아야 한다.
아들 다니엘은 4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서 통합교육의 혜택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조금. 6학년이 되니까 통합교육의 순기능이 50, 역기능이 50정도가 되었다. 6학년 2학기에는 역기능이 51%가 되었다. 나는 지체없이 학교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2% 손해와 초등학교 졸업장을 맞바꿀 수 없었다. 그리고 아이가 좋아하는 컴퓨터 전문가 과정에 입학시켰다. 아들은 스스로 버스를 타고 컴퓨터학원에 다녀온다. 최근에는 걸어서 1시간 거리인데도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 다니는 연습을 하고 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홈스쿨을 시작했다. 요즘 다니엘의 얼굴은 항상 밝고 건강하다. 아이가 행복하니 아버지인 내가 너무 행복하다.
'구걸통합' 이야기를 다시하고 싶다.
내가 부모님들에게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이 내 아이에 대한, 장애아를 둔 부모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해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아가 교육받는데 방해물이나 걸림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학교교육에서 스스로 죄인처럼 내몰려서는 안된다. 일반아동 부모가 우리를 그렇게 보더라도 우리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도리어 우리에게 차가운 시선을 쏟는 그 일반아동 부모의 인격과 인생관을 불쌍히 여겨 주어야 한다. 그들의 가치관이 기존 일제교육의 잔존교육관이자 우리교육의 폐단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잘못되었지 우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장애아를 홀대하는 나라 가운데 대표적인 국가가 제국주의 가치관을 가진 독일과 일본이었다.
대게르만 종족의 우월성을 강조한 독일은 자국의 연약한 장애자들을 1,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대학살을 단행했고, 일본은 태양의 아들들이 장애자일 수 없다고 엄청난 차별을 주었다. 우리나라도 외국산업연수생을 홀대하는 것을 보면 비난할 처지도 되지 못한다.
일본은 우리에게 획일주의를 가르쳤다. 약한 것을 악한 것으로 보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아이들 때문에 자기 자녀가 피해를 입는다고 보는 사람들의 교육관이 일제잔존교육관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앞서 인생의 도를 터득한 사람들로서 이런 세속주의 가치관에 깊이 병든 사람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 그들을 섬겨야 한다. 그들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상처를 싸 매어 주어야 한다. 우리 함께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아이는 그런 점에서 잘못된 우리교육의 선구자이자 개혁자이다. 심하나? 과장되나? 전혀 그렇지 않다. 실로 우리아이들의 역할이 그것이다. 약한 것을 보고 손가락질 하지 않고 친구되어줌을 가르칠 수 없는 우리교육의 현실에서 우리아이들은 당분간 희생양이 되겠지만 우리아이들의 삶은 십자가 예수의 삶이다. 성결의 삶이요, 풍성함을 여는 열쇠를 가진 존재들이다. 우리아이들로 인해 세상이 달라질 것이요, 일반아이들이 치료될 것이다. 교육이 다시 방향타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시 너무나 서글펐던 아들을 데리고 1학년 교실을 찾았다. 첫날부터 울고 떼쓰기 시작한 녀석을 보고 가슴이 미어 터졌지만 나는 그 교실을 축복했다. 내 아들이 이 학급에 왔으니 이 학급이 복되도다. 이 학급이 우리 아들로 인해 치료가 될 것이다. 진정한 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 내 축복의 기도가 6학년 2학기가 되어 응답되었다. 다니엘이 홈스쿨을 하면서 학교가 가지 않자, 반친구들이 몇 번씩이나 우리집에 왔다. 올때마다 아파트문이 잠겨 있었다며..
그들이 틀어놓는 말이 이러했다. "대열이가 학교에 오지 않으니 교실분위기가 엉망이에요. 수업을 해도 재미가 없어요. 대열이 수업하다가 한번씩 웃기는 말을 해서 웃을 때가 많았는데.. 아이들이 대열이를 기다려요." 우리아들은 학교의 복덩이였다.
통합교육을 준비하는 과정은 www.zape.co.kr의 부모교육을 참고하세요.
<행동수정이 꼭 필요한가? -칼럼->
특수교육하면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용어중의 하나로 '행동수정'을 들 수 있다. 행동치료사 자격연수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도 '행동수정'인 것을 보면 우리는 '행동수정'이라는 용어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는 듯 하다.
대학원 수업을 하면서 나 역시도 '행동주의' 이론을 중점적으로 공부했다. 그런데 미국의 일선 교육기관에서 하는 '행동주의'원리와 우리나라에 소개된 '행동주의'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ABA(Applied Behavior Analysis) or FBA(Functional Behavior Analysis)로 진보된 응용행동분석과 기능분석을 사용한다. 이는 반드시 Team Approach를 근간으로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행동주의'이론 가운데서 '행동수정'만 떼내어서 1:1 수업에 응용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선생님들도 분명 많으시지만 Team Approach가 사실상 불가능한 우리의 환경을 고려할 때 어찌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개별교사가 아동을 관찰할 때는 자신이 전공한 전공자의 눈으로 '장애'를 찾아내기 때문에 편견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영역보다 행동수정이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행동수정'은 타인을 공격하거나 자해하는 특별히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행동수정'을 권면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우리아이들에게서 찾는 소위 '문제행동'들이 있다. 우리 부모는 우리 아이들의 문제행동을 개선시키기 원한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소거시키기 원한다. 보기 싫은 행동을 하지 않게 해 달라고 교사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전혀 다른 접근을 한다. 나는 우리아이들의 문제행동을 반긴다. 어쩌면 기다린다고도 할 수 있다. 아이들이 문제행동(팔흔들기, 괴성지르기 등)을 할때는 대개 무의식적으로 한다. 습관적으로 한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은 문제행동을 즐기는 것 같다. 문제행동을 하면서 스스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는 것 같다. 쉬는 것 같기도 하고..
적어도 이 순간은 몰입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우리아이들의 문제행동을 기다린다. 그 문제행동속에서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아이가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아이가 관심을 두는 세상에 내가 들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야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가 하는 문제행동을 따라한다. 그 아이의 행동을 모방한다. 아니 그 아이의 문제행동을 더 오버해서 따라한다. 그때마다 아이는 나에게 시선을 주는 것을 느낀다. 'mirror effect'다.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아이의 행동을 먼저 시범보이고 아이에게 따라하게 한다. 그러면 아이가 혼자 무의식적으로 할 때는 자연스럽던 동작이 나의 동작을 모방해서 따라하도록 하면 부자연스럽다.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무의식적으로 무의미하게 하던 동작들을 의식적으로, 의미 있게 따라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심리치료의 핵심이다. 심리치료는 자신이 그러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는 것이 목표다. 그러면 치료의 절반은 이미 성공한 것이다.
우리아이들의 행동양태가 다양하지 못한데, 몇 가지도 하지 않는 동작인데 그 마저도 수정해야 한다면 억울한 생각이 든다. 어차피 수정한다고 수정이 쉽지도 않는데 그렇다면 권장해 보자는 것이다. 아이에게 자꾸만 '안 돼, 하지 마' 외치며 X를 가르치는 것 보다. '이렇게 해봐' 하고 '동그라미'를 가르쳐 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쓰는 단어가 부정적인 단어일 때 아이의 문제행동은 골을 깊이 파게 된다. 우리가 격려하고, 박수치고, 동그라미를 쳐 줄 때 아이들은 우리가 숨 쉬는 환경이 안전하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동그라미의 세계로 나아오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행동수정은 우리가 강제로 수정시키다 보면 큰 상처를 남기지만 아이가 스스로 수정해 나올 때 상처가 남지 않게 된다고 본다. 스스로 수정한다고? 그것이 바로 인지의 힘이요, 동그라미 교육의 결정체인 것이다.
<우리 아이에게 자생력이 있는가? -칼럼->
영화 '우주전쟁'을 보고
아내가 빌려온 톰크루즈 주연의 비디오를 보았다. 영화는 올해 여름 스필버그 블록버스터로 크게 흥행했단다. 이야기의 전개는 이러했다. 톰크루즈가 아내와 별거중에(전반부 조금은 보지 못함) 아들과 딸을 데리고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은 아빠에 대한 원망으로 일탈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 날 외계에서 온 생물체가 지구를 공격하기 시작하고 톰은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가 있는 보스턴을 찾아 떠난다. 그 여정이 너무나 험난하다. 무자비한 외계생물체는 인간을 무차별 학살한다. 숫자도 엄청 많다. 지구방위대의 최첨단 무기가 소용이 없다. 방탄막을 뚫을 길이 없다. 전 세계가 파괴되어가고 인간은 너무나 무력하기만 하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 종반을 치달으면 우리의 영웅이 나타나야 하는데 지구가 완전파괴 될 때까지 그런 영웅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껏해야 소총과 수류탄정도로 대응할 뿐이다. 나는 감독이 이 영화를 어떻게 매조지할 지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참고로, 나는 직업병이 있다. 무엇을 보던지, 무엇을 하던지 항상 특수교육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통찰한다는 것이다. 어쩐지 저 외계의 무시한 생물체가 우리가 맞서 싸우는 아이의 장애와 같아 보이기 시작한다. 저 외계생물체가 어느 별에서 왔는지? 왜 왔는지? 정체가 무엇인지? 대처할 공략법은 무엇인지?
우리는 미국의 앞선 특수교육이 신무기(?)를 개발해서 처리한 후 연구결과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미국이 자랑하는 최첨단 무기들이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외계생물체를 더욱 화나게 만드는 것 같다. 의협심에서 대응해 볼려고 나서는 사람들은 모두 초주검을 당하고 만다. 그 세력이 너무 강해서 누구하나 대응방안을 내놓지 못한다. 그저 지하실에 꼭꼭 숨어서 지낼뿐이다. 그런데 지하실도 안전하지 못하다. 외계생물체는 지하실로 뱀같이 생긴 눈달린 다리를 내보내 일일이 잡아가기 때문이다. 도대체 쉼이 없다. 차라리 빨리 죽어서 이 고통을 보지 않는 것이 나을 것만 같다.
그런데 러닝타임이 끝나갈 무렵, 영화는 너무나 어이없게 매조지된다. 외계생물체가 스스로 기력을 피지 못하게 된다. 이유는 지구에 존재하는 미생물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무시해 온 그 미생물이 최첨단 무기가 되어 외계생물체를 갉아 먹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의 자막은 '자생력'의 힘을 강조하면서 마무리된다.
영화를 다 감상하고 난 후 내 안에 작은 전율이 흐름을 느낀다. 자생력이다. 우리는 장애아가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고만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우리아이들은 스스로 발달한다. 자생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자생력을 믿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이것을 믿어야만 아이에게 기회를 주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가 생긴다. 종달새가 종달새알이 부화할 것을 믿고 기다리듯이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가끔 우리는 내가 품은 달걀이 부화할 조짐을 보이지 않을 때 이 알이 삶은 알은 아닌가? 의심해 볼 때가 있다. 그래서 품다가 꺼내어서 흔들어 보기도 한다. 심하면 껍질을 조금 깨보기도 한다. 확인을 해 보고 싶은 것이다.
씨앗을 심은 농부는 부지런히 물을 뿌려준다. 중간에 뿌리가 나고 있는 지 들어보지 않는다. 그리고 씨앗을 믿고 평안히 잠든다. 우리는 이 농부의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을 얻고 누려야 한다. 투명한 유리컵에 양파를 올려놓고 키우면 뿌리가 내리는 모습을 볼 수는 있겠지만 그 양파는 관상용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생명체는 생명의 원리에 따른다. 우리의 교육도 이 생명의 원리를 거스려서는 안 된다고 본다.
필리핀에 있었을 때 아들은 대, 소변을 가리지 못해 온 집을 화장실로 만들었었다. 대변은 조금누고 응개고 자리를 옮겨 다니며 응개었다. 그때 나는 아이가 외계에서 온 또 다른 생명체인 것만 같았다. 아이양육 하다가 너무 스트레스가 받쳐서 아이를 집어 던진 적도 있었다.
나는 아들이 5세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벙어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기도했다. "하나님, 아들이 저를 보고 아빠라고만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제가 이 아이의 전 인생이 회복될 것을 믿겠습니다." 이 기도는 1년 후 응답이 되었고 그 이후 나는 아들의 여전히 산적한 모든 문제행동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아이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을 돌아보아도 구원투수가 없었을 때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아들자체뿐이었다. 아들이 생득적으로 타고난 자생력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 학문의 기초는 행동주의자인 Watson이나 Skinner가 아니라 Gesell(생득론적 관점)에 있다. www.zape.co.kr